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402)
  • 아버지와 마사토

    김포공항의 안쪽을 운행하는 버스가 스르륵 들어섰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강우와 아버지가 내렸다.

    “가자.”

    강우와 아버지가 국제선 청사의 입국장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동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안쪽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웅성거리는 입국장의 안으로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강우가 쓰윽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 진짜 많네요.”

    “그러게. 요즘 들어 해외 나가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70, 80년대를 지나 90년대 중반에 이른 지금은 누구나 해외여행을 가기 쉬워졌다. 게다가 경제까지 호황인 상황이라 한국인들의 해외여행은 더욱 잦았다. 공항의 입국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음···. 어디 보자.”

    커다란 전광판을 바라본 아버지가 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선명한 영어로 Mr. Masato라고 적혀있었다.

    “이쪽으로 가자.”

    “네.”

    강우와 아버지가 입국장의 한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힐끗 옆으로 바라보니 아버지의 얼굴은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있었다. 이번 마사토의 한국행은 사업적으로는 꽤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

    “......”

    문득 침묵의 시간이 시작됐다. 기억 속 미래보다는 가까워진 부자 사이였지만, 늘 그렇듯 남자 간의 사이에는 이런 순간이 찾아오고는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입국장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오는 사람들 사이를 아버지가 빠르게 훑었다.

    “마사토!”

    아버지의 입에서 잔뜩 흥분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우의 시선이 빠르게 목소리를 따라갔다. 그곳에는 아담한 키에 왜소한 체구 그리고 포마드로 깔끔히 넘긴 머리가 인상적인 중년남성이 있었다.

    “정식!”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마사토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아버지가 마사토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꽉.

    두 중년남성의 뜨거운 해후가 악수로 이어졌다. 사실 아버지는 마사토를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지난번 일본 출장 때에도 마사토가 해외 출장을 나가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셨다고 했다. 아버지와 마사토가 영어로 서로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마사토, 정말 오랜만입니다.”

    “도봉산에서 마지막으로 클라이밍을 한 후로 처음입니다.”

    아버지와 마사토는 정말 오랜 친구처럼 보였다. 다만 아직은 격식을 갖춘 그런 친구 말이다. 강우가 슬쩍 아버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유창한 영어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박강우라고 합니다.”

    강우의 덩치와 유려한 발음에 놀란 마사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아들 강우입니다.”

    “오? 정식의 아들입니까?”

    마사토가 강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며 손을 잡았다.

    “비행은 안 불편하셨습니까?”

    “편하게 왔습니다.”

    일본인 특유의 깍듯함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버지의 친구분이시니 말을 편하게 하셔도 좋습니다.”

    “그럴까요?”

    마사토가 강우의 팔을 두들겨주었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마사토의 캐리어에 손을 뻗었다.

    “제가 들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내건 내가.”

    마사토가 부드럽게 웃으며 캐리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버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쪽으로 갑시다.”

    드르륵.

    캐리어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와 마사토가 이동을 시작했다. 강우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끈 머리가 아프더니 미래의 기억들이 밀려들었다.

    ‘마사토 아저씨···.’

    마사토는 거래를 하는 데 있어서 신뢰를 중시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마사토의 기대에 부응하셨다. 깔끔하고 신의 있는 아버지의 일 처리는 강우도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꼼수라고는 모르는 분이시니까.’

    아버지의 식품 무역은 마사토가 있기에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 지금은 수출하는 물품이 고추뿐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식품을 마사토의 도쿄 스파이시에 수출했다. 강우 가족에게 마사토는 참 고마운 존재였다.

    물론 아직은 미래 기억 속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 회사를 독립해 나오시면서 본인도 힘들어지셨지.’

    도쿄 스파이시에서 승진이 막힌 마사토는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아버지와 식품 무역을 계획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IMF의 파도에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아버지 몰락과 마사토의 몰락은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맞물렸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이번에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다.’

    강우가 제자리에서 천천히 기억을 받아들였다. 토요일인 오늘 학교가 끝나자마자 아버지를 따라 공항에 온 이유가 바로 지금의 순간 때문이었다.

    ‘마사토를 만나 정확한 기억을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그때였다.

    “강우야!”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는 강우를 아버지가 큰 소리로 불렀다. 사람이 많은 공항에서 혹여 아들이라도 잃어버릴까 싶었나 보다. 강우가 생각을 정리하고는 손을 들어 크게 흔들었다.

    “여깄어요! 갈게요.”

    강우가 인파를 헤치고 아버지를 따라붙었다. 마사토가 강우를 보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키가 크니 찾기도 편하네.”

    강우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윽고 강우 일행이 청사를 벗어나 택시에 올라탔다.

    “정식, 면허 아직도 안 땄습니까?”

    “아. 아직입니다.”

    마사토의 질문에 아버지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아버지의 회사에서 차량을 받을 수 있었다. 마사토는 엄연히 회사의 손님으로 온 것이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면허가 없으셨다. 아니 있었지만, 지금은 취소된 상태였다. 큰 사고를 당한 이후 운전을 안 했고, 면허 갱신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기억하는 미래에도 계속 면허는 없으셨지?’

    늘 면허를 딴다고만 호언장담하시던 기억 속 아버지가 떠올랐다. 강우가 아버지를 보며 몰래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택시가 명동에 도착했다. GIC의 한국지사가 있는 곳이 명동이었다. 그리고 마사토는 명동에서 가까운 남산의 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부우웅.

    택시가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뒷자리에 아버지와 함께 앉아있던 마사토가 창문을 내렸다.

    지이잉.

    산뜻한 5월의 봄바람이 신록의 냄새를 담고 차 안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살짝 밀려오는 졸음을 참던 택시기사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마사토가 크게 숨을 쉬어 남산의 봄 향기를 맡았다.

    “하아~ 진짜 한국의 공기는 또 다른 상쾌함을 주는군요.”

    “도봉산에 가면 또 다른 공기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마사토의 얼굴로 옅은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만 충분하면 설악산도 가보고 싶은데요.”

    “일정을 한번 볼까요?”

    아버지의 질문에 마사토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예정대로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예정대로 도봉산에 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오랜만에 도봉산 갈 생각에 장비도 제대로 챙겨왔습니다.”

    아버지와 마사토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마사토의 일정은 토요일인 오늘부터 다음 주 금요일까지였다.

    ‘당장 내일 설악산을 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겠지.’

    하지만 설악산까지는 간다고 해도 하산 후 다시 돌아오기도 만만치 않았다. 강우가 택시에 앉아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일 저도 등산 같이 가도 될까요?”

    “어? 그래? 나야 좋지.”

    마사토가 반가워하며 웃었다. 아버지가 살짝 놀란듯한 표정이 되었다. 강우가 산을 가겠다니. 예전 같으면 산이 웬 말인가 대번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싫다고 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내 상기된 표정이 되었다. 아들과 가까워진 거리만큼 취미도 공유할 생각에 흥겨워진 것이다.

    “저 호텔이군요?”

    이윽고 택시가 남산에 있는 호텔로 들어섰다. 푸르른 나무들 사이에 파묻혀있는 호텔의 모습에 마사토의 얼굴에 만족감이 차올랐다.

    “역시, 좋군요.”

    택시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호텔의 앞쪽으로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덜컹.

    택시의 트렁크가 열리자 강우가 빠르게 내렸다. 그리고 마사토의 캐리어를 꺼냈다. 마사토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맙다. 강우야.”

    “제가 안까지 들어드릴게요.”

    마사토가 거절할 사이도 없이 강우가 캐리어를 호텔의 입구까지 가지고 갔다. 호텔 직원이 금세 다가와 강우에게서 캐리어를 이어받았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짐만 빨리 올려놓고 오겠습니다.”

    강우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반면 아버지는 오랜만에 젊을 적 설렘을 느끼시는 듯했다. 마사토가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들, 정말 내일 산에 같이 갈 거야?”

    “네, 같이 가요. 저도 요즘 공부만 해서 바람 좀 쐬면 좋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좋으신지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다시 두 부자의 침묵이 시작됐다.

    “......”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사토가 헐레벌떡 로비에서 달려 나오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남에게 피해를 주기가 싫은가 보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닙니다. 경치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남산의 풍경이 점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사토도 주변을 보며 만족해했다.

    “칼국수 괜찮으시죠?”

    “오? 칼국수 좋습니다.”

    아버지가 마사토의 식성을 기억하고는 음식을 제안했다. 마사토가 아버지의 작은 배려에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마사토가 한국에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칼국수였다.

    “택시.”

    다시 택시를 타고 이동이 시작됐다. 아버지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면허를 따든지 해야지.”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이윽고 택시가 명동거리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자 온갖 화려한 네온사인이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거리에는 잔뜩 멋을 낸 멋쟁이들이 걷고 있었다. 흔한 90년대의 명동거리의 모습이었다.

    “이쪽입니다.”

    아버지가 마사토를 명동에서 유명한 칼국수집에 데리고 갔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국숫집 특유의 담백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여기 칼국수 세 개 부탁드립니다.”

    “아빠 만두도요.”

    강우가 슬쩍 메뉴를 추가했다. 아버지가 씨익 웃더니

    “만두도 주세요.”

    메뉴를 추가했다. 마사토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본과는 다른 식당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한국에는 왜 안 온 겁니까?”

    아버지의 질문에 마사토가 멋쩍게 웃었다.

    “결혼하고 삶이 바쁘다 보니 여행이라도 갈 시간이 있었겠습니까? 좋아하던 클라이밍은 물론이고 산 근처도 못 갔습니다.”

    “그랬군요.”

    아버지가 동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국적은 다르지만, 가장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나 보다. 이윽고 주문한 칼국수가 나왔다.

    “드시죠.”

    “감사히 먹겠습니다.”

    마사토가 일본인 특유의 손 합장을 한 뒤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후루룩 면을 들이켰다.

    “아···. 역시 좋네요.”

    “이거랑 같이 드셔보시죠.”

    아버지가 갓 무친 겉절이를 마사토에게 내밀었다. 마사토가 눈을 빛내더니 겉절이를 한입 크게 먹었다. 그리고는 콧소리를 내며 두 눈을 감았다.

    “정말 맛있습니다.”

    “국수는 겉절이랑 먹어야 제맛이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강우도 식사를 시작했다. 이윽고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한국에 오신만큼 꼭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성과를 내야 승진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버지와 마사토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지난번 고추 무역 건으로 회사에 큰 성과를 올린 마사토였다. 애초에 부장에서 더는 미련이 없던 마사토의 마음이 바뀌었다. 이번 한국행으로 다음 전무 승진을 노려볼 심산이었다.

    ‘마사토가 회사에서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아버지도 더 큰 돈을 벌겠지.’

    강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마사토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마사토에게 지금이 가장 중요한 승부처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과거의 마사토는 부장에서 회사를 퇴직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있으니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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