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402)

아빠는 너를 믿는다.

시간이 항상 빠르게 흐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떨 때는 너무나 지루할 정도로 느렸고, 어떤 때는 정신없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방학의 경우는 완벽한 후자의 경우였다.

“형아, 이제 일어나.”

강용의 목소리에 강우가 부스스 눈을 떴다. 슬쩍 고개를 돌려 탁상시계를 보니 이른 아침이었다.

“형아, 일어났어?”

강우가 몸을 일으키며 강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아 자는 거 구경했냐?”

“응, 엄마가 깨우랬는데 내가 봐줬다.”

강용이 재빨리 손에 수건을 턱 하니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흉내를 내며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빨리 씻고 나와 밥 먹고 학교 가야지.”

“어, 알겠어.”

강우가 픽하고 웃은 뒤 강용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강용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도망쳤다. 강우가 화장실로 향했다. 양치를 위해 거울을 보니 아버지를 닮은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며칠 새 통 아빠 얼굴을 못 보네.’

강우 아버지의 계약성사로 GIC 한국지사가 발칵 뒤집혔었다. 사실 한국에 자리 잡을 기간은 큰 계약성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회사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대박을 터트려 버렸지.’

현재 일본으로 수출되는 중국산 고추는 한국의 삼산물산이 휘어잡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 아버지가 그 틈에 균열을 만들어 낸 것이다. 미국에 있는 본사도 난리가 났다. 강우 아버지를 유능한 인재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의 일을 해내 버렸으니까 말이다.

‘본사에서 성과금도 두둑하게 준다고 했다는데.’

아버지가 바빠지기 시작하자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강우가 잠들면 들어와 새벽같이 나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간혹 마주친 아버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이윽고 강우가 현관을 나섰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들~ 잘 갔다 와. 새 친구들 많이 사귀고.”

“네!”

강우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봄의 문턱에 다가가고 있는 시기였지만, 아직은 추위가 느껴졌다. 강우가 익숙한 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새로 이사 온 오성맨션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십 분 남짓이었다.

“야!”

“억···.”

교문을 지나치자 누군가가 강우의 뒤를 덮쳤다. 강우가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휘청였다. 강우가 빠르게 몸을 틀어 습격자를 확인했다.

“야! 놀랬잖아.”

“쫄았냐?”

강우의 목을 뱀처럼 낚아챈 인물은 신원주였다. 신원주의 입에서 속사포 같은 잔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너는 진짜 인간이 그러면 안 돼. 어떻게 방학 동안 한 번을 안 놀러 와?”

“야야···. 이것 좀 놓고 말해라. 형님 숨넘어간다.”

신원주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신원주의 팔을 단번에 밀어냈다.

“아···. 이 괴물 같은 놈 힘센 거 봐라.”

“네가 약골인 거지.”

강우가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툭툭 다잡았다. 입가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신원주를 보니 반가웠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방학 내내 좀 바빴거든.”

“그래? 그럼 방학 끝났으니까 안 바쁘지?”

괴상한 논리였지만, 강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신원주가 이때다 싶어 마무리 공격을 시도했다.

“오늘은 무조건 우리 집 가는 거다.”

“오늘?”

“우리 엄마의 특명이다. 박강우 생포 작전.”

“거짓말. 나한테 게임 이기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고?”

“아니거든?”

신원주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하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알겠어. 오늘 개학식이니까 놀러 갈게.”

“오케이!”

강우와 신원주가 교실로 들어섰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교실의 문이 드르륵 열렸다.

“다들 방학 동안 공부 열심히 했나?”

오랜만에 보는 담임이었지만, 반갑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담임의 등장이 완벽한 방학의 끝을 알리는 것 같았다. 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렷, 인사.”

학생들의 우렁찬 인사가 끝나고 개학식이 시작됐다. 널찍한 운동장으로 전교생이 모였다. 단상으로 일 년에 몇 번 볼까 한다는 교장이 올라섰다.

-사랑하는 양서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교장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흐아암~”

신원주가 대번에 찢어지게 하품을 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너 어젯밤에 뭐 했냐?”

“오늘의 결전을 위해 밤을 새웠다.”

“전쟁 나가냐?”

“어, 상대는 바로 너다 박강우.”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개학식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왔다.

“박강우, 신원주. 너희 둘은 교무실로 와.”

담임이 문을 열고 나가며 강우와 신원주를 지목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부르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전과 신청을 했으니 상담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신원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강우를 툭 쳤다.

“빨리 담임 만나고 우리 집에 가야지.”

“어.”

강우가 신원주와 함께 교무실로 올라갔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학생주임 선생이 대번에 참견을 해왔다.

“뭐야? 개학식 날부터 사고를 쳤어?”

강우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틈만 나면 몽둥이를 쓰기 위해 안달이라도 났나 보다.

“학생주임 선생님, 전과 문제 때문에 상담하러 온 겁니다.”

담임이 나타나 강우와 신원주를 구해주었다. 강우는 멍한 표정으로 신원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너 전과해?”

“어.”

신원주가 씩 웃으며 답했다. 강우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너는 왜?”

“바늘 가는 데 실 가야지.”

신원주의 말에 강우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분명 기억 속 신원주는 이과였었다.

‘원주 녀석의 미래가 바뀌었다.’

* * *

드르륵.

교실의 문이 열리고 강우가 들어섰다. 웅성거리던 학생들의 시선이 강우에게 쏟아졌다. 힐끗 분단의 끝 쪽을 바라보니 박광웅과 허준후가 하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강우와 시선이 마주친 둘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박광웅과 허준후의 반응에 자기들끼리 희희낙락거리던 일진들도 갑자기 숙연해졌다. 강우가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너 진짜 잘 생각한 거 맞아?”

강우가 옆에 있는 신원주를 향해 말했다. 혹시 신원주가 자신과 함께하기 위해 진로를 억지로 바꿨나 싶었다. 신원주의 반응은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설마 내가 친구 따라 강남 가겠어?”

“너라면 그러고도 남지.”

사실 기억 속 강우가 그랬었다. 신원주가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야. 아빠하고 진지하게 상의한 거야.”

“그래?”

신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힘든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했어.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나는 축복받은 환경인데도 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더라고.”

“......”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신원주의 이런 진지한 표정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도 부모님이 원하는 걸 하나쯤은 해야겠더라.”

“그게 뭔데?”

신원주가 다짐하듯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나 서울대 갈 거야.”

“그거랑 전과랑 무슨 상관인데?”

“나 언론정보학과 가려고.”

강우가 잠시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기억 속 신원주는 서울대를 가지는 않았다. 언론정보학과는 더더욱 아니었다. 서울에 있는 모 대학을 나와 평범하게 직장을 다녔었다.

“그래, 아버지랑 잘 상의했다니까. 네가 알아서 하겠지.”

“응. 나도 한 번쯤은 효도해야지 않겠냐?”

“그래, 너도 열심히 해라.”

“응, 그런데 오늘 우리 집 가는 거지?”

“어.”

강우와 신원주가 묵묵히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는 학교를 벗어나 신원주의 집으로 향했다. 원주 어머니는 강우를 크게 반겨 주셨다. 그리고 예상대로 신원주는 강우에게 게임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과는 강우의 여전한 압승이었다.

* * *

겨울방학이 끝나자 곧장 봄방학이 시작됐다. 일주일뿐인 짧은 방학은 새 학기를 준비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강우와 강용이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만화에 온통 집중한 강용과는 달리 강우는 연신 시계를 힐끔거렸다.

“야압! 얍!”

강용은 텔레비전을 보며 연신 액션 영웅의 흉내를 냈다. 강용의 콧등에 땀이 맺혀 있을 만큼 열정적이었다. 강용의 손짓과 발짓이 절정에 다다를 때였다.

“강용아, 늦었어. 얼른 자러 가.”

어머니의 말에 강용이 빠르게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강우를 보며 슬쩍 묻는다.

“아들 안 자?”

“아빠, 기다리려고요.”

어머니가 힐끗 시간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엄마는 좀 자고 있을게. 아빠 오면 깨워줘.”

어머니의 얼굴에 옅은 기대감이 묻어있었다.

“네.”

문이 닫히고 어머니와 강용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텔레비전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베란다의 창으로 환한 불빛이 멈춰 섰다.

‘오셨네.’

차량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하셨어요.”

강우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덜컥 문이 열리고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났다. 깔끔한 양복에 트렌치코트를 걸친 아버지는 참 멋졌다.

“어? 아들, 안 자고 있었어?”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취기가 감돌고 있었다. 회사에서 회식이 있다고 하시더니 술을 드셨나 보다. 강우가 아버지의 서류 가방을 받아들었다.

“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우리 장남이 아빠도 기다려주고. 참 좋네.”

아버지가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보, 왔어요?”

안방에서 주무시던 어머니가 부스스한 얼굴로 아버지를 반겼다.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우리 마누라! 자다 깨도 어쩜 이렇게 이쁠까?”

“술 마셨어요?”

평소와는 다른 남편의 행동에 어머니가 눈을 흘겼다. 아버지가 움찔하며 엄지와 검지를 살짝 벌렸다.

“아주 조금?”

어머니가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분위기 전환에 성공한 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식탁에 앉으며 강우와 어머니에게 손짓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 여기 앉아봐.”

강우와 어머니가 식탁에 앉았다. 그러자 강우 아버지가 입고 있던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윽고 노란색의 봉투가 자태를 드러냈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탁.

아버지가 식탁의 가운데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어머니 쪽을 향해 스윽 밀었다.

“첫 월급이야···.”

아버지의 얼굴로 만감이 교차했다. 강우와 아버지의 시선이 어머니를 향했다. 어머니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었다.

“고생했어요.”

“아니야. 더 일찍 가져다주지 못해서 미안해.”

강우가 부모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늘 고생만 하신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꽃처럼 피어나 있었다. 아버지의 시선이 이번에는 강우를 향했다.

“이제 강우 너도 학원도 다니고 그래라.”

“학원은 괜찮아요. 혼자서 공부할 수 있어요.”

아버지의 얼굴에 대견함이 스쳐 지나갔다.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진 강우였다. 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아빠, 본사에서 지급한다던 성과금은 어떻게 됐나요?”

강우의 질문에 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일단 이번 첫 컨테이너가 나가고 나면 지급될 거 같아.”

강우가 눈을 빛냈다. 일본으로 처음 수출되는 물량은 총 100톤이었다. 거기서 아버지는 톤당 20불의 성과금을 받기로 했다.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본사의 결정은 합당한 것이었다. 애초에 톤당 가격을 50불이나 깎은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공이었으니까.

‘거기다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꾸준히 물건이 나갈 테니까.’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 이번에 받는 성과금 어디다 쓰실 거예요?”

강우의 질문에 아버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며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입술을 달싹일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윽고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일단 아빠 조금 있는 빚부터 갚고 나머지는 아직 정한 건 없어. 그런데 왜 그래?”

“아빠, 저를 한 번 더 믿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너를 믿는다.”

강우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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