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특별편)
“헉!”
믿을 수 없다!
하루를 알리는 운기조식이 끝난 뒤의 소감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서 볼을 꼬집었다.
뺨이 화끈해지는 고통. 현실이 분명하다.
“얼른 이 소식을 사부님께 알려야 해!”
고개를 좌우로 거세게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머리 위에 쌓인 매화의 꽃잎이 바닥에 떨어졌다.
“헥, 헤엑!”
숨이 가빠 온다. 심장이 죄여 왔다.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었지만, 희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달렸다.
그러나 한껏 부풀었던 감정은 얼마가지 않아 허탈함으로 줄어들었다.
“소, 소령 교두님?”
“……”
화산파의 사대제자를 맞이한 건, 사부가 아닌 두 눈을 천으로 가린 묘령의 여인이었다.
“사부님은 어디 가시고 교두님이 여기에 왜……?”
“손님.”
“아, 손님이 찾아오셔서 자리를 비웠다고요?”
끄덕.
“과연.”
불경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사부는 무인으로서 그리 유능하지 않다.
툭 까놓고 말하면 무능하다.
아는 것이라곤 매화심법과 매화검법뿐.
누구나 알고 있는 기초 중의 기초뿐이었다.
사부는 미안하다면서 대신 무공을 가르쳐 줄 사람을 붙여 주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화산파의 사람은 아니고 언뜻 듣기로는 암살 단체의 수장이라고 한다.
왜 여기서 지내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말수도 적고 표정에도 변화가 없어 무서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 표현에 서툴러서 그런 것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녀는 기초적인 체력 단련부터 시작해 오감의 단련이나 보법, 기척을 지우는 법 등을 가르쳐 줬다.
“오늘의 수련, 내가 대신.”
“오늘은 뭐죠? 보법인가요? 아니면……”
제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소령이 마치 원래부터 옆에 있던 것처럼 나타나더니, 목덜미를 낚아챘다.
“증진 체조.”
“네?”
제자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안 돼요!”
“오늘, 늦었어. 괘씸해. 벌칙이야.”
“자, 잠깐만요! 교두님! 사정이 있었어요!”
증진 체조.
이름만 들으면 몸을 푸는 운동 같지만 그 실상은 다르다.
그 어떠한 훈련보다도 악랄하다.
몸 안의 내공을 전부 소진한 뒤, 맨손으로 절벽을 등반한다.
악마나 구상할 법한 훈련 방식이었다.
“안 돼.”
“사정이 있었다니까요? 사부님께 전해야 할 말이 있어요!”
“반 시진이나 늦었으니까, 강도를 높일 거야. 오감의 발달도 함께하도록 해.”
교두는 수련생의 말을 무시한 채, 눈을 가린 검은 천을 풀어 그에게 씌워 주었다.
“으아악!”
두 시진 뒤.
“사조께서는 악귀셨을 것이 분명해.”
구름 낀 가파른 절벽을 오르며 든 생각이었다.
입에선 욕이 감돌았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다.
증진 체조의 창안자가 스승의 스승, 사조였던 탓이다.
사조는 물론이요 고인에 대한 모독도 될 수 있다는 불손한 생각에 머리를 털어 지워 냈다.
“절벽은 싫어, 절벽은 그만, 잘못했어요……”
정상에 오른 제자는 무릎을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눈은 죽은 동태눈 같았다.
“괜찮니?”
“살려 주세…… 앗, 사고(師姑)!”
제자는 여인의 목소리에 놀랐다가 안도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눈부신 미모.
구름이 낀 탓인지 어딘가 모르게 신비로움이 가득했다.
“얼굴이 엉망진창이네.”
제자에게는 사부의 사매, 즉 사고되는 사람인 낙소월은 ‘쿡’ 하고 엷게 웃었다.
“제자를 절벽에 홀로 내버려 두다니, 사형도 참.”
슥슥.
낙소월이 얼굴에 묻은 흙을 소매로 닦아 주었다.
‘우, 우와.’
쿵쾅쿵쾅.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정말로 선녀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미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 사고……”
“응?”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이를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몇 살로 보이는데?”
“삼십 대 중후반……?”
“후후. 그래?”
낙소월은 제자의 궁금증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사고는 사질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자, 그럼 잡담은 그만두고 슬슬 수련을 시작해야지?”
“수련이요?”
제자가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전 두 시진을 걸쳐 절벽을 등반했다.
그런데 슬슬 수련을 시작해야지, 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순간 그녀가 선녀가 아니라 지옥의 악마로 보였다.
낙안지옥의 교두들도 혀를 내두를 가혹함이었다.
“저, 사고.”
“안 돼.”
“사부께서 보이시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나에게는 안 통해요.”
낙소월이 어림없다는 듯이 웃었다.
“손님이 찾아오셨거든요. 아름다운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아름다운 사람?”
낙소월의 입가에 웃음이 싹 가셨다.
“네. 교두님이 그랬어요.”
거짓말은 아니다. 손님이 찾아오기는 했다.
뒷말은 추측이지만 말이다.
“……”
“……”
“사질.”
“네, 사고.”
“정말로 미안한데,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응, 나중에 봐.”
휘리릭!
낙소월이 손을 흔들곤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우와……”
제자는 낙소월이 경공을 펼치는 건 둘째 치고, 절벽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떠나는 걸 보며 감탄했다.
‘사고는 언제 봐도 대단하시네. 제자인 내가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왜 사고같이 굉장한 사람이 사부님처럼 무능한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제자에게 사부는 변변치 않은 사람이었다.
물론, 아쉬움을 느낄망정 불만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사부가 거둬주지 않았더라면 굶어 죽었으리라.
생명의 빚을 진만큼 감사와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였다.
“사고의 말에 의하면 사부님은 위인이라고 하시지만, 솔직히 믿을 수 없단 말이야……”
제자에게 사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가르침이라고는 무림에 대한 기초상식, 사대제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매화심법과 매화검법뿐이었다.
무인인데도 취미는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독서.
특이 사항이라고는 머리가 새하얀 것뿐이었다.
사부의 말에 의하면 젊었을 적에 고생 좀 해서 이십 대 무렵부터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고 한다.
가끔, 인생에 대해 물어봐도 ‘때가 되면 알게 된다.’라면서 대답해 주시지 않았다.
“아, 집이다.”
평소라면 길게 느껴질 거리였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오다 보니 짧게 느껴졌다.
“휴, 이 지긋지긋한 곳은 언제 벗어나나.”
끝없이 펼쳐진 돌계단을 따라가니, 몇 시진 전에 다녀간 오두막이 보였다.
험준한 산 한가운데 지어진거라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살기에는 충분했다.
집 자체야 좋다.
사부의 말에 의하면 솜씨 좋은 장인이 지어 주셨다고 한다.
다만 화산파가 위치한 낙안봉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 왕래가 힘든 건 물론이고 깎아내린 듯 한 절벽이나 산등성이, 산림이 우거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곳에서 지내시는지 여쭤봤더니 옛날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제자의 입장에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화산파의 제자이면서 정작 화산파에 가 본 적은 아주 어렸을 적을 제외하곤 없으며, 본 적도 없다니.
종종 낙소월처럼 사부가 아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외롭지는 않지만, 역시 동년배를 만나보고 싶었다.
수련에 열심히 임하는 것도 하루라도 빨리 인정받아 강호에 출두하기 위해서였다.
사부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싶기도 하고.
“다녀왔…… 히, 히익!”
제자는 무심코 문을 열었다가 식겁했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건 분노로 인한 살의, 독기로 번들거리는 표독스러운 눈빛이었다.
“으아악! 악귀다!”
“악귀? 누구 제자 아니랄까 봐, 건방지구나.”
흥!
방 한가운데, 악귀는 없고 미부인이 있었다.
청순하고 신비한 분위기의 낙소월과는 달랐다.
눈매는 칼날처럼 매섭고, 머리를 절로 조아리게 만드는 위엄, 분위기는 고고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으, 으응?”
“왜 그러니, 네 사부를 똑 닮은 표정을 짓고서는.”
“아!”
제자는 그제야 미부인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누구인지 알아봤으면, 차를 내오는 건 어떤가 싶네. 방금 전 발언을 못 들은 걸로 해 줄 수도 있으니 말이야.”
눈빛, 태도, 몸가짐에서 권위적인 자태가 느껴졌지만, 흔히 보이는 귀부인과는 사뭇 달랐다.
“네, 넵!”
아이에게도 가차 없는 독설. 그 사람이 분명하다.
저 말이 농담이 아닌 진심이란 걸 알고 있기에, 제자는 평소 단련했던 보법을 펼쳐 차를 내왔다.
“그 사람은?”
“손님이 오셔서 자리를 비우셨어요.”
“흐응.”
미부인은 차로 목을 축였다.
“분명, 오늘 방문한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네, 네?”
“나와의 선약을 무시하고, 자리를 비운 거에 대해서 묻는 거란다. 제자인 네 의견을 듣고 싶네.”
‘오 원시천존이시여!’
사부를 향한 존경심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속에서는 원망감과 공포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정도로 불편한 자리였다.
‘후우, 후우. 침착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사부 가라사대, 어느 때에도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 상단주 할아버지의 조언을 떠올리는 거야.’
머릿속으로 푸짐한 살덩어리의 노인이 떠올랐다.
‘상단주 가라사대, 아부가 싫은 사람 없다!’
제자는 각오한 듯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사부님은 너무하……”
“뻔한 아부를 한다면 각오하렴. 독지에 넣어 단숨에 내성을 길러 주도록 하마.”
“흠……”
미부인은 아부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네 의견을 물어본 거야.”
문을 열어 둔 것도 아닌데도 소맷자락이 펄럭였다.
바람 탓이 아니다. 공력을 끌어 올렸다는 증거였다.
제자는 땀을 폭포처럼 흘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사, 사모님…… 저, 그게……”
“……뭐?”
“히익! 죄, 죄송해요! 사모님! 용서해 주세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목은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으나, 낙소월처럼 무공의 극의에 오른 고수 앞에선 도망쳐 봤자 소용이 없다.
“얘.”
“네, 네?”
“사모(師母)란?”
“네?”
“대답해.”
“사, 사부님의 부인이요……”
제자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누가?”
“그…… 당 혜자가 되시는 분입니다만……?”
미부인, 당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제자는 혹시 잘못 말했나 싶어 얼른 수정하려다가 멈췄다. 당혜의 입 꼬리가 씰룩였기 때문이다.
‘이거다!’
당혜의 반응에 제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모님, 사모님. 불초자가 사부님의 부인이신 당 사모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정말로 그 스승에 그 제자구나. 주둥아리 놀리는 솜씨가 아주 똑같네, 똑같아. 좋아, 용서할게.”
당혜의 입가는 소매로 가려져 볼 수 없었지만, 귀가 벌겋게 달아오른 걸 볼 수 있었다.
눈썹도 씰룩이는 것이 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한창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또 한 사람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피부는 하얗고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굴곡 없는 일직선이었다.
눈은 호수처럼 맑으면서도 잔잔하고 깊었는데, 도를 쌓은 현인과도 같았다.
“오랜만이네요.”
제갈수란이 두 사람을 보고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당혜도 제갈수란의 인사에 답했다.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제자가 그녀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까닭은, 어릴 적부터 갖은 학문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도사인 사부가 맡은 도학을 제외하곤, 유학이나 성리학부터 시작해 전략 등 다양한 공부를 가르쳐 줬다.
낙소월이나 당혜의 미모에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면서, 무척이나 똑똑한 사람이었다.
참고로 그녀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동시에 사부와 의형제이기도 한 제갈승계는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사부가 자신을 불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부터 너에게 기관지술을 가르칠 사람이 올 건데, 정말 재수 없는 녀석이란다.”
“사부님,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남을 깎아내리시면 안 돼요.”
하지만 사부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 이 주변부터 보고 시작할까? 저기 설치된 거 보이지?”
“안 보이는데요?”
“이게 왜 안 보이지……? 이상하네. 딱 봐도 보이지 않아?”
“아뇨.”
“넌 재능이 없구나?”
‘재수 없는 사람이다……’
제갈승계는 여러모로 최악인 사람이었다.
특히 누군가를 가르치는 능력은 전무했다.
여담으로, 얼굴은 잘생겼다. 그래서 더 재수 없게 느껴졌다.
결국 부인인 무선화가 남편을 대신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남을 가르치는 데 재능은커녕 최악인 남편을 대신하여 수습생이나 가문의 식솔들에게 기관지술에 대해 강연하는 모양이었다.
“사부님은 어디에 가셨니?”
“손님이 찾아오셔서 잠깐 자리를 비우셨어요.”
제갈수란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입가에 맺히는 웃음은 물론이고 표정 변화가 드문 사람이지만, 그녀 역시 교두처럼 감정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것뿐이었다.
속은 읽기 힘들어도 좋은 사람이었다.
“얘.”
당혜가 그를 불렀다.
“네?”
“모처럼 선생님이 오셨는데, 차를 내와야지.”
“앗, 네. 사모님. 그럴게요.”
움찔.
제갈수란의 손이 떨렸다.
“왜 그러신가요, 선생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약이라도 내어드릴까요?”
당혜가 제갈수란을 내려다보듯이 바라보며 웃었다.
“……악취미시네요.”
“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속여서 불리고 싶은 대로 불리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갈 수란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누가 누구 보고 속인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어딘가의 모사께서 몇 십 년 전의 일을 잊었나 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역시 아무리 똑똑해도 나이는 이기지 못하는 모양이네. 치매 예방으로 괜찮은 독약이 있는데 처방해 줄까?”
“그 말 그대로 되돌려드릴게요.”
치지직!
두 사람 사이에서 번갯불이 튀기는 것 같았다.
‘살려 줘……’
제자가 울상을 지으며 속으로 바랐다.
‘사고. 혹시 사부님께서 대단했다는 건, 무공이 아니라 여자를 후리는 능력이었나요?’
사부에 대한 의문은 여러 가지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역시 주변 인물. 복잡한 여성 관계였다.
낙소월과 당혜, 그리고 제갈수란.
한 사람도 아닌 세 사람씩이나 사부를 몇 십 년 동안 사랑하고 있다.
제자의 입장에서는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사부가 못생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세 사람에게 사랑을 받기에는 약간 부족한 감이 있었다.
툭 까놓고 말하면 객관적으로 봐도 세 사람이 아까웠다.
무공이 고강하다거나, 아니면 남들보다 머리가 뛰어나다거나 하는 특출한 것이 있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하고 고민해도 의문밖에 남지 않았다.
“두 분 다, 사부님의 어디가 좋으신 거예요?”
결국 참지 못하고 장본인들에게 묻기로 했다.
“……”
“……”
방금 전만 해도 오갔던 설전이 멈췄다.
두 사람 다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뺨은 불그스름하고 손가락은 꼼지락거렸다.
덥지도 않은데 손으로 부채질하는 것이 이상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사부에 대해서 물으면 소녀처럼 부끄러워했다.
‘정말로 복잡해……’
사부의 관계가 이렇게 복잡한 건 사실, 사부가 아직 기혼이 아닌 미혼 남성이기 때문이었다.
사부도 당혜도 서로 사랑하는 건 맞으나, 피치 못 할 어른의 사정 탓에 혼인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제자는 무척 궁금했으나, 낙소월과 제갈수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당혜가 무서워서 차마 묻지 못했다.
“그나저나, 네 사부는 누구를 만나고 있기에 이렇게 늦는 거야?”
당혜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인지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교두가 말씀해 주셨거든요.”
“교두? 소령?”
끄덕.
“소령.”
당혜가 제자의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네.”
“으악!”
제자는 그림자 속에서 소령이 솟자 기겁했다.
“주 가가를 찾아온 게 누구야?”
“호칭이 잘못됐어요.”
제갈수란이 지적했지만 당혜가 깔끔히 무시했다.
“남궁선유입니다.”
“창천(蒼天)이?”
* * *
“검신께서는 세월이 흘러도 참 변함이 없으십니다.”
남궁선유가 주서천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입가에 웃음을 맺자 세월을 가득 담은 주름도 움직였다.
“남들보다 일찍 극의를 이루고, 심상을 구현하지 않았소. 남들보다 노화가 늦는 거야 당연하지.”
쪼르륵.
주서천도 남궁선유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상천이자 남궁세가의 가주나 되시는 양반이 무슨 일이오? 설마 누이를 소개하려는 건 아니겠지?”
“몇 십 년 전에 그러려다가 세 분께 죽을 뻔 하지 않았습니까. 천군사, 그 친구도 누이를 슬퍼하게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면서 째려보더군요.”
“그리운 사람이 떠올라서 말이오.”
“……”
잠시 간의 침묵이 흘렀다.
애도하는 것이 아닌,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듯했다.
“어젯밤, 천기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술병을 집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오래도 살았군.”
주서천은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였다.
“검신께서 쉽게 죽일 수는 없다면서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영약을 먹인데다가, 화인의원이 세대에 걸쳐 건강을 관리하지 않았습니까. 이십 년 전에는 위에 혹이 발견됐는데도 무사히 제거하고 살아남기까지 했습니다.”
암천의 군사는 천수, 아니 그 이상의 삶을 살았다.
정사의 관리 하에 둔 뇌옥에서.
“어땠소?”
“무섭더군요.”
남궁선유가 술잔을 매만지면서 몸서리쳤다.
“금제에 걸려 자살은 물론이요 자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병에 걸려도 곧장 치료되지요. 먹을 것이라곤 벽곡단뿐입니다. 여럿도 아니고 혼자서 수십 년 동안 뇌옥에서 지냈는데, 미치지 않은 게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
“수감자가 수감자인 만큼, 말을 나누는 것도 금했거늘…… 정말로 무서운 정신력입니다.”
“그리고?”
“수십 년을 뇌옥에서 혼자 갇혀 있었는데도, 마치 밖에 있는 것처럼 무림의 상황을 추측하더군요. 문제는 그 말이 대부분 맞았다는 겁니다.”
창천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천기는 숨을 거두기 전, ‘무림은 변하지 않았지?’라면서 비웃었습니다. 정사는 희생 끝에 얻은 평화를 잊은 채 대립하고 있을 것이며, 무림인은 여전히 무공과 사문만으로 차별하고, 미워하고 있을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지요.”
남궁선유는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전란이 막을 내렸을 때, 과거의 저는 무림이 변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정사에 등을 돌린 이들이 암천회와 손을 잡은 건 용서할 수 없으나, 원인은 결국 무림의 차별 탓이 아니었습니까.”
깍지를 낀 손가락에 힘이 들었다.
“실제로도 그 후, 무림에서 불평등한 차별은 줄어들었습니다. 어쩌면 무림이 정말 일통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크나큰 착각이었습니다. 평화 조약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대립하더군요. 게다가 얼마 전에 무림맹에서 흑영부의 부활이 검토됐을 때는 제 두 귀를 읫미했습니다. 그나마 천추의 전례가 있으니 다수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당혜의 귀에 들어가면 아마 무림맹의 수뇌부가 독살될지도 모르니, 입단속을 시키는 편이 좋을 거요.”
“맹주님께서 노발대발하셨으니 당분간은 그 누구도 입 하나 뻥긋하지 못할 겁니다.”
“그 홍진대사께서 화내셨다니 깜짝 놀랄 일이로군. 그보다, 그 분께서는 아직도 은퇴할 생각이 없으신 거요?”
홍진은 내일 입적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무림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보지 못하는 만큼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더 구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분도 참……”
주서천은 질린 듯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는 겁니까?”
“기다리는 이들이 있어서 말이오.”
“이런, 제가 실례했군요.”
남궁선유는 포권으로 사과를 표했다.
“아 참, 천기가 저에게 남긴 말은 없었습니까?”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 만큼 심한 욕설 인지라…… 그저 저주했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소?”
주서천이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창룡.”
“부르셨…… 음?”
남궁선유는 무심코 답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운 별호였다.
“무림이 어떻든 간에 당신이 무림을 구한 영웅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결코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었다는 걸 명심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영웅은 검신……”
“당신과 함께 걸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무림을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주서천은 최대한 절도 있는 포권으로 인사했다.
남궁선유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떠날 수 없었다.
왠지 모를 그리움을 느꼈다.
“사형.”
낙소월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장로께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주서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뜨리려 해도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미소 탓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같은 스승 아래에서 배운 것도 아닌데 저러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정작 그녀를 가르친 철혈매검과는 정반대였다.
가끔씩, 단리화가 방문할 때는 철혈로 물들기는 하지만.
“뭐가 곤란한데요?”
낙소월이 머리를 기대면서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나한테 걸리면 죽을 테니까.”
주서천이 걸음을 멈췄다.
공포로 얼어붙은 눈동자에 비치는 건 악귀나찰로 변해 버린 당혜였다.
그리고 바로 옆, 제갈수란은 악귀처럼 변하진 않았지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어 몹시 신경이 쓰였다.
“사형을 괴롭히지 마세요!”
낙소월이 주서천의 앞을 가로막았다.
“낙소월, 그 자리에서 비키는 것이 좋을 거야.”
“절대 안 돼요.”
“좋아,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너에게는 원한이 있어서 갚아 줄 생각이었거든.”
“원한이요?”
“모른 척하지 마. 몇 십 년 전에 혼담이 오갔을 때, 방해했던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무, 무슨 소리세요. 전 그냥 화산파의 제자로서 규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뿐인걸요?”
낙소월이 모른 척했다.
동공은 물고기처럼 헤엄치고, 목소리는 떨렸다.
나이를 먹었는데도 거짓말을 못하는 건 여전하다.
한편, 제갈수란은 낙소월과 당혜가 대치하는 동안 유령처럼 슥 하고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바람 소리를 내면서 날아온 독접에 멈춰야만 했다.
“어디 가려고?”
낙소월도 낙소월이지만 제갈수란도 문제였다.
몇 십 년 동안 그녀에게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으음.”
마음 같아선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후에 당혜가 무슨 말을 할지 알기에 얌전히 있어야 했다.
툭툭.
“응?”
“사부님, 사부님.”
“왜 그러니, 제자야?”
“사부님은 쓰레기인가요?”
제자가 소령의 옆구리에 들린 채로 물었다.
“어허, 이 녀석. 사부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더냐. 누가 그리 가르쳤어?”
“사모님이요.”
“흠……”
주서천이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앗!”
어떻게 복수할까 하고 소심하게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제자가 무언가 떠올린 듯 방방 뛰기 시작했다.
소령은 제자가 옆구리에서 마구 움직이자, 귀찮다는 듯이 바닥에 내팽개쳤다.
제자는 ‘철퍼덕’ 하고 엎어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사부님, 사부님! 큰일이에요!”
“무슨 일이야?”
“제가 매화심법, 그러니까 매화기공의 비밀을 알아냈어요!”
주서천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지었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제자는 사부에게 오늘 알아낸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잔뜩 들뜬 목소리가 귀엽게 느껴졌다.
“정말로 대단하구나, 제자야. 그런데, 그 운기법을 무어라 부르면 좋겠느냐?”
“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매화생공(梅花生功)! 매화생공이요!”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