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402)
  • 도약을 위한 준비(2)

    “아빠?”

    교수실에 강우의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잘 차려입은 강우의 아버지는 그림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강우 아비 박정식이라고 합니다.”

    “먼 길 오셨습니다. 신철민입니다.”

    두 분이 악수하는 모습에 강우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언제 연락을 아니 어떻게?’

    불과 며칠이었다. 그사이 두 분이 어찌 연락을 주고받은 지 의아했다. 원주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찾아오시는데 불편한 건 없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부족한 저를 도와주시는데 제가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죠.”

    두 아버지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원주 아버지가 강우 아버지의 반대편으로 앉았다. 강우가 잠시 허둥대더니 아버지의 옆으로 앉았다.

    “저와 아들 녀석이 너무 신세를 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야말로 훌륭한 가문을 돕게 되어 영광입니다.”

    강우 아버지를 바라보는 원주 아버지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저희 아버님이 하신 일입니다. 제가 감사를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시니 충분히 자격이 있으십니다.”

    원주 아버지는 강우 가족의 이력을 알고 더욱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신 것이다.

    ‘음.’

    강우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강우의 친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셨다. 즉 강우는 독립운동가의 친손자였다.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지.’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맞는 말도 아니었다. 경상도 모 지역의 만석꾼이었던 강우의 가문은 엄청난 독립자금을 지원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강우 가문의 가세를 기울게 한 것은 아니었다. 강우의 가문은 그 정도는 가뿐히 넘길 정도의 만석꾼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에서 한 번 더 가세가 기울었지.’

    북한군이 지역의 유지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죽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역사가 아니었던가. 그 시절 강우 할아버지의 큰형님 그리고 여동생 둘이 북한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강우 할아버지는 산속에 숨어 목숨을 부지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미군이 들어오자 정보부 소속으로 한국전에 참여하셨지.’

    강우의 친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얻은 인맥으로 한국전이 끝난 후 사업에 뛰어드셨다. 할아버지가 선택하신 사업은 광산업이었다. 강우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집안에 다이너마이트가 있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지프를 타고 집에 오실 때마다 나무상자에 돈을 가득 담아 오셨다고 할 정도였어.’

    큰돈을 벌어들인 강우의 친할아버지는 남해의 대륙붕에서 천연가스를 발굴하는 사업에 도전하셨다. 아버지가 말씀해주시기로는 미국의 대기업과 협약을 맺었을 정도로 크게 규모를 키우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대륙붕 개발은 실패했다.’

    결국, 남해 대륙붕의 조광권은 정부에 반납되었다. 미국의 대기업은 손을 떼고 사업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강우 할아버지의 사업은 무너졌다.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는 제법 부유하게 살았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강우는 아니었다. 늘 돈에 시달리고 고생하는 아버지의 모습만이 기억에 선명할 뿐이었다.

    ‘왕년에 잘나갔다는 말이 나한테 와닿을 리가 없었지.’

    하지만 지금 강우가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허울뿐인 명예가 아닌 진심으로 우러나는 존경심이 들었다. 문득, 할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할아버지는 잘 지내시려나.’

    강우의 할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셨다. 찾아뵌 지 한참이나 지났기는 했지만 말이다. 강우가 조만간 한번 찾아봬야겠다는 생각했다. 생각을 마친 강우가 아버지를 힐끗 보았다. 원주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셨다. 강우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기억 속에서 두 분은 아예 모르고 사셨는데 말이지···.’

    하지만 강우의 작은 행동 하나로 지금의 순간이 바뀐 것이다.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 사이 시간이 제법 흘러버렸다. 원주 아버지가 힐끗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다 돼가는군요. 일어나시죠.”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강우가 상념에서 깨어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원주 아버지가 강우를 향해 말했다.

    “나는 아버님이랑 오늘 GIC 본사에서 나온 관계자들을 만나러 가기로 했어. 강우 너는 여기서 기다리면 아르바이트 같이할 학생이 찾아올 거니까 기다렸다가 잠깐 설명을 듣고 집으로 가.”

    “아···. 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배웅했다. 원주 아버지가 먼저 교수실을 나갔다. 강우 아버지가 문을 나서기 전 슬쩍 고개를 돌려 강우를 바라보았다.

    “아들, 고맙다.”

    “네? 네···.”

    강우의 얼굴에 지진이 났다. 그사이 강우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지고 강우가 혼자 남았다.

    ‘고맙다고 하셨어.’

    간단한 말이지만, 들어본 적이 없던 말이었다. 강우의 아버지는 늘 무뚝뚝하고 칭찬에 인색한 분이셨으니까. 강우의 얼굴에 스르륵 미소가 떠올랐다.

    덜컥.

    그때, 교수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혼자 실실거리던 강우가 깜짝 놀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 저 사람은?’

    강우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강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에 남학생도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혹시 아르바이트하러 온다던 그 고등학생이에요?”

    “아···. 네.”

    “아까 잠깐 마주쳤었죠? 이재원이라고 합니다.”

    “아···. 박강우입니다.”

    나이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강우의 태도에 이재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연구가 진행 중인 곳으로 안내해줄게요.”

    이재원이 강우를 연구실로 데리고 갔다. 연구실에 도착하자 여러 대의 컴퓨터와 잔뜩 쌓인 서류들이 있었다. 이재원이 그중 한 대의 컴퓨터를 가리켰다.

    “강우 씨가 쓸 컴퓨터는 저거입니다.”

    “말 편하게 하세요. 저보다 형님 아니신가요?”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슬쩍 웃었다.

    “몇 학년?”

    “이제 2학년 됩니다.”

    굳이 한 살을 먼저 올리는 강우였다.

    “나는 이제 1학년이야.”

    “그럼 편하게 말하세요. 형.”

    “그럴까?”

    이재원이 한결 편해진 얼굴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강우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어려웠던 차였다.

    ‘신기하네. 이제 고1인데···. 꼭 우리 형을 보는 거 같은데.’

    이재원이 강우를 자세히 살폈다. 열일곱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커다란 덩치에 이목구비도 남자다웠다.

    “우리가 무슨 프로젝트를 하는지 알고 있지?”

    “네, 교수님이 미국의 중견기업들의 자료를 조사하신다고 들었어요.”

    “맞아, 정확히는 인터넷의 발달이 중견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거야.”

    이재원이 컴퓨터의 앞쪽으로 앉았다. 전원을 켜자 서울대 로고가 선명히 나타나더니 이내 부팅이 되었다. 인터넷에 따로 접속할 필요도 없었다.

    ‘속도도 가정용이랑은 차원이 다르고.’

    강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고 싶었다. 강우가 여러 대의 컴퓨터 중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제가 할 일이 뭐죠?”

    “잠깐만.”

    이재원이 한쪽에 있는 자료집을 가지고 왔다.

    “그동안 내가 좀 정리해놓기는 했는데, 혼자서는 영 벅차더라고.”

    강우가 자료집을 살피기 시작했다. 주로 미국에 있는 중견기업들에 대한 자료였다. 그리고 모두 영문으로 된 자료였다.

    “보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이재원이 자신만만해했다. 영어라면 자신이 있는 이재원이었다. 하지만 강우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네, 알겠어요.”

    이재원이 강우의 옆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우가 일을 어찌하나 볼 요량이었다.

    타다닥. 타다닥.

    강우가 인터넷을 통해 자료집에 나와 있는 회사들의 근황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마침 나도 궁금하던 건데 잘됐네.’

    강우가 능숙하게 인터넷을 다루자 이재원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던 이재원이 감탄을 뱉었다.

    “와우~ 너 인터넷 진짜 잘한다.”

    “키워드 검색이란 걸 잘 사용하면 돼요.”

    “키워드 검색?”

    강우가 시범을 보였다.

    “큰 카테고리에서 점점 세부적인 카테고리로 검색 범위를 좁혀가는 거죠. 이렇게요.”

    “아아. 알겠다.”

    이재원이 강우의 말을 이해하고는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자료집의 한곳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 정보가 잘못됐네요. 이 회사는 무역이 아니라 제조회사에요.”

    “어?”

    “여기도요. 이 회사는 폐업한 지 몇 년 됐네요.”

    강우가 연신 자료의 오류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원주 아버지에게 전달됐다면 큰일 날뻔했다.

    ‘원주 아버지가 고생깨나 하셨을 거야.’

    강우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원주 아버지에게 큰 도움을 받은 이상 일을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형, 이거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는데요?”

    “처···. 처음부터?”

    이재원이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강우야 지금 합류했지만, 이 프로젝트는 제법 진행된 상태였다.

    “네, 여기 조사된 자료가 다 엉망이에요.”

    강우가 자료집 몇 개를 툭툭 찍었다. 이재원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강우가 의아한 듯 물어보자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나 전에 이걸 담당하던 선배가 있었거든.”

    “아···.”

    “매일 프로젝트는 대충하고 밥을 먹으러 가자 어딜 놀러 가자 그러고 주말에는 또 얼마나 연락을 해대는지.”

    “그 선배가 여자였어요?”

    “아니, 남자.”

    강우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라고요?”

    “그래, 어찌나 귀찮게 굴던지.”

    이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선배라는 분은 왜 그만둔 건데요?”

    “군대 갔다.”

    “아···. 군대.”

    강우가 피식 웃었다. 대한민국 남성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우가 이재원에게 자료집을 내밀었다.

    “할 일이 많네요. 일단 그 선배분이 했던 자료부터 다시 다 검토해야 하니까. 형은 이것부터 봐주세요.”

    “어? 어어.”

    이재원이 강우가 내민 자료집을 받아들었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요.”

    “어, 알겠어.”

    자료집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던 이재원이 흠칫하며 멈춰 섰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무언가 이상했다. 어느새 강우의 페이스에 완전히 조종당하는 자신이었다. 이재원이 고개를 힐끗 돌려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나를 막 대하는 사람도 진짜 오랜만이네.’

    이재원이 씨익 웃었다. 남은 프로젝트 기간이 즐거울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늦은 시각 부평역에 도착한 강우는 곧장 버스를 타고 여관으로 향했다. 늦은 밤, 한산한 거리에 내린 강우가 걸음을 재촉했다. 아르바이트를 끝낸 첫날이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오늘도 늦었구나.”

    “아르바이트하고 오느라요.”

    “기특하구나.”

    이제는 너무나도 친근해진 여관주인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강우를 맞이해주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의 중간층에 정수기용 물통들과 업소용 캔음료박스가 잔뜩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 이것 좀 옮겨드릴까요?”

    “됐다. 내가 하마.”

    강우가 씨익 웃으며 정수기 통을 들었다.

    “창고에 놓으면 되죠?”

    “녀석···. 괜찮대도.”

    강우가 묵묵히 물통과 캔음료박스들을 옮겼다. 여관주인 할아버지가 카운터에서 나와 흐뭇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참 가정교육이 잘된 녀석이야.’

    문득 강우네 가족이 처음 여관에 들어서던 날을 떠올렸다. 얼굴 가득 냉기를 품은 강우의 부모에게서는 불안감과 좌절감이 엿보였었다. 하지만 강우는 달랐다. 어린 녀석이 어찌나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지, 범상치 않은 아이라 생각했었다.

    “다 옮겼어요. 올라가 볼게요.”

    “잠깐 기다려 보아라.”

    여관주인이 음료 상자에서 음료 캔을 몇 개 꺼내 강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가지고 올라가서 동생이랑 마셔.”

    “감사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여관주인 할아버지가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똑똑.

    문을 두들기자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관의 복도는 신기할 정도로 고요했다. 이윽고 문 너머에서 강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엄마 저예요.”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 어머니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전과는 달리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르바이트는?”

    “잘하고 왔어요.”

    강우가 안쪽으로 들어서자 어린 강용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강우가 물었다.

    “아빠는요?”

    “오늘 원주네 아버지하고 술 한잔하고 오신다더라.”

    “아 그래요?”

    강우가 씨익 웃었다. 아마 갔던 일이 잘됐나 보다.

    “밥 먹었어?”

    “네, 먹었어요.”

    강우 어머니가 강우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아들, 어때? 서울대 가본 소감이?”

    “서울대라고 뭐 다를 게 있나요. 다 똑같죠.”

    “우리 아들도 공부 열심히 하면 서울대 갈 수 있을 거야.”

    강우 어머니가 아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내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우가 말없이 씨익 웃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강우가 씻고 나왔다. 강우 어머니는 어느새 강용을 품에 안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강우가 자리에 누웠다. 힐끗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강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올겨울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려나.’

    순간,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별 시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 생각을 끝으로 고단했던 강우의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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