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402)
  •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

    문이 열리고 널찍한 집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지끈거리던 머리가 가라앉자 강우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강우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성을 뱉어냈다.

    “와~”

    정말 잘 꾸며진 집이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가전제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강우가 신발을 벗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형은 어디로 눕힐까요?”

    “아···. 이쪽이 침실이에요.”

    강우가 김세아가 가리키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깔끔한 모던스타일로 정돈되어 있었다. 특히 방의 한쪽에 놓여있는 오디오 시스템이 강우의 눈길을 끌었다.

    ‘저거 비싼 건데···.’

    이재원을 침대에 눕힌 강우가 이불을 덮어주고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방 밖의 김세아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재원이 형 후배 박강우라고 합니다.”

    “아···. 저는 재원이···. 이모 김세아예요.”

    김세아의 얼굴이 크게 흔들리며 말까지 더듬었다. 강우가 김세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70년대 최고의 여배우. 브라운관의 여신이라 불린 김세아.’

    현재 40대 초반의 나이인 김세아였다. 하지만 아직 미모가 상당했다. 과연 연예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김세아가 재원이 형의 이모였다고?’

    김세아는 어느 순간 브라운관에서 사라졌다. 김세아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병이 들어 죽었다. 재력가한테 시집을 갔다. 연예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평범하게 살아갔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자 대중들의 관심도 사라졌다. 그렇게 잊혀진 여배우 김세아가 지금 강우의 눈앞에 있었다.

    ‘음···.’

    무언가 기억이 더 떠오를 듯했지만, 흐릿한 안개처럼 흩어지기만 했다. 강우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기억도 아니고.’

    강우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당황하는 김세아의 모습에 집안에 더 머무르기도 민망했다.

    “그럼,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왔는데 차라도 한잔···. 아니 음료라도.”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부모님이 걱정하셔서 집에 빨리 가야 합니다.”

    “그래요. 그럼 재원이 일어나면 연락하라고 할까요? 아니면 나중에 재원이 보고···.”

    김세아가 횡설수설했다. 누가 봐도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지만, 강우는 모른 척해주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강우가 신발을 신고는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밖을 나왔다.

    “후아···.”

    밖으로 나오니 완전한 밤이 되어 있었다. 강우가 오피스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잘생긴 이재원과 김세아는 매우 닮은 듯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외탁했나 보지.’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전철이 끊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강우가 전철역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 * *

    다음 날 아침, 방학의 여유를 만끽하며 잠자고 있는 강우를 강우 어머니가 깨웠다.

    “아들, 전화 왔어.”

    “네?”

    강우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바뀐 잠자리 환경 탓일까 몸이 찌뿌둥했다. 강우가 거실로 나가자 강용이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강우가 척 손을 내밀자 두 손으로 턱하고 쥐여주었다.

    “여보세요?”

    -나다.-

    수화기 너머로 술 냄새가 난다면 이런 것일까? 이재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일어났어요?”

    -지금 좀 와줄 수 있을까?-

    대뜸 집으로 와달라는 말에 강우가 잠시 멍했다. 그러자 이재원의 목소리가 더욱 가라앉았다.

    -꼭 좀 와줘.-

    “알겠어요. 그럼 씻고 나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봐요.”

    강우가 통화를 끝내자 강우 어머니가 관심을 드러냈다.

    “아들, 누구?”

    “서울대에서 아르바이트 같이한 형이에요.”

    “그래?”

    강우 어머니의 눈동자가 빛을 냈다. 강우가 화장실로 향했다.

    “저 씻고 좀 나갔다 올게요.”

    * * *

    딩동~

    “강우냐?”

    문이 벌컥 열리고 이재원의 모습이 드러났다. 엉망인 행색의 이재원이었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확 밀려들었다.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어휴···. 술 냄새. 들어가도 돼요?”

    “어? 어어.”

    이재원이 문을 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강우가 힐끗 현관을 내려다보니 신발은 이재원의 것 한 켤레뿐이었다. 강우의 시선을 눈치챈 이재원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이모는 갔어.”

    “아···. 네.”

    강우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재원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강우를 따라오라 손짓했다. 강우가 다시 한번 집안을 둘러보았다. 어젯밤은 경황이 없어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잘 꾸며 놓고 사네.’

    힐끗 주방을 바라보니 아일랜드 형식의 주방이 보였다. 식탁 위에는 맥주캔 몇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아니, 술을 또 마셨어요?”

    강우가 식탁으로 다가가 빈 캔을 정리했다. 이재원이 화들짝 놀라며 강우를 말렸다.

    “놔둬 그거 나중에 치울 사람 오니까.”

    “치울 사람이요?”

    강우가 멈칫하며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이재원이 짧게 한숨을 쉬더니 거실로 향했다.

    “이리 와서 좀 앉아.”

    “네.”

    강우가 이재원의 앞쪽으로 앉았다. 강우를 앞에 둔 이재원의 얼굴에 망설임이 가득했다.

    “사람 불러놓고 왜 말이 없어요.”

    “음···. 그게···.”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해장 좀 하고, 씻고 맨정신에 이야기하죠.”

    “어? 어어···.”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다가갔다. 이재원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우왕좌왕했다.

    “형, 라면 없어요?”

    “어···. 없어.”

    강우가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먹을 것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아니, 집에서 밥 안 먹고 살아요?”

    “잘 안 먹어. 주로 사 먹어.”

    강우가 이재원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척'하니 내밀었다. 이재원이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돈 달라고요 돈. 가서 장 좀 봐오게.”

    “장을? 네가 음식도 해?”

    “그럼요. 이래 봬도 사기 캐릭터인데 못 하는 게 있을까 봐요?”

    이재원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재원이 손안에 신용카드를 쥐고 나타났다.

    “이거로 계산해.”

    “신용카드도 써요?”

    강우가 신용카드를 받아들었다. 기억 속 미래에는 흔하디흔한 신용카드였지만, 90년대에는 흔하지 않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재원은 대학생이 아니던가.

    “어, 지금 현금이 없어서.”

    “그럼, 금세 올 테니까 그동안 씻고 있어요.”

    “어어···.”

    강우가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이재원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랑 있을 때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한없이 끌려다녔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이재원이 희미하게 웃더니 샤워를 하러 갔다.

    보글보글.

    펄펄 끓는 물에 강우가 콩나물을 잔뜩 쏟아 넣었다. 그다음은 면을 넣고 스프를 투하했다. 강우가 쓰윽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샤워를 끝내고 이재원이 나와 있었다.

    “계란 넣어요?”

    “어. 한 개만.”

    강우가 계란까지 탁 까서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파를 송송 잘라 우수수 쏟아 넣고는 마무리했다. 강우 아버지와 달리 강우는 불은면을 싫어했다. 이윽고 주방에 있는 접시를 두 개 꺼낸 강우가 라면을 각각 부었다.

    “이리 와서 먹어요.”

    “으응···.”

    이재원이 식탁의 맞은편으로 앉았다. 그리고는 국물부터 후루룩 마셨다.

    “하아~”

    이재원이 깊은숨을 토해냈다. 속에 잠들어 있던 알코올 성분 탓에 얼굴이 다시 붉어져 있었다.

    “먹을 만하죠?”

    “응.”

    두 사람이 한동안 말없이 라면을 먹었다. 이윽고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이재원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고맙다.”

    이재원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묻어있었다. 강우가 당황했다.

    “왜 그래요? 갑자기.”

    “이 집에서 누군가가 나한테 음식을 해준 게 오늘이 처음이야.”

    “......”

    강우가 먹던 것을 멈추고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여 빈 그릇을 바라보는 이재원의 어깨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어제 우리 이모 만났지?”

    “네.”

    이재원이 고개를 들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에는 취기와 복받친 감정이 뒤섞여있었다.

    “안 놀랐어?”

    “뭐···. 조금요?”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해졌다. 그리고 짤막한 기억의 파편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또다시 흩어져 버렸다.

    ‘음···.’

    강우의 표정이 굳었다. 이재원이 그런 강우의 표정에 움찔했다.

    “그···. 우리 이모가 김세아인 거 비밀로 해줄 수 있을까?”

    “네, 걱정하지 마요.”

    이재원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이모가 연예계 은퇴한 지 오래돼서 사람들이랑 엮이는 거 싫어하거든. 그래서 어제 너 만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늘 집에 가면서 부탁을 하더라고.”

    이재원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이재원을 강우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머지 기억의 파편이 맞춰질 듯하다 흩어지고는 했다. 강우가 안심하라는 듯 씩 웃었다.

    “걱정 마요. 저 입 무거운 놈이니까.”

    “그래,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이재원이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강우가 이재원이 먹은 그릇을 세척대로 옮겼다.

    “그나저나 혼자 자취하는데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아요?”

    “어? 뭐···. 그냥.”

    “부럽네요. 집에 돈 많은가 봐요?”

    강우의 등을 바라보는 이재원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응, 부족한 정도는 아닌데···.”

    이윽고 정리를 마친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씩 웃었다.

    “이제 속 좀 어때요?”

    “한결 낫네. 고맙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부터는 무리해서 술 마시지 말아요. 나 없을 때 인사불성 되면 구해줄 사람도 없으니까.”

    “너 있을 때만 마셔야지.”

    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듣던 중 거북한 소리네요.”

    “하하.”

    이재원이 진심으로 웃었다. 어느새 걱정과 수심이 사라진 이재원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집 구경할래?”

    “그래요. 얼마나 잘사는지 좀 봐요.”

    이재원이 픽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가 집안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이윽고 이재원이 다시 식탁에 앉으며 강우에게 손짓했다.

    “이리 앉아. 온 김에 오늘부터 과외 시작하자.”

    “오늘요? 여기서요?”

    “응, 보통은 과외 선생이 학생 집으로 가지만, 너는 공짜과외니까 네가 우리 집으로 와야지.”

    “이거 나 식모로 부려먹으려는 속셈 같은데?”

    “들켰냐?”

    강우가 소파에 둔 가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참고서를 잔뜩 꺼냈다. 이재원이 질색하는 시늉을 했다.

    “와···. 참고서에서 해방된 게 얼마라고 또 보니까 어제 먹은 술이 넘어온다.”

    “거참! 수험생 앞에 두고 못 하는 말이 없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 무슨 참고서로 공부하나 좀 보자.”

    “여기요.”

    강우가 가방에서 참고서를 잔뜩 꺼냈다. 보통이라면 한 브랜드의 참고서를 사는 게 일반적이었다. 수능 도입 초기인 이 시기에는 브랜드별로 특화된 영역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우의 참고서는 여러 출판사의 것으로 뒤섞여있었다.

    “어디 보자. 이렇게 참고서를 뒤죽박죽으로 공부하면 힘들지 않냐?”

    “어쩔 수 없어요. 다 얻은 것들이라.”

    수능용 참고서의 가격은 정말이지 비쌌다. 강우 가족의 형편상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은 모두 학교에서 얻은 것들이었다.

    “아···. 그래···.”

    이재원이 미안한듯한 표정이 되었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괜찮아요. 누구나 힘든 시기는 있으니까요. 저는 장래가 밝다고 생각해서 멀쩡합니다.”

    “......”

    이재원이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진짜 네 나이 같지가 않아. 나보다 더 어른 같아.”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럽니다.”

    “하···.”

    강우의 당당한 답에 이재원이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다시 참고서를 힐끗 바라보았다.

    “나도 너처럼 당당해지고 싶은데.”

    이재원의 목소리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이윽고 이재원이 참고서 몇 개를 골라냈다.

    “이 출판사 거는 보지 마.”

    강우가 힐끗 참고서를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특정 출판사의 참고서였다.

    “왜요?”

    “대진 그룹. 여기 참고서는 내용이 진짜 엉망이거든.”

    이재원의 얼굴에는 은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순간, 강우의 머리가 깨질 듯 아파져 왔다. 그리고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강우의 얼굴이 충격으로 멍해졌다.

    ‘이재원이 아니라 김재원이었어. 그래서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았던 거야.’

    머릿속으로 기억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여배우 김세아 그리고 대진 그룹과 이재원. 이 세 가지 요인이 합쳐져 미래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대기업 회장의 사생아 스캔들. 재벌가의 버려진 탕아이자 자살로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재벌 2세.’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이재원이자 미래의 김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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