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402)

나 믿죠?

[2- 1]

교실의 문이 열리고 강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온통 낯선 얼굴들뿐이었다.

“강우야!”

그때, 강우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다. 창가 쪽으로 신원주와 김춘배가 앉아있었다. 반가운 얼굴에 강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강우가 성큼성큼 걸어가 신원주의 옆에 앉았다.

“와···. 학년이 바뀌었는데 어찌 구도는 변한 게 없냐?”

강우의 앞쪽으로 김춘배 그리고 짝꿍인 신원주. 일 학년 때와 같은 구도였다. 이윽고 조회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담임 떴다!”

아직 정체가 가려진 담임이 나타날 시간이었다. 교실의 창 너머로 성인 남성의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

“.......”

웅성거리던 교실이 침묵에 빠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새 학기의 담임이 누구인가는 곧 열리는 문과 함께 밝혀진다. 그리고 드러나는 얼굴이 학생들의 일 년을 좌지우지했다.

드르륵.

이윽고 문이 열렸다. 잠시 멍하던 학생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아···.”

단숨에 교탁으로 걸어온 담임이 씨익 웃었다.

“이놈들. 어디서 한숨을 쉬어?”

강우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실 반을 배정받는 순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했는데 여지없이 똑같은 상황이었다. 강우가 옆쪽의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하하···.”

신원주는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앞으로 시선을 돌리니 김춘배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난 이제 죽었네.”

학생들의 충격과 공포를 만끽한 담임이 씨익 웃었다.

“일 년 동안 잘해보자. 그리고 사고 치면 알지?”

담임이 손에 들린 밤나무 몽둥이로 탁자를 탕탕 쳤다.

“......”

“.......”

교실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조회를 마친 담임이 다시 교실을 나갔다. 교실 안으로 학생들의 원망이 터져나왔다.

“말도 안 돼! 왜 학주가 이 학년 담임을 하는데?”

“아아! 망했다.”

학생들의 좌절감은 당연했다. 단지 학생주임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학생주임은 일주일에 한 번 자체 쪽지 시험을 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 진짜···.”

신원주가 헛숨을 뱉어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러길래 왜 문과로 쫓아왔어.”

“으으···.”

강우는 태연했다. 학생주임이 유별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멀쩡히 학교생활을 하는 학생까지 건드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하고자 하는 애들은 더 챙겨주기도 하지.’

강우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학년부터는 정말이지 중요한 시기였다. 내신과 수능. 이 두 개를 모두 끌어 올려야 했다.

‘서울대에 가려면 말이지.’

이윽고 수업이 시작됐다. 첫날부터 줄줄이 쪽지 시험이었다. 선생들은 방학 동안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확인하려 했다. 강우는 막힘없이 문제를 풀었다. 방학 내내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은 성과였다.

쪽지 시험을 보는 족족 만점의 향연이었다. 김춘배가 멍하니 강우를 바라보았다.

“박강우, 너 뭔데?”

강우가 씩 웃었다.

“이게 다 노력의 대가다.”

2학년이 되자 학교생활은 더욱 빡빡해졌다. 아침 0교시는 물론이고 야간 자율학습도 반드시 참여해야 했다. 선택적으로 참여하던 1학년 때와는 다른 점이었다.

딩동댕동~

이윽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긴 종소리가 울렸다. 교실의 곳곳에서 해방감을 느낀 학생들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으아!”

강우가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뒤이어 보온도시락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온갖 반찬이 뒤섞인 묘한 향이었지만, 어머니의 정성이 느껴졌다.

‘조금만 싸주셔도 된다니까.’

꾹꾹 눌러 담긴 반찬양에 강우가 픽 웃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을 싼다며 분주하시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동안 도시락을 싸주지 못한 게 한이 되셨나 보다.

“오? 미니 돈가스? 좀 센데?”

신원주가 강우의 반찬을 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자신 있게 도시락을 깠다.

“비엔나 정도면 합류 가능?”

“가능.”

신원주가 의자를 돌려 강우의 책상에 도시락을 올려놓았다. 김춘배가 살짝 망설이더니 도시락을 꺼냈다. 보온도시락이 아닌 일반 플라스틱 도시락이었다.

“난 별거 싸 온 게 없는데···.”

강우가 씨익 웃으며 김춘배의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뭐 어때. 다 나눠 먹는 거지.”

책상 위로 강우와 신원주 그리고 김춘배의 도시락이 옹기종기 모였다. 각각의 반찬들이 모이자 진수성찬이 되었다.

“저기···.”

그때, 김춘배의 짝이 도시락통을 들고 머뭇거렸다. 신원주가 힐끗 강우의 눈치를 살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하자 신원주가 활짝 웃었다.

“같이 먹자. 난 신원주라고 해.”

“아···. 난 남재식이야.”

사각진 얼굴에 동그란 테의 안경을 쓴 학생이었다. 그렇게 앞뒤로 네 명이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신원주는 어색해하는 남재식에게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너 몇 반이었냐?”

“나? 3반···.”

과연 생판 모를만했다. 강우의 반이었던 15반과 3반은 끝에서 끝이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나고 또 수업의 연속이었다. 무려 7교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에 학생들은 지쳐갔다.

“오늘부터 바로 야간 자율학습도 시작한다.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이다. 알겠지?”

종례 시간이 끝나고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점심을 먹었던 사인방은 교문 밖으로 나가 저녁을 사 먹고 들어왔다. 그리고 야간 자율학습 줄여서 야자가 시작되었다.

“.......”

“.......”

야간 자율학습의 풍경은 천태만상이었다. 이미 공부를 포기한 학생들은 가수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삼삼오오 모여 조용히 떠드는 학생들도 있었다.

스윽. 스윽.

강우는 공부에 집중했다. 이왕 하는 야자를 효율적으로 쓰고 싶었다. 강우가 공부에 매진하자 신원주도 불타올랐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김춘배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변한 친구들의 학구열이었다.

“아···. 심심한데.”

김춘배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강우가 잠시 물끄러미 김춘배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CD플레이어를 꺼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강우가 노래를 재생시켰다.

-♪~♬~-

흑인 4인조 R&B 그룹의 감미로운 화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김춘배가 흠칫했다.

“뭐야! 너 CD플레이어 샀어?”

강우가 씨익 웃으며 볼륨을 높였다. 김춘배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신원주 역시 어느새 이어폰을 꽂고 웃고 있었다.

“와···. 너무들 하네.”

김춘배가 옆으로 표적을 전환했다. 남재식 역시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지이잉.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강우의 삐삐가 온몸을 비틀며 울렸다. 하지만 이어폰을 꽂은 강우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이잉. 지이잉.

몇 번이고 삐삐가 울리자 김춘배가 몸을 돌려 강우를 툭 쳤다.

“어?!”

자기도 모르게 크게 답한 강우가 깜짝 놀라 이어폰을 뺐다. 그제야 삐삐의 진동 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반 학생들의 시선이 온통 강우를 향해있었다.

“아···. 미안.”

강우가 미안하다는 몸짓을 하며 삐삐의 액정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1004 8282]

‘재원이 형이다!’

강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어? 강우야!”

신원주가 깜짝 놀라 강우를 불렀다. 한 층을 올라가자 교무실의 옆쪽으로 공중전화가 있었다. 강우가 주머니에 손을 뒤적거려 동전을 찾아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호출기 번호를 입력했다.

삐이-

[새로운 음성 메시지가 1개 있습니다.]

강우가 메시지를 재생시켰다.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우야, 형이다. 잘 지냈냐? 너희 학교 공부 열심히 시키는 곳이라더니 진짜인가 보네. 학교 전체에 불이 들어와 있는데 제법 볼만한 야경이야. 9시에 끝나지? 형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끝나면 딴짓하지 말고 곧장 나와라.-

뚝.

메시지가 끊어지고 강우가 픽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 메시지에서 들었던 목소리보다 훨씬 밝고 안정적인 목소리였다. 강우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이었다.

“이야~ 박강우. 뭐가 그리 급해서 야자 시간에 뛰쳐나오셨을까?”

강우의 얼굴이 굳었다. 몸을 돌리자 담임이 씨익 웃고 있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급한 연락이 있어서.”

담임이 잠깐 강우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학기 초라 한번 봐주는 거다. 다음에 또 걸리면 삐삐 압수야.”

“네, 선생님.”

강우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교실로 돌아왔다. 신원주가 강우를 보며 의아해했다.

“뭐야? 뭐가 그리 급해서 뛰쳐나갔어? 배 아팠냐?”

“아니. 아는 형한테 메시지가 와서.”

강우의 말에 신원주가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그때 아르바이트 같이했다던 형?”

“어.”

강우가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신원주도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공부를 이어갔다. 저녁이 깊어지자 교실이 깊은 침묵에 빠졌다. 떠들던 아이들도 지쳐 잠이 들었다.

딩동댕동.

밤 아홉 시가 되고 야자가 끝나는 종이 울렸다. 쓰러져 자고 있던 학생들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교실을 벗어났다. 가방은 진작에 싸놓은 상태라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강우가 급하게 참고서를 정리했다.

“야! 나 먼저 간다.”

“어어? 같이 가!”

급하게 교실을 벗어나는 강우를 신원주가 따라나섰다. 같은 교복을 입은 전교생이 유일한 탈출구인 좁은 교문으로 쏟아져 나갔다. 경쟁이라도 하듯 밀려 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은 흡사 좀비들 같았다. 강우와 신원주는 약간 뒤쪽에 있었다.

“좀 한산해졌네. 지금 나가자.”

“어.”

강우가 교문을 벗어났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재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빵.

자동차의 경적이 울렸다. 강우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리고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뭐야···.”

스르륵.

최고급 세단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덜컥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깔끔한 슈트를 빼입은 미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원이 형?”

“강우야.”

이재원이 환하게 웃으며 강우에게 다가왔다. 약간은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어디 아파요?”

“어? 아닌데?”

강우가 옆을 힐끗 보았다. 신원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 내 친구 신원주에요.”

신원주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가 신 교수님 아들이구나?”

이재원이 신원주를 향해 호감을 드러냈다. 그사이 하굣길에 오르던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차 엄청 좋네.”

“연예인이야?”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에 이재원이 두 사람을 차 안으로 이끌었다.

“타. 데려다줄게.”

강우와 신원주가 차량에 올라탔다. 신원주는 앞자리에 탔고 강우와 이재원이 뒷자리였다. 운전석에는 중년의 남성이 앉아있었다. 신원주가 움찔하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십니까?”

이윽고 중년 남성이 이재원을 향해 물었다.

“도련님, 출발할까요?”

“네, 아저씨.”

이재원의 허락이 떨어지자 차량이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재원이 신원주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목동 아파트 단지지?”

“네.”

중년 남성이 빠르게 답했다.

“그럼 먼저 목동 아파트 단지로 향하겠습니다.”

“네, 그래 주세요.”

중년 남성의 운전 솜씨는 기가 막혔다. 차량이 가는지 서는지 모를 정도였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신원주가 꾸벅 졸아버릴 정도였다. 이윽고 차량이 신원주의 집 앞에 도착했다.

“원주야.”

강우가 신원주를 툭하고 쳤다. 신원주가 깜짝 놀라 깨더니 소매로 입가를 스윽 닦았다.

“다 왔어?”

“어, 집 앞이야.”

신원주가 문을 열고 내리고는 중년남성에게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지이잉.

이재원이 창문을 내리고 신원주를 향해 손을 들었다.

“나중에 강우랑 해서 같이 밥 한번 먹자.”

“네? 아···. 네!”

신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재원의 너머로 보이는 강우를 보며 손을 척 들었다.

“나 간다.”

“어, 내일 보자.”

신원주가 아쉬운듯한 얼굴을 잠시 했다. 하지만 이내 몸을 돌려 집을 향해 달려갔다. 이재원이 창문을 올리더니 강우에게 묻는다.

“잠깐 시간 괜찮지?”

“네, 너무 늦지만 않으면요.”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년남성에게 말했다.

“한강 고수부지로 가주세요.”

“네, 도련님.”

이윽고 세단이 한강 고수부지에 도착했다. 적당한 곳에 차가 세워지자 강우와 이재원이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이 차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아···.”

이재원의 입에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휘날리듯 흩어졌다. 차가운 강바람에 이재원이 슬쩍 몸을 떨었다. 강우가 힐끗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수척해진 얼굴로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엿보였다.

“땅 꺼지겠네. 뭔 한숨을 그렇게 쉬어요.”

“그동안 얼마나 숨 막혔는지 넌 모를 거다.”

이재원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칫밥은 많이 먹었어요?”

“배 터져 죽는 줄 알았지.”

이재원이 씁쓸하게 웃었다.

“갑자기 사라져서 좀 놀라기는 했어요.”

“나도 내가 그렇게 강단 있는 놈인지 몰랐다. 너랑 이야기한 다음 날에 곧장 아버지한테 쳐들어갔지.”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재원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룹 본사 로비가 발칵 뒤집혔었다. 아버지 만나러 왔다니까 다들 미친놈 보듯 보는데···.”

“조용히 만날 방법은 없었어요?”

이재원의 얼굴에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그 인간을 마지막으로 본 게 내가 중학생 때 인가 그랬어. 그전에도 만나고 싶어서 몇 번인가 찾아도 갔었는데 없는 사람 취급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야.”

“그랬군요···.”

“아마 그날 있던 일 입 막는다고 돈깨나 썼을걸?”

이재원이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영감은 좀 당해도 돼. 그동안 나랑 우리 엄마한테 한 거 생각하면.”

“아무튼, 별일 없어 보여 다행이네요. 난 또 어디 조용히 끌려가서···.”

강우가 손을 스윽 그었다. 이재원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라.”

“그래서 눈칫밥 먹은 목적은 달성했어요?”

이재원이 눈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어.”

“좋네요. 축하해요.”

“힘들었다. 사모님 성격이 아주 그냥···. 어휴~ 생각하기도 싫어.”

“그럼 갑자기 형들이 두 명이나 생긴 거네요?”

“그래, 여동생 한 명도.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나를 형제 취급이나 해주겠냐?”

대진 그룹 이철금 회장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물론 이재원을 제외하고였다.

“앞으로 어쩌려고요?”

“뭘 어째. 네 말대로 당당하게 나서려고.”

“후계자 싸움이라도 하려고요?”

“그래, 맞아. 대진 그룹을 내 손에 넣을 거야.”

이재원이 선언하듯 말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

“하아···. 그런데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야.”

이재원이 그새 죽는소리를 냈다. 이철금 회장의 두 아들은 이재원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미 경영 일선에서 치열하게 싸울 준비를 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재원은 어떤가?

‘아직 대학도 졸업 못 했고, 지지기반도 없다.’

더군다나 이재원은 현대판 서자였다. 모든 조건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인제 와서 그만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내가 부추긴 거고.’

지금 이재원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는 생기가 가득했다.

“경쟁자들하고 격차가 심하기는 하네요.”

“그래, 두 형님은 벌써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잖아.”

이철금의 첫째아들은 대진 그룹의 모체가 된 출판사의 부사장이었다. 둘째 아들은 그룹 전략본부에서 상무를 맡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 하나 있기는 했다.

“이철금 회장님 아직 정정하시잖아요. 시간은 많아요.”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형들은 뭐 놀고 있냐? 어차피 시간은 평등해.”

“자신감을 가져요. 두 형님은 온실 속의 화초에요. 야생에서 강하게 자란 형을 이길 수 없을걸요?”

이재원이 픽하고 웃었다.

“그거 칭찬이냐?”

“아마도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렸다. 차가운 강바람이 두 사람의 머릿결을 강하게 훑고 지나갔다.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래, 이왕 돕기 시작한 거 끝을 보자.’

강우가 결심을 내리는 순간, 이재원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늦었다. 내일 또 학교 가야 하는데 빨리 가자.”

“형.”

강우가 이재원을 불렀다. 이재원이 멈칫하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응?”

“나 믿죠?”

이재원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진지한 강우의 표정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엄마 다음으로 믿는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놀라지 말고 의심도 하지 말고 들어요.”

이재원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뚱딴지같은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우는 달랐다. 이재원에게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였다.

“무슨 이야기인데?”

강우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대진 그룹에서 삼우 건설을 인수추진 중이죠?”

“어? 어떻게 알았어?”

이재원이 깜짝 놀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극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개 고등학생이 알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하지만 IMF의 기억을 알고 있는 강우가 떠올릴만한 기억이었다.

‘워낙 유명한 호구 짓이었으니까.’

대진 그룹은 지금도 문어발식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경제가 호황인 지금의 상황에 잔뜩 무리하고 있었다. 강우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형네 아버지한테 가서 그만두라고 조언해요.”

“뭐? 내가 그만두란다고 말을 들을까? 그 인간이?”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해내는 게 형의 능력이겠죠.”

굳이 IMF에 대해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삼우 건설은 부실기업 그 자체였으니까. 이재원이 조금만 자세히 조사해본다면 금세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못 먹어도 고라고. 원래 이철금 회장은 막무가내식 기업 운영으로 유명하지.’

이재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삼우 건설의 인수를 막아내기만 한다면, 형은 곧 아버지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

잠시 고민에 빠졌던 이재원의 얼굴에 결심이 떠올랐다.

“그래, 네 말이라면, 내가 도박을 걸어볼 만하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은 여기까지였다. 그 이후는 온전히 이재원의 몫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