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402)

도약을 위한 준비(3)

“아들.”

얼굴에 느껴지는 따듯한 손길에 강우가 두 눈을 부스스 떴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취기가 오른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 오셨어요?”

“그래, 곤히 자던데 더 잘래?”

“아니에요.”

강우가 몸을 일으켰다. 금방 들어오셨는지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셨다. 힐끗 시선을 돌리니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뭐 사 오셨어요?”

“어, 오늘 간 일식집 회가 맛있길래 조금 포장해 왔다.”

강우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강우는 특히 회를 좋아했다. 강우의 아버지는 그걸 잊지 않은 것이다. 봉지의 한쪽으로 슬쩍 고개를 내민 소주병은 덤이었다.

“잠시만요. 상 좀 펼게요.”

“그래, 아빠는 씻고 나오마.”

강우가 한쪽에 놓인 상을 꺼내 들었다.

딱. 딱.

상다리가 펴지는 소리에 강우 어머니가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강우가 바닥에 깔린 이불을 한쪽으로 밀어낸 후 그곳에 상을 펼쳤다.

바스락. 바스락.

행여 어머니와 동생이 깰까 강우가 조심스럽게 봉지를 벗겼다. 잘 포장된 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 위에 회를 놓고 딸려온 초고추장 팩을 깠다. 상위가 금세 풍성해졌다.

샤아아.

화장실에서 샤워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강우가 침을 꿀꺽 삼키며 아버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뿌연 수증기와 함께 아버지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아빠, 다 준비했어요.”

“그래.”

옷을 챙겨입고 앉은 아버지의 얼굴은 더욱 붉어져 있었다. 온기와 취기가 뒤섞인 탓이었다. 강우 아버지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준비해온 작은 플라스틱 컵을 꺼내 들었다. 강우가 재빨리 소주병의 윗부분을 비틀었다.

따라락.

“제가 따라 드릴게요.”

“그래라.”

아버지가 강우를 향해 컵을 내밀었다. 강우가 소주병을 기울였다.

쪼르륵.

잔이 차오르자 강우 아버지가 단숨에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는 한쪽에 놓인 과자를 뜯어서는 한 개 집어 드셨다.

“과자 말고 회 드세요.”

“아빠는 많이 먹었어.”

강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회를 먹기 시작했다. 빈 잔을 다시 채워드리려 했지만, 아버지가 슬쩍 웃으며 스스로 따르셨다.

“강우야.”

“네?”

“아빠, 내일부터 출근한다.”

강우의 얼굴에 스르륵 미소가 번져나갔다. 역시 예상대로 일이 잘 풀린 것이다.

“잘됐네요.”

“원주 아버지가 많이 도와주셨지.”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좋은 분이시죠.”

“그래, 참 좋으신 분이더구나. 오늘부터 형님 동생 하기로 했다.”

원주 아버지는 강우 아버지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다. 신원주는 늦둥이 외아들이었다.

“잘됐네요.”

“형님이, 얼마나 네 칭찬을 하던지 아빠가 참 기분이 좋았다.”

강우가 슬쩍 웃으며 회를 집어 먹었다. 아버지에게 듣는 칭찬이 아직은 어색했다. 강우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금세 화제를 돌렸다.

“나가기로 한 회사의 조건이 참 좋더구나. 월급도 많고 조만간 사택도 하나 제공해 준다더라.”

강우가 깜짝 놀라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새로 취직한 회사의 조건이 그렇게 좋을 줄 몰랐다.

“진짜요? 그럼 우리 이사하는 거예요?”

“그래, 지사 설립이 마무리되면 법인 명의로 사택이 하나 제공될 거야.”

“사택까지 주다니 대단하네요.”

“그래, 미국에서 한국에 올 사장과 부사장을 위해 한 곳씩 마련할 생각이었다더라. 그중 한 곳을 내가 쓰기로 했다.”

강우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강우 아버지가 다시 소주를 한잔 들이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기업은 아니라 그리 큰 사택은 아닐 거야.”

“그래도, 여관방보다는 좋겠죠.”

강우 아버지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슬쩍 물었다.

“그 회사가 한국에 들어오는 이유가 중국 시장 개척이죠?”

“그래, 중국에 식품을 수출하려고 하는 거 같은데···.”

강우 아버지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중국 시장 개척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쉽지 않겠네요.”

“쉽지는 않겠지. 그래서 일단 다른 나라와 무역 거리를 생각 중이다.”

강우 아버지가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많은 아들의 궁금증이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긴 대화이기도 했다. 강우 아버지는 이 자체도 만족스러웠다.

“아빠라면 잘 해내실 거예요.”

“그래야지.”

두 부자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강우 아버지가 취기를 빌려 강우에게 진심을 전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아버지의 한마디에 강우의 눈가가 붉어졌다. 강우 아버지라고 자식들을 고생시키고 싶었을 리는 없었다. 예전과 달라진 강우는 이제 그 점을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에요. 저희야 학교 다니고 할 거 다 했는데요. 아버지가 고생 많으셨죠.”

“.....”

강우 아버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동안 겪어온 가족의 고생을 강우 아버지라고 마음 편할 리가 있었겠는가. 다만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깨고 나오기란 누구나 힘든 것이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라고 하지만, 한 명의 인간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런 것을 서로 보완하고 보듬어 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존재일 것이다. 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아버지에게는 가족의 신뢰가 살아가는 힘이자 원동력이 될 것이다.

“저는 아빠를 믿어요. 무슨 일을 하시든지 말이에요.”

“....”

강우 아버지가 말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려 보이던 강우에게서 묵직한 느낌을 받았다. 강우가 아버지의 앞쪽으로 회를 한 점 놓아드렸다.

“아빠도 좀 드세요.”

강우 아버지가 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단숨에 입에 넣으셨다.

“사실 오늘 형님을 만나고 너희들한테 많이 미안했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해서 말이지.”

“.....”

이번에는 강우가 침묵했다.

“아빠의 욕심 때문에 아니 자존심 때문에 애꿎은 엄마랑 너희만 고생을 시켰다. 이제 아빠도 새 출발을 하니 크게 걱정하지 말거라.”

“네.”

강우 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그동안 쌓여있던 걱정이 그 숨을 타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

“네.”

강우가 다짐하듯 답했다. 강우 아버지의 말처럼 이제 강우에게 남은 몫은 공부였다.

‘방학 동안 미친 듯이 공부를 한다.’

물론, 원주 아버지를 도와드리는 일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강우가 아버지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아빠.”

“왜?”

“앞으로 가끔 제가 하는 말에 이번처럼 귀를 기울여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 아들의 말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야지.”

“정말 약속이에요?”

강우의 진지한 말투에 강우 아버지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알겠다.”

그 말을 끝으로 강우 아버지가 마지막 잔을 마셨다.

“너무 늦었네. 그만 자자.”

“네, 아빠.”

강우와 아버지가 조용히 상을 정리했다.

“아, 그리고 강우야.”

“네?”

“내일 할아버지 만나러 갈 건데 같이 갈래?”

강우 아버지의 말에 강우가 눈을 빛내며 답했다.

“네.”

“그래, 그럼 아르바이트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아빠가 데리러 가마.”

“네, 아빠.”

그 말을 끝으로 두 부자가 각자의 자리로 누웠다. 강우 어머니와 강용을 보호하듯 양쪽 끝에 누운 두 부자가 잠을 청했다.

* * *

“아들.”

아침을 깨우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강우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몸을 일으킨 강우가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빠는요?”

“벌써 나가셨어.”

“벌써요?”

“응, 오늘부터 바쁘시다네.”

강우 어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강우 역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어제 나갔던 일이 잘되셨데요.”

“그래, 다 장남 덕분이라고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강우가 멋쩍게 웃자 강우 어머니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 학교 가야지. 씻고 나와.”

“네.”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여관의 작은 창밖으로 온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밤새 눈이 많이 왔나 보다.

“강용아, 일어나봐. 눈 왔어.”

강용은 눈을 참 좋아했다. 눈이 오면 꼭 깨워달라고 하고는 했었다.

“누···. 눈?”

강용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강용이 여관방에 하나 있는 작은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창문을 열었다. 한겨울의 냉기가 밀려 들어오며 어린 강용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와~ 눈이다! 엄마 나랑 같이 눈사람 만들러 나가요.”

강용이 입을 열자 하얀 입김이 창밖으로 흩어져 나갔다. 눈이 쌓인 거리를 보는 강용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강용아, 감기 걸려. 창문 닫고 이리 와.”

강우의 어머니가 밥상에 밥을 준비하며 강용을 불렀다. 강용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엄마, 나 배 안 고파요. 빨리 눈사람 만들러 나가면 안 돼요?”

“그래, 밥을 먹고 형아 나가면 만들러 나가자.”

“앗싸~”

강용이 잔뜩 신이나 방을 뛰어다녔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강용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윽고 강우가 화장실로 들어가 빠르게 세면을 끝냈다. 밖으로 나온 강우가 교복을 챙겨입고는 가방을 멨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

어린 강용이 입안 가득 음식을 물고는 강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형아, 잘 갔다 와! 돈 벌어서 과자도 많이 사 와.”

“그래, 너도 눈사람 잘 만들어.”

강우가 여관의 현관으로 날 듯이 내려와 밖으로 나섰다. 눈이 잔뜩 쌓인 거리로 사람들이 펭귄 걸음을 걷고 있었다. 강우가 빠르게 움직여 목적지인 학교로 가기 위한 길에 올랐다.

부우웅.

부평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자 장미여관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네.’

불과 며칠 만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는 여관방 살이도 절망적이지 않았다. 강우 가족에게 생겨난 작은 희망 때문이었다. 학교로 향하는 강우의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 * *

학교가 끝나고 강우는 곧장 서울대로 향했다. 그리고는 먼저 원주 아버지의 방에 들렸다. 감사 인사를 꼭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리를 비워 계시지 않았다. 대신 이재원이 강우를 반겨 주었다.

“왔냐?”

“안녕하세요. 근데 교수님은요?”

“강의 들어가셨지.”

“네, 근데 형은 강의 안 들어가요?”

“들어가야지. 너 오면 연구실 문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실로 향했다. 강우가 그 뒤를 따라갔다. 이재원이 연구실의 보안장치를 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일단, 들어가서 좀 쉬고 있어. 강의 끝나고 금세 올 테니까.”

“네, 다녀오세요.”

연구실을 떠나려던 이재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멋들어진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점심은 먹고 왔냐?”

“아니요.”

강우가 배를 부여잡았다. 단축 수업인지라 밥을 거르고 온 차였다. 이재원이 품에서 배춧잎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럼, 이걸로 밥을 사 먹어.”

“어? 그래도 돼요?”

“응, 어차피 연구비에서 다 지원되는 거야.”

강우가 넙죽 손을 뻗어 지폐를 낚아챘다.

“넵,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강우가 돈을 받아 품에 넣었다.

“그럼 조금 이따가 보자.”

이재원이 손을 흔들고 강의를 위해 떠나갔다. 혼자 남은 강우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꼬르륵.

‘음···.’

강우가 배를 쓰다듬었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품속의 돈은 아낄 생각이었다. 강우가 정수기에서 물을 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타다닥. 타다닥.

강우가 인터넷을 시작했다. 일단 이런저런 정보를 조금 검색해볼 요량이었다.

‘정보 수집을 좀 시작하다 보면 또 떠오르는 기억이 있지 않을까?’

강우가 가방에서 한 권의 노트를 꺼내 들었다. 얼마 전 아버지의 회사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노트였다.

‘어디 보자. 오늘은 경제란에서.’

강우가 미국과 중국의 무역 상황에 대해 검색했다. 이런저런 회사 이름이 나열되면 강우가 그 회사와 관련된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는 떠오르는 기억이 있을까 집중해 보았다.

‘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네.’

강우가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껏 강우의 가족과 주변 인물에 대한 미래의 기억은 잘 떠오르는 편이었다. 강우 스스로가 겪은 일은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미래의 기억이 나와 직접성이 떨어질수록 정확하지 않고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거구나.’

회귀일까 예지몽일까? 강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회귀라고 하기에는 기억이 부족했고, 예지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했다. 강우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아무렴 어떠냐. 좋은 대학을 간다. 성공한다. 돈을 많이 번다.’

간결한 강우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가족이 잘살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이미 시작되었다. 바로 아버지의 성공이었다.

‘조만간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무역을 시작하시겠지.’

그리고 아버지는 중국 시장을 뚫기 위해 노력하실 것이다. 중국은 급격하게 시장을 개방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시장경제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시장개방이라는 파도에 올라타야 해.’

그리고 곧 한국에 거대한 위기가 닥쳐올 것이다. 그전에 강우 가족의 위험 요소를 최대한 줄이는 것 그것이 강우의 목표였다.

‘일차적으로 IMF를 넘긴다.’

그때까지 돈이 많이 필요했다. IMF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물 위로 올라온 대어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중에 좋은 것을 골라 담으려면 현금이 필요했다.

‘그것도 이왕이면 달러로.’

강우의 아버지는 미국에 본사를 둔 회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회사는 IMF에도 끄떡없는 곳이었다. 많은 한국의 회사들이 무너져 내릴 때도 강우가 고른 두 곳의 회사는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일단 IMF까지 무사히 넘기면···.’

그러고 나면 강우의 가족은 한 번 더 재력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는 강우가 더욱 주도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남들보다 정보력에서 앞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공의 비결 중 하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