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402)
  • 당연하지. 누구 손자인데.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강우의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강우의 할아버지가 다닌 곳은 일본의 명문 대학 중 한 곳인 와세다 대학이었다. 할아버지의 전공은 정치학과였다. 할아버지는 그때의 조선에서도 그리고 일본에서도 초특급 엘리트였다.

    ‘.......’

    강우가 멍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 세세히 이야기해 주시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으로 마주하는 할아버지의 일대기는 강우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강우야, 상 좀 펴줄래?”

    어머니의 목소리에 강우가 깜짝 놀라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을 가지러 갔다. 강우가 거실에 큰 상을 펼쳤다. 오늘을 위해 아버지가 미리 준비해놓은 교자상이었다. 두 개의 교자상을 이어붙이자 거실이 가득 찼다.

    “아버지, 이쪽으로 앉으시죠.”

    “그래.”

    할아버지가 소파를 등받이 삼아 앉으셨다. 그 반대편으로 마사토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마사토는 할아버지를 앞에 두고 살짝 경직된 모습이었다. 그 옆으로는 왜인지 모르지만, 아버지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사토라고 편하게 불러도 될까?”

    “그러십시오. 어르신.”

    할아버지가 마사토의 불편한 자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편히 앉지.”

    “네, 어르신.”

    할아버지의 말에 마사토가 빠르게 자세를 바꿨다. 아버지도 자세를 바꿔 편히 앉았다. 할아버지의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식이가 일본어는 할 줄 모르니까 영어로 대화하지.”

    “네, 어르신.”

    마사토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완벽한 일본어에 영어까지 완벽해 보였다. 그 모습에 강우가 속으로 웃었다.

    ‘러시아어에 중국어까지 유창하신걸 알면 기절하시겠네.’

    그때, 어머니가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강용이는 할아버지의 등에 매달리듯 업혀있었다.

    “그래, 우리 아들이랑 친구라고.”

    “네, 지금은 같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하겠네.”

    “아···. 아닙니다! 제가 정식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마사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이는 들었지만, 자식의 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느 부모와 다를 게 없었다.

    “아버지, 오시는데 불편한 건 없으셨어요?”

    “아니다. 네가 보내준 택시를 타고 와서 편했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미소에 아버지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죄송해요. 갑자기 오시라고 해서···.”

    “제가 꼭 뵙고 싶다고 졸랐습니다. 찾아뵀어야 했는데 실례를 범했습니다.”

    마사토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버지가 멋쩍게 웃었다.

    “사실, 아버지가 와세다 대학을 다니셨다고 말하니까 믿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좀 다투다가 직접 만나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아이 같은 승부욕에 강우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잡았다. 잠시 아버지를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셨다.

    “그게 뭐가 중요한 일이라고 다 큰 어른들이 싸우고 그래? 그리고 졸업도 못 한 학교인데 뭘.”

    마사토가 머리를 긁적였다. 1940년대에 조선인이 일본에 유학을 오다니 일반인으로서는 믿기 힘들 수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졸업 못 한 이유도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을 직접 뵙고 싶었습니다. 정말 존경하고 있습니다.”

    “존경까지야···. 다 살려고 했던 일이지···.”

    할아버지의 얼굴에 진한 회한이 스쳐 지나갔다. 젊었을 적의 파란만장한 삶이 떠올랐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마사토를 바라보았다.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투사인 할아버지였다. 일본인에게 받는 존경이라는 단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드셨다. 그런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마사토의 얼굴에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제가 일본에 돌아가면 와세다 대학에 문의해 보겠습니다.”

    마사토의 돌발 발언에 아버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사토? 대학에는 왜?”

    “분명, 그 일이 없었다면 졸업을 하셨을 거야. 나는 와세다 대학 측에서 명예 졸업장이라도 줘야 한다고 생각해.”

    마사토의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멍해지셨다. 할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내셨다.

    “다 지나간 일이네. 신경 쓸 거 없어.”

    아버지와 마사토가 묵묵히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

    “......”

    분위기가 무거워지려 하자 강용이 귀신같이 눈치를 챘다.

    “할아버지!”

    강용이 할아버지의 품에 파고들며 앉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아이쿠. 인석아~ 할아비 아파.”

    “헤헤···.”

    강우가 멍한 표정으로 강용을 바라보았다. 영어도 모르는 강용은 오직 눈치로만 분위기를 파악했다. 역시 대단한 아이였다.

    “식사 준비할까요?”

    사뭇 진지한 분위기에 주방에서 대기하던 어머니가 물었다. 아버지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좀 도울게.”

    “그래요.”

    강우도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요.”

    어머니가 준비한 푸짐한 음식이 금세 상위로 날라졌다. 상위의 빈 곳이 줄어들수록 마사토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해졌다.

    “자 먹자. 우리 며느리 음식 차리느라 수고했구나.”

    “아니에요. 아버님. 그동안 모시지 못해서 죄송했어요.”

    할아버지의 수고했다는 말에 어머니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살짝 당황하셨다.

    “아니다. 아니야.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아니에요.”

    이윽고 식사가 시작됐다. 마사토는 어머니의 음식솜씨에 크게 감동한 듯했다. 음식 하나하나를 먹을 때마다 어머니에게 어설픈 한국어로 맛있습니다를 연발했다. 그중 최고는 어머니가 담근 겉절이였다.

    “정말 대단합니다. 제가 먹어본 김치 중에 가장 맛있습니다.”

    아버지가 마사토의 칭찬을 어머니에게 전해주었다.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휴~ 급하게 담그느라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김치를 내려다보던 마사토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아버지에게 말했다.

    “정식, 김치 공장을 세우면 자네 안사람의 레시피를 참고하면 어떨까?”

    “뭐? 하하!”

    진지한 마사토의 표정에 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마사토의 말을 전해주었다.

    “어머? 어디 내세울 만한 솜씨는 아닌데···.”

    말을 그렇게 했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어머니였다. 마사토는 정말 김치를 좋아했다. 어머니가 몇 번이고 더 가져다줄 정도였다.

    “마사토, 그렇게 많이 먹다가 탈 난다고.”

    “오늘 아니면 언제 또 먹겠어?”

    마사토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어머니의 음식솜씨는 대단했다.

    “나도 오랜만에 먹으니 정말 맛있구나.”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음식을 제일 맛있어했다.

    “할아버지, 아아~”

    강용이는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강용이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셨다. 강용이의 재롱에 할아버지의 입에서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아이구~ 내 새끼 잘 먹는다.”

    어머니가 강용이를 향해 작게 나무랐다.

    “강용아~ 할아버지 힘드셔.”

    “나 다 먹었어요.”

    강용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소파 위로 올라가 할아버지의 뒤쪽으로 앉았다. 어머니가 눈빛으로 강용이를 나무랐다. 하지만 마사토가 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아이들이 다 그렇죠.”

    식사가 어느 정도 이어지자 할아버지가 슬쩍 술이 당기시는 눈치였다.

    “아버님, 약주 한잔 드시겠어요?”

    눈치 빠른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는 소주와 소주잔을 준비해왔다.

    “한잔하겠나?”

    “네, 어르신.”

    마사토가 잔을 들었다. 할아버지가 잔을 채워주었다.

    “너도 한잔해야지.”

    “네, 아버지.”

    아버지의 잔에도 술이 따라졌다. 이윽고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할아버지가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셨다. 아버지와 마사토는 고개를 돌리고 술을 마셨다.

    “좋구나.”

    잔을 내려놓은 할아버지가 집 안을 쓰윽 둘러보셨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자식과 며느리 그리고 손주들이 겪은 그간의 고생을 왜 모르겠는가. 다만 도울 길이 없던 자신의 상황이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네가 이렇게 자리를 잡으니 이 아비가 여한이 없구나.”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이제 저희 효도도 받으셔야죠.”

    “그래···. 그래야지···.”

    할아버지가 자신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러는 게지.”

    말을 마친 할아버지가 소파 위의 강용이를 힐끗 보았다.

    “어멈아. 그런데 강용이가 좀 뜨끈하더구나? 감기 걸린 거야?”

    “네, 아버님. 요새 열이 자주 나서 병원 가서 약 받아 왔어요.”

    할아버지가 강용이의 이마를 쓸어 넘겨주셨다.

    “우리 강아지 아프지 말아야지.”

    “네, 할아버지. 나 튼튼해요.”

    강용이 소파에서 일어나 방방 뛰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빛 공격에 금세 얌전해졌다. 아버지와 마사토가 웃음을 터트리셨다.

    “한잔 따라주겠나?”

    할아버지가 마사토에게 잔을 내밀었다. 마사토가 깜짝 놀라 일어나며 할아버지의 잔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기분이 좋은 술자리가 이어졌다. 강우는 또 열심히 술을 날랐다. 집안에 웃음꽃이 지지를 않았다. 창밖을 힐끗 보니 어느덧 어둑해지고 있었다.

    “할아버지, 주무시고 가실 거죠?”

    강우의 물음에 할아버지가 살짝 망설이신다. 강용이 할아버지의 등에 또 매달렸다.

    “나랑 자고 가요!”

    “하하! 그래그래.”

    강용이의 애교에 할아버지가 결국 백기를 드셨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흐뭇하게 웃으셨다. 마사토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정식, 다음에 일본에 오면 꼭 우리 집으로 초대하지.”

    “오? 정말?”

    아버지가 깜짝 놀라셨다. 일본인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한국보다는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래, 이왕이면 방학에 맞춰서 가족이 전부 오면 어떨까?”

    “우리 식구 전부 다?”

    아버지가 또 놀라는 표정이 되셨다. 마사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정식으로 초대하는 거야.”

    “알았어. 가족이랑 상의해볼게.”

    마사토가 어머니를 보며 또 어설픈 한국어를 했다.

    “잘 먹었습니다.”

    “네.”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어머니와 강우가 상을 치웠다. 하지만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기분이 좋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술을 계속 드셨다. 어머니가 과일을 깎아 술안주를 마련해 주었다.

    “글쎄, 강우가 갑자기 중국어를 하는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는 강우의 활약상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정말인가? 강우가 그렇게 외국어를 잘해?”

    마사토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대견해하셨다.

    “당연하지. 누구 손자인데.”

    아버지의 입에서 계속해서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김치 공장 이야기가 나왔다.

    “일본에 김치 공장을 세우자고 하는데 순간 멍했습니다. 그 생각을 왜 못 했을까 싶기도 하고.”

    마사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마침 회사도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었습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김치 공장이라···.”

    할아버지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술잔을 다시 비우셨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일본에 유학을 갔을 때 말이지. 조선에서 온 유학생들은 김치맛을 잊지 못했지. 그래서 어렵게 재료를 구해 가끔 담가 먹고는 했었어. 그런데 말이야 그 당시에도 김치맛을 본 일본인 동기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하더군.”

    아버지와 마사토가 할아버지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확실히 일본인들에게 김치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을 거야. 강우 말대로 아직 마니아층만 접했기 때문에 대중성이 없는 거겠지.”

    이윽고 할아버지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음···. 마사토. 이왕 공장을 세울 거라면 굳이 자네가 다니는 회사에 좋은 일을 시켜줄 필요가 있을까?”

    마사토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할아버지가 눈을 빛내셨다.

    “이왕 하는 거 자네가 공장을 차리는 게 어떤가. 사내라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강우가 깜짝 놀라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럴 수가···.’

    강우가 마사토를 바라보았다. 마사토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마사토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장을 세우기에는 제 능력이 부족합니다.”

    할아버지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내가 비록 대학은 졸업 못 했지만, 내 동기들은 그대로 다 남아있으니.”

    “정말이십니까?”

    마사토가 깜짝 놀랐다. 와세다 대학은 전통이 깊은 대학이었다. 많은 수의 동문 들이 일본의 언론계, 출판계, 정계, 경제계에 두루 포진해 있어서 도몬카이(稲門会)라는 주요 동창회를 형성하고 있기도 했다.

    “그럼, 내 동기들을 한번 찾아볼 테니 걱정하지 말게.”

    “감사합니다.”

    마사토가 꾸벅 인사를 했다. 강우가 힐끗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대···. 대단하시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산속에 은거한 호랑이나 다름없는 분이셨다. 그리고 지금 그 호랑이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지금 할아버지의 모습은 강우에게 너무나도 거인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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