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남처럼 불리고 싶지는 않아.’
당혜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을 삼켰다.
“몸 상태도 멀쩡해졌고, 사부님께서도 걱정하실 테니 슬슬 화산으로 돌아가 볼까 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
한 해가 또 시작됐다.
“……그래.”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었다.
곁에서 간호를 하며 마음을 접을 생각이었지만, 사라지기는커녕 더 커지기만 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 왔으나 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놔줘야만 했다.
“당혜, 전에……”
“돌려줘.”
당혜는 주서천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할지 아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뭘?”
“기사분반.”
“아, 음. 그래.”
당혜는 주서천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기사분반이 빠져나오는 모습은……마치, 주서천의 마음에서 당혜 자신이 제외되는 것 같았다.
당혜는 주서천이 무어라 하기 전에 얼른 왼손을 뻗고, 눈짓을 보냈다.
“네, 네. 마님.”
주서천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당혜의 손을 왼손으로 받쳤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기사분반을 들어 그녀의 왼손 약지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이거면…… 된 거야.’
당혜는 마치 가락지를 빼앗기는 것이 두렵다는 듯, 손을 내빼곤 반대쪽 손으로 기사분반을 쓰다듬었다.
“주서천.”
“왜?”
“얼마 전에 내가 한 말, 없었던 걸로 해 줘.”
당혜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슬픔에 젖은 그 눈은 가락지에 고정됐다.
“……응?”
“내 이기심 탓에 당신이 낙소월과 불편해지는 걸 원치 않아. 부탁이야. 잊어 줬으면 해.”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중원, 아니 천하를 뒤져 봐도 낙소월 같은 여자는 볼 수 없을 거야. 그녀를 놓치지 마. 진심이야.”
스무 살에 화경이라는 성취를 이뤄냈다.
미모 또한 섬서, 아니 무림제일미에 견줄 정도로 아름다웠다.
성격 또한 어떠한가.
누군가의 고통이나 비극에 진심으로 슬퍼할 정도로 고운 마음씨를 지녔다.
또 그렇다고 현실을 모를 정도 로순진한 것도 아니다.
설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선녀였다.
“설마, 고백하기도 전에 차일 줄이야.”
“……뭐?”
약간 곤란해하는 듯한 목소리.
당혜는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들어 올렸다.
주서천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현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듯했다.
“무언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낙 사매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만, 네가 생각하는 감정까지는 아니야.”
주서천은 얼마 전, 낙소월과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당혜에게 전했다.
“낙 사매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남녀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사형제 간의 사랑이랄까.
호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마 동경이었다고 생각해.”
주서천에게 낙소월은 동경의 대상이요, 영웅이었다.
남녀이다 보니 호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감정이 누구에 비해서 강하진 않았다.
“그러면……”
“그렇게 됐네. 화산은 되도록 빨리 되돌아오도록 할 테니까 좀 봐주……”
짜악!
주서천의 머리가 휙 되돌아갔다.
“전부 포기하고 당가의 가주가 됐는데…… 그걸 지금 말하면 어쩌라는 거야, 이 머저리야!”
당혜가 분노로 가득한 독기를 풀풀 풍겼다.
어쩌면, 주서천을 향한 진심이 담긴 최초의 욕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안 될까?”
주서천이 진심으로 걱정이라는 듯 물었다.
당혜는 주서천을 덮치듯 달려들더니, 이내 그의 품에 안겨 입술을 포겠다.
“소저, 이쪽이오.”
원대식은 소령을 극진하게 대우했다.
전란이 막을 내린 이후, 암천회주와의 결전이 알려지게 되면서 소령 역시 명성을 얻게 됐다.
최악의 재앙, 암천회주와 일합도 나누지 못했으나, 그래도 결정적인 때에 도움을 주었다.
강호에선 소령이 주서천의 그림자이자 호위라는 걸 듣고 그녀의 공 역시 칭송하면서 존경을 표했다.
“그분께선 이곳에 계시……”
원대식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외에 복도를 순찰하던 당가의 고수들 역시 멈췄다.
“……?”
소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함을 표했다.
“이, 이쪽이 아닌 것 같습니다.”
원대식이 몸을 되돌렸다.
그 얼굴에선 식은땀이 폭포처럼 흐르고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거짓말, 하고 있어. 왜?”
목소리가 떨리고 호흡이 불규칙적이다.
심장 역시 빠르게 뛰고 있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비켜.”
“아, 안 됩니다!”
원대식이 양팔을 벌렸다.
“비켜.”
“안 됩…… 케헥!”
소령의 주먹이 원대식의 복부에 꽂혔다.
“안에서, 곡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비켜.”
“콜록! 콜록! 제기랄!
막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상처 없이 제압해!”
원대식이 결사의 각오로 외쳤다.
“하, 하지만……”
당가의 무사가 주저했다.
소령은 고수이며 귀빈이다.
고수를 상처 없이 제압하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안 막으면 우리가 가주께 죽는다!”
꿀꺽!
당가의 무사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암천회를 눈앞에 둔 것처럼 결사의 각오가 느껴졌다.
열댓 명, 아니 그 이상의 무리가 소령을 포위했다.
“으아아악!”
“케헥!”
“끄아악!”
* * *
(외전 2)
금의상단. 무림이 암천회에게 대승을 거둔 이후, 여러 무림인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평소 돈에 영혼을 팔았다면서 손가락질을 받던 상왕조차 무림의 영웅으로서 찬양받았다.
“천하제일상단? 그야 금의상단이지!”
“내 듣자 하니 금의상단은 오래전부터 주서천 대협과 힘을 합해 암천회의 계획을 방해했다고 하네.”
“탐욕에 눈이 먼 돼지 같은 상인들과는 그릇이 달라요, 달라.
대의를 위해서 희생하는 위인이지.”
“금의검문은 어떻고? 현 문주인 왕일, 그리고 부문주인 초련을 필두로 한 그들은 비록 실력은 뒤떨어질지 몰라도 무림의 평화를 위해 싸운 이들이지. 소문에 의하면 개파한 이유도 암천회와 대적하기 위해서라는데?”
“금의상단, 만세! 이의채 만세!”
금의상단과 금의검문, 그리고 이의채의 이름 역시 날이 갈수록 유명해졌다.
“우헤헤!”
이의채는 명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좋아했다.
명예는 곧 돈을 부른다.
굳이 힘이나 돈을 들여 신뢰를 얻을 필요도 없으며, 가만히 있어도 흔히들 말하는 큰손들이 찾아와 거래를 요청했다.
경쟁 상단이라 부를 만한 자들도 없었다.
혹여나 괜히 금의상단을 폄하하거나 그러면, 무림을 구한 상단에게 무슨 짓이냐면서 도리어 비난을 받았다.
따로 손을 쓰지 않아도 금의상단은 중원의 정점에 섰다.
“투자란 존엄하게 버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전부터 주서천 대협과 제갈 공자님을 눈여겨봐 왔지.”
이의채가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오, 위대하신 상왕이시여, 존경합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무림을 구하기 위해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동안 돈을 악착같이 긁어모은 이유가 실은 많은 이들을 돕기 위해서라는 말이 사실입니까?”
“물론이지요. 제가 돈에 영혼을 팔았다고 말하는 건, 절 시기하는 경쟁 상단의 음모일 뿐입니다.”
“역시나! 자산의 대부분을 기부하신다는 것도 사실이었군요!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으, 으응? 기부?”
“저희는 상단의 규모가 작아 어찌할지 고민했는데…… 괜한 고민이었습니다. 저희 역시 물심양면으로 전란에 의한 희생자와 피해자들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 없……”
“금의상단 만세! 상왕 만세! 이의채 만세!”
이후, 상왕이 자산의 팔 할 이상을 피해 복구를 위해 기부했다는 게 알려졌다.
또한 그를 필두로 하여 여타 상단들도 단체로 기부에 나서 보다 빠르게 피해를 복구할 수 있게 됐다.
“자네, 그거 들었나? 최근, 상왕이 밤마다 대성통곡을 한다고 하네. 역시 기부금이 너무 많았나?”
“어허, 이 사람! 아무리 자네라 해도 그분을 모욕하지 말게.
사돈의 친구의 동생의 친척의 벗의 말에 의하면 상왕께서 밤마다 우는 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서라 하더군. 정말 감동적이지 않나?”
“미안하네…… 내 그런 줄은 몰랐군.”
기룡, 제갈승계.
현 무림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까아아악, 공자님!”
“공자님, 얼굴 한 번만 보여 줘요!”
“기룡께서 아직 홀몸이라 들었소! 내 딸의 얼굴을 한 번만 봐 주시오!”
“사부님! 절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무림인은 물론이요 일반인 등 많은 사람들이 제갈승계를 만나려 했다.
하루에 무려 수백 명씩이나 방문했다.
제갈승계는 미칠 지경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제갈승계는 인맥이나 배경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화려했지만, 개인적인 능력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순수한 명성만 봐도 군사나 모사미봉에 지지 않을 정도였다.
전란에서 보였던 활약을 생각하면 이상치 않았다.
“미, 미친!”
친구의 이름을 대라면 열 명도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교류가 어색한 제갈승계는 기겁할 일이었다.
제갈승계는 산동의 제남 지부, 금의상단에서 준비해 준 거처이자 공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후, 세가에서 어떻게든 해 보라고 사람까지 보내오다니……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무림의 영웅, 제갈승계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공자님, 어서 오세요. 몇 가지 도움을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새로운 장치를 구상 중이거든요.”
무선화가 살짝 웃으면서 제갈승계를 반겼다.
“새로운 장치?”
“물론입니다!”
제갈승계가 눈을 반짝이면서 협조를 받아들였다.
무선화는 보이지 않도록 입가에 웃음을 그려 내면서, 제갈승계의 품 안에 안겼다.
“이러면 됩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장치입니까?”
“네, 네. 훈련용 목인에게 다가가면, 그 몸이 열리면서 적을 안에 가두는 용도에요.”
무선화가 얼굴을 비비적거리면서 답했다.
만면에는 행복한 미소로 가득했다.
“여우일세, 여우야……”
초련이 그 광경을 보고 감탄사를 흘렸다.
“오호, 과연……”
제갈승계가 여러 가지를 떠올리고 있을 참이었다.
“서, 선화야……?”
“앗, 아버님.”
무선화가 제갈승계에게 안긴 채 머리만 옆으로 빼선 활짝 웃더니만, 손까지 흔들어 무곡을 반겨 줬다.
“응?”
제갈승계가 고개만 돌려 무곡을 봤다.
“오, 어르신. 어서오……”
제갈승계가 인사를 건네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곡의 표정이 악귀처럼 물들더니만, 이마에 뿔 같은 것이 솟아냐면서 용처럼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른손과 왼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지만, 마치 검을 든 것처럼 손을 쥐고 있었다.
“교두, 진정하십시오.”
초련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앞을 가로막았다.
무곡은 종종 금의검문의 교두로서 무공을 가르쳤다.
그녀는 무곡이 얼마나 괴물인지 알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아!”
무곡이 심상구현을 펼쳤다.
섬서, 화산.
“거절했다고?”
장서은이 목소리를 높였다.
낙소월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서천, 내 이놈을 그냥!”
장서은이 씩씩거리면서 소매를 걷었다.
상천육좌, 아니 상천오좌이자 천하제일인을 보고 이럴 수 있는 사람은 무림을 뒤져도 몇 없을 것이다.
“오늘은 마음껏 마서라.내가 허가하마.”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었던 매화검수, 담향이 술병을 건네면서 낙소월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신경 쓰지 마라. 생각해 보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화검수의 경우, 혼인할 수 없으니까.”
도사라고 연애나 혼인을 못 하는 건 아니다.
연애는 물론이요 자식까지 낳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일반 제자에나 해당하는 경우다.
화산의 장로, 그 밖의 요직에 앉아있는 자들은 무공의 유출을 우려해 혼인이 제한되어 있다.
화산에 스물네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매화검수 역시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주서천의 경우, 무림의 대영웅이자 천하제일인이지만 사실 화산 내에선 보통의 사대제자일 뿐이다.
낙소월은 담향이 따라 준 술잔을 시원스럽게 넘기더니,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무슨 소리세요? 이제부터인걸요.”
“……응?”
“화산파의 규정상, 이십사수매화검법처럼 절기를 알고 있을 경우 자식을 낳을 수 없어요. 혼인도 무척 제한되고요. 사형은 이십사수뿐만 아니라, 일대신공인 자하신공의 구결을 알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자, 잠깐…… 너, 설마……”
“자하신공이 화산오장로에게 전달된 경우야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 외에는 지켜야죠.”
안 그래요?
하고 눈을 빛내는 낙소월.
“설사 사형의 경우가 특별하다고 한들, 아내로 맞이할 사람의 신분이 높으면 더욱 힘들고요. 예를 들어, 오대세가의 직계 혈통이라거나 하면 서로의 비전 무공이 유출될 수도 있으니 더더욱 문제가 크지 않겠어요?”
“사, 사매. 진정해. 네 말대로라면 매화검수인 너도……”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서 그만 일어나 볼게요.”
낙소월의 눈이 야망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 * *
음과 양이 교차했다.
어슴푸레하게 빛나던 햇빛은 점차 강해지면서 창궁을 가득 메웠다.
당혜는 주서천을 배웅하면서도 탐탁지 않은 듯,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두드리면서 불만을 표했다.
“왜 그래?”
“……”
주서천의 물음에 당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한번 물으려던 찰나, 당혜는 특유의 표독스러운 눈초리를 옆으로 돌리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으니까.”
“허미……”
주서천이 진심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당혜의 입에서 달콤한 말이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놀라움도 놀라움이지만, 생각 이상의 귀여움이라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죽고 싶어?”
당혜의 손가락에서 독기가 흘러나왔다.
“농담이야, 농담.”
주서천은 ‘하하하’ 하고 웃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날…… 사랑해?”
당혜는 주서천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물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됐다.
“그래.”
걱정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시원스러웠다.
“……”
당혜는 주서천의 품 안에 안겨 머리를 기댔다.
“어떤 점이?”
꽃에는 가시가 있다지만, 당가의 꽃은 독을 품고 있다.
건들면 다치는 게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
당혜는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름답다고 한들, 성격이 좋지 않으니까.
‘그날이었나.’
한 번, 꽃에 품은 독기가 사그라졌던 적이 있었다.
당가의 진실을 알게 되던 날.
당혜가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거짓을 고했을 때였다.
평소의 독기 어린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강하기는커녕 툭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여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가련하고도 애잔했다.
“오라버니에게…… 지고 싶지 않아.”
당혜가 거짓이 아닌 진실을 고했던 모습이 보인다.
누군가의 등을 좇기 위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언젠가는 좇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걸으며, 넘고 싶다는 말을 할 때는 입가에 웃음이 절로 걸렸다.
달빛에 비춰지는 아름다움, 낯설지 않은 익숙함, 평소에 보지 못했던 모습이 노쇠한 마음을 키웠다.
소매를 놓칠 듯 말 듯 잡으면서 도와 달라는 말을 꺼낸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흠흠, 뭐. 여러 가지.”
주서천은 헛기침으로 얼버무리려고 했다.
“주……”
‘주서천, 죽고 싶어?’
당혜의 다음 말이 예상이 갔다.
그러나 그다음 말은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주, 주…… 주 가가(哥哥)…… 부탁할게.
알려 줘.”
주서천이 순간 숨을 쉬지 못했다.
빙백신장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당가의 가신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당장 가주님을 내놔라! 이 가짜 년아!’ 라면서 외쳤을 것이다.
쨍그랑!
“응?”
주서천이 당혜를 껴안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나타나면서 무언가가 깨졌다.
깜짝 놀란 두 남녀는 서로 떨어지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제갈 소저?”
무림 연합의 모사로 이름을 날린 절세미녀, 제갈수란이었다.
발 밑에는 항아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약 향이 나는 걸 보면, 의식을 차리지 못한 주서천을 위한 약이었던 모양이었다.
“아, 무림맹에서 마중을 나오셨…… 제, 제갈 소저?”
주서천은 도중에 말을 잇지 못하고 당황했다.
제갈수란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서 있다가, 갑작스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흑흑……”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성이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흑, 읏…… 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