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그리고 가상현실[게임&판타지] [25 회] 2003-05-12 조회/추천 : 11268 / 22 글자 크기 8 9 10 11 12
[ 외전] 예진이 신비지인이 되기 까지..
[ 게임]
' 벌레'는 살아 있었다. 붉은 무복 여기저기가 그을리고 검 또한 반토막난 낭패한 몰골
이었지만 분명히 살아있었다. 아마 힘이 없던 나였다면 그저 절망하며 하늘을 저주할
뿐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나는 믿을 수 없게도 침착했고 저 그랜드 소드 마스
터라는 존재를 '벌레'로 생각할 뿐이었다. 왠지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뿐.
벌레는 반토막난 검을 던져버렸다. 검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그랜드 스킬 중에는 '마나소드' 또는 '무형검'이라 불리는 스킬이 존재한다. 검이 필요
없는 단계. 마나를 이용해 검을 만들어내는 경지가 바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 벌레는
기합과 함께 기를 방출했다.
" 흐아압!"
곧 벌레의 오른손에 순수하게 마나로 이루어진 '검(劍)'이 생성되었다. 시리도록 푸른
빛을 발하는 마나의 검. 가르지 못할 것이 없다고 알려진 검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자신할 수 있다. 저 검은 절대로 나를 상처입히지 못할 것이라고.
" 죽여주마! 화염신검(火炎神劍) 오의(奧議) 화신강림(火神降臨)!"
벌레의 무형검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8클래스 헬 파이어만큼이나 뜨겁게 느껴지
는 그 화염은 곧 하늘을 뒤덮는 화염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형체는 없었지만 하늘을
뒤덮는 그 위용은 가히 '화신(火神)'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 그 정도에 내가 당하리라 생각하는 거야?"
차갑게 식어버린 감정. 지금 이질감이 느껴지는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
다. 신을..없애버리라고.
나는 슬쩍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의지'를 담아 마음 속으로 읊조렸다.
의검(意劍) 섬광(閃光)
검은 없었지만 실패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믿었다.
나의 의지가 곧 검이라고.
파아아아앗..
나를 향해 쇄도하는 붉은 화염. 아마 거대한 힘을 내포한 강기(剛氣) 또한 스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좌에서 우로 휘두른 나의 손을 뒤따르는 빛의 궤적. 이것은 저
' 화신'을 충분히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파아앗!!
작은 빛은 곧 세상을 뒤덮는 소멸의 광선이 되어 '벌레'를 향해 뻗어나갔다. '화신'은
잠시간의 저항도 하지 못한채 소멸해 버렸다.
" 크아아악!"
벌레의 비명 소리.
한 차례 밝은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단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회색으로 물든채 땅에 엎어져 있는 벌레 하나가.
" 두고 보자.."
" 꺼져. 벌레."
" 으드득.."
반항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일까? 벌레는 그저 한 번 이를 간 뒤에 리스타트장으로 재
시작 버튼을 눌렀는지 캐릭터는 점점 희미해지더니 결국 사라져 버렸다.
[ 레벨이 252로 올랐습니다.]
[ 의검(意劍) 섬광(閃光)을 12성 대성하였습니다.]
후우..이걸로 확실해졌다.
의검(意劍)
말 그대로 의(意)가 곧 검(劍)인 검법이었다. 그동안 써오던 의검에는 뚜렷한 의지가
담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의검을 사용함에 있어 완벽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것.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하면 될
것이다. 기술에 의를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최강의 힘을 발휘해 줄 테니까.
" 마스터."
시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나는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 그런 존재를 나의 힘으
로 지켰다는 것에 나는 커다란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 시아. 강해졌구나.."
" 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의 레벨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녀가 나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증거.
하지만 상관없다. 그녀가 강하다면 위험에 빠질 확률은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이니까.
" 가자."
" 예."
나는..그렇게 의검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