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402)
  • 친구

    따악.

    기다란 나무 막대가 하얀색 공을 강하게 밀어쳤다. 힘이 실린 하얀색 공이 커다란 당구대 위를 크게 돌더니 빨간 공 두 개에 연달아 부딪혔다.

    “예스!”

    신원주가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그리고는 강우를 바라보며 콧대를 높였다.

    “봤냐? 형님의 실력을?”

    “일 점.”

    강우가 나른한 표정으로 말하며 점수를 올렸다. 신원주가 세상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야, 너 정말 안 칠 거냐?”

    그때, 강우에게 김춘배가 말을 걸어왔다. 일 학년 때 잠시 스쳐 지나간 반 친구 중 하나였다.

    ‘나는 이과 이놈은 문과를 가서 자연스럽게 접점이 사라졌으니까.’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작은 공으로 하는 스포츠는 질색이라.”

    “그래? 기다리기만 하면 지루할 텐데.”

    말을 마친 김춘배가 교복의 윗주머니에서 작은 머리빗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당구장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캬···. 잘생겼어.”

    “.....”

    강우가 그런 김춘배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저럴 정도로 잘생긴 건 아니지만, 현실을 깨워줄 이유는 없었다.

    “그럼, 금세 끝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알겠어.”

    김춘배가 잔뜩 멋있는 척을 하며 당구대로 다가갔다. 실소를 흘린 강우가 주변을 쓰윽 돌아보았다. 당구장은 뿌연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하아···. 당구는 진짜 딱 질색인데.’

    문득 강우가 피시방을 떠올렸다.

    ‘이제 피시방이 활성화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지.’

    강우가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세상 진지한 친구의 모습에 픽 웃음이 나왔다.

    ‘자식.’

    따악. 따악.

    당구공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신원주와 김춘배의 희비가 교차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김춘배가 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우는 씨익 웃어주었다.

    “신경 쓰지 마라. 신문 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다.”

    강우의 옆쪽으로는 신문이 잔뜩 쌓여있었다. 강우가 다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주로 경제란과 기업에 관련된 기사를 읽었다. 신원주와 김춘배는 괴상한 놈 보듯 강우를 바라보았다.

    딸랑.

    그때, 당구장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들어섰다. 강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했다. 그리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왜 거기서 들어와?’

    강우의 표정에 신원주와 김춘배의 시선이 당구장의 입구로 향했다.

    “어?”

    신원주와 김춘배가 강우처럼 놀란 눈이 되었다. 열린 당구장의 문으로 박광웅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커다란 덩치의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교복이 각양각색인 것이 모두 다른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어? 박강우?”

    박광웅이 멈칫하더니 역시 놀란 눈이 되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덩치 중 한 명이 박광웅을 툭 쳤다.

    “박강우가 재냐? 네가 말한 놈?”

    “네, 형.”

    박광웅이 얼굴을 붉혔다. 강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형이라고?’

    박광웅을 툭툭 친 학생이 강우가 있는 당구대로 거침없이 걸어왔다. 신원주와 김춘배가 긴장한 표정으로 옆으로 물러섰다. 강우가 쓰윽 몸을 일으켰다. 거구의 강우가 몸을 일으키자 걸어오던 덩치가 살짝 움찔했다.

    “네가 박강우냐?”

    “그런데?”

    상대방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런데? 야 내가 너보다 형이야. 어디서 반말을 찍 뱉어?”

    “네가 내 선배냐? 그것도 아닌데 무슨 나이를 들먹여.”

    강우의 당당한 대응에 상대방이 실소를 뱉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는데.”

    강우의 반응에 박광웅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시비를 걸고 있는 학생의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하···. 지금 나랑 장난하냐?”

    그때, 이상한 기류를 느낀 당구장의 사장님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강우에게 시비를 건 덩치의 이름을 불렀다.

    “준태!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아니에요.”

    당구장 사장님의 말에 덩치가 깜짝 놀라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덩치의 이름을 알게 된 강우가 속으로 살짝 놀라움을 느꼈다.

    ‘이준태?’

    강우의 학교 근방에 있는 학교를 휘어잡고 있는 일진이었다. 나이는 스무 살이었지만, 고3이었다. 사고를 치고 정학을 받아 한 학년을 유급한 것이다.

    ‘양아치들의 대장이라더니.’

    과연 듣던 대로 덩치도 범상치 않았다. 예전이었으면 무서울 만도 했지만, 지금의 강우에게는 그저 화가 많은 학생일 뿐이었다.

    ‘귀찮게시리.’

    사장님이 강우를 은근한 눈빛으로 보며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처음 봅니다.”

    강우가 담담한 대답에 사장님의 미간이 좁혀졌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준태가 또 행패를 부린다 생각했다. 당구장의 사장님이 이준태를 보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준태 너, 또 여기서 사고 치면 경찰 부른다.”

    “네, 사장님.”

    이준태가 살짝 놀라며 물러났다. 그래도 경찰은 무서운가 보다.

    “너, 나한테 찍혔어. 앞으로 조심해라.”

    이준태가 손을 들어 강우를 가리키더니 목을 쓰윽 그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뭐냐? 살인예고냐?’

    강우가 픽하고 웃어버렸다. 그러자 이준태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쓰윽 시선을 돌리자 박광웅이 잔뜩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쟤는 또 왜 저런 표정인데?’

    김춘배가 강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야, 너 진짜 무슨 깡인데?”

    “왜??”

    “너 저 형 누군지 몰라서 그런 거야?”

    “이준태라며.”

    김춘배가 혀를 내둘렀다. 이준태를 앞에 두고 저리 태연하다니.

    “진짜 사람이 변해도 이리 변하냐.”

    “뭘 변해. 그대로야.”

    긴장감 속에서 당구가 이어졌다. 당구대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이준태가 강우를 계속 노려보았다.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신원주와 김춘배가 집중하지 못하고 불안해했다.

    ‘하아.’

    강우가 게임의 끝을 알리는 버튼을 눌렀다.

    “그만 가자.”

    강우의 말에 신원주와 김춘배가 빠르게 계산대로 가서 게임비를 냈다. 이윽고 강우와 일행이 당구장의 밖으로 나왔다.

    “아. 앞으로 이 당구장은 못 오겠네.”

    당구장 밖으로 나오자 신원주가 한숨을 쉬었다. 김춘배가 당구장을 바라보며 짜증을 냈다.

    “아니, 운동 좀 배웠다고 유세는.”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놀았다던 김춘배가 이준태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신원주와 김춘배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리고는 박광웅과 일진들을 욕했다. 그런 두 친구의 모습에 강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신원주를 향해 말했다.

    “오늘은 그냥 집에나 가자.”

    “어? 벌써?”

    김춘배가 아쉬운 듯 강우를 잡았다. 당구장에 이어 노래방까지 가기로 한 오늘 계획이 아니었던가.

    “갈 거냐?”

    김춘배가 신원주를 향해 물었다. 신원주가 강우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노래방은 다음에 가자.”

    김춘배가 아쉬운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 보자.”

    강우와 신원주가 김춘배에게 손을 들어 인사한 후 신원주의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 * *

    신원주의 집은 당구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목동 아파트 단지였다. 길을 안내하듯 살짝 앞쪽에 걷던 신원주가 잔뜩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 춘배가 저녁에 여자애들도 부른다고 했는데. 이 형님이 너 때문에 진짜 숭고한 희생을 했다.”

    “여자는 무슨.”

    강우의 해탈한듯한 말투에 신원주는 어이가 없었다.

    “관심 없는 척하지 마라.”

    “여자는 무슨. 공부해야지.”

    강우가 걸음을 옮겼다. 신원주가 재수 없는 놈이라며 중얼거리며 뒤를 따랐다. 단지 안으로 들어서자 온갖 고급 승용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잘 정돈된 단지 안의 모습도 그림 같았다. 퇴근 시간 무렵인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여유가 가득했다. 순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도 빨리 돈 벌어서 이런 데로 이사를 와야지.’

    강우가 속으로 다짐을 하는 사이 앞장을 서던 신원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입 좀 다물어라. 파리 들어간다.”

    “코가 막혀서 입으로 숨 쉬는 거다.”

    강우의 궁색한 변명에 신원주가 픽하고 웃었다. 이윽고 신원주의 집 문 앞에 두 사람이 도착했다.

    딩동.

    신원주가 벨을 눌렀다.

    덜컹.

    문의 잠금장치가 열리고 신원주의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경을 쓰고 있는 단아한 분위기의 중년여성이었다.

    “아들, 집 열쇠 없어? 왜 벨을 누르고 그래.”

    “아···. 친구가 와서요.”

    “친구?”

    원주 어머니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문이 활짝 열리고 원주 어머니가 강우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 우리 원주 친구구나?”

    “네, 안녕하세요. 원주 친구 박강우입니다.”

    강우가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원주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인사만 잘해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헛말은 아니었다.

    “그래, 일단 안으로 들어오렴.”

    신원주가 신발을 벗더니 집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와.”

    “어.”

    강우가 신원주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훈훈한 온기가 강우의 온몸을 감쌌다. 널찍한 거실에는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놓여있었다.

    “여기 좀 앉아있어.”

    “엄마, 우리 그냥 방에 들어가면.”

    원주 어머니가 아들의 말을 딱 자르며 노려보았다.

    “아들?”

    “야, 여기 앉아.”

    신원주가 강우에게 소파 한쪽을 가리켰다. 강우가 소파에 앉자 원주 어머니가 다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봐. 내가 과일이라도 좀 잘라올게.”

    원주 어머니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강우가 다시 집안을 둘러보았다. 잘 꾸며진 집 안을 보자 문득 여관방에 있을 가족이 떠올랐다.

    ‘뭐들 하고 있으려나.’

    가족을 떠오르자 아차 싶었다. 신원주의 집으로 놀러 온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강우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크게 걱정할 강우의 어머니와 강용이었다.

    ‘잠깐···. 여관 전화번호가···.’

    기억을 더듬자 강우의 머릿속으로 장미여관의 간판이 선명히 떠올랐다.

    “원주야, 전화 좀 쓰자.”

    “어, 잠깐.”

    신원주가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강우가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이 몇 번 울렸다.

    딸칵.

    -장미여관입니다.-

    장미여관의 주인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저 강우예요. 201호.”

    -강우구나. 그래 무슨 일로 전화를 했어?-

    “방에 전화 좀 연결해 줄 수 있으세요?”

    -기다려봐라. 내가 방으로 연결해 줄 테니.-

    “감사합니다.”

    뚜르르.

    신호가 가자마자 누군가가 덜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린 강용의 앳된 목소리였다. 강우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져나갔다.

    “형아야.”

    -형아, 집에 왜 안 와!-

    대뜸 언제 올 거냐고 묻는 강용이었다.

    “엄마는?”

    -엄마, 화장실.-

    “그럼, 엄마한테 형아 오늘 친구 집에 놀러 와서 좀 늦는다고. 아니 하룻밤 자고 갈 수도 있다고 전해드려.”

    -자고 온다고?-

    강용의 목소리가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강우가 강용을 달래듯 말했다.

    “대신 내일은 일찍 가서 놀아줄게.”

    -좋아! 약속했다?-

    강용의 목소리가 다시금 활력을 찾았다. 강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엄마한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강우가 신원주를 힐끗 바라보았다. 신원주가 전화기의 본체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받아 적어봐.”

    수화기 너머로 한참이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아니다. 내가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

    -응, 알았어.-

    툭.

    전화를 끊자 신원주가 강용에 대해 호기심을 드러냈다.

    “동생이냐?”

    “어. 남동생 나랑 9살 차이가 나.”

    “완전 아기네 아기.”

    “그렇지, 내가 업어 키웠다.”

    신원주가 부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신원주는 외동아들이었다.

    “오래 기다렸지?”

    그때, 원주 어머니가 과일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쟁반 가득한 과일의 양에 강우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 일단 밥 먹기 전에 과일 조금 먹어.”

    강우가 포크를 들며 원주 어머니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말을 마친 강우가 과일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신원주도 질세라 과일을 마구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원주 어머니가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원주가 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게 처음이라 아줌마가 너무 좋네.”

    “처음이요?”

    강우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신원주가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엄마.”

    “우리 아들이 외동이라 친구가 없어서 아줌마가 늘 고민이었거든.”

    그 순간, 또다시 능력이 발현되며 머릿속으로 기억이 마구 밀려들었다.

    ‘윽.’

    모두 신원주와 관련된 기억들이었다. 이윽고 강우가 놀란 눈으로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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