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402)
  • 이거 면허를 꼭 따야겠네

    술자리는 늦은 밤이 돼서야 끝났다. 술이 약한 마사토는 금세 인사불성이 돼버렸다. 할아버지께 연신 미안하다며 존경한다며 머리를 땅에 박는 통에 아버지가 꽤 고생했다.

    “아버지, 그럼 빨리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먼저 주무시고 계세요.”

    “알겠다. 마사토 잘 데려다주고 오거라.”

    아버지가 마사토를 부축했다. 반은 끌려가듯 마사토가 현관을 나섰다.

    “어르신!!”

    덜컥.

    마지막 일본어 단말마를 끝으로 현관문이 닫혔다. 할아버지가 현관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셨다.

    “아버님, 피곤하실 텐데 그만 주무세요.”

    “미안하다. 어멈아. 일거리만 잔뜩 만들었구나.”

    할아버지가 엉망이 된 상을 보며 미안해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싱긋 웃었다.

    “아니에요. 오랜만에 진지 차려드려서 저도 너무 좋았어요.”

    “할아버지, 제가 도와드리면 금세 치워요.”

    강우가 벌떡 일어나 어머니를 돕기 시작했다. 강우가 나서자 상이 금세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장손 착하다.”

    할아버지의 말에 강용이 질 수 없다는 듯 일어났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릇을 나르기 시작했다.

    “나도 할 수 있어요.”

    “아이구~ 우리 강아지.”

    강우가 고무장갑을 끼는 어머니를 슬쩍 밀어냈다.

    “설거지 제가 할게요.”

    “너무 많은데?”

    “할 수 있어요.”

    “그래, 그럼 엄마는 할아버지 잠자리 봐 드릴게.”

    어머니가 비어있는 방으로 갔다. 원래 강용이의 방이었다. 하지만 아직 엄마 품이 좋은 강용이 덕분에 항상 비어있는 방이었다.

    “나 할아버지랑 잘래!”

    강용이가 드디어 자기 방에서 자겠다 선언했다.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강용이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물었다.

    “우리 장손도 오늘은 할아비랑 잘까?”

    “네, 좋아요. 설거지 빨리 끝낼게요. 먼저 들어가 계세요.”

    강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할아버지랑 같이 잘 때면 항상 들려주던 이야기가 있었다. 파란만장한 젊은 청년의 이야기였다.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는 강우 가족이 좋아하는 홍콩 영화 저리 가라였다.

    “엄마, 저 먼저 잘게요.”

    강우가 설거지를 끝냈다. 식탁에 앉아 아들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아들. 덕분에 한결 편했네.”

    “필요하면 언제든지 시켜만 주세요.”

    강우가 눈을 찡긋했다. 달라진 아들의 재롱에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강우가 조심히 강용의 방에 들어갔다. 할아버지와 강용은 이미 옛날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어? 할아버지. 형아 왔어요. 처음부터 다시 해주세요.”

    “엥? 처음부터?”

    할아버지가 놀라는 척을 하셨다. 하지만 얼굴 가득한 미소는 감출 수 없었다. 강우가 할아버지의 옆쪽으로 누웠다. 양쪽에 두 손자를 안자 할아버지의 얼굴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셨다.

    “자~ 그럼 할아비의 옛날이야기를 시작하마.”

    할아버지가 목청을 가다듬으셨다.

    “할아버지가 말이야. 아주 중요한 편지를 가지고 만주에서 조선으로 들어왔을 때 이야기야···.”

    강우와 강용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강우는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강용은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도성으로 들어와서 약속된 동료를 만나기로 했었을 때였지···.”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며 강우의 머릿속으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옛 경성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할아버지다.’

    커다란 지게를 메고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가 걷고 있었다. 지게 위에 올려진 소금 가마니의 무게가 제법 나가 보였다.

    “......”

    할아버지의 얼굴은 태연했다. 사실상 적진에 뛰어든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배포였다. 할아버지는 거침없이 걸어 한 가게 앞에 섰다.

    “푸른 벌판의 소금이 왔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가게 주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이내 환하게 웃었다.

    “들어오슈.”

    할아버지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소금 지게를 내려놓았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감시의 눈이 많소. 시간이 없으니 빨리 움직이쇼.”

    “알겠습니다.”

    남성이 가게의 안쪽 창고로 할아버지를 이끌었다. 그곳에는 온갖 식자재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남성이 식자재 중 일부를 힘겹게 밀어냈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멍석을 걷었다.

    끼익.

    바닥이 열리고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할아버지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소금가마니 중 하나를 찢었다.

    촤르륵.

    소금이 바닥으로 약간 쏟아지고 그 안에서 꽁꽁 밀봉된 작은 서신이 나타났다.

    “빨리.”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래로 향했다. 지하 토굴을 한참을 걸어가자 작은 공간이 나왔다. 어두컴컴한 곳에는 한 명의 남성이 앉아있었다. 탁자 위로는 작은 촛불이 하나 놓여 있었다. 하지만 더한 어둠이 남성의 얼굴을 가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

    “상해에서 전하는 지령을 가지고 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서신을 탁자에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타앙! 타앙!

    총성이 울렸다. 화들짝 놀란 할아버지가 서신을 집어 들었다. 서신을 구긴 할아버지가 단숨에 삼키더니 마구 씹어서 꿀꺽 삼켰다.

    “잡아라!”

    토굴에서 일본 순사들의 고함이 들렸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남성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우리 중에 누군가 배신자가 있다.”

    “.....빨리 몸을 피하십시오.”

    어둠 속 남성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침음성을 쏟아냈다.

    “박 동지. 미안하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인물은 절대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잡히는 것은 더욱더 안 됐다. 조선에 있는 항일 투사들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닙니다. 제가 막겠습니다. 어서 몸을.”

    잠시 머뭇거리던 어둠 속 남성이 토굴의 반대편 통로로 도망쳤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할아버지가 작은 화약 뭉치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촛불에 불을 붙이고 남성이 도망친 통로로 던졌다.

    콰아앙!

    폭음이 울리고 할아버지의 의식이 멀어져갔다. 그와 동시에 강우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안 돼요! 할아버지 잡아간 사람들 나빠!”

    강용이가 할아버지의 말에 잔뜩 몰입해 있었다.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했다. 할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강용이를 달래주었다.

    “다 옛날이야기야. 우리 강아지 울지 마라. 뚝.”

    “뚝.”

    강용이가 입술을 앙다물며 눈물을 참아냈다. 어릴 적 강용이는 공감 능력이 참 뛰어났었다. 강우가 물끄러미 할아버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강우는 상상도 못 할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에 감탄과 존경심이 마구 샘솟았다.

    “할아버지.”

    “응?”

    할아버지가 고개를 강우에게 돌렸다. 강우가 진심을 담아 감사를 드렸다.

    “저는 할아버지가 정말 존경스러워요.”

    “그래, 고맙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크게 흔들리셨다. 이윽고 이야기를 이어가시려던 할아버지가 작게 미소를 지으셨다. 강용이가 눈을 반쯤 감은 채 졸음을 참고 있었다.

    “강용아, 졸리면 자도 된다.”

    “이야기는요?”

    “할아버지가 내일 또 해주마.”

    “응···.”

    할아버지가 몸을 돌려 강용이를 품에 안으셨다. 어린 강용이 강아지처럼 할아버지의 품에 파고들었다.

    “할아버지 냄새 좋아요.”

    “허허···. 녀석.”

    이윽고 강용이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강우는 몸을 뒤척였다. 할아버지에게 뒷이야기를 물어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혼자 듣는다면 분명 강용이가 섭섭해할 것이다.

    “.......”

    강우가 몸을 뒤척였다. 할아버지의 옅은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잘된 일이야.’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치공장을 만든다고 마사토가 당장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었다. 준비될 때까지는 계속해서 회사에 다녀야 했다. 물론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도 회사를 계속 다닌다는 약속을 받아내셨다.

    ‘할아버지의 인맥이라면 일본에서 큰 도움이 될 거야.’

    아버지는 GIC에서 자리를 굳건히 할 것이다. 마사토는 일본으로 돌아가면 김치공장을 세울 준비를 할 것이다. 강우의 계획은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더욱더 굳건해진 것이다.

    ‘좋아. 완벽해.’

    강우가 스르륵 웃으며 눈을 감았다.

    똑똑.

    그때, 문이 열리고 문틈으로 거실의 빛이 스며들어왔다.

    “아버지, 주무세요?”

    할아버지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강우가 눈을 떴다. 할아버지가 몸을 뒤척이시더니 상반신을 일으키셨다.

    “정식이 왔니?”

    “네, 아버지 마사토는 잘 들어갔습니다.”

    부스럭.

    말을 마친 아버지가 검은색 비닐봉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민망한 듯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좋아하시는 막걸리 사 왔습니다. 약주 한잔 더 하시겠어요?”

    “막걸리??”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묻어있었다. 살가운 아들의 권유 때문인지 좋아하는 막걸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네, 제가 상 차려 놓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나오세요.”

    “그래.”

    아버지가 조심히 문을 닫고 나가셨다. 할아버지가 강용에게 이불을 꼭 덮어주셨다.

    “아이구···.”

    그리고 불편한 몸을 일으키셨다. 강우가 벌떡 일어나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엥? 강우 안 잤니?”

    “네, 할아버지. 제가 모시고 나갈게요.”

    “괜찮다.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 얼른 자야지.”

    “하루쯤은 괜찮아요.”

    강우의 말에 할아버지가 스르륵 웃으셨다. 그리고는 강우의 부축을 받아 거실로 나왔다. 거실로 나오니 집 안은 컴컴했다. 주방에 있는 작은 전등만이 커져 있어 제법 운치가 있어 보였다. 아버지는 막걸리에 어머니가 담근 겉절이를 안주로 준비해 놓으셨다.

    “좋구나.”

    할아버지는 그 상차림이 매우 마음에 드셨나 보다. 아니 어쩌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들과의 관계가 나아지고 있음을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할아버지 이쪽에 앉으세요.”

    “그래.”

    강우가 할아버지를 가장 편한 위치에 앉혀 드렸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았다. 아버지가 강우를 힐끗 보았다.

    “오늘은 조금 늦게 자도 되겠지.”

    아직 어색한 아버지와의 대면에 강우가 있어 다행인 얼굴이었다. 강우가 막걸리를 흔들었다. 아버지는 안심한 표정으로 강우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치이익.

    김을 뺀 강우가 따라락 뚜껑을 땄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잔에 공손히 따랐다.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내가 장손한테 술을 다 받고 아주 출세했구나.”

    “죄송해요···.”

    그동안 무심했던 것은 할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강우도 아버지도 할아버지에게 무심했다. 강우는 그게 너무나 죄송했다. 강우가 이번에는 아버지의 술잔을 따라드렸다.

    “먹자.”

    “네, 아버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단숨에 술을 마셨다. 강우가 재빨리 두 분의 접시에 겉절이를 놓아드렸다. 할아버지가 겉절이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입을 열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말거라.”

    “네, 아버지···.”

    아버지가 약간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사토를 돕겠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아버지가 서운함을 느낀 것을 할아버지는 눈치채고 있었다.

    “나는 네가 사업을 하기 원치 않았어. 그래서 그랬던 게다.”

    “알고 있습니다.”

    강우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할아버지라고 아버지를 돕고 싶지 않았겠는가. 다만 단절되었던 관계와 서로의 타이밍이 어긋났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내가 어찌해 볼 방법도 없었고···.”

    아이러니했다. 할아버지는 한국의 유공자셨다. 나라를 지킨 독립투사였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과거에 쌓아놓은 외국에서의 인맥이 더 두터웠다.

    ‘.......’

    강우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내가 가능한 한 도와볼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모습에 살짝 걱정됐는지 할아버지가 살짝 아버지를 나무랐다.

    “그래도 딴생각하지 말고 회사 열심히 다니거라. 이렇게 가정이 안정되니 얼마나 좋으냐?”

    “네···. 아버지.”

    강우가 재빨리 두 분의 잔을 채웠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어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서로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종종 놀러 오마. 우리 손자들도 자주 보고. 며느리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도 먹고.”

    “네, 그러세요. 오실 때마다 꼭 택시 타시고요.”

    아버지의 표정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슬쩍 웃으시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버스가 제일 편해.”

    “그래도요···.”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불편한 다리를 힐끗 보았다. 이윽고 막걸리를 모두 마신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럼 나 먼저 자러 가마.”

    강우와 아버지가 일어났다.

    “안녕히 주무세요.”

    달칵.

    할아버지가 강용이의 방으로 들어가셨다. 강우가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막걸리를 드시더니 남은 술을 탈탈 털었다. 몇 방울 안 되는 술을 홀짝 마신 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이거 면허를 꼭 따야겠네.”

    왜인지 후련해 보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강우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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