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251/254)

그리고.

천하를 가득 메운 함성 소리가 터졌다.

정신이 돌아오고 의식이 뚜렷해진다.

“……!”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검을 찾으려 했다가 멈칫했다.

“여기는……”

모래사막처럼 메마르고 듣기 싫은 목소리를 느끼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낯선 천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침상이 있다.

바로 옆에는 물병이 놓인 원형 탁자가 자리 잡았다.

주서천은 잠시 넋을 잃은 듯 있다가, 손을 옆으로 뻗어 물병을 잡고 입술과 목을 축였다.

꿀꺽꿀꺽.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가슴을 차갑게 적시는 물은 시원했다.

“후우……”

물병에서 입을 떼고 멈추었던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회상에 잠겼다.

‘와아아아아아!’

뇌에 새겨진 기억이 과거로 돌아가자, 천지를 뒤흔들 정도의 함성이 귀 근처를 감돌며 메아리쳤다.

‘정말로, 이겼다.’

암천회주.

정말 질릴 대로 질린 적이었다.

오만에 걸맞은 무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순간을 위해서 비장의 일격을 준비했다.

철저하거나 훌륭하다는 수준이 아니라 미쳤다는 정도였으나, 불행하게도 적이 그 주서천이었다.

주서천은 천기만큼이나 깊은 심계를 지닌 암천회주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치명적인 무언가를 아끼고 아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하를 뒤집을 수 있는 권력과 무력, 자금력을 손에 쥐었는데도 보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 몇십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죽였으니,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에 알맞은 일격을 준비할 거라 생각했다.’

암천회의 칠성사와 도감부.

그 규모는 결코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정보도 노출되지 않았다.

두뇌인 천기의 장기 말인 칠성사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이도 지도자의 판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어쨌거나 끝까지 방심의 끈을 놓지 않고 적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한 덕에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주서천은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확인을 위해서 볼을 꼬집어 통증을 확인하곤, 손을 쥐락펴락했다.

‘선천진기.’

진원번, 북해빙궁에서 도움을 받아 손에 넣은 네 번째 무공은 신의 한 수였다.

심상을 구현한 자조차 다룰 수 없는 선천진기답게 수련 또한 어려웠다.

무려 답습을 적용시켰는데도 성취를 이루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해서 결전 전에는 어찌어찌 터득하는 데 성공했다.

낙소월이 감탄했을 때 수련하던 것이 바로 이 진원번이었다.

‘부작용은……’

무공의 이름처럼 선천진기를 불태웠다.

천만다행으로 운이 좋아 그 자리에서 죽지는 않았다.

선천진기와 그 부작용, 그리고 대가에 대해서 생각하려 할 때였다.

기척이 느껴졌다.

드르륵.

“사형……?”

주서천은 귀에 익은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옆으로 열린 문 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 낙…… 억.”

“사형!”

낙소월이 몸을 날리듯 달려와 품에 안겼다.

“사형, 사형!”

낙소월은 감격에 겨운 채,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는 온갖 감정으로 떨렸다.

주서천은 낙소월에게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언제나 보았던 등을 슥슥 쓸어 주며 웃었다.

“흐윽, 흑! 제가, 얼마나……!”

가슴팍이 눈물로 젖는다.

울음으로 가득한 목소리에서 그동안의 걱정이 묻어났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주서천은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여주면서 등에서 손을 옮겨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낙소월은 그 손길에 울음을 멈추기는커녕 더욱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다가, 일각의 시간이 흘러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사형 몸은 좀 어떠세요?”

낙소월이 걱정스레 물었다.

“난 괜찮아. 그보다 여기는 어디야?”

“무림맹 합비의 본부에요. 그보다, 의료각에 신의께서 진찰 중이시니 지금 당장 불러올게요.”

낙소월이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서천은 재빨리 손목을 낚아채 앉혔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보다, 괜찮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줄래?”

“하지만……”

“사매.”

“……알았어요. 대신, 설명을 다 들은 뒤에는 신의께 반드시 진료를 받겠다고 약속해 줘요.”

낙소월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힘을 풀었다.

“물론이야.”

“좋아요. 어디까지 기억하세요?”

“암천회주의 확인 사살을 끝낸 뒤.”

당연한 이야기지만 확인 사살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마무리했다.

그 뒤로는 바로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이곳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사형이 정신을 잃은 순간에 맞춰 사실상 전란은 막을 내렸어요. 암천회 일부가 수뇌부를 잃고도 천기가 준비해 둔 몇 가지의 지휘 사항을 따라 저항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전멸했어요. 무림맹주님, 사도천주, 그리고 북해궁주께서 선두 지휘를 맡아 주셔서 제압 역시 빨리 끝냈고요.”

정사와 새외의 상천은 큰 부상을 입었으나, 고통 하나 티 내지 않고 선두에 서서 멀쩡함을 과시했다.

사실은 고수는커녕 일반 무사들과 손을 섞기도 힘들 만큼 몸 상태가 나빴지만, 지휘를 위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실제로 아군과 적군에게 상천의 건재를 보이면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패도제공의 주인, 사도천주가 특히 큰 도움이 됐다.

암천회주와의 결전에서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되려 부상이 덜 심해 뒷정리에서 활약했다.

특히나 무공 특성상 다수에게 유리하다 보니 좋았다.

‘전력은 차이 나고 중심을 잃었는데도 저항하다니, 하여간 정말 지독한 놈들이야.’

그 암천회라도 회주와 천기를 잃었으니 곧장 항복하거나 단념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물론 전부가 아닌 일부이긴 하지만 그래도 보통 집념이 아니었다.

후일을 위해 사도천주를 물러나게 한 게 다행이었다.

“전 사형제와 금의검문 등 몇몇 문파와 함께 사형을 신의가 있는 곳으로 후송했고요. 당시 사형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어요.”

낙소월은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듯, 고운 이맛살을 찌푸렸다.

뼈라는 뼈는 부서지고, 근맥까지 끊어졌다.

대해와 같은 내공 역시 한 줌도 남지 않았다.

의식은 없지 숨도 잠깐이나마 멈추기까지 했다.

구희의 신단의 치유력이 적용되지 않았더라면 진작 죽었다.

“오늘은 그날로부터 보름째에요.

암천회 대다수가 죽거나 혹은 포로로 뇌옥에 갇혔어요.

운이 좋아 도망에 성공한 잔당은 정사의 추격자가 쫓고 있는 중이고…… 구파일방, 오대세가, 사도사문, 무림맹, 사도천, 북해빙궁, 해남검파, 남해용문.

그 밖에도 여러 무림 세력이 힘을 합해 돕고 있어요.”

“다행이다.”

주서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전생과 달리 현생은 전란이 끝나고도 무림 세력이 건재했다.

정파와 사파 모두 피해가 없던 건 아니지만, 멸망 직전까지 간 전생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세력이 건재한 탓에 패자가 되기 위해 누가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다.

‘정말로, 전생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구나.’

전생의 경우에는 지금처럼 다 끝난 뒤에도 하나가 된 것처럼 힘을 합쳐 뒷정리를 하지는 않았다.

정사와 마도이세, 그 외의 세력들도 각자 서로 너무 많은 피해를 입은 탓에 누군가를 돕기는커녕 주변을 경계하면서 사문의 회복에만 주력했다.

그때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이야기는 끝이에요.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면, 진료부터 받고 오도록하세요. 이 이상은 안 돼요.”

낙소월이 쌍심지를 켜며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어, 그럴게.”

“좋아요. 그러면 부축해 줄게요.”

낙소월이 그제야 생긋 웃었다.

“아니, 그 전에 할 이야기가 있어.”

낙소월은 무심코 허튼수작하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주서천의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주서천은 낙소월과 마주 본 채 입을 열었다.

“아가씨.”

당가의 호위 무사, 원대식이 당혜를 불렀다.

“왜?”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그러니까, 뭐가?”

“그놈…… 아니, 주서천 말입니다. 의식을 차렸다고 하는데, 정말 안 보고 돌아가셔도 괜찮겠습니까?”

원대식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가네.

아, 혹시 무림의 영웅과 소싯적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탓에 마음에 걸리기라도 한 걸까. 지금에라도 관계를 되돌려서 친분을 과시라도 하고 싶은 거야?”

당혜는 등을 보인 채로 특유의 독설을 쏟아 냈다.

“아가씨.”

“그만둬 무림의 대영웅이신 검신께 꼬리라도 흔들고 싶으면 차라리 화산파에 가서 머리라도 조아리도록 하렴. 그리고, 더 이상 듣기 싫은 목소리를 낸다면 그 입에 독주를 먹인 뒤 버리고 갈 거야.”

원대식은 다시 무어라 말하려다가, 이내 그만두고 입을 다물었다.

“당가로 돌아간다.”

합비의 팔문을 돌아보곤,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 *

주서천은 신의에게 진료를 받았다.

“괜찮다면 해부 좀 해도 되겠나?”

신의는 주서천을 진료하면서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무림인, 특히 고수는 회복력이 남다르기는 하지만 주서천만큼 터무니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아무리 고수라 해도 내상을 입으면 회복이 더딘 게 정상이다.

다른 상처까지 더하면 두말할 것 없다.

보름은커녕 수개월, 아니 몇 년이 걸려도 부족하다.

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는데 신체만큼은 대강 회복됐다.

“구희의 신단이 괜히 신단은 아니로군.”

신의는 진심으로 해부하고 싶었지만, 곁에서 이를 듣고 눈총을 쏘아대는 낙소월 탓에 그럴 수 없었다.

어쨌거나, 주서천은 진료를 끝낸 뒤 신의와 몇 가지 대화를 섞은 뒤에 어딘가로 향했다.

“잠은 잘 자냐.”

주변의 빛이라곤 벽에 걸린 횃불뿐이었다.

불빛이 주변을 천천히 밝힌다.

일반 철도 아닌 한철로 이루어진 쇠창살.

그 너머에는 외팔이 죄인이 혼자 앉아 있었다.

그동안 먹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피골이 상접했다.

입술은 물어뜯었는지 굳은 핏자국으로 얼룩졌다.

사지, 아니 삼지(三技)에는 한철로 된 쇠사슬과 사람 몸만 한 철구가 달려 있었다.

“천기.”

한림원의 외팔이 학사이자 암천의 두뇌였다.

“주서천……”

천기가 눈을 부릅뜨며 낮게 으르릉거렸다.

보름 전, 주서천은 천기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두었다.

암천의 두뇌이자 또 다른 괴물을 살려 두는 것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후일을 위해서 기절만 시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뇌옥은 천기가 수감된 순간, 현존하는 뇌옥 중 가장 삼엄한 곳으로 재탄생했다.

장소는 무림 연합 수뇌부 극소수만 알고 있으며, 이 뇌옥의 문지기 및 경비들은 천기가 죽기 전까지 나갈 수 없게 됐다.

그 밖에도 제갈승계와 간야자가 뇌옥 시설 및 기관을 설치했으며, 경비는 백여 명이 무작위 시간으로 교대를 섰다.

그 외에도 절대복종하는 유령이 곳곳에 배치되기까지 했다.

무인도 아닌 자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그 반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불안했다.

“카아악, 퉤!”

천기가 가래침을 최대한 멀리 내뱉었다.

아쉽게도 닿지는 못했다.

“꺼져라! 재수 없다!”

“다 끝났다.”

“헛소리!”

천기는 암천회주의 사망 소식을 믿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뇌옥의 안이었다.

제갈상이 찾아와서 사실을 말해 줬으나 전혀 믿지 않았다.

“암천회주께서는 인간이 아닌 재앙이시다.

주서천, 네가 아무리 잘났다 한들 결국 사람에 불과하다.”

암천회주는 무신.

패배란 없었다.

마교의 교주조차 상처 없이 굴복시켰다.

“날 가두고 살려 둔 걸 보니, 결전이 실패 혹은 무승부로 돌아간 모양이로군. 거짓말로 날 속여 단념시킬 생각이라면 오산……”

천기는 말을 이으려다가 멈췄다.

입은 열려 있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요동치는 눈동자에 담긴 건 쇠창살 너머의 어떤 머리였다.

“속을 줄…… 아느냐.”

주서천은 암천회주의 수급을 천천히 내려놓은 뒤, 뇌옥의 문을 열어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어디선가 그분과 닮은 자의 얼굴에서 인피면구라도 만들어 온 거겠지. 누군지는 몰라도 보통 솜씨가 아니구나. 흑도의 하오문인가?”

천기는 끝까지 부정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미약하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주서천, 시도는 좋았다. 그러나 넘어가진 않는다.

날 속여서 계획을 알아낼 생각이었더라면……”

“천기, 착각하지 마라.”

주서천은 천기의 말을 자르고 소매를 뒤적거렸다.

그 안에서 나온 건, 어떤 인피면구였다.

“난 딱히 너에게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온 게 아니다.

심문은 더더욱 아니다. 애초에, 고통 따위로 너에게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기가 고통에 넘어갈 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쉽지도 않았다.

어쩌면 포로로 잡힌 것도 계획의 일부라고 의심할 정도였다.

뭘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아닌 척하지만……”

“만년화리.”

천기의 표정이 변했다.

“칠각사.”

주서천이 보라는 듯이 인피면구를 보였다.

“흉마의 무덤.”

“아니야……”

천기의 동공이 요동쳤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쇠사슬이 출렁이면서 쇳소리를 냈다.

“하오문주, 천선.”

“아니야……”

“천권, 철무명환.”

“아니라고!”

천기가 목청껏 소리쳤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그동안의 의문, 그 밖에도 여러 일이 섞이면서 답을 도출해 낸다.

천기는 머리가 좋다.

좋은 걸 넘어서 천재다.

“아니, 알잖아. 그게 맞아.”

몇 가지 단어만 듣고도 수많은 가능성을 낸다.

그리고 거기서 답에 근접한 추측도 가능하다.

“알고 있지?”

주서천은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인피면구를 얼굴에 썼다.

“그럴 리가 없다고! 이 개새끼야!”

천기는 그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직접적으로 본 적은 없었지만, 주서천과 나란히 살생부 제일 윗줄에 이름을 올린 만큼 초상화를 만들어 외웠다.

“말도 안 돼!”

“그래, 나다.”

터벅터벅.

주서천은 천기에게 다가갔다.

“웃기지 마!”

주서천은 천기의 앞에 쭈그려 앉아, 어깨를 툭툭 두들기면서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바로 패신군, 주서천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간이 흐르고 눈이 내렸다.

마치 그동안 흘린 피를 덮겠다는 듯, 함박눈이 펑펑 내리면서 전쟁이 지나간 땅을 덮었다.

“전란의 막이 내렸습니다.”

무림맹주가 말했고……

“무림을 정복하려는 목적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를 능멸해 온 집단, 암천회는 수뇌의 멸망으로 붕괴했다.”

사도천주가 말했다.

천기가 아직 뇌옥 안에 수감된 채 있었지만, 후일을 위해서 세간에선 사망한 것으로 공표됐다.

“오랫동안 반목하고, 배척해 왔던 이들이 힘을 합해 평화를 얻어 냈습니다.”

“모든 일이 해결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아직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무공이나 사문에 의한 차별, 배척, 또는 증오.

그 외에도 사익에 눈이 멀어 저지른 악행.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비극이지요.

이에 정사는 각자 길은 달라도 전란의 시대에 의한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약조합니다.”

“이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폭력의 동물이며, 역사를 반복하는 자들이니까.

그러나 역사상 좋은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나쁜 평화는 없다. 그러니 하나는 말할 수 있다.”

무림맹주와 사도천주가 입을 모아 말했다.

“적어도, 발 뻗고 잘 수는 있다.”

정사 연합의 수뇌부는 제외였다.

천군사 제갈상을 필두로 하여 많은 이들이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뒷정리를 하느라 바빴다.

참고로, 암천회의 재산을 몰수한 덕에 자금력은 충분했다.

전란의 시대 피해자들에게 전부 분배됐다.

유실됐던 사문의 무공 역시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승전과 평화에 기뻐할 틈도 없었다.

암천회의 잔당, 그 외에도 배반자의 처리 등 여러 일에 힘썼다.

“중원을 구한 귀빈 중 한 분이거늘 대접 하나 하지 못하고 보내는 것이 마음에 불편하구려.”

“신경 쓸 것 없느니라. 본 녀는 검신에게 진 빚을 갚았을 뿐이니.”

북해궁주, 냉악비는 곧바로 돌아가기로 했다.

현재 북해는 사하와 설화가 패퇴하여 빙궁의 아래로 들어왔다.

어느 때보다 지도자가 필요했다.

떠나기 전에 주서천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아쉬움 하나 없이 떠났다.

그녀 답다면 그녀 다웠다.

“장강이라…… 바다와는 역시 조금 다르네요.”

적수수가 이무기의 몸체에 앉아 다리를 첨벙이면서 주변을 구경했다.

남해용문, 그리고 해남검파는 평화 유지 목적으로 일부 잔류하기로 했다.

중원은 전란의 시대를 복구하느라 눈코 뜰 틈 없이 바빴다.

평소에도 손을 대기 힘든 장강에 신경 쓸 틈이 없다 보니, 적어도 그럭저럭 안정화되기 전까지 도움을 받기로 했다.

물론 대가도 정당히 지불됐다.

암천이라는 격동을 겪은 무림은 변화를 겪었다.

정사인은 하나가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처럼 얼굴을 보면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진 않았다.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불편함을 보일 뿐.

확실히 전과 달리 다투는 일은 줄어들었다.

이는 정파의 기둥, 북두소림의 한 행적 때문이었다.

“뇌승도 서문이진, 그를 비롯한 서문세가는 암천회주에게서 소림이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림과는 관여되지 않은 사람들을 구제해 줬지요. 부디, 무림을 구한 영웅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소림방장 홍진은 전란의 막이 내리자마자 적극적으로 당시에 있었던 일을 풀어 주변에 알렸다.

명예를 중시하는 정파로서 도망쳤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임에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민간인들을 구한 공도 서문세가로 돌렸다.

냉정히 말한다면 전력을 잃고 약해진 서문세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기억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현 세대에서만큼은 뚜렷하게 인식됐다.

그리고 어느 날, 홍진은 방장의 업무를 사형제들에게 맡기고 호위로 나한 몇몇과 함께 산을 올랐다.

“이건……”

등산 도중, 나한이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뭐라도 있는 게냐?”

앞이 보이지 않는 홍진이 물었다.

나한이 뭐라 답하려 할 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앗, 스님이다!”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스님, 마침 잘 왔어요! 부탁할 일이 있었거든요!”

남자아이는 홍진의 소매를 잡아당기곤, 어디론가 이끌었다.

“부탁할 일이라니…… 그보다, 이 추운 날씨에 산중에 있으시면 위험합니다, 어린 시주.”

남자아이는 홍진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그를 이끌었다가, 멈췄다.

“아……”

등 뒤의 나한들이 무언가 본 듯 감탄을 흘렸다.

“스님, 스님. 스님들은 장례도 치르시죠?

그러니 부디 이 사람들을 달래 주실 수 있을까요?”

“이 사람들이라니, 기척은 없……”

홍진은 의아한 듯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남자아이의 기척을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었다.

“얼마 전에 이 근처에서 큰 싸움이 있었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마을도 휘말릴 뻔했는데 이 사람들이 우리를 구해 줬대요! 영웅이죠?”

“아아……”

홍진은, 이 장소가 어디인지 단숨에 이해했다.

나한의 감탄사가 어떤 건지 알았다.

앞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에 덮인 무덤들이 보였다.

“어떤 사람들인지는 잘 모르지만 무림인이라는 모양…… 스님? 왜 울어요?”

몸에 힘이 풀렸다.

가슴에 무언가가 벅차올랐다.

‘당신이…… 틀렸소.’

홍진은 손에 염주를 꽉 쥐고, 입을 다물었다.

새하얀 눈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서문이진, 그대가 틀린 거요.’

홍진은 희생이 기억될 것이라 말했다.

서문이진은 희생이 잊혀질 것이라 말했다.

정파와 사파는 끝까지 서로 이해하지 못했다.

“앗, 혹시 공양이 없어서 그래요?

겨울이라 그래서 드릴 게 없는데…… 그래도 저 항상 부처님에게 절해요! 착한 일도 많이 해요!”

목숨을 잃기 직전에도 각자의 주장을 밀어붙였다.

“엄마 말도 잘 듣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홍진은 울음을 터뜨리면서 기쁜 듯이 웃었다.

“보십시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 * *

전란의 막이 내리면서 몇몇 무림단체 역시 변화를 겪었다.

당가는 그중에서도 격변을 맞이했다.

당가는 흑영부가 사라지면서 권세를 잃었다.

또한, 당명인의 악재까지 껴서 밑바닥까지 추락했었다.

한때 암천회 의혹을 받긴 했지만, 당유기가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한 데다가 후에 당혜가 전란에서 여러 방면으로 활약해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사천, 당가.

탓탓탓!

문 바깥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콰앙!

가주의 집무실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그리고 곧 안으로 험악한 분위기의 무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무슨 뜻이지?”

책상에 앉아 집무를 보던 당유기가 머리를 들었다.

당가의 무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사이로 당혜가 걸어 나왔다.

“독운인무.”

“무슨 소리지?”

당유기가 태연하게 물었다.

“모른다는 건 아니겠죠?”

“사람의 몸 안에 독을 불어 넣고, 산 채로 녹여 제작한 독연이 아니더냐. 태독인작처럼 마도이세에서 저지를 법한 인륜을 저지른 금기지. 그것이 어쨌다는 거냐.

암천회의 잔당, 천추의 수하들이 또 사용해서 도움이라도 달라는 것이냐?”

“아니요. 조사 결과 독운인무는 합비의 북부 평원에서 사용된 것이 전부에요.”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데 이 소란이냐.”

“그 독운인무의 출처가 확인됐거든요.”

“출처? 출처라면 천추……”

“천추가 가지고 있던 독운인무는 제작한 것이 아니라, 당가의 독고에 보관된 걸 빼돌린 것이에요.”

“헛소리.”

당유기는 논할 것도 없다는 어투로 즉답했다.

“헛소리가 아니야, 당유기.”

당혜의 말투가 바뀌었다.

“천추가 흑영부 시절 작성한 장부가 발견됐거든.”

“네 이년! 아비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애초에, 정파의 배반자가 남긴 기록 따위 믿……”

“끌어내.”

당혜가 무사들에게 턱짓했다.

“죄인을 포박해라!”

당가의 호위대장, 원대식이 외쳤다.

이에 당가의 무사들이 당유기를 억지로 끌고 와서 앉혔다.

“미친년!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느냐!”

“당가의 가주, 전(前) 흑영부의 수장, 독왕(毒王).”

당혜는 아비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또한, 권세를 위해서 인체 실험까지 행한 악인.”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하는구나!”

당유기의 얼굴이 흉악해졌다.

“옳거니, 네 이년. 가주의 자리에 눈이 멀어 친아비를 모함했겠다! 여봐라, 지금 당장……!”

당유기는 진노하여 외치다가 멈칫했다.

‘저 눈은……’

확실히, 당혜는 당유기의 친딸이었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혹함.

빛을 잃고 꺼멓게 죽어 버린 눈빛엔 약간의 정도 없었다.

당유기는 그 눈길을 보고 깨달았다.

독운인무의 진실이 어떻든 상관없다.

지금의 그녀라면 없던 명분도 만드리라.

“이 시간부로 당유기의 가주직을 박탈 근맥을 절단하고 단전을 폐해 뇌옥에 집어넣어.”

“아가씨의…… 아니, 가주님의 명을 받습니다!”

“적폐를 청산하는 일 또한 당가를 위한 일이야.

가문을 위한 일이니 무척이나 기쁘겠네, 당유기.”

당혜는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당혜는 당유기의 괴성을 뒤로하고 복도를 걸었다.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도 끝났어.

이제, 나 혼자 당가를 이끌어 가면 되는 거야.’

당혜는 역대 최연소로 가주에 올랐다.

가문 내에서도 전란에서 부관으로 다양한 공을 세워 영웅이 된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 나 혼자서……’

당유기의 경우 나이도 나이지만, 남궁위무가 죄를 뒤집어썼는데도 흑영부 시절 악행 의혹을 떨쳐내지 못해 사실상 지지가 전무했다.

정파의 어둠으로 수많은 배반자를 내놓은 만큼 흑영부의 일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사회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가주님.”

“용건.”

“가주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오신 분이 계신데요.”

“바쁘니까 돌아가라고 해.”

“그게……”

“무림맹주라도 온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그러면 돌려보내.”

“그게, 주서천 대협입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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