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402)

한끼 먹으러 온 손님

덜컹. 덜컹.

지하철 안에 강우와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마사토를 호텔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끝나고 아버지의 입에서 옅은 취기가 흘러나왔다.

“일본에 김치 공장을 세울 생각은 정말 못 했는데 말이지.”

일본에 김치 공장을 세운다.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아직 아무도 구체화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차라리 한국에 공장을 세우는 건 어떨까? 본사의 자금력이라면 충분한데 말이야.”

“안 돼요.”

강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곧 IMF가 다가올 것이다. 한국에 투자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살짝 멍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안 된다고? 이유가 있을까?”

“일단 중국산 고추가 한국에 못 들어오잖아요. 그리고 식품 후생성의 기준을 통과하기에도 일본 공장이 제격일 거예요.”

“음···. 일본에 김치 공장이라···.”

아버지가 살짝 망설이는 표정이 되셨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누구에게나 망설여질 법했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사업이라는 게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큰돈을 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버지가 살짝 놀란 눈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던 아들은 늘 내성적이고 조용했다. 하지만 지금 강우의 눈빛은 마치 승부사를 보는 것 같았다. 문득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오른 아버지가 묘한 감정이 되었다.

“그렇지. 맞는 말이야.”

“그리고 중국산 고춧가루도 아버지는 얼마든지 수량을 맞출 수 있으시잖아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진오에게 갈 거까지도 없었다. 진출구 공사의 진 사장과의 인맥 정도여도 충분했다.

“그런데 말이야. 고춧가루의 질이 문제야.”

“중국산이 한국산보다 맛이 떨어지는 게 문제겠죠?”

아버지가 대견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비교가 안 되지. 중국산은 싼 맛에 사 가는 거니까.”

일본 사람들은 한국산 고추를 더욱 선호했다. 중국산과는 달리 고추에 달콤한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단가였다. 중국산보다 한국산 고추는 몇 배나 더 비싸다. 중국산 이 톤당 1불이라면 한국산은 그 몇 배였다. 하지만 강우에게는 그것에 대한 대책도 있었다.

‘몇 년 후 중국은 자국 고추의 개량을 시도한다.’

현재의 중국은 값싼 인건비 그리고 품질은 낮지만, 생산량으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일본만 하더라도 다시 한국산을 찾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으니까.’

마사토의 이번 한국행도 다 그런 이유도 포함하고 있었다.

‘곧 중국은 한국산과 비슷한 맛을 내는 종자의 개발을 시도하지.’

그 과정이 깨끗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그 일을 더 앞당길 생각이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아버지가 주도하게 할 생각이었다. 아버지에게는 위진오라는 강력한 아군이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중국산 고추를 개량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개량? 종자를?”

아버지가 뜨악한 표정이 되셨다. 종자 개량이라니 대기업이나 정부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강우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껏 만들어놓은 인맥은 이럴 때 써먹는 게 아니겠는가?

“어렵게 생각하실 거 없어요. 산둥성에서 재배하는 고추의 개량을 시도하고 성공한다면 대부님한테도 아버지한테도 큰 이득이 될 거예요.”

“으음···.”

아버지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강우가 아버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GIC 본사에도 프로젝트를 제안해 보세요. 분명 좋은 반응이 있을 거예요.”

“알겠다.”

아버지의 얼굴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아버지의 입지는 물론 큰돈도 벌 수 있을 것이었다.

“하···. 네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아버지가 감개무량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했던 아들의 배포와 생각에 놀라고 감격한 것이다.

“다 아버지 옆에서 보고 배워서 그런 거죠.”

“그런가···.”

아버지가 살짝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전철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강우가 힐끗 옆을 보았다. 아버지가 두 눈을 감고 계셨다. 산행과 술자리로 피곤한 것 같았다.

스르륵. 툭.

이윽고 아버지의 몸이 강우 쪽으로 쓰러졌다. 강우가 슬쩍 몸을 틀어 아버지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했다. 아버지가 작게 코를 골기 시작하셨다. 깊은 잠에 빠진 아버지의 습관 중 하나였다. 강우가 물끄러미 아버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40대 중반이 넘어가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어느새 하나둘 주름이 늘어가고 있었다.

* * *

교실의 열린 창문으로 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휘날리며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커튼에 얼굴을 쓸린 신원주가 마구 손짓을 하며 밀어냈다.

“창문 좀 닫자니까.”

“안 돼.”

강우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온통 남자뿐인 교실에는 젊은 수컷의 페로몬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도시락까지 까먹은 점심시간 이후면 온갖 향기가 섞이고는 했다.

“으음···.”

강우의 앞쪽에서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덕거리던 강우와 신원주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동시에 피식 웃었다.

“쟤는 종일 잠만 자냐.”

“그러게···. 요새 계속 저러네.”

바람에 휘날린 커튼이 김춘배의 몸을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김춘배는 정말 자기 집인 것처럼 숙면하고 있었다.

드르륵.

교실의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춘배야!”

담임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깜짝 놀란 김춘배가 몸을 벌떡 일으키다 커튼과 엉키며 허우적거렸다. 반 아이들의 폭소가 터져나왔다. 담임 역시 입가를 실룩거렸지만, 끝내 참아냈다. 역시 학생주임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너 인마! 맨날 잠이나 자고! 또 어젯밤에 뭘 한 거야?”

“어어···. 잘못했습니다.”

김춘배가 입가에 묻은 침을 쓱 닦으며 어버버 댔다. 담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1학기도 한참이나 흐른 상태였다.

“내가 공부할 분, 사고를 치는 새끼는 확실하게 구분 지어 대접해주겠는데 말이야.”

담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처럼 애매하게 잠만 자는 놈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응?”

“......”

김춘배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몇몇 학생들도 도둑이 제 발 저린 지 담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담임이 밤나무 몽둥이를 탁자에 탁탁 내리쳤다.

“공부 좀 해라. 공부해서 남 주냐?”

잠시 후, 담임의 종례 시간이 끝났다.

“야자 열심히들 해라.”

그 말을 끝으로 담임이 교실을 벗어났다. 강우가 드르륵 자리를 밀고 일어났다. 신원주가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오늘 진짜 야자 안 하려고?”

“어, 오늘 집에 손님이 오셔서.”

강우가 담임의 뒤를 빠르게 따라 나갔다. 교무실로 향하는 중앙계단에서 담임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선생님.”

담임이 계단 오르는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부드러운 표정이 되었다.

“오? 그래 강우야.”

“저, 오늘 야자를 조퇴해도 되겠습니까?”

“야자를? 왜? 집에 무슨 일 있니?”

강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조퇴 사유를 밝혔다.

“오늘 집에 아버지 손님이 오십니다. 외국 분이신데 당장 내일 출국이라 저녁을 같이하기로 해서요.”

“음···.”

담임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굳이 식사라면 같이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담임에게 강우는 이뻐해 마지않는 제자였다.

“좋아. 오늘만 가는 거다. 그리고 애들한테는 아프다고 말해.”

“네, 선생님.”

담임이 계단을 오르려다 다시 멈칫했다.

“다음 주면 수능 모의고사야. 이번에도 기대해도 되겠지?”

“네, 이번에는 더 놀라게 해드리겠습니다.”

강우의 대답에 담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2-1반의 담임이자 학생주임 거기다가 2학년의 주임 선생이 바로 담임이었다. 반에서 성적이 제일 좋은 학생이 나오기를 내심 바라는 것이었다.

“그래, 얼른 가봐.”

“감사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교실로 돌아왔다. 교실은 한산하게 비어있었다. 야자를 위해 저녁을 먹으러 대부분이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몇몇 저녁 도시락을 싸 오는 친구들만이 교실을 지키고 있었다.

“아직도 자냐?”

자리로 돌아오자 신원주와 남재식은 없었다. 김춘배만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으응···. 졸려서 잠이나 자련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힐끗 김춘배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김춘배는 통 저녁을 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저녁을 사서 먹을 사정이 안 되거나 그래 보이지도 않았다.

“간다.”

“어, 가라.”

잠에 취한 김춘배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교문을 벗어난 강우가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지금쯤 지방에서 오셨으려나?’

아버지와 마사토는 지난 주중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본으로 수입해갈 물건을 고르기 시작했다. 식품 무역은 특히나 샘플링이 중요했다. 여기서 아버지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상급의 물건을 고르는 아버지의 눈썰미는 마사토를 만족시키기 충분했다.

‘게다가 엄청난 호재까지 이어졌다.’

전혀 기대치 않은 뜻밖의 도움을 준 곳이 있었다. 바로 삼산 물산이었다. 삼산 물산은 아버지에게 여러 업체와 농장주들을 소개해주었다. 아버지는 훨씬 수월하게 샘플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진짜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지···.’

지난 중국 출장 이후 아버지는 삼산 물산에 임성환 사장의 사기 행각을 알렸다. 삼산 물산은 처음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으로 나간 물건을 검수해본 결과 사실로 밝혀졌다.

‘일본 쪽 직원 한 명이 임성환한테 돈을 받고 눈감아 주고 있었다지.’

삼산 물산이 발칵 뒤집혔다. 삼산 물산의 직원은 물론 일본 쪽 직원도 연루된 사기극이었다. 어마어마한 일을 벌인 한국과 일본 직원은 현재 퇴사를 당했다고 했다. 임성환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삼산물산은 임성환을 고소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사기꾼의 최후지.’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었을 대참사를 아버지가 막은 것이다. 기억 속 미래에서도 삼산 물산은 임성환에게 크게 사기당한 회사 중 한 곳이었으니까.

덜컥.

집에 도착한 강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는 움찔하며 멈춰 섰다.

‘할아버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현관에 멋들어진 곰보 구두가 놓여있었다. 신발장의 옆쪽으로는 할아버지의 전용 지팡이도 있었다. 강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할아버지!”

안으로 들어서니 할아버지가 소파에 앉아계셨다. 할아버지의 옆에는 강용이 바짝 붙어있었다.

“형아! 할아버지 왔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발견하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셨다.

“아이고 우리 장손 왔구나.”

“어떻게 오셨어요?”

강우가 반색하며 할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가 강우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셨다.

“우리 강아지들 보러 왔지.”

“형아, 할아버지가 아이스크림 사줬다!”

강용이가 냉장고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냉동실로 손을 뻗었다. 아직 키가 작은 강용이 낑낑대더니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드르륵.

식탁 의자를 냉장고 앞에 놓은 강용이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냉동고에서 검은색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져 버렸다.

“아야!”

그중 하나에 머리를 맞은 강용이 인상을 찌푸렸다. 강우가 힐끗 바라보니 모두 아이스크림이었다. 그것도 전부 강우와 강용이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들이었다. 강우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할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항상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시고는 했지.’

그때, 강용이가 걱정된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시려 했다. 하지만 불편한 다리 때문에 힘들어하셨다. 강용에게 다가가던 강우가 몸을 돌려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버님, 제가 할게요.”

밖의 소란에 안방에서 어머니가 나왔다. 손님이 온다는 소리에 한껏 차려입느라 안방에 계셨던 모양이다.

“강용아, 이런 건 형아한테 해달라고 해.”

“응, 엄마.”

강용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아이스크림 두 개를 들고 후다닥 뛰어왔다.

“이건 내 거. 이건 형아 거.”

“그래.”

강우와 강용이 할아버지의 좌우로 앉았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두 손자를 바라보았다.

“아범은?”

“아까 거의 다 왔다고 했으니까 금세 올 거예요.”

어머니가 주방으로 향하셨다. 이미 음식 준비는 끝났는지 음식이 가득하였다. 그중에서도 어머니가 직접 담근 김치가 유독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겉절이를 좋아하는 마사토를 위한 특별식이었다.

덜컥.

이윽고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버지를 발견한 아버지가 멋쩍게 웃었다.

“아버지 오셨어요?”

“그래, 손님은?”

강우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아버지와 사전에 약속된 일이었나 보다.

“지금 들어올 겁니다.”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마사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 안으로 들어선 마사토가 할아버지를 보더니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국어인 일본어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마사토라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입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박재봉이라고 하네.”

유창한 일본어였다.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강우가 작게 신음을 흘리자 모두의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그리고 강우와 할아버지의 시선이 맞닿았다.

“윽···.”

그와 동시에 강우의 머릿속으로 기억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강우가 헛숨을 들이켰다. 거대한 건물의 앞쪽으로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서 있었다. 마치 제복을 떠올리는 옷을 입은 청년의 손에는 가방이 들려있었다.

[早稲田大学]

청년의 시선이 머문 곳에 선명히 박혀있는 글자가 보였다.

‘와세다 대학?’

그때, 누군가가 청년을 불렀다. 청년의 시선이 스르륵 돌아가며 다시 강우와 눈이 마주쳤다. 강우가 놀란 눈이 되었다.

‘할아버지?’

그랬다. 기억 속 영상에 보이는 젊은 청년의 정체는 할아버지의 젊을 적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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