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402)
  •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2)

    강우가 차분히 기억을 받아들였다. 먼 미래에 이재원은 이철금 회장과 부자 관계를 끊는다는 계약을 하며 일정의 돈을 상속받았다. 재벌 집 회장님답게 그 액수가 제법 통이 컸었다.

    ‘한 몇백억 정도라고 했었지···.’

    그렇게 돈을 받았지만, 이재원의 가슴에는 커다란 상처가 남았다. 애초에 이재원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혼외자를 인정하기가 쉬웠겠는가.

    ‘결국, 자의 반 강압 반으로 그 돈을 받고 호적을 완전히 정리하지.’

    그래서 성씨도 어머니 김세아를 따라 김 씨로 바꾼 것이다. 김재원은 몇백억이라는 돈을 바탕으로 커다란 사업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아버지인 이철금 회장에게 복수할 생각이었다.

    ‘복수라기보다는 애증의 관계에 가깝겠지···.’

    하지만 돈이 많은 김재원에게 달라붙은 것은 사기꾼과 돈을 노린 하이에나들뿐이었다. 그렇게 김재원이 가진 돈은 물새듯이 세어나갔다.

    ‘그렇게 재원이 형은 망가져 갔다고 했어.’

    외가 쪽과도 연을 끊고 산 김재원을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 그대로 고아나 다름없었다. 결국, 자신의 신세를 비관한 김재원은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 김재원의 이야기는 어느 한 기자의 호기심에 취재가 됐고, 기사화도 됐다.

    ‘하지만 대진 그룹이 가만히 보고 있었을 리가 없지.’

    기사는 금세 묻혔고, 김재원이라는 인물은 세상에서 완벽히 사라졌다.

    “........”

    강우가 아직은 이재원인 눈앞의 남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이재원이 보여주었던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과도할 정도의 활발함 그리고 강우와 원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부러움을 보인 것 말이다.

    “야, 왜 그래?”

    강우의 시선에 이재원이 움찔했다. 강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

    “어?”

    강우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눈을 빛냈다.

    “당당하게 살아요. 숨지 말고.”

    “......”

    이재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김세아가 형 엄마죠?”

    “너···. 너···. 그걸 어떻게···.”

    이재원이 경악에 찬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아차 싶은 이재원이 입을 틀어막았다.

    “누가 봐도 닮았는데요 뭐. 그리고 여배우 김세아는 무남독녀. 외동딸이잖아요.”

    “하아···.”

    이재원이 고개를 떨궜다. 당황한 김세아가 내뱉은 이모라는 단어를 수습하기란 역시 불가능이었나 싶었다. 결국, 이재원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사실 내 아버지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 회장이야. 우리 엄마는 그 사람이랑 불륜으로 나를 낳았어. 한마디로 나는 사생아고 혼외자야.”

    대한민국에서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세상에 알려진다면 비난과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 이재원은 그런 자신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강우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래서요?”

    “어?”

    이재원이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형의 상황이 힘든 건 알겠어요. 누구에게나 자신이 겪는 힘든 상황이 가장 고통스러운 법이니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이재원이 발끈했다. 그동안 쌓아온 울분이 강우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넌 부모님도 모두 계시잖아. 내가 얼마나 많이 놀림당하고 비난받고 살아왔는지 알아? 아비도 모르는 놈이라며 뭐 하나만 잘못해도 남들보다 더 심하게 놀림당하고 욕먹고, 그뿐인지 알아? 항상 감시받고 숨어 살아야 했어. 친구들이라도 제대로 사귀어 본 적 있을 거 같아? 난 늘 혼자였다고.”

    이재원이 씩씩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우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요? 형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죠? 우리 집은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어요. 왜인지 모르지만 그랬어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나서는 집도 절도 없이 여기저기 떠돌았어요. 학교는 몇 번이나 전학 갔는지 알아요? 초등학교만 네 군데가 넘어요. 중학교는 두 군데나 전학을 갔고요.”

    이재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친구요? 나는 뭐 친구 많은지 알아요? 나도 어렸을 적에는 부모님 원망도 하고 내 현실을 원망도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

    이재원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형, 정신 차려요. 결국, 형의 인생은 형이 개척하는 거예요. 사연 없는 무덤 없다고, 세상에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으음···.”

    “형은 남들보다 가진 게 많다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인정 안 해주는 거? 형이 스스로 증명해요. 넋 놓고 살지 말라고요.”

    이재원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독설에 가까운 강우의 말이었다. 하지만 긴장감이 풀리고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넌 도대체···.’

    강우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잘 생각해봐요. 대신 형에게는 남들보다 돈도 많아요. 그리고 공부도 잘하고,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출중한 외모도 있잖아요.”

    이재원이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다 뭐? 다 소용없는 것들이라고. 난 그냥 치부 덩어리라고.”

    “그러니까 아까 말했잖아요. 당당하게 살라고 숨지 말라고.”

    이재원의 눈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아니 태어나자마자 자신은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이재원은 죽어라 하고 노력했다. 학창 시절 성적은 늘 전교 1등이었다. 서울대학에 진학도 성공했다. 모두 아버지인 이철금 회장의 눈에 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었어.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심지어 우리 엄마도.’

    그때, 강우의 목소리가 이재원의 굳은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형한테 무슨 비밀이 있는지는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활발하고 정 많고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라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러니까 내 앞에서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가···. 강우야.”

    “바보처럼 좌절하지 말라고요. 형한테 있는 것들은 남들이 항상 꿈꾸는 것들뿐이니까.”

    이재원의 입에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오랜 세월 쌓여온 자격지심과 울분이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재원이 눈을 빛내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네가 나보다 동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네.”

    강우가 자신의 빈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앉아요. 과외나 마무리하죠.”

    “어···. 어. 알겠어.”

    이재원이 멍한 표정으로 이끌리듯 자리에 앉았다. 생각해보니 만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두 강우의 페이스에 완전히 끌려가 버렸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 중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맙다. 내 동생.”

    이재원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집안으로 퍼져 나갔다.

    * * *

    방학에 아르바이트까지 끝나자 시간이 남기 시작했다. 강우는 방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데 열중했다. 목표로 세운 서울대를 가기 위해서는 성적을 매우 많이 끌어올려야 했다.

    스윽. 스윽.

    강우는 참고서를 반복해서 풀었다. 지능은 물론 집중력까지 높아진 강우에게 고등학교 과정의 문제는 쉬웠다. 강우의 시선이 문득 한 권의 참고서로 향했다. 대진 출판사에서 나온 참고서였다.

    ‘재원이 형은 별일 없으려나.’

    그날의 사건 이후, 이재원은 통 연락이 없었다. 흔히 삐삐라 불렀던 호출기의 번호를 알고 있어 몇 차례 번호를 남겼지만, 반응이 없었다.

    ‘과외공부를 해준다고 큰소리 떵떵 치더니.’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강우 어머니가 간식을 잔뜩 준비해 들어오셨다.

    “강우야, 이것 좀 먹고 해.”

    “네, 엄마.”

    강우 어머니가 간식을 내려놓으며 참고서를 힐끗 바라보았다. 강우 어머니의 얼굴에 이내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 우리 아들 벌써 여기까지 진도가 나갔어?”

    “네, 뭐···.”

    강우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강우 어머니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거봐. 우리 아들 똑똑해서 공부하니까 금세 따라잡잖아.”

    “그러게요. 공부가 어렵지 않네요.”

    “아들~ 다음 시험은 기대해도 되겠지?”

    “네, 기대하세요.”

    강우 어머니가 날아갈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강우의 등을 쓰다듬어 준 후 밖으로 나갔다.

    ‘요즘 얼굴이 아주 좋아 보이시네.’

    얼마 전 강우는 아르바이트비를 받았다. 과연 원주 아버지의 말처럼 섭섭지 않은 액수였다.

    ‘그거 잠깐 도와드리고 30만 원이나 주시다니.’

    30만 원이면 90년대에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강우는 그 돈을 모두 어머니에게 드렸다. 아들이 처음으로 벌어오는 돈을 받은 강우 어머니는 한참을 우셨다. 강우 어머니가 밤새 돈 봉투를 끌어안고 자느라 강용이 돈 봉투가 밉다고 말할 정도였다.

    ‘좋다~’

    강우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관의 작은 창보다 훨씬 큰 창문으로 겨울 햇살이 가득 방안에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 아버지 월급이 나오기 시작하면 슬슬 돈을 좀 모아놔야 하는데 말이지.’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진 강우가 펜을 내려놓았다. 힐끗 참고서를 바라보니 오늘의 목표치는 이미 초과달성한 상태였다.

    드르륵.

    강우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자 방문을 열고 나갔다. 강우의 코끝으로 달콤한 음식 냄새가 밀려들었다. 강우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엄마가 요리 중이신가?’

    강우 어머니의 음식솜씨는 상당히 훌륭했다. 그동안 발휘하지 못한 솜씨를 오늘 한껏 부리실 모양이다.

    치이익.

    방으로 다가가니 강우 어머니가 잔뜩 신이나 콧노래까지 부르고 계셨다. 강우 어머니의 손끝에 쥐어진 프라이팬이 마치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 이거!”

    강용은 엄마를 돕겠다고 나섰는지 식탁 옆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강우 어머니는 그런 강용이 귀여워 죽겠는지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시켰다.

    “강용아, 거기 두부 좀.”

    “네!”

    강우가 벽에 기대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집안에 감도는 따듯한 기운에 온몸이 푸근해졌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딩동~

    “내가 나갈래!”

    강용이 강우를 스쳐지나 또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아빠!!”

    그리고는 아직 퇴근 시간도 한참 남은 강우 아버지를 찾았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어, 그래 꼬마야. 어른은 안 계시니?”

    강우가 현관에 도착했다. 한 남성의 손에 커다란 상자가 들려있었다.

    “박강우 씨?

    “네, 접니다.”

    강우가 남성이 내미는 박스를 받아들었다. 남성이 뭐가 그리 급한지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갔다. 강우가 박스를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형아! 궁금해. 빨리 뜯어보자.”

    “알겠어.”

    강용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강우가 박스를 뜯었다.

    “음?”

    “와~ 이게 뭐야?”

    상자 안에는 작은 상자가 또 들어있었다. 강우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삐삐네.”

    “삐삐?”

    강용이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박스를 까니 노란색 무선 호출기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작은 메모지에는 무선 호출기의 호출 번호가 적혀있었다.

    지이잉.

    무선 호출기의 전원을 켜자 곧바로 진동이 울렸다. 슬쩍 액정을 확인한 강우가 질색한 표정이 되었다.

    [1004 8282]

    강우가 전화기를 들어 삐삐의 호출 번호를 눌렀다. 상투적인 말투의 안내음이 들렸다. 강우가 능숙하게 음성 사서함에 접속했다.

    -삐이. 녹음된 음성메시지는 1건입니다.-

    이윽고 이재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우야, 나다. 잘 지내고 있냐? 나는 지금 본가에 들어와 있어. 방학 동안 여기서 눈칫밥 좀 얻어먹고 나갈 생각이다. 네 말대로 더는 숨지 않기로 했거든. 당당히 맞서 싸울 거야. 이게 다 네 덕분이다. 아 참 그리고 과외공부를 하기로 한 약속은 방학이 끝나고 꼭 지키도록 할게. 마지막으로 이 삐삐랑 참고서는 내가 너한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부담 갖지 말고 받아줬으면 좋겠어. 그럼 방학 끝나고 보자. 내 동생 강우야.-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강우가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힐끗 상자 안을 다시 살펴보니 다량의 참고서가 아래쪽으로 깔려 있었다.

    부스럭.

    강우가 참고서를 일일이 꺼내 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뭐야···. 순 엉망이라더니.’

    이재원이 함께 보낸 참고서는 모두 대진 출판사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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