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네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니
부우웅.
버스가 지나가고 강우 아버지와 강우의 모습이 나타났다. 강우 아버지의 손에는 과일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강우 아버지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가자.”
“네.”
두 부자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좁은 시장 골목을 지나치자 주공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나라에서 유공자에게 제공하는 임대아파트로 강우의 할아버지는 이곳에 살고 계셨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복도식으로 만들어진 아파트의 모습이 드러났다. 강우 아버지와 강우가 엘리베이터의 왼쪽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할아버지가 머물고 계시는 호수 앞에 멈춰선 강우 아버지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제가 벨 누를까요?”
강우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딩동.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카랑카랑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강우 아버지가 움찔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접니다 정식이.”
“정식이?”
예상과는 다른 반가운 목소리에 강우 아버지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윽고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아파트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건장한 체구를 가진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우도 왔구나?”
장손을 발견한 강우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었다. 평소 무뚝뚝하고 엄한 할아버지였지만, 유독 강우에게는 약하셨다.
그리고 그 순간.
‘윽···.’
강우의 인상이 찌푸려지며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강우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본의 한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셨다. 그러던 중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강제 차출돼 만주로 향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속한 소대가 정찰을 나갔고 할아버지는 소대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인 몇 명과 함께 일본인들을 죽이고 곧장 상해로 향하셨지.’
강우의 할아버지는 그 당시에도 매우 큰 체격을 가진 남성이었다. 만석 집안으로 대대로 잘 먹고 자랐으니 후손들이 다 덩치도 크고 힘도 강할 수밖에 없었다.
‘탈출한 조선인 중 할아버지만이 상해의 임시정부에 가담하셨다고 했어.’
강우의 할아버지는 그 당시로써는 상당한 지식인이었다. 임시정부에 투신하던 당시 영어는 물론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했다고 했었다.
‘우리 집안의 사람들이 언어에 재능이 있는 것도 다 유전적인 거지.’
그렇게 임시정부에 투신한 할아버지는 상해와 조선을 오가는 밀정을 하셨다고 했다. 소금 장수로 위장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지령을 전하고 독립자금을 전해 받아 상해로 돌아오고는 했다.
‘일본 순사를 만나면 일본인 행세를 중국에서는 중국인 행세를 하며 유유자적 빠져 다니셨다고 들었지.’
죽을뻔한 위기도 수없이 넘기셨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손에 죽은 일본 순사와 중국 군인들의 숫자도 셀 수도 없다고 했다.
‘자신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 후손들에게 해가 될까 걱정된다고 하셨을 정도니까···.’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던 강우를 강우 아버지가 깨웠다.
“아들.”
“아!”
강우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황급히 신발을 벗고 할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 하나와 화장실 하나 그리고 작은 거실이 달린 임대주택이 할아버지의 거처였다.
“이리 앉아.”
강우 할아버지가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한쪽에 앉았다. 강우 아버지와 강우가 맞은편으로 앉았다. 삼대가 모이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혼자 지내신 지도 한참이나 됐는데···.’
강우가 할아버지의 집안을 스윽 훑었다. 옷을 수납하는 가구 하나 그리고 거실에 놓인 작은 텔레비전. 그 앞으로는 작은 상이 놓여있었는데 그 위쪽에 있는 재떨이에는 담배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강우는 할아버지의 방안에서 진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때, 강우 아버지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세요?”
“병원에 주기적으로 나가서 괜찮다.”
강우의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하셨다. 밀정의 임무를 하다 붙잡혀 고문을 당하신 후유증이었다. 그 당시 할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독립운동가 여럿이 목숨을 던졌다고 했었다. 강우 할아버지는 그 후유증으로 밀정을 그만두시고 광복군 제2 징모처에서 장교로 생활을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걸 증명하는 기록이 됐지.’
아마 밀정으로만 남으셨다면, 광복 후 그 공로를 인정받기 힘드셨을 것이다. 강우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얼굴 가득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래, 우리 장손. 못 본 새 많이 컸구나.”
“네, 할아버지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아니다. 내가 오히려 미안하지.”
강우 할아버지가 품을 더듬어 담배를 꺼냈다. 할아버지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자 강우가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팔각형의 성냥갑을 발견한 강우가 빠르게 불을 붙였다.
치이익. 화르륵.
매캐한 유황 냄새와 함께 불이 타올랐다. 강우가 불을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의 담배에 가져다 댔다.
“고맙다.”
강우의 할아버지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더니 크게 내뱉으셨다. 강우가 빠르게 일어나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그사이 강우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
“새로 직장을 잡았습니다.”
강우 할아버지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는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이제 마음잡고 직장생활을 해야지.”
“......”
강우 아버지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강우 할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안다. 네가 왜 사업에 집착하는지. 하지만 정식아.”
“네, 아버지.”
“다 지나간 일이다. 너는 네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니.”
“아버지, 저는···.
강우 할아버지가 강우 아버지의 말을 잘랐다.
“사업으로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네 마음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정식아 먼저 가족을 돌봐야 한다.”
“.....”
강우 할아버지의 말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있었다. 강우는 그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역시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일념으로 사업을 하셨어. 그렇게 미친 듯이 사업에 매달리시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는 이미 가정이 엉망인 상태였고.’
그 결과 강우의 할아버지는 자식들과 멀어졌다. 아니 죄책감에 스스로 거리를 두셨다는 게 맞았다. 시간이 흐르고 그 틈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졌다.
“내 말 명심하거라. 이 아비 같은 실수는 하면 안 돼. 알겠지?”
“네···. 아버지.”
고개를 떨구는 강우 아버지의 얼굴에도 어느덧 할아버지를 이해하는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이해 못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가장이 된 지금에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강우가 다시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이게 아버지가 사업에 집착하시는 이유였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과일 바구니를 주방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강우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는 것들을 골라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할아버지, 좀 드세요.”
“그래, 다 같이 먹자꾸나.”
삼대가 둘러앉아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강우가 힐끗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살폈다. 너무나 닮은 두 사람의 외모와는 달리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강우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강우는 내심 의대를 목표로 잡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강우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번다. 가족을 행복하게 한다. 이 두 가지 절대적인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식을 바꿔볼 생각이었다. 강우는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바닥부터 일어나 성공하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 하셨지.’
강우의 남은 고등학교 생활의 확실한 목표가 세워졌다.
‘서울대 경영학과. 꼭 그곳에 입학하겠어.’
강우의 두 번째 방향이 확실히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 * *
높게 쌓인 자료집에 다가간 강우가 몇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자료집을 펼치자 온통 영어로 적힌 자료들이었다.
사라락. 사라락.
자료에는 온갖 어려운 영어가 가득했다. 하지만 강우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술술 읽히는 영어가 강우 자신도 놀라울 정도였다. 그전에도 영어를 제법 하는 강우였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꿈을 꾸며 기억 중 일부를 흡수한 걸까? 그래서 영어 능력이 좋아진 걸까?’
여태껏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떠올려 보았을 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렴 어떻겠는가? 강우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일단 일부터 마무리하자.’
그렇게 한참 동안 강우가 자료를 모으고 수정하고 기록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구실의 문이 열리며 이재원이 들어섰다. 멋지게 차려입은 옷의 곳곳에 흰색의 눈이 묻어있었다.
“으아~ 연말에 연구실에 틀어박혀 일이나 하고 있다니. 너도 참.”
“그러는 형은요?”
강우의 날카로운 반격에 이재원이 살짝 비틀거리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이내 씨익 웃었다.
“나야, 만나 달라는 여성분들이 줄을 섰지만, 우리 동생님의 외로움을 위로하기 위해 다 거절하고 오셨지.”
“아~ 그러셨어요?”
실없는 이재원의 농담에 강우가 픽 웃었다. 이재원이 어깨에 묻은 눈을 툭툭 털더니 강우의 옆에 앉았다.
“어디 얼마나 하셨나 볼까?”
이재원이 강우가 정리해 놓은 자료집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자료집이 넘어갈 때마다 이재원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뒤죽박죽이던 자료가 너무나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재원이 감탄성을 뱉어냈다.
“너 같은 고등학생이 존재한다는 거 자체가 충격이다.”
“가끔 그런 존재가 태어나기도 하죠.”
넉살 좋은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픽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자료집을 내려놓았다.
“혼자서 수고했다. 고생했으니까 내가 밥이라도 살게.”
“밥이요?”
밥이라는 단어를 듣자 배가 고파져 오는 강우였다. 더군다나 오늘 처음으로 밥을 사준다는 이재원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강우가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대충 밥을 먹고 빨리 가면 전철 시간에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맛있는 거 사주나요?”
“기대해라.”
강우와 이재원이 연구실의 밖으로 나왔다. 이재원이 걷는 방향에 강우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설마···.’
이윽고 서울대 학생 식당의 입구에 도착한 강우가 한숨을 쉬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서울대생들을 공부만 하느라 전부 미각을 잃었어요?”
이재원이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왜? 우리 학교 학식이 얼마나 싸고 맛있는데. 그리고 너 이거 나중에는 먹고 싶어도 못 먹는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에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차라리 나가서 라면에 김밥을 먹어요.”
“시간 아까워.”
이윽고 학식을 받아든 두 사람이 식당의 한곳에 자리 잡았다. 강우가 천천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좀 있으면 방학이지.”
“네, 다음 주요.”
“방학 동안 뭐 할 거야?”
“공부해야죠.”
강우의 대답에 이재원이 기특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열심히 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 갈 수 있을 거야.”
“서울에 있는 대학이 아니라 서울대를 올 건데요?”
이재원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반에서 28등이라며.”
“그건 이전까지의 성적이고요.”
“그러려면 방학 내내 공부만 해도 모자를 텐데?”
“선택과 집중 몰라요? 시간을 잘 쪼개서 쓰면 됩니다.”
강우의 넘치는 자신감에 이재원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했다.
“그래, 기적이 일어나서 너랑 동문이 되는 날을 기다려 볼게.”
“그 기적 일어날 겁니다. 두고 봐요.”
강우가 고개를 들어 이재원을 향해 씨익 웃었다. 강우가 다시 고개를 박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과외라도 해줄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재원의 제안에 강우가 화들짝 놀랐다.
“어? 정말이요?”
사실 머리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공부를 어찌할지 방향성을 짚어줄 사람은 필요했다. 남들은 과외에 학원에 난리인 것이 현재 교육의 현실이 아니던가.
“뭐 자주는 아니고 주말마다 가끔.”
“좋습니다. 말 무르기 없어요?”
“자식.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다.”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