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으읏!”
암천회주의 입에서 신음다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압!”
주서천은 자세를 유지한 채로 검격을 연이어 쏟아 냈다.
암천회주만큼은 아니나 무서운 속도였다.
파바밧!
검신에서 태양 빛이 반사될 때마다 빛이 번쩍였다.
수십 개에 이르는 검광이 암천을 지우기 위해 비처럼 쏟아져 내리면서 정신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채재재재재챙!
암천회주도 손 놓고 당하지만은 않았다.
몸이 삐걱거리는 걸 참으면서 신속의 쾌검으로 대응해 막았다.
‘젠장!’
째애앵!
수 없이 이어지던 검의 세례가 끝났다.
동시에 황금 같은 기회도 날아간 걸 알게 됐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암천회주의 얼굴을 보았지만 역시였다.
“마음껏 되돌릴 수는 없는 모양이로구나!”
암천회주가 눈치했다.
세계의 시간은 되돌아가지 않는다.
암천회주가 아까 전 발을 굴리면서 낸 흔적이 그 증거였다.
본인이 아닌 타인만 회귀시키는 것이라면, 암천회주만 검을 휘두르기전의 무방비로 돌리면 그만이다.
반격이라는 ‘결과’가 사라지니 손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주서천!”
암천회주의 팔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라는 듯 퓻 하고 피가 터졌다.
그 역시 전과 같은 능력을 내지는 못했다.
육체에 축적된 피해량, 그 외에도 외경의 진입으로 인한 부담감 탓에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크하아아압!”
검은 위가 아닌 아래를 향하더니, 지면에 닿을락 말락 저공비행하다 직각으로 솟구쳐 턱 밑을 노렸다.
전처럼 인지할 수 없을 정도의 신속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위력은 변화 없이 무식했다.
콰아앙!
턱이 세로로 쪼개지기 직전, 검을 정중앙으로 끌어온 덕에 가까스로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부웅.
그러나 그 괴력은 전부 소화하지 못했고, 결국 몸이 강제적으로 붕 떠오르며 유성이 되어 날아갔다.
“커허억!”
몸이 아프다.
내장이 저릿했다.
뼈가 아파 왔다.
주서천은 화살처럼 쏘아졌다가 담에 충돌했다.
콰앙!
수많은 장인의 손길이 지나쳐간 담은 마치 두부가 된 것처럼 뭉개졌다가, 다시 부풀어 오르며 박살 났다.
시야도 빙글빙글 돌면서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었다.
어떻게든 멈추어 보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대로 내부에 자리 잡은 건물에 처박히나 했다.
그러나 주서천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소리쳤다.
“소령!”
파아앗!
대나무 숲을 뚫고 온 건 주서천 혼자만이 아니었다.
여덟 개의 문 내부에 별동대 무리가 보였다.
다들 하나같이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오직 소령만이 움직였다.
타다닷!
소령 역시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렸다.
작은 체구의 여아는 없고 성인 여성이 있었다.
잘 단련된 일자 복근 위로 고문자가 검게 일렁였다.
소령은 대리석으로 포장된 길을 극성의 유령보로 소리는커녕 기척 하나 없이 달렸다.
옆에서부터 보면 빙판으로 된 내리막길을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몸에 딱 달라붙은 옷은 바람에 흩날리는 일이 없었다.
쇄골 언저리에 닿는 짧은 머리카락도 멈췄다.
몇 번이나 도움을 주었던 유령은 늘 그랬듯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망 위가 아닌 벽을 타고 달려 나가 중간 높이쯤에 멈춰 서서 자세를 잡았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보이도록 눕혔다.
흑철에 감싸진 왼손은 손등을 받쳐 모았다.
양갓집 규수라면 배꼽 앞에 가지런히 모았겠으나, 그럴 신분도 상황도 아니었다.
좌측 골반 위에 올려 도착할 사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치 일부러 준비한 연극인 것처럼, 담을 부수고 날아갔던 주서천이 공중에서 화려하게 제비를 돌았다가 손바닥 위에 도착했다.
쿠와아앙!
별똥이 추락한 것 같은 굉음.
담이 부서지면서 충격을 분산했음에도 불구하고 팔 근육이 다 떨려 왔다.
무릎은 갑작스러운 무게에 무너질 뻔했고, 허리도 꺾인 것처럼 구부려야만 했다.
어깨는 삐걱거렸다.
쩌저적!
짓밟고 있던 벽의 일부도 금이 가면서 거북이 등껍질처럼 변했고, 그 위의 기왓장도 산산조각 났다.
그녀는 전신을 옥죄는 고통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자기 할 일을 했다.
“날려!”
척추와 동시에 꺾여 있던 무릎을 폈다.
그 뒤로 손에 받쳤던 유령곡주가 투창이 되어 날았다.
“하아아아!”
주서천은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하듯,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날아올라 검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당연한 말이지만 목표는 애꿎은 허공이 아니었다.
용이 승천하는 걸 가로막은 암천이었다.
“죽어라!”
암천회주도 진저리 난 듯 외쳤다.
그러곤 두 뼘 정도 위에서부터 아래로 휘둘렀다.
콰아앙!
전부터도 마찬가지였지만 더 이상 금속끼리 부딪치면서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충돌할 때마다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것처럼 굉음과 폭음이 뒤섞여 난장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카학!”
회귀로 되돌렸던 육신이 직각으로 곤두박질쳤다.
지면에 처박혀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대신 등이 활처럼 굽어지면서 몸 또한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리고 떠오른 입이 흙바닥과 입을 맞추기 전, 암천회주가 공간을 이동한 것처럼 앞에 나타났다.
암천회주는 유언 하나 허용하지 않고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원수의 앞에 모습을 보인 건 회주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 주인인 유령곡주를 투창처럼 쏘아 내자마자 고민도 하지 않고 착지 장소로 뛴 소령이었다.
“꺼져라!”
천하를 농락했던 유령보도 암천의 앞에선 숨지 못했다.
회주는 같잖다는 듯, 소령을 무시하려 했었다.
흑철로 된 장갑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까짓 장갑 부수고 지나가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카가가각!
“막았다고?”
암천회주가 두 눈을 부릅뜨며 대경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몸 상태가 아무리 정상이 아니라고 한들, 무형강기를 상시로 두르고 있는데 베지 못한 것이 이상했다.
찰나의 순간,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한 가지 답을 내놓았다.
“만년한철!”
간야자의 손에서 새롭게 구성된 흑철장갑의 내구력은 무시무시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한들 그 암천회주의 일검에 잘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력도 분산시켰다.
이 이상 부딪치면 만년한철도 무리겠으나 그 정도까지 갈 리가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때다!’
유령 가라사대, 암살이란 적을 속이는 것.
조금이라도 한눈을 판 사이를 노려야만 했다.
온몸이 더 이상 무리라고 절규하고 있었으나 무시했다.
제대로 휘두를 수도 없는 용연은 과감하게 버렸다.
그 대신, 소맷자락 안을 움직여 암기를 꺼냈다.
팔에 묶인 천잠사가 스르륵 풀린다.
이 척 가량에 먹빛을 머금은 각도가 흘러내리며 손에 잡혔다.
‘모든 걸, 동원해라!’
이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뭐든지 좋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걸 전부 쏟아냈다.
생각보다 큰 흑철장갑이 있어 각도를 꺼내는 것이 도움이 됐다.
시야를 가려 줘서 은밀 행동에 성공했다.
칠각사의 뿔로 된 칼을 빙글 돌려 역수로 쥔 뒤, 감각만으로 팔과 연결된 근맥을 정확히 찔렀다.
푸우욱!
“크으읏!”
암천회주가 얼굴을 구기면서 신음을 토해 냈다.
끝을 내기 위해 검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감히!”
암천회주가 분노하면서 검이 아닌 팔을 휘둘렀다.
통나무 이상의 강도를 자랑하는 굵은 뼈가 흉기가 되어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소령의 흉부를 후려쳤다.
퍼억!
“……!”
소령이 숨을 쉬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춤을 추듯 일렁이던 고문자가 화려하게 빛났지만, 끝내 충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소령은 정통으로 후려 맞고 피를 흩뿌리면서, 물수제비처럼 지면을 수차례 튕겼다가 팔문에 처박혔다.
“우오오옷!”
그 광경을 볼 틈은 조금도 없다.
주서천은 소령을 대신해 고통을 토해 내듯, 목이 터지도록 외치며 암천회주의 턱 아래에 주먹을 꽂았다.
퍼어억!
“커흐윽!”
암천회주가 기어코 손에서 검을 완전히 놓았다.
머리와 허리는 뒤로 꺾이듯 젖혀졌다.
시커멓게 물든 자위 중간에 자리 잡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서천은 부도옹(不倒翁)처럼 상체를 오뚝 일어서면서, 반동을 주먹에 실어 앞으로 쭉 뻗었다.
쾅!
“커허억!”
암천회주가 피를 울컥 토해 내면서 밀려났다.
주서천은 흙과 피로 얼룩진 손으로 지면을 짚었다.
뾰족한 조각이 굳은살을 파고 들었지만 상관없다.
대지를 힘껏 밀어내면서 아슬아슬한 몸을 일으켰다.
“암천회주우우!”
온몸에서 불협화음이 났다.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지만 억지로 기운을 짜내 일으켰다.
암천의 주인에게 파고들어 얼굴에 다시 한번 주먹을 꽂아 주려던 찰나였다.
“네 이놈!”
암천회주 역시 오뚝 일어섰다.
부서지고, 망가진 다리를 철심으로 삼아 지면에 박아 두고 상체를 세웠다.
휘릭!
머리카락이 흩날리면서 주먹만 한 구멍이 났다.
주서천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암천회주는 상체와 하체, 곧 육신을 받치고 있었던 다리 하나를 땅밑에서부터 꺼내 차올렸다.
콰앙!
주서천이 컥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작아진 동공에 비춰진 건 갈비뼈를 박살을 낸 무릎이었다.
다음 공격을 이으려던 주먹이 힘을 잃고 너울거렸고, 만신창이인 몸 역시 반대편으로 넘어가려 했다.
“크하아아아!”
암천회주는 포효했다.
끝을 내기 위해 힘을 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허리 위에까지 올렸던 다리를 원래의 위치로 되돌린다.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기며 앞으로 걷는다.
찢어진 근육, 꿰뚫린 근맥.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움직이지 말아야 할 것이 여전히 괴력을 내뿜었다.
좌완을 내빼듯 뒤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밀어붙였다.
목표는 쓰러져 가는 주서천.
넓게 열린 가슴 정중앙에 주먹을 철퇴처럼 내리꽂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일어날 수 없다면……!’
주서천은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무게를 늘렸다.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던 몸이 벌러덩 넘어졌다.
그러나 아직 모든 걸 내려놓은 건 결코 아니었다.
뼈가 몇 개나 엇나간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 그대로 하체를 위로 힘껏 차올렸다.
쐐액!
몸이 거슬러 올라가는 걸 확인.
그대로 오른 다리에 미약하게 남은 힘을 집중해 채찍처럼 휘둘렀다.
퍼어억!
혼신의 돌려 차기가 회주의 왼팔을 막아 냈다.
“크으윽!”
입에서 절로 나오는 신옴.
“네놈 따위가!”
암천회주가 포효한다.
그리고 끝을 알리는 듯 두 눈 중 하나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꺼멓게 물들었던 흰자위는 사라지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이 보이는 충혈된 눈이 나타났다.
‘부숴!’
우드드득!
정강이에 닿은 팔뚝이 꺾였다.
살과 근육에 둘러싸인 뼈가 두 조각나더니, 결국 다리가 팔을 밀어내면서 얼굴을 후려갈겼다.
“컥!”
암천회주가 외마디 비명을 흘리며 밀려나면서도 다시 자세를 잡기 위해서 몸을 틀었다.
주서천 역시 방금 전의 일격을 반동으로 삼아서 몸을 틀고, 제자리에 되돌아와 멈춰 섰다.
두 절대고수는 서로를 놓치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았다.
“암천회주우우우!”
“주서처어어어언!”
더 이상, 대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묘리도 없다.
의지로 법칙을 뒤흔드는 심상의 구현도 없었다.
서로 근간이 되는 검은 교차한 채 땅에 박혔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정상이 아니었다.
맥박은 멈춘 것처럼 늦어지고, 피는 강처럼 흘렀다.
근맥은 너덜너덜하고 뼈는 부서졌다.
상황을 생각해 보면 물러서는 것이맞다.
물러서서 누구보다 먼저 검을 잡아야한다.
자하검결과 선천검법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하지만, 용납하지 않았다.
눈앞의 적에게만큼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네놈만큼으으은!”
그동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의 이성, 판단력은 당장 등을 돌려서 검부터 줍고 공격하라고 외쳤다.
혹은 소령, 또는 주변의 무림인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다수 대 일로 이기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런데 싫었다.
어쩌면, 이게 그토록 비웃었던, 밥먹여 주는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알고 있는데도 물러서지 않았다.
“네 녀석만큼으은!”
암천회주도 물러서지 않았다.
신속도 사용하지 않았다.
아까 전처럼 등 뒤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주서천과 암천회주.
두 절대고수, 아니.
두 무림인이 동시에 주먹을 휘둘렀다.
오른손과 왼손.
그 주먹이 교차하면서 동시에 양뺨에 도착했다.
콰앙!
“저게…… 뭐야.”
압도당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잘렸던 팔이 되돌아오는 등 여러 일이 있었으나, 워낙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라 환각으로 치부했다.
무엇보다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느리지 않았다.
외경에 진입한 순간부터는 좇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는 곳에 나타나 볼 수 있었던 것뿐이었다.
퍼어억!
“카흑!”
“커흑!”
머리가 꺾이듯이 책 돌아갔다.
더 이상 무공도 뭣도 아니었다.
초식이 아닌 주먹질에 불과했다.
분명 그동안 보여 준 신위에 비해선 보잘것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리는 나무뿌리처럼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피부 위로는 긴장으로 인해 땀방울이 떨어졌다.
군중의 무리, 무림인들은 말로 헤아릴 수 없는 분위기에 사로잡혀서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상처를 입어도 맹수는 맹수.
아니, 도리어 상처투성이기에 그 흉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림 연합도, 암천회도.
적의 수장이 만신창이가 됐는데도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지켜만 보았다.
“검신!”
운광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별호만 불렀다.
돕고 싶은 마음만은 굴뚝같으나 몸이 좋지 않았다.
휘둘려 맞고 손목이 꺾인 검수가 무엇을 하겠나.
괜히 참견했다가 훼방이라도 놓는다면 곤란하다.
그 외의 상천도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냉악비는 팔이 부서져 들기조차 힘들었고, 사도천주나 무곡은 각각 뇌와 옆구리를 다쳤다.
“사형……”
낙소월 역시 애가 타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사랑하는 이가 엉망진창이 되어 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안 찢어질 수가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뭘 보고만 있는 거야!”
한 무림인이 결국 보다 못해 나서서 돕자는 듯 몸짓을 보였다.
그러나 따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파인이건 사파인이건, 하나같이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정면에 눈길을 고정한 채 꼼짝도 안 했다.
“이봐, 다들 뭣들 하고 있……”
무림인이 추궁하듯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이었다.
“닥쳐.”
또 다른 무림인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말했다.
“대장전, 아니 비무.”
한 사람이 말을 끊고, 또 다른 사람이 말을 잇는다.
“보고 있는 중이잖아.”
주서천과 암천회주, 두 사람 다 한계였다.
당장 정신을 잃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러나 둘 다 끝까지 의식의 끈을 붙잡고 부딪쳤다.
“왜냐!”
굳센 주먹이 곧게 뻗어 온다.
바보같이 맞아 줄 생각은 없었기에 어깨만 살짝 틀어 피했다.
“도대체 왜!”
곧장 왼손을 번개같이 뻗어 회주의 멱살을 쥐어 잡은 뒤, 힘껏 잡아 당겨와 이마와 이마를 부딪쳤다.
쿠웅!
“왜 이렇게까지 방해하느냐!”
암천회주는 뼈에 사무친 원한을 토해 냈다.
오랫동안 많은 걸 준비해 왔다.
혹시 몰라 조심, 또 조심해서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틈 하나 없을 것 같던 계획이, 실행하고 몇 년도 채 되지 않아 박살 났다.
“왜냐고?”
주서천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멱살을 잡은 채로 머리만 뒤로 젖혔다가 힘껏 내리쳤다.
“귓구멍 열고 잘 들어!”
빠악!
“사람들이 죽어!”
전란의 시대.
열여덟 살의 해, 흉마의 무덤이 발굴되고 일 년 동안 지속됐던 칠검전쟁으로 인해 전란이 개막한다.
그 후 정사와 마도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약 십 년 동안 흑막의 존재조차 모른 채 처절하게 싸웠다.
암천회가 모습을 드러낸 건 주서천이 이십팔 세 무렵.
이 시점을 기준으로 전란은 줄어들기는커녕 심화된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단 말이다!”
남녀노소 무작위로 죽었다.
무림인은 물론이요 아무런 연관 없는 백성도 목숨을 잃었다.
추억이 아닌 악몽.
과거를 연상시키는 향은 매화가 아닌 피였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에 시체가 쌓였다.
전무후무한 전란의 끝을 맺은 건, 주서천이 노년에 접어들고도 칠순이 지나서였다.
오십 년.
오늘날로부터 약 오십 년이 지나서야 현세의 지옥이 끝나고 막이 내렸다.
암천회주는 인간의 수명을 진작 초월해 오십 년 동안 무림을 유린하고 농락하고, 짓밟았다.
“막아야 하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그게 당연한 일이니까!”
그 시작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영웅의 삶을 동경하지 않았다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학살과 비극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집념이 원동력이 됐다.
잘못된 것이니까 막아야 한다.
그뿐이다.
“그런데 의미가 없다고?”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었다.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무림인이란, 정말로 무언가에 의미를 두는 걸 좋아하는 족속이로구나……”
암천회주가 낮게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답했다.
“잘 들어라, 무림인. 정도이니 사도이니, 마도니 혹은 대의니…… 사람을 죽이는 데 이유를 붙이는 건 너희 무림인이라는 족속들밖에 없다.”
어두운 빛이 흘러나오는 안광은 고요했다.
“군대란 인간을 잡는 흉기요, 전쟁은 덕을 거스르는 것이며, 장수는 죽음을 내리는 관리다.
역사상 좋은 전쟁, 나쁜 평화란 있었던 적이 없다.
단언컨대, 전쟁은 악의 집합체이며 그 시작은 누군가를 죽이는 걸로 시작된다.
살인에 신념을 갖다 붙이지 마라.”
무언가에 미쳐 버린 사람의 눈 따위가 아니었다.
얼음처럼 차가웠고, 호수처럼 잔잔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데 숭고함이나 고결함을 붙이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무감각해지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속이려고 변명을 찾는 자거나 혹은 병기에 불과한 병사들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한 지휘관일 뿐이다.
무엇을 위해 살고, 혹은 어떤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라고? 헛소리를 하는군.
그따위 취급을 받는 것조차 역겹다.”
진심으로 불쾌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심연밖에 보이지 않은 눈동자에도 불쾌함이 물씬 풍겼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학살을 일으켰냐고?”
입가에 지어진 냉소가 사라질 생각이 없었다.
“악은 악이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합리화할 수도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다!”
암천회주는 주서천의 발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무의미한 것에!”
콰직!
발등을 노렸지만 빗나갔다.
확실히 힘이 빠졌는지 아까와 달리 지면이 부서지진 않았다.
“굳이 의미를 두지 마라!”
손영관, 아니 암천회주는 무림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또 누구보다도 무림인 다웠다.
쐐액!
잘 단련된 어깨가 크게 열렸다가 좁혀진다.
상처투성이인 주먹을 주서천의 오른뺨에 꽂았다.
퍼억!
목이 팽그르르 돌아갔다.
목뼈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이었다.
그대로 이어서 다음 주먹을 날리려 할 때였다.
“그래, 네 말대로다.”
바람이 아닌 충격에 흩날리는 새하얀 머리카락.
그 사이에 우직함 가득한 안광이 빛났다.
“네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주서천은 묘한 말을 하며 오른팔을 뒤로 꽉 잡아당겼다.
생명의 줄기를 모두 쏟은 듯, 주먹에 힘을 다 실었다.
손가락은 퍼렇게 물든 지 오래였다.
“그래, 그 말대로……”
콰아아아아앙!
암천회주가 화답하다 말고 목이 팍 꺾였다.
언제나 여유나 오만을 보이던 눈이 커졌다.
주먹이 작렬한 뺨은 파르르 떨렸고, 코뼈가 뭉그러졌다.
어금니 하나 역시 부러졌다.
그리고 그걸 입에서 뱉기도 전, 그다음 권격이 흉부에 꽂혔다.
퍼억!
“커허억……!”
암천회주가 몸을 웅크렸다.
주서천은 앞으로 쭉 뻗은 주먹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 그다음 동작을 이으려고 빈틈을 보였다.
‘걸렸다!’
암천회주가 머리를 떨군 채, 입가에 웃음을 그렸다.
‘역천!’
머리가 타오를 듯이 아파 왔다.
흰자위가 다시 검은자위로 되돌아갔고,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이때만을 노렸다.’
동시에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암광을 번쩍였다.
역천의 사용은 이미 한계였다.
그러나 딱 한 번, 일격 정도는 가할 수 있도록 만약을 위해 남겨 두었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심계였다.
천하에 대적할 힘을 얻었다.
범인보다 비상한 지력까지 지녔다.
그뿐만 아니라 방심까지 버렸다.
무림이 괜히 암천회주를 쓰러뜨리기까지 오십 년이란 세월이 걸린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무림이 약한 게 아니다.
암천회주가 터무니없는 괴물이었을 뿐이었다.
“차라리, 검을 쥐었어야 했다.”
암천회주가 작게 속삭이면서 외경에 들어섰다.
세상이 다시 느려진다.
혼자만이 움직였다.
뜨거워졌던 피가 차가워졌다.
천하를 괄시할 힘이 솟았다.
“잘 가라.”
쐐애애액!
공기의 충으로 이루어진 대기가 둘로 갈라졌다.
주먹이 한순간 검과 같이 변하면서 구멍을 냈다.
피할 곳은 없다.
공격을 위해 접근한 것이 문제였다.
물러서지 않은 자존심을 비웃으며 승리를 예상했다.
그런데……
“아니.”
주서천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고서 안 쥔 거야.”
세상이, 천하가 뒤로 돌아갔다.
“……이럴 수가.”
주먹이 되돌아갔다.
곧게 폈던 척추가 구부러졌다.
시야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세상 속에서 오직 한 사람, 암천회주만이 과거로 돌아가며 삼 회 차에 진입했다.
“잘 가라, 암천회주.”
다음 동작을 잇는다.
주먹을 꽉 쥐었다.
영약의 기운이건 자하진기건 선천진기건 전부 짜냈다.
무엇을 실었는지도 잘 기억 나지 않는다.
그냥, 힘을 쥐었다.
그리고, 강하게 내질렀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
“안……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소리가 터졌다.
누군가가, 주먹에 맞는 소리가.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간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수천 명에 이르는 무림인들로 가득한데도 적막하기만 했다.
기분 나쁠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사람들은 정중앙을 지켜봤다.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없었다.
숨도 쉬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하아, 하아……”
적막감을 깬 건 누군가의 숨소리였다.
무림 연합도, 암천회도 아니었다.
군중의 그 누구도 아니었다.
이목이 집중된 장소에서였다.
서 있는 자와 누워 있는 자.
전자는 화산파의 사대제자였고 후자는 암천의 주인이었다.
백발의 청년은 흑발의 장년을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근처에 떨어진 검을 당겨와 마무리를 했다.
심장을 세 번 찌르고, 목을 베어 확인 사살을 한다.
그 후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가, 이내 손에 쥔 검을 위로 들면서 무어라 말했다.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