소설리스트

37화 (37/402)
  • 왔구나. 이곳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교실의 창가 쪽에 앉은 강우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더위에 교실에서 진행된 여름 방학식 날이었다.

    -사랑하는 양서 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교실의 스피커에서 교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벽에 걸린 선풍기 몇 대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더위에 열어놓은 교실의 창가에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바람이 강우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며 땀을 식혀 주었다.

    ‘후···. 좀 살겠네.’

    힐끗 앞으로 보니 담임이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고 있었다.

    “방학이라고 다들 놀지만 말고 공부 열심히 해라.”

    담임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방학식이 끝을 맺었다. 아이들이 빠르게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방학이다!”

    “아! 이제 좀 놀자!”

    아이들의 얼굴이 점점 상기되기 시작했다.

    “강우야.”

    교실을 나서려던 담임이 강우를 불렀다. 가방을 싸던 강우가 담임을 바라보았다. 담임이 강우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네, 선생님.”

    강우가 다가오자 담임이 어깨에 손을 턱 하니 올렸다.

    “2학년 여름 방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지?”

    “네.”

    담임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랐다. 눈앞의 제자는 그야말로 대단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1학기 중간고사에서 반 1등에 전교 18등을 하더니 다음으로 이어진 수능 모의고사에서도 반 1등에 전교 10등 그리고 기말고사에서는 반 1등에 전교 5등을 해버리는 기염을 토해버렸다.

    “너라면 잘하겠지만, 그래도 쉬는 기간 동안 공부 게을리하지 말아라.”

    “네, 선생님.”

    강우가 씨익 웃었다. 담임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래, 보충수업 때 보자.”

    방학이 시작하고 보름이 지나면 여름 방학 보충수업을 위해 다시 학교에 나와야 했다. 담임이 몸을 돌려 교실을 나갔다. 강우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밤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사나워 보이던 모습은 이제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그만큼 내 입지가 변한 것도 있지.’

    역시 학교생활에서는 성적이 깡패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강우가 자리로 돌아왔다. 강우와 친구들은 교문을 벗어났다. 교문 앞에서 강우와 친구들이 잠시 멈춰 섰다.

    “다음 주에 재식이네 집에서 모이기로 한 거 잊지 마라.”

    신원주가 다짐을 받아내겠다는 듯 말했다. 김춘배가 강우를 툭하고 치며 웃었다.

    “강우는 여행 잘 다녀오고.”

    “그래, 가서 선물 사 올게.”

    김춘배의 얼굴은 전에 비해 밝았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했던 결의 이후 김춘배는 부단히 노력했다. 성적도 어느 정도 끌어올렸고, 연기 학원도 다닌다고 했다. 확실히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었나 보다.

    “그럼 우린 간다.”

    신원주와 김춘배의 집은 같은 방향이었다. 두 사람이 강우와 남재식에게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우리도 가자.”

    강우는 남재식과 함께 집 쪽으로 걸었다.

    “기사 투고한 거는 어떻게 됐냐?”

    “그거? 아마 다음 달 잡지에 실릴 거 같은데?”

    남재식은 강우의 도움으로 여러 개의 기사를 완성했다. 그리고 게임잡지사 여러 곳에 기사를 투고했다.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고 했다. 게임잡지사 여러 곳에서 연락이 오는 통에 남재식이 행복한 고민에 빠졌을 정도였다.

    “잡지 나오면 나중에 하나 선물해줘라. 기사 어떤지 궁금하네.”

    “당연하지.”

    이윽고 강우의 집 앞에 도착하자 남재식이 손을 ‘척’ 하고 들었다.

    “여행 잘 다녀오고. 내가 부탁한 거 꼭 사다 줘.”

    “어, 알겠다.”

    작별 인사를 끝으로 남재식이 집 쪽을 향해 달려갔다. 왜 뛰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덜컥.

    강우가 문을 열고 현관을 들어서자 강용이가 대번에 달려 나왔다.

    “형아아!”

    잘 차려입은 강용이의 모습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머리는 역시나 이 대 팔로 넘겨져 있었다. 아버지의 손길이 닿은 게 분명했다. 현관을 들어서자 거실에는 여행 가방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강우 왔니?”

    어머니가 커다란 캐리어 두 개에 여행을 위한 짐을 싸고 계셨다. 한 곳에는 강우와 아버지의 짐이 한 곳에는 어머니와 강용이의 짐이 담길 캐리어였다.

    “다녀왔습니다.”

    강우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캐리어에 다가갔다. 어머니가 옆쪽에 있는 여행용 가방 하나를 쓰윽 밀어주었다.

    “일단 엄마가 대충 짐은 쌌어. 속옷이랑 양말은 충분히 챙겼고, 옷은 네가 확인해 보고 가지고 가고 싶은 거로 바꿔.”

    “네.”

    강우가 힐끗 가방 안을 확인했다. 패션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강우였다. 특별히 교체하거나 그럴만한 것이 없었다. 강우가 반으로 입을 벌린 가방을 다시 닫았다. 강용이 강우의 옆으로 오더니 잔뜩 흥분한 목소리를 냈다.

    “형아, 나 비행기 처음 타는데 하나도 안 무섭다?”

    “오? 진짜?”

    “어, 그리고 엄마가 그러는데 비행기 타면 진짜 재밌대.”

    “그럼 얼마나 재밌는데?”

    강우가 웃음을 터트리며 강용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용이 혀를 삐쭉 내밀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는요?”

    “응, 이제 오실 때 됐는데.”

    그때였다.

    따르릉.

    전화기가 울리자 어머니가 빠르게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상대방의 목소리를 확인한 어머니의 표정이 푸근해졌다.

    “어머? 재원이구나? 강우? 잠깐만.”

    어머니가 수화기를 강우에게 내밀었다. 강우가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강우야, 나다. 일본 가는 거 오늘이냐?-

    대뜸 오늘이냐고 묻는 이재원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강우가 피식 웃었다.

    “네, 오늘이에요.”

    -그래? 아 웬만하면 내가 공항까지 모셔다드리려고 했는데.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못 갈 거 같다.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전해드려.-

    “바쁜데 일해야죠. 형이 지금 놀 때가 아닐 텐데?”

    강우의 농담 섞인 말에 수화기 너머의 이재원이 윽 하는 소리를 냈다.

    -아···. 아픈 데 찌르지 말라고.-

    “잘 갔다 올게요.”

    -그래, 올 때 선물 사 오고.-

    “재벌이 벼룩의 간을 빼먹어요?”

    -짜식.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럼 잘 다녀와라.-

    “네, 형도 파이팅.”

    -오케이.-

    툭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이재원은 정말이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강우의 조언대로 대진 미디어로 출근을 시작했다. 이재원의 소속은 미디어개발 1팀이었고 직급은 평사원이었다. 바닥부터 경험해야 한다는 이철금 회장의 신념은 확실해 보였다.

    ‘그래봤자. 어차피 다들 소문으로 누군지 알 텐데.’

    평사원이지만, 평사원이 아닐 게 분명했다.

    “엄마, 재원이 형이 공항 못 모셔다드려서 죄송하대요.”

    강우의 말에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유···. 회사 일로 바쁜 사람이 무슨 배웅까지 해.”

    이재원은 바쁜 와중에도 종종 집에 찾아왔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집밥을 얻어먹고 충전을 하고 간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붙임성 좋은 이재원을 어머니는 친아들처럼 대해주었다.

    “그러게요.”

    강우가 자리로 돌아와 짐을 마저 챙겼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어머니가 상기된 표정으로 베란다 밖을 힐끗거렸다. 어머니도 해외여행은 처음이었다. 신혼여행도 국내로 가셨던 어머니였다.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강우의 집 밖으로 부르릉하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조심히 내리세요.”

    “어? 할아버지?”

    강용이 베란다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는 밖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잔뜩 흥분했다.

    “할아버지! 아빠!”

    밖에서 할아버지의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어이구~ 우리 강아지!”

    “할아버지 빨리 들어오세요.”

    강용이가 창문을 탁하고 닫더니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들어섰다. 강우도 짐을 싸는 것을 멈추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덜컥.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멋진 중절모에 모시 재질의 셔츠 그리고 세련된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반짝이는 곰보 구두와 전용 목제 지팡이로 마무리된 할아버지의 모습은 참 멋졌다. 할아버지가 강우와 강용이를 보며 씨익 웃었다.

    “다들 준비 끝났지?”

    강우와 강용이 크게 대답했다.

    “네!”

    “빨리 가요!”

    그때, 할아버지의 뒤쪽으로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손에는 할아버지의 여행용 가죽가방이 들려있었다.

    “자. 준비 마무리하고 빨리 갑시다. 비행기 시간 늦겠어.”

    이번 일본행은 마사토의 초대를 받아 가는 가족 여행이었다. 아버지는 여름휴가를 내신 상태였다.

    “자. 가자꾸나.”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잠시 후, 택시 한 대가 강우의 집 앞에서 김포공항을 향해 스르륵 출발했다.

    * * *

    “우와! 우와!”

    신동경 공항의 출국장을 나서는 강용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김포공항을 벗어날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정식!”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강우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마사토가 손에 플래카드를 들고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사토!”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마사토에게 다가갔다. 아버지와 악수한 마사토가 이내 할아버지를 보며 꾸벅 인사를 했다.

    “어르신,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니다. 오랜만에 오는 일본이구나···.”

    광복 이후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일본을 찾지 않았다. 사업을 하던 때에도 말이다. 일본을 오는 것은 거의 50년 만이었다.

    “정식, 일단 숙소까지 내가 안내해주지.”

    “부탁할게.”

    강우 가족이 마사토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강용은 강우 옆에 꼭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형아, 반 친구들이 공항에서 미아 되면 큰일 난다고 했어.”

    “그래, 맞아. 형아 손 꼭 잡고 다녀.”

    “응.”

    이윽고 밖으로 나온 강우 가족이 마사토가 준비한 승합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목적지로 향했다. 공항을 벗어나 한참을 달리자 도쿄의 중심부가 나타났다. 도쿄의 거리는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마사토, 그래도 일본 상황이 많이 좋아졌나 본데?”

    아버지의 물음에 운전대를 잡은 마사토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요새는 조금 나아지고 있는데. 모르지 아직.”

    일본은 지금 소위 잃어버린 20년이라는 긴 터널에 갇혀있는 상태였다.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거품경제의 몰락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는 중이었다. 하지만 95년도부터 어느 정도 경제 상황을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회복세도 멀지 않았다.’

    강우가 힐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일본 역시 외환위기라는 2차 타격을 겪을 순간이 멀지 않았다.

    “지난번에 가져간 물건들의 반응은 어때?”

    “생각보다 잘 팔리고 있어.”

    지난 3개월의 시간 동안 아버지와 마사토는 꽤 많은 일을 해내셨다. 한국에서 가져가는 식품들의 양도 늘리고, 중국산 고추의 수입량을 늘리는 데에도 합의했다. 아버지와 마사토는 각자의 회사에 커다란 실적을 남겼다.

    “그렇군. 이번에는 꼭 승진할 수 있겠군.”

    “아직 연말 임원 인사발령 전까지는 시간이 남았어. 아직 방심할 수는 없겠지.”

    아버지와 마사토의 심각한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강우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는 두 눈을 감고 계셨다. 일본의 풍경을 그리 궁금해하지는 않으시는 듯했다.

    부우웅.

    그렇게 한 시간쯤을 더 달렸을까. 승합차가 화려한 거리로 들어섰다. 강용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

    강우도 힐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높은 빌딩들과 빽빽이 들어선 상가들이 이곳이 번화가임을 알려주었다. 이윽고 승합차가 신주쿠의 중심부를 약간 벗어났다. 그곳에는 작고 아기자기한 가옥들이 늘어서 있었다. 강우 가족을 태운 승합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드르륵.

    승합차의 문이 열리고 강우가 먼저 내렸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탁.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렸다.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마사토와 아버지가 내렸다.

    “여긴가?”

    승합차가 멈춘 곳은 아담한 일본식 여관이었다. 마사토가 강우 가족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숙소였다.

    “그래, 어르신이 꼭 이 지역에 머물고 싶어 하실 거 같았어.”

    “고맙다. 마사토.”

    마사토의 작은 배려에 아버지가 감동했다. 마사토가 멋쩍게 웃었다.

    “어려운 일도 아닌걸. 그리고 우리 집이랑도 그리 멀지 않고.”

    그때였다.

    “우와~ 집 예쁘다.”

    강용이가 차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소리쳤다.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짓했다. 강용이가 폴짝 뛰어내려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강용이 마음에 드나 보다.”

    “응, 아빠. 우리 가족 다 같이 와서 어디든지 다 좋아.”

    강용이의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푸근해졌다. 이윽고 승합차 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아버지가 아차 싶은 얼굴이 되었다. 승합차로 다가가자 할아버지가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계셨다.

    “강우야.”

    “네, 아버지.”

    강우가 다가가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들과 장손의 부축을 받으며 할아버지가 승합차에서 내렸다.

    “왔구나. 이곳에···.”

    할아버지의 눈동자에 짙은 회한이 떠올랐다. 강우 가족이 도착한 신주쿠에는 와세다 대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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