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이름 모를 숲.
주변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근처 기후는 따뜻한 것인지는 몰라도 눈이 녹아 있었다.
“왔어?”
주서천은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
“독봉 아니, 가주님이라 불러야 하나?”
“팔에 닭살 돋을 것 같으니까 그만둬.
화가 나서 당신 얼굴에 독을 뿌릴지도 모르니까.”
“가주가 됐다고 너무 막나가는 거 아니냐.”
“영양 없는 소리는 그만둬. 그보다……”
당혜는 주서천과 그 주변인을 쳐다봤다.
“당가의 가주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신의가 손을 들어 예의상 축하 인사를 건냈다.
다시 눈을 돌려 신의의 바로 옆, 아직 성년도 채 되지 않은 여아를 봤다.
유령인 소령이었다.
“기사분반을 빌려서 무얼 할 생각이야?”
당혜는 왼손을 들어 반지 형태의 법보를 보였다.
“뭐, 이것저것.”
주서천은 당혜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보였다.
당혜는 그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아니야.”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왼손을 손 위에 올린다.
손과 손이 접촉하자 따스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손을 잡는 건 아마 최초이지 않을까 싶었다.
약지에 착용한 반지가 천천히 빠진다.
얼마나 오랫동안 착용했는지 자국이 남은 게 보였다.
당혜는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갑작스레 손가락을 구부려 쥐었다.
“왜 그래?”
주서천이 의아한 듯 물었다.
“말해.”
“뭘?”
“뭐에 쓸 건지 말하라고.”
왜 그런지 모르겠다.
다만,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소령의 마음을 되돌릴 생각이야.”
“소령을?”
당혜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능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될 것 같아.”
“부작용은?”
“음……”
주서천은 침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혜는 그제야 왜 신의가 동행한지 알 수 있었다.
“선천진기를 사용하는 것인데 없을 리가 있겠냐.”
신의가 주서천을 대신해 답했다.
설사 결과가 절망적일지 몰라도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이 의원이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자네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야.”
“알고 있습니다.”
주서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
“웃기지 마!”
주서천은 당혜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당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암천회를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해 오고, 이를 위해서 삶의 일부를 포기했잖아.
툭 까놓고 말해서 복수가 목적인 것도 아니었고,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을 도우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제정신이야?”
암천회주는 주서천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연인이나 스승이라거나 사형제가 살해당해 복수에 불탄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념이었다.
“당신이 쉰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 안 해. 더 이상 희생하지 마. 그동안의 보답을 받으란 말이야.
낙소월과 사랑이라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
상천이자 검신으로서 칭송받으면서 살아가!
내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포기했는데!”
“너……”
“정마대전에서 당신을 잃었을 때,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잘 들어, 주서천.”
당혜는 두 손으로 주서천의 손을 포개었다.
“난…… 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는 없어.
부탁할게, 그만둬.”
눈초리에서 물방울이 뺨을 타고 뚝뚝 흘렀다.
주서천은 당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반대쪽 손을 들어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며 눈물을 닦아 줬다.
“걱정 마. 죽지는 않을 거니까.”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약속할게. 날 믿어 주지 않겠어?”
주서천은 당혜와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 스승과 제자라고 할까.
유정목과 닮았다.
“부탁할게, 당혜. 날 믿어 줘.”
“당신 정말…… 비겁한 거 알아?”
당혜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사랑에는 먼저 반한 사람이 약자라 했는가.
뺨을 쓰다듬어 주고, 웃어주면서 부탁을 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알고도 당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준비는 됐나?”
“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만약, 무언가 잘못되면 제가 아닌 이 아이부터 봐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주서천은 당혜에게서 떨어져 소령에게 갔다.
소령은 늘 그렇듯 영혼이 없는 것처럼 서 있었다.
‘기사분반은 기와 사고를 분리하는 법보다.
이 법보로 회귀를 사용한다면, 어쩌면 되돌릴지 몰라.’
주서천은 소령과 마주 보고 앉은 채 손을 맞잡았다.
‘진원번.’
새하얗게 물든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혼과 육체의 근원, 물질의 시초인 선천진기가 흘러나왔다.
주서천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얼마 전에 신의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무공을 잃었다고?’
‘예. 전부는 아니고 일부이긴 한데, 다시 습득하려고 해도 불가능하더군요.’
‘뭐, 시간도 되돌리고 선천진기를 사용하고도 살아남았는데 그 정도야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
목숨은 붙어 있으니 넘어가게.’
‘만약 한 번 더 사용하면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자살하려고?’
선천진기는 사용하면 죽는다.
천운이 닿아도 폐인이었다.
그러나 주서천은 비교적 멀쩡했다.
‘중도만공의 부작용이 적용돼서 그런가, 선천진기의 부작용도 어떻게 된 것인지 이상하게 적용됐다.’
선천진기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영역이다 보니,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추측할 뿐이었다.
“정말로 이해가 안 가.”
신의는 주서천과 소령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늙은이는 비록 무림인은 아니지만 무림인에게 무공은 목숨 이상의 가치라는 건 잘 알고 있네.
하물며 무림을 구한 신에 가까운 힘이 아닌가.
그런데 여자아이 하나 구하기 위해 버리겠다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물어봤지.
그런데 뭐라 답했는지 아나?”
신의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회상했다.
‘원래부터 없었던 겁니다.’
주서천은 소령의 기와 사고를 분리했다.
마음이 있어야 할 사고(思考)이나 심살로 인해 아무것도 없었다.
주서천은 이 사고만을 과거로 되돌렸다.
뇌에 새겨진 기록이 아니다.
영혼을 뜻하는 마음.
유령곡에게 살해된 유령을 과거로 되돌린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다.
회귀한다.
그리고 그 부작용으로 무공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주서천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울 수는 없다.
기존에 있는 것들 또한 잃게 되면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월신궁, 유령신공, 녹안만독공, 만중검, 철포삼, 탄검음, 전음입밀, 용후, 해남일도류, 수인공, 강격권, 공진장, 중소보, 중도만공, 진원번.
그리고 또 하나의 근간이었던 자하신공도 사라졌다.
그 행위에 주저함은 없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모든 걸 버렸다.
도가나 불가에선 모든 걸 버리면 등선하거나 열반에 든다고 가르치나 자신은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너무나도 많은 미련이 남아 있으니까.
아마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
”난 여태껏 무림을 구해야 한다는 이유를 변명 삼아 소령을 마음껏 이용해 왔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 앞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다. 실패할 수도 있고, 어쩌면 무공만이 아니라 목숨까지 잃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시도를 안할 수는 없다.’
최후에 잃지 않은 건 매화심법과 매화검법이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소령이 보였다.
“소령아……?”
주서천은 약간의 기대를 담아 물었다.
“……”
“소…… 령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질렸다.
“뭐가…… 뭐가 영웅이냐……”
손에 힘이 풀린다.
몸이 떨려 왔다.
“뭐가, 영웅이냐고!”
정파의 어둠을 모른 척했다.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갔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변명해 왔다.
“검신? 영웅? 지랄하지 마!
나는, 나는 결국 그냥 주서천이야!
그냥, 아무것도 아닌 주서천일 뿐이라고!”
소령에게 명령할 때마다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뭐가……”
스륵.
주서천은 말을 이으려다 눈을 크게 떴다.
오른쪽 뺨 가녀리고 얇은 손가락이 올라왔다.
“슬퍼요……?”
아래로 떨어뜨렸던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곳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곡주가, 슬프면…… 저도, 슬퍼요.”
“아아……”
“곡주?”
“아아아!”
와락!
손을 뻗어 그 몸을 껴안는다.
부서질 것처럼 힘껏, 또 힘껏 껴안은 채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눈물이 터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안도인지, 아니면 기쁨인지도 잘 모르겠다.
주서천은 소령에게 안긴 채 울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목 놓아 엉엉 울며 오열했다.
문득, 울어 본 게 오랜만이란 걸 깨달았다.
언제나 당신들의 등을 보았습니다.
당신들처럼 되고 싶어 등을 좇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저도 당신들과 함께 걸을 수 있을까요?
- 화산파의 사대제자, 주서천 -
<완결>
* * *
(외전 1)
시간이 흘러간다.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하던 눈 덮인 대지도 조금씩 녹아 없어졌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겨울은 종막을 고한 전란의 시대와 함께 끝났다.
새벽이슬이 맺힐 무렵, 지평선 너머로 밤의 장막이 걷히며 어슴푸레한 빛이 인시(寅時)를 알렸다.
“후우……”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가 내쉰다.
생명을 품은 양기가 몸을 가득 메우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소실된 무공은 돌아오지 않나.’
주서천은 진원번, 선천진기를 소모한 부작용으로 대부분의 무공을 잃었다.
이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재차 습득해 보려고 노력은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조금도 되찾지 못했다.
‘심법의 경우에는 구결을 외거나 운기해도 반응하지 않는다. 검법은 펼치려 하면 몸이 따르지 않아 도중에 갑자기 잊어버린 것처럼 멈춘다. 조금 아쉽구나.’
주서천은 아쉬워하면서 두 눈을 느릿하게 떴다.
“……”
만약, 주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면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을 것이다.
주서천은 황당함이 묻어나는 눈초리를 반개한 채, 정면을 바라보면서 말을 꺼냈다.
“소령아, 뭐하니?”
“곡주를…… 바라보고 있어요.”
소령이 쪼그려 앉은 채 답했다.
“그건 나도 알아. 아니, 그것보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더 이상 곡주가 아니야.”
유령곡의 주인은 유령신공을 수련한 자에게만 허락된 칭호다.
따라서 여타 무공처럼 유령신공 또한 소실한 주서천 역시 더 이상 곡주가 아니었다.
“……”
소령은 머리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표정이었으나, 마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령곡주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 되니까 마음이 되돌아온 건 맞는데 말이야……”
만약, 유령신공의 절대명령이 잔존해 있었더라면 ‘곡주라 부르지 말 것’이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소령은 몇 날 며칠이 지나고도 계속해서 곡주라 불렀고, 이를 지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거부는 둘째치고, 표정이나 감정표현이 전과 다를 것 없으니 제대로 돌아왔는지 파악하기 힘들구나.’
스스로의 입으로 슬프다고도 말했고, 방금 전처럼 때때로 기행을 보이기도 했으니 확실했다.
다만 표정변화가 없다 보니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서천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내 피식 웃으면서 소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령곡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가지 않고, 너는 끝까지 내 속을 썩이는구나.”
마음을 되찾은 이후로 몇 번이나 유령곡으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마음 가는 대로 살라고 말하며 어르고 달래 봤지만 소용없었다.
소령은 별다른 말없이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곁을 지켰다.
“곡주, 저 때문에…… 속, 아파요?”
두 눈을 치켜뜬 채, 올려다보는 모습은 부모에게 혼나는 걸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농담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누가 이 아이를 보고 잔혹과 두려움의 대명사이자, 전설로만 전해지는 암살자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마침 널 부를 생각이었는데 잘 왔다.”
“……?”
“지금부터 유령신공의 구결을 가르쳐 주마.”
무공의 소실이라고 해도 구결까지 잊어먹은 건 아니었다.
주서천은 소령에게 구결을 전달했다.
“마음 같아서는 너희 전원의 마음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었는데……그러지 못해 정말로 미안하다.”
주서천은 아쉬움과 미안함이 섞인 쓴웃음을 흘렸다.
무림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희생된 건 소령만이 아니다.
그녀 외의 유령들도 존재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 역시 타인 회귀로 되돌리고 싶었으나, 현재 그럴 능력이 되지 못했다.
“유령신공의 사용처는 네 마음대로 하도록 하렴. 누군가에게 전수하는 것도 좋고, 네가 습득해서 다음 대의 유령곡주가 되는 것도 좋지만…… 적어도, 너처럼 심살을 겪은 이들은 내버려 뒀으면 하는구나.”
끄덕.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란 걸 명심해다오.”
소령은 주서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처럼 예의 무표정으로 두 눈을 껌뻑이기만 했다.
입에서 존명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주서천은 산 중턱에서 내려왔다.
소령은 전처럼 그림자처럼 쫓는 게 아니라, 곁에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가의 뒷문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당가의 무사가 양 열로 서 있었다.
“검신을 뵙습니다!”
전란도 아닌 평화의 시대이거늘, 당가의 무사들은 잔뜩 군기 든 모습이었다.
현 가주가 누구인지 잘 알 수 있는 태도였다.
“가주도 참 너무하군요.정문도 아니고 뒷문인데, 그리 힘줄 필요 없습니다.”
정문이야 당가를 대표하는 간판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뒷문에서까지 이럴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 본다면 도리어 무슨 중요한 곳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당가의 무사는 주서천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검신의 말씀에 토를 달 생각은 아닙니다만, 실례를 무릅쓰고 몇 마디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검신이라는 과한 별호로 부르지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주서천이 살짝 웃으면서 답했다.
검이라곤 매화검법, 또는 신체 능력에 의지하여 휘두른 것에 불과한지라 현재의 별호가 부담스러웠다.
“감사합니다.”
당가의 무사는 진심을 담아 감사함을 표했다.
“주서천 대협. 대협께서는 정파, 아니 중원 무림을 위기 속에서 구해주신 위대한 영웅이십니다.
대협의 숭고한 희생이 없었더라면, 전란은 끝나지 않고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겠지요.
저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감사해하며, 또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의 말대로입니다.”
옆에 있던 무사가 존경의 눈빛을 보이면서 말했다.
“단언컨대, 저희의 행동은 결코 타의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이 주변을 청소하거나, 혹은 뒷문을 지키는 것에 불과하나 저희 나름대로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대협께서 종종 이 문으로 뒷산에 나가신다는 걸 들었을 때, 세가 의무사들이 앞다퉈서 경비를 서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당가의 문을 맡은지 십 년이 넘었지만, 이 정도까지 열의를 보였던 건 처음입니다.”
무사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무사만이 아닙니다.
직계나 방계의 혈족들은 물론이요 하인과 하녀까지.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대협께서 편의를 느낄 수 있도록 일하고 있습니다.
평소 일하기 싫다고 툴툴대던 이들도 반 시진 일찍 일어나서 회의를 할 때는 제 눈을 의심했지요.”
주서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벅차올랐다.
“여러분의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주서천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무사들은 서로를 쳐다봤다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면서 고개를 원래의 위치로 되돌렸다.
“죄송합니다.
예의에 어긋난 건 알고 있지만,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렸지만, 보답 받으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니까요.
그저, 대협에게 보답하고 싶은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표정이나 태도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들은 정말로 이름이 밝혀지는 걸 원치 않아 하는 느낌이었다.
감사함과 존경, 그뿐이었다.
주서천은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무사들처럼 입가에 호선을 그려 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지요.”
주서천은 무사들에게 포권을 한 뒤, 그들의 경의 가득한 눈빛을 받으면서 지나쳤다.
세가의 안으로 들어서니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이 시선이 부담스럽고 한편으로는 불편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서천은 가시방석에 앉은 상황을 맞이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한 달 만에 의식을 차리자마자 이곳저곳 싸돌아다니면서 진심으로 걱정한 사람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은 사람 아니야?”
주서천이 소령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혼자서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들은 말이었다.
당혜가 침실에 걸터앉은 채 힐난의 눈초리를 보냈다.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은 독기가 느껴졌다.
“바람 좀 쐬고 싶어서 그래.”
주서천은 소령의 마음을 되돌리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선천진기의 소모 탓이었다.
당혜는 주서천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마음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역시 그때 막았어야 했다며 후회하면서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래, 어쩔 수 없었네.
무림을 구한 대영웅께 내가 감히 무어라 하겠니.”
톡톡.
당혜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두드렸다.
주서천은 정신을 차리고도 요 며칠동안 화산에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가지 못했다.
당혜가 두 눈을 부릅뜨고 제대로 된 진료와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압박해서였다.
“너무 화내지 마.
신의에게 몸에 문제가 없다는 걸 듣고 나온 거니까.”
주서천이 미안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
당혜는 주서천의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서 안도감과 아쉬움이 섞여있었다.
“당 가주.”
“낯간지러우니 그만둬.”
당혜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낯간지럽다고는 했으나 진의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