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402)
  • 할 수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야.

    어두침침한 방 안에 번쩍하는 빛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을 뚫고 엔조이 스테이션이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게임 조작을 위한 패드는 신원주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와씨!”

    좀비가 튀어나올 때마다 신원주가 움찔하며 놀랬다. 하지만 패드를 열심히 조작하며 게임을 진행했다. 강우와 남재식은 통닭을 먹으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와···. 진짜 게임 잘 만들었네.”

    남재식이 감탄을 했다. 강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시기의 게임 산업은 일본이 세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강우야, 이것 좀 해석해줘 봐. 뭐라고 하는 거냐?”

    신원주가 게임 속 캐릭터들의 대화 장면을 가리켰다. 강우가 자막을 술술 해석해 주었다. 남재식이 짧게 감탄성을 터트렸다.

    “와···. 일본어 진짜 잘하네.”

    “아···. 대사도 무서워.”

    김춘배는 여전히 두려운 눈빛으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 신원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툭 말을 뱉었다.

    “무서우면 보지 말라니까.”

    김춘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몰라.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되네.”

    “그게 바로 공포 게임의 매력이지.”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남재식이 강우의 컵에 콜라를 따라주며 물었다.

    “그런데 강우야, 너 일본어는 언제 배운 거냐?”

    “그냥···. 예전부터 조금 공부는 했었지···.”

    강우가 대충 둘러댔다. 할아버지의 기억을 얻으며 한순간에 알게 됐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임을 하던 신원주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야. 쟤가 일어만 하는 줄 아냐? 영어랑 중국어도 한다. 저놈 진짜 괴수라니까.”

    “진짜? 말도 안 돼. 인간이 그게 가능해?”

    남재식이 경악스럽다는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김춘배가 한숨을 푹 쉬었다.

    “누구는 모국어도 힘들어서 쩔쩔매는데.”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남재식이 손가락에 묻은 치킨 기름을 쪽쪽 빨아먹더니 입을 열었다.

    “진짜 대단하네. 나도 일본어 잘하고 싶다.”

    “일어는 왜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강우의 물음에 남재식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잠깐만.”

    남재식이 책장으로 다가가 연습장을 묶어놓은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제법 무게가 나갔는지 이내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남재식이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붉혔다.

    “하하···.”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사실 남재식은 비쩍 마른 체형이었다. 남재식이 강우의 앞쪽으로 연습장을 늘어놓았다.

    “한번 볼래?”

    남재식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강우가 시선을 내리자 소중하게 보관된 연습장들이 보였다. 강우가 연습장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락. 사락.

    “와···.”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감탄성이 절로 나왔다. 연습장에는 남재식이 그동안 공략해 놓은 게임들의 정보가 가득했다. 강우가 힐끗 남재식을 바라보았다.

    “이거 다 네가 한 거야?”

    “어, 게임잡지사에 투고할 기사들.”

    강우가 연습장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게임 공략은 물론이고 게임에 대한 분석까지 자세하게 적혀있었다. 남재식은 게임을 즐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임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고, 가끔 달아놓은 자신의 아이디어는 번뜩이는 면이 있었다.

    “대단하네. 너 진짜 게임 좋아하는구나?”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분석하는 것도 좋아해.”

    남재식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또 다른 연습장들을 꺼내왔다.

    “이건 뭐야?”

    “어, 내가 예전에 TRPG 마스터도 했었거든. 그때 써놓은 스토리북이랑 룰북이야.”

    “오? 진짜?”

    강우가 또 감탄하며 연습장을 살폈다. 남재식이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짱이네.”

    강우가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남재식의 연습장에는 온갖 재밌고 기발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진짜? 고맙다!”

    환하게 웃는 남재식의 얼굴에는 게임에 대한 애정이 물씬 풍겼다.

    “부럽네. 나도 게임을 좋아하긴 하는데 이 정도는 아니거든.”

    “그···. 강우야.”

    남재식이 잠시 머뭇거렸다. 강우가 남재식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왜?”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도와줘? 뭐를?”

    남재식이 망설이듯 콧등을 긁적였다.

    “내가 이번에 게임잡지사에 공략 기사를 투고하고 싶은데. 일어가 좀 모자라서.”

    “그래? 그거라면 문제없지. 시간 날 때마다 도와줄게.”

    남재식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진짜?”

    “어, 집도 가까우니까 도와주기도 편하겠네.”

    “고마워. 진짜 고마워.”

    남재식의 기뻐하는 모습에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앞으로 게임에 관련된 일 하려고?”

    “음···. 그러고 싶기는 한데···. 아버지가 반대가 좀 심하셔.”

    남재식이 말끝을 흐렸다. 게임과 관련된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지금 시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거하고 사는 거지. 걱정하지 말고 계속 도전해봐. 게임 산업은 앞으로도 전망이 밝으니까.”

    “그렇지? 내 생각도 그래. 그래서 내 목표도 신방과에 가서 게임잡지사에 들어가는 거야.”

    강우가 물끄러미 남재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툭 하고 말을 뱉었다.

    “게임잡지사보다 게임 개발자는 어떠냐?”

    “게···. 게임을? 만든다고? 내가?”

    남재식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게임 개발이라니 지금의 시기에는 일본이 휘어잡고 있는 분야였다. 하지만 강우는 조금 전의 기억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게임 개발은 미래 산업이다. 여기도 투자할만하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게임 좋아한다며? 그럼 충분히 매력적인 직업이지.”

    “음···. 게임 제작이라···. 하지만 나 문과인데?”

    “꼭 개발자만 되라는 법이 있어? 시나리오 기획자도 있잖아.”

    남재식의 얼굴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사실 게임 개발이라는 게 이 시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일로 받아들여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지금도 한국에는 서서히 게임 개발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지.’

    이미 국산 업체 중에서 유명한 개발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음···.”

    남재식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뭐···. 잘 생각해봐. 결국,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니까.”

    “알겠어.”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재식은 자신이 적어놓은 연습장을 소중히 다시 책장에 꽂아 넣었다. 신원주는 여전히 게임에 몰두 중이었다. 강우가 벽에 기대있는 김춘배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

    김춘배의 이어폰에서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강우의 귓가에 울렸다.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김춘배의 눈동자에는 형형색색의 빛이 맺혔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강우야.”

    고개를 돌리니 김춘배가 이어폰을 빼며 자세를 바로잡고 있었다.

    “어?”

    “나 연예인 할 수 있을까?”

    김춘배의 말에 어두운 방 안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원주는 하던 게임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

    “.....”

    “.....”

    강우도 친구들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얼마 전 연예인이 하고 싶다는 진로 때문에 반에서 놀림거리가 되었던 김춘배였다. 김춘배 역시 웃어넘겼지만, 마음의 상처가 남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알아. 나 생긴 것도 별로고, 노래도 별로고, 춤도 못 추고···.”

    김춘배가 말끝을 흐리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네가 할 수 있다고 해주면 진짜 될 거 같은 느낌이야.”

    강우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춘배 말에 나도 동의해. 이상하게 강우랑 지내다 보면 자신감이 생겨.”

    신원주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강우의 행동으로 인해 자신 역시 서울대를 가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신원주도 성적을 많이 끌어올린 상태였다.

    “내가 뭘···.”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강우는 가족을 행복하게 하려고 나아가고 있었다. 공부해 성적을 올리고, 아버지를 도와 가정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당당해졌다. 예전과 같은 내성적이고 대책 없는 강우가 아니었다. 그런 강우의 변화로 인해 주변의 사람들도 변화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미래의 기억 속에 있던 인연도 있었고, 변한 현실 속 새로운 인연도 있었다.

    ‘내 행동 하나가 말 한마디가 영향을 주는 것은 가족뿐만이 아니었어.’

    강우가 김춘배를 바라보았다. 자신감 없이 축 늘어져 있는 김춘배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턱.

    강우가 김춘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춘배야, 할 수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야. 내가 재식이한테도 말했지만,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봐. 대신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해.”

    “......”

    김춘배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너 연극영화과 가고 싶다고 했지?”

    “어, 그런데 부모님 반대가 너무 심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봐. 그리고 솔직히 대화를 나눠보고. 부모님은 확신이 없으신 거야.”

    “확신?”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정말 그 길을 가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

    “아···.”

    김춘배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연예인이 되겠다고만 하고 자신이 하는 게 무엇인가 싶었다. 부모님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겉돌기만 하지 않았던가.

    “알겠어. 내일 집에 가면 부모님이랑 제대로 이야기해 봐야겠다.”

    “그래, 잘 생각했어.”

    김춘배가 스르륵 웃었다. 눈동자에는 강우에 대한 강한 신뢰가 담겨있었다.

    “고맙다. 강우야.”

    강우가 씨익 웃었다.

    “그래, 부모님 설득하려면 공부도 좀 하고. 우리 같은 학생들에게 성적만큼 좋은 무기가 어딨어?”

    “고···. 공부?”

    김춘배가 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거 공부 내가 하고 만다!”

    “좋네. 그러면 나는 방송국 PD가 되는 게 꿈이고, 춘배는 연예인 그리고 재식이는 게임 개발자네?”

    신원주가 상황을 단번에 정리해 주었다. 그러자 남재식이 씨익 웃었다.

    “뭐야? 그럼 내가 나중에 게임 개발하면 춘배가 광고 찍어주고 원주가 방송으로 홍보해주면 딱 맞는데?”

    “어? 진짜네?”

    신원주와 남재식이 서로를 보며 빵하고 웃었다. 김춘배는 창피한지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야 근데 여기 너무 춥다. 보일러 없냐?”

    “어? 미안, 여기는 보일러 안 되는 곳이라.”

    남재식이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김춘배가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아우~ 그런데 여기서 겨울은 어떻게 지냈어?”

    “겨울? 겨울에는 집에 가 있었지.”

    신원주와 김춘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집? 여기서 혼자 산다며.”

    “어, 여기서 혼자 사는 건 맞아. 그런데 겨울에는 추워서 집에서 자.”

    강우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물었다.

    “집이 가까운가 보네. 어쩐지 밥해 먹을 것도 없고. 살림이라고 할 것도 없더라.”

    남재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여긴 원래 창고였어. 나가서 건물 맨 위층으로 가면 부모님 집이야.”

    “어? 맨 위층이? 그럼 왜 여기서 혼자 사냐.”

    강우와 친구들의 의아한 시선이 남재식에게 쏟아졌다.

    “말했잖아. 아버지가 게임이라면 질색을 하셔서. 나 혼자 나와 있었지.”

    “그럼, 여기 월세는 누가 내주는데?”

    남재식이 어깨를 으쓱했다.

    “월세를 왜 내. 여기가 우리 건물인데.”

    “아···. 어?”

    강우와 친구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남재식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건물이라고 해봤자. 오 층짜리 상가건물인데 뭐···.”

    강우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미래의 기억 속 모두가 바라지마다 않던 1순위 직업 중 하나가 바로 건물주가 아니던가.

    더군다나 남재식은 외동아들이었다.

    ‘하···. 미래의 갓물주님께서 여기 계셨네.’

    그때, 김춘배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콜라를 들여 각자의 잔에 가득 따랐다. 김춘배가 잔을 들더니 강우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강우야. 너는 경영학과 가서 뭐를 하려고 그러냐?”

    신원주와 남재식의 얼굴에 궁금함이 가득 차올랐다. 강우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씨익 웃었다.

    “나? 나는 부자가 되는 게 꿈이다. 그것도 아주 큰 부자.”

    친구들이 입꼬리를 올렸다. 강우다운 현실적 목표라는 생각을 했다.

    “좋아! 그러면 나중에 강우가 부자 돼서 우리 도와주면 되겠네.”

    “오케이! 강우만 믿고 간다.”

    그렇게 각자의 포부가 밝혀졌다. 강우가 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복숭아나무는 없었지만, 제법 결의가 차오른 방안이었다.

    “마셔.”

    강우와 친구들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리고는 단숨에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캬!”

    “크···.”

    강우와 신원주 그리고 남재식이 잔을 내려놓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꺼어억.”

    김춘배가 굉음을 뿜어내며 트림했다.

    “아 좀!”

    “야!”

    친구들의 아우성에 김춘배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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