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402)

양반은 못되겠네

강우의 집 앞으로 이재원의 차량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고 강우가 내렸다.

“이번 주말에 약속 잊지 마라.”

“과외는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자 이재원이 고개를 저었다.

“남아일언 중천금. 약속은 지킨다.”

“알겠어요. 그럼 삐삐 쳐요.”

“그래, 들어가서 쉬어라.”

이재원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차량이 부드럽게 출발하고 이내 멀어져 갔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우가 집으로 돌아갔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버지가 출장 준비에 한창이셨다.

“강우 왔니?”

아버지가 시계를 힐끗 보시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늦었네. 피곤할 텐데 씻고 빨리 자라.”

“좀 도와드릴게요.”

“아니야. 너도 아침 일찍 나가야 하잖아.”

“괜찮아요.”

강우가 화장실로 가 재빨리 씻고 나왔다. 그리고는 출장 짐을 싸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보름이나 되는 장기 출장인 만큼 캐리어는 매우 컸다. 평소 깔끔한 성격의 아버지는 남들보다 가지고 가는 옷의 양도 많았다.

“공부는 할 만해?”

“오늘 쪽지 시험 봤는데 전부 백 점 맞았어요.”

아버지가 옷을 싸다 말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진짜?”

“네.”

아버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 어떤 소식보다 기뻐하시는 모습이었다.

“잘했다. 우리 아들이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게 없지.”

“네, 중간고사 성적 많이 끌어올릴게요. 기대해주세요.”

아버지가 잠시 짐 싸는 것을 멈추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해.”

“네, 그런데 내일 몇 시 비행기세요?”

“9시 비행기라 새벽같이 나가야 해.”

강우와 아버지가 말없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색은 안 해도 강우의 도움에 매우 기뻐하시는 아버지였다. 이윽고 양쪽으로 벌어져 있던 캐리어가 입을 닫았다.

“아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네.”

강우와 아버지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안방 문을 열었다.

“잠깐, 기다려봐.”

안방에서 나온 아버지의 손에는 하나의 통장과 도장이 들려있었다. 강우의 맞은편으로 다시 앉은 아버지가 통장을 스윽 내밀었다.

“지난번에 말한 외화통장이다. 네 말대로 본사에서 직접 달러로 입금될 거야.”

“아···.”

강우가 통장을 확인했다. 강우가 부탁한 은행의 통장이었다. 아버지의 성과금은 모두 이곳에 달러로 입금될 것이었다.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적은 돈도 아니야. 네가 이걸로 뭐를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말을 끊고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우와 아버지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잠깐의 침묵이 끝나고 아버지의 손이 강우의 손에 올려졌다.

“아빠는 너를 믿는다. 그러니까 뭐를 하던지 망설이지 말고 경험한다고 생각해봐.”

아버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 미소와 힘에는 아들에 대한 대견함과 믿음이 담겨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통째로 주실 줄 몰랐는데.’

아버지의 강우에 대한 믿음은 파격적이었다. 성과금으로 들어오는 돈을 모두 강우에게 맡긴다고 하셨다. 기억과는 사뭇 달라진 아버지와의 관계는 강한 신뢰가 있었다. 앞으로 묵직해질 통장의 무게만큼이나 말이다.

‘IMF라···.’

강우가 기억하는 IMF 정보는 대부분 가족과 관련된 것이었다. IMF가 터지고 온 국민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 당시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강우의 가족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바로 한동냉장의 사건 직후였다. 그 사건이 터지고 회사를 그만둔 아버지는 바로 중국으로 가셨었다.

‘중국에 있는 인맥을 통해 어떻게든 재기해 보시려 했지.’

하지만, 기억 속 아버지의 인맥은 지금과는 달랐다. 모두 임성환을 통한 인맥이었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힘겹게 버티셨다. 심지어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던 일본의 바이어가 막 독립을 해 회사를 차려버렸다.

‘거래처까지 잠시 끊겨버린 거지.’

아버지는 중국에서 악전고투하셨다. 중국에서 물러나면 자신의 사업은 끝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실 수밖에 없었다. 강우의 집에 빨간딱지가 붙었고, 얼마 안 있어 강제 집행을 당했기 때문이다.

‘1999년 1월 23일이었던가···.’

새벽같이 문을 뜯고 들어오던 용역들의 얼굴이 강우의 눈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집행장을 내미는 공무원의 얼굴에는 강우 가족을 향한 동정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곧 집행이 시작됐다. 온 집안의 물건이 밖으로 던져졌다. 어머니는 침묵 속에 눈물을 흘렸고, 공포에 질린 강용은 크게 울었다. 그리고 아수라장의 한가운데서 강우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멍청아. 아버지가 없으면 네가 가장인데···.’

소식을 들은 동네 이웃 몇 명도 현장에 들이닥쳤다. 어머니는 이미 이웃들과 돈으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강우 가족을 안타까워하는 소수의 사람과 돌려받지 못할 돈을 걱정하는 다수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강했다. 차분히 남은 돈을 끌어모으시고 뒷수습을 시작했다.

‘밖으로 던져진 짐은 모두 버려졌고. 우리는 또 여관으로 갔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아버지가 귀국하셨다. 아무것도 없는 빈 몸이었다. 여관의 문이 열리고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강우가 느낀 것은 분노였다.

‘왜 집을 비웠냐고. 왜 이런 일을 만들었냐고 아버지에게 대들었었지···.’

강우와 아버지는 크게 싸웠다. 강우는 그대로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PC방에서 먹고 자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도피이자 자기만족이었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일부분만을 어머니에게 주었다. 나머지 돈은 모두 놀고먹었다.

‘심지어 재수까지 했으니···.’

재수 생활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게임에 몰두했다. 일 년이 지나고 수능을 다시 치렀고, 강우는 지방의 평범함 대학에 갔었다.

그 뒤로 한참이나 아버지는 재기하지 못하셨다. 그리고 강우는 한참이나 아버지가 짊어졌던 무게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때도 지금과 다를 게 없었을 거다. 다만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뿐이었겠지.’

강우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기억의 파편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아빠 아니 아버지.”

강우의 말에 아버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아버지라는 단어에서 아들이 또 한 번 커버렸음을 느꼈다.

“그래, 장남.”

“이 통장에는 앞으로 더 큰 돈이 쌓일 거예요.”

“그래?”

아버지는 그저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강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본사와의 성과보수 계약이 되어있는 아버지였다.

중국의 위진오라는 꽌시와 일본의 오랜 친구 같은 마사토의 존재.

이 두 개의 요인으로 아버지는 승승장구할 것이다. 기억 속 미래와 회사는 달랐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큰돈을 벌고 강우 가족은 점점 안정될 것이다.

“네, 그때도 저를 믿고 꼭 이 통장을 맡겨 주셔야 해요.”

“그래, 걱정하지 말래도.”

아버지가 다시 한번 약속하셨다. 하지만 마음 같아서는 각서라도 받아놓고 싶은 강우였다. 이런 강우의 불안감은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너무 정에 약하시다. 여유가 생기면 주변을 돌아보시는데 인색하지 않으시지.’

IMF 때 강우 가족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것에는 이런 배경도 존재했었다. 물론, 강우도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부모님은 있었고, 형제자매도 있었으니까. 강우가 부모님을 생각하고, 강용이를 생각하는 마음과 다를 것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 가족이 행복해지는 게 먼저야.’

강우가 마음을 다잡았다. 거대한 파도에 모두가 휩쓸려 나가서는 안 됐다. 강우는 그 파도를 이겨낼 단단한 배를 지을 생각이었다.

“늦었네. 그만 자자.”

“네, 아버지.”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향하셨다. 조심히 문을 연 아버지가 뒤를 돌아 강우를 바라보았다.

“내일 같이 나갈까?”

“네, 그래요.”

두 부자가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각자의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 * *

시간이 지나고 계절의 여왕 5월이 찾아왔다.

“다녀오겠습니다!”

“강우야! 도시락 챙겨가야지!”

“아···. 맞다.”

현관을 나서려던 강우가 다시 들어가 도시락통을 건네받았다. 슬쩍 안방 안을 보니 아버지가 곤히 잠들어 계셨다.

“피곤하신가 봐요.”

“그래, 요즘 계속 바쁘셨잖니.”

그동안 아버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중국과 일본을 쉼 없이 오가며 업무를 보셨다. 그래서 토요일인 오늘 회사에 월차를 내고 오랜만에 쉬고 계셨다. 강우가 아버지의 잠든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갔다 올게요.”

“그래, 오늘도 열심히 공부해.”

집 밖을 나서자 따듯한 훈풍이 강우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완연한 봄에 들어선 거리에는 온갖 꽃들이 자신의 색을 뽐내고 있었다. 이윽고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 강우가 학교를 들어서 곧장 교실에 도착했다.

“왔냐?”

“어.”

강우가 신원주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드르륵.

그 순간, 교실 문이 열리고 담임이 들어섰다. 한 손에는 트레이드마크인 밤나무 몽둥이를 다른 한 손에는 묵직한 종이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조용!”

날카로운 담임의 말에 학생들이 금세 조용해졌다. 학생들의 시선이 담임의 손에 있는 두툼한 흰색 종이 꾸러미에 집중됐다. 누구는 기대해 마지않고 누구는 꺼려 마지않는 성적표였다.

“이것 참 이걸 믿어야 할지.”

담임이 맨 위쪽에 있는 성적표를 보더니, 감탄했다. 그리고는 강우를 바라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박강우.”

담임의 입에서 강우의 이름이 불렀다.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진짜야?”

학생들의 이런 반응은 이유가 있었다. 가장 먼저 이름이 불렸다는 것의 의미는 단 하나였다.

“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담임이 맨 위쪽에서 성적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학생들을 쓰윽 보며 말했다.

“이번 2학년 중간고사의 우리 반 1등은 박강우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담임이 교탁을 탁 내려쳤다.

“일 학년 기말고사에 강우 성적이 몇 등이었는지 알아? 28등이었어. 그런데 지금 1등을 했다.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겠지? 자 다들 박수!”

담임의 말에 박수 소리가 교실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담임이 부드럽게 웃으며 성적표를 내밀었다.

“강우야, 정말 열심히 공부했구나.”

“네, 열심히 했습니다. 선생님.”

강우가 성적표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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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가 담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담임이 손을 들어 강우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그래, 지금처럼 계속 열심히 해.”

“네.”

강우가 뒤를 돌았다. 반 전체의 시선이 강우를 향해 있었다. 강우가 스윽 걸음을 옮겼다. 반 친구들의 시선이 끌리듯 강우를 따라갔다.

“......”

“......”

학생들의 시선에 강우가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꼈다. 지금의 만족감은 정당한 대가였고, 노력의 결과였다. 특별한 능력으로 머리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강우가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자리로 돌아오니 신원주와 김춘배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뭔데 그 눈빛은?”

강우가 자리에 앉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김춘배가 믿기지 않는 듯 말했다.

“이게 말이 돼? 진짜 해냈어?”

“안 될 건 뭔데?”

그사이 학생들의 이름이 계속 호명하던 담임이 신원주의 이름을 불렀다. 순서로 따지자면 반에서 10등이었다.

“네! 나갑니다!”

신원주가 만족한 듯 웃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

김춘배가 어이가 없어 실소를 뱉어냈다.

“와···. 진짜 나만 계속 소외되는 이 기분은 뭐냐.”

김춘배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담임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려면 한참이나 남은 것을 알고 있었다.

“김춘배.”

얼마 남지 않은 순서에 불린 김춘배가 담임에게 다가갔다. 역시나 담임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춘배야, 너는 매일 거울이나 보고 노래나 부르고. 마음잡고 공부해야지.”

“네···.”

김춘배가 잔뜩 풀이 죽은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신원주가 김춘배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란다.”

“혼자 있게 놔둬 봐.”

강우와 신원주가 픽하고 웃었다. 성적표를 모두 나누어준 담임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자 다들 중간고사 끝났다고 늘어지지 마라. 조금 있으면 수능 모의고사도 있으니까. 공부들 열심히 해. 알겠나?!”

반 아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담임이 나가자 몇몇 아이들이 강우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강우야, 너 참고서 뭐 보냐?”

“과외는 누구한테 해? 학원은 어디 다녀?”

강우가 쓰윽 친구들을 훑어보았다. 강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역시, 성적이 깡패야.’

힐끗 반대편을 바라보니 몇몇 아이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딜 가나 있는 반의 일진들이었다.

“과외는 안 하고 학원도 안 다녀. 참고서는···.”

강우가 힐끗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참고서를 내려다보았다. 대진 출판사의 것들이었다. 문득 이재원이 떠올랐다.

“참고서는 대진 거 본다.”

강우의 말에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집에 돌아간다면 분명 대진 출판사의 문제집을 사겠지.

‘내가 영업까지 해준 거 알려나 몰라?’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삐삐가 울리고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1004 8282]

‘이 형, 양반은 못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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