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章 (246/254)

“제갈승계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천기는 온갖 기술에 능했다.

기관 역시 그중 하나였다.

흉마의 무덤부터 시작하여 은거지에 기관을 설치해 침입자를 막았으며, 또 노출되는 것조차 막아 두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기문진 아래에……?”

항시 냉정함을 잃지 않던 제갈수란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과 불신 어린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기문진이란 건 상상 이상으로 민감하다.

풍수지리부터 시작해 주변의 지형지물에 영향을 받다 보니, 어느 하나 잘못 건드려도 엉망이 된다.

“이, 이런!”

“안 돼!”

여기저기서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약 일 년이란 시간이 있었다곤 하지만, 최초부터 설계된 것도 아니고 기문진 아래에 기관을 설치했다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제갈수란은 혼란 속에서도 빈틈을 찾았다.

분명 허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축하한다, 주서천!”

대나무 숲 너머, 천기가 팔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올 때쯤에는,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

“천기.”

주서천은 천지가 뒤흔들리는 진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휘청이기는커녕 똑바로 서서 그를 바라봤다.

“나 역시 널 우습게 보지 않는다.”

주서천은 천기를 단 한 번도 비웃지 않았다.

“너라면, 네놈이라면 제갈 소저의 능력을 꿰뚫어 보고 그 이상의 것을 준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서천은 방심하지 않는다.

주서천은 자만하지 않는다.

주서천은, 언제나 전력을 다했다.

“내 장담컨대, 중원, 아니 천하를 뒤져도 아마 너를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전략이나 모략, 그 외에도 첩보전이나 행정부터 시작해 학문이나 기문진, 기관까지 정점에 서 있었다.

“지상에는 천기라는 괴물이 있었다.”

암천회에 괴물은 둘, 회주와 천기다.

무력도 무력이지만 두뇌 역시 범재를 넘어선 암천회주가 괜히 천기의 계획을 따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제갈세가의 천재를 보냈다.”

주서천은 천기를 똑바로 바라봤다.

“헛소리.”

천기의 입가에서 웃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갈승계를 믿는 것이라면 헛된 꿈 깨라.

오늘 새벽만 해도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설사 제갈승계라도 해도 하루, 아니 고작 한두 시진 내로 해제할 수 있는 것이……”

천기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

제갈수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주변인들 역시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소리가……”

“……멈췄다?”

“흔들림도…… 멈췄어.”

파도처럼 출렁이던 대나무가 힘을 잃고 멈춰 갔다.

반동이 사라져 가며, 동시에 흔들림도 깨끗이 사라졌다.

“아니야……”

천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럴 리가 없어……”

목소리가 불안으로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묻어나는 눈은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그럴 리가 없단 말이다!”

끼익.

대나무 숲의 정중앙, 바닥에 숨겨져 있던 둥근 문이 위로 올라왔다.

“아, 재밌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머리를 꺼낸 건, 입가에 만족이 가득한 미소를 지은 제갈승계였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무사히 성공…… 히익!”

제갈승계가 무심코 주변을 둘러봤다가 기겁했다.

“아, 아줌마! 아직, 아직 나올 때 아니에요!”

“뭔 소리야. 빨리 안 올라가? 무겁다고.”

“으악!”

초련이 제갈승계를 밀어 위로 올렸다.

“……”

좌중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제갈승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머쓱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전란의 시대, 천기는 기관지술에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걸 이용해 무림을 농락했다.

‘그 천기이니 분명 기문진뿐만 아니라 기관지술도 운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려 약 두 달 전, 주서천은 산동곡의 유령들에게 연락해 누군가를 데려왔다.

유일한 대항마, 만각이천이라 불렸던 제갈승계다.

제갈승계는 거의 반 억지로 유령들에게 끌려와선 울상을 지은 채 주서천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진정시키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적의 소굴 한복판에 부르시다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형님, 그냥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천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관이 있을 거야.’

‘무림의 평화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형님!

정파의 중심지, 합비의 본부를 탈환합시다!’

제갈승계는 용맹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겁이 많은 것부터 시작해 사람과의 교류 능력도 떨어진다.

밖에 나가는 것보다 방 안, 혹은 작업실에 박혀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기관만 관련되면 이렇게 눈을 반짝이면서 어디든지 따라갔다.

주서천이 보기에도 여러모로 괴이한 성격이었으나, 그 점이 또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어쨌거나, 제갈수란 한 사람만으로는 천기라는 이름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역부족이라 생각했다.

“나 역시 설마 살짝만 건드려도 잘못되는 기문진 아래에 기관을 설치해 둘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 분야에 높은 성취를 이룬 건 둘째 치고, 제갈수란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낸건 조금도 예상, 아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너라면 분명 승계를 상정 하에 두고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다. 천재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걸 해냈다고 한들, 내가 아는 너라면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경계하고 있었겠지.

그래서 일부러 사전에 조사하지 않았다.”

“네 이놈, 주서천……!”

주서천의 추측은 정확했다.

천기는 기관진과 기관 장치, 암성관(暗域關)을 준비해 놓고도 어제까지도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암성관은 심혈을 기울여 설치한 만큼 자신작이었으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보안과 경계를 철저히 했다.

“만약, 사전에 보낸 탓에 눈치라도 챘다면 계획을 수정하여 또 다른 대비를 해 골치가 아파졌을 거야.불확실한 요소를 만드느니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결전이 시작되기 두 시진 전, 승계에게 호위를 붙여보냈지.”

주서천은 천기의 능력을 그 누구보다 인정했다.

암천회의 병적일 정도의 철저함이나 혀를 내두르는 독함의 원인은 바로 눈앞에 있는 군사 탓이었다.

천기는 칠성사의 수뇌, 도감부장, 그리고 암천회주에게조차 수십 차례 방심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만약 수하들이 실수하거나 잘못된 생각을 할 경우 가차 없이 쳐냈다.

암천의 군사에게 있어 수하란 병장기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부실해 보이면 버리고 다른 걸 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에 부담 갖지 않고 이를 행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철저함으로 그동안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제갈승계를 최후에 보냈다.

“아무리 너라고 한들 약 일 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걸 한두 시진만에 해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주서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천기의 능력이 부족했던 게 아니다.

다음 수를 내다보지 못한 실책 따위도 아니었다.

암성관이 고작 한두 시진 만에 해체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예측이 아니라 과대망상이다.

“혀, 형님. 제가 여기 있는 건 아시죠?”

제갈승계가 괜히 자극하지 말라는 듯 필사의 시선을 보냈다.

입가에 맺혔던 웃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주…… 서…… 천……”

천기가 몸을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휴! 내가 아니구나!’

제갈승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갈…… 승계……!”

천기가 머리를 든 채 두 눈을 부릅떴다.

흰자위에 핏줄이 툭 튀어나오고, 안광은 형형하게 빛났다.

“이 개새끼들!”

어떤 때에도 얼음처럼 차갑던 이성이 분노로 녹아내렸다.

“히, 히익!”

제갈승계가 자그마한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죽여 버리겠다!”

천기가 품 안에 손을 찔러 넣어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구를 꺼냈다.

“어림없다!”

주서천은 천기의 움직임을 보고 옳다구나 하고 달려들었다.

혹시나 또 환영이 아닐까 싶었지만, 최후에 벽력탄으로 추정되는 걸 꺼내는 걸 보니 허상이 아닌 실체가 확실했다.

“막아라!”

“천기 님을 지켜라!”

칠성사, 개양성의 고수가 다급하게 외쳤다.

‘목숨을 걸어서 막는다!’

주서천을 감히 어떻게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목숨은커녕 손가락 한두 개 자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해 몸을 던졌다.

“초련, 그리고 산동곡! 승계를 지켜라!”

칠성사병 따위는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꼽 아래에서 실자락처럼 뽑아진 진기가 다리를 타고 용천혈, 발바닥에서부터 터지듯 뿜어졌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이 추진력을 얻고 단숨에 개양성 고수 무리를 지나쳤고, 검광 또한 뒤를 따랐다.

크악!”

“컥!”

겉만 보면 신체 능력을 극대화하여 검을 고속으로 휘두른 것처럼 보이나 아니다.

해남일검류였다.

일초식뿐이나, 몇 번이나 연달아 펼쳤다.

워낙 빨라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주서천은 마치 공간과 공간 사이를 접은 것처럼 천기의 앞에 이동해 벽력탄을 쥔 손목을 붙잡았다.

우득!

“크아악! 주서천, 이 개새……”

“이렇게 얼굴을 맞대니 얼마나 반갑냐.”

주서천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농이 들어간 말투와는 달리 차갑기 그지없었다.

눈매는 매의 눈처럼 매서워졌고, 그 안의 눈동자에선 한기가 흘렀다.

입가엔 약간의 웃음조차 없었다.

“자라.”

퍼억!

“컥!”

천기는 복부에 전해지는 충격에 두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아, 안 돼!”

“천기 님께서……”

무림의 기둥이 소림사요, 희망이 주서천이라면 천기는 암천회의 희망이자 하나뿐인 사령부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사령부가 붕괴됐다.

온 무림을 뒤져 봐도 천기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암천회도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항복해라, 암천회.”

주서천이 천기를 어깨 위에 올린 채로 말했다.

“……”

암천회의 무인들은 의견을 묻듯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곤 무언가 다짐한 듯 각자 손에 쥔 병장기를 들며 살의를 내뿜었다.

“천기 님이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 비상시의 대처 방안을 따른다.”

“주서천은 천기 님을 죽이지 않았다.”

“천기께서 말씀하신 대로다. 대처 방안 열세 번째를 따른다.”

암천회의 무인, 칠성사병 무리가 재전에 들어섰다.

“허, 참!”

“독한 새끼들!”

연합 소속 무인들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

주서천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제갈 소저! 내부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일각…… 아니, 반 각도 안 남았어요”

주서천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까닥이고, 목소리를 높여 명령을 내렸다.

“제갈 소저를 따라 본부 내부를 향해 돌파한다!

모사미봉, 그리고 기룡은 영순위로 호위하라!”

“명!”

“암천회의 무인들은 되도록 무시하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남아서 시간을 끌어라!

또한, 아직 기문진 안이니 웬만하면 움직이지 말 것!

후에 사람을 보내겠다! 뒤처지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알겠습니다, 대협!”

“좋아! 간다!”

* * *

와아아아아아아!

머리가 울린다.

귀청이 따갑다.

고막에 진동이 전해졌다.

검고 멋들어진 깃털을 자랑하는 매가 본부의 위를 선회했다.

샛노란 눈동자에는 참혹한 전장이 맺혔다.

“죽어랏!”

“뒈져!”

“크아악!”

“도와줘! 도와줘!”

무어라 말하는 것 같지만 참혹하게 울리는 비명 탓에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파악할 수 있는 말은 살의로 가득찬 말 그리고 죽기 직전에 죽음에 발버둥 치는 말 정도였다.

“그만!”

제갈상이 오른손에 쥔 부채를 들어 외쳤다.

“물러나라!”

땅 위를 가득 메운 팔천의 연합군이 곧장 반응하며 물러났다.

암천회는 굳이 쫓지 않았다.

“끝인가?”

여덟 개의 문 중 중앙의 앞.

암천회주가 겨우 이 정도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괴물 같은 놈.’

제갈상이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연합군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정사, 그리고 새외의 힘까지 통합됐다.

유례에 몇 없는 연합체였다.

그러나 암천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적으로 반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무림 연합도 암천회도 팽팽한 접전을 보여 주었다.

특히나 문제인 건 눈앞의 괴물, 암천회주였다.

몇십 명이 합공을 퍼부어도 암천회주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주변의 도움 없이도 고수들을 상대했다.

“암천회주, 제안 하나 하겠다.”

“제안?”

암천회주가 흥미를 보였다.

“그래,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잔재주일 것이 뻔하나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는 하구나. 좋다, 들어는 봐 주마.”

“암천회주, 현명한 지도자인 그대라면 방금 전 격돌로 어떻게 될지 눈치챘을 터. 이대로 간다면 양측 다 승패는 둘째 치고 괴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암천회주는 무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전쟁이 끝난 뒤 평화가 찾아오면 보다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더 이상의 희생이 불필요하다는 건, 무림연합이나 암천회나 피차 마찬가지이지 않나.”

무림 연합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정파와 사파가 뼈에 사무친 원한을 잠시 접어 두고 손을 잡은 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였다.

갖은 고생 끝에 암천회를 무찌른다 할지라도 후에 찾아올 미래를 생각하면 희생이 부담스러웠다.

무림맹도, 그리고 사도천도 예전같지 않다.

온갖 일로 전력이 감퇴하였으니까.

“천군사 아니랄까 봐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암천회주도 그 점을 인정했다.

암천회는 천선을 시작으로 주요 수뇌부를 죄다 잃었다.

천기가 아니었더라면 진작 마비됐다.

무림을 정복할지라도 혼자 남는다면 무의미하다.

인재 양성에 힘쓰던 요광도 없어 더더욱 중요했다.

“제안은 대장전(代將戰)이다.”

“호오.”

용장 간의 일대일 정면 승부였다.

누군가는 이 대장전이 후한 말, 삼국(三國)에서부터 시작됐다곤 하나, 결코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국가 간의 전쟁에 책임자끼리 승부를 보게 할 리가 없었다.

개인의 무학이나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 무림이 낳은 개념인 비무의 일종이었다.

“암천회주, 상천칠좌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시오.”

무림맹주, 운광이 선수 쳤다.

‘더 이상의 희생은 낼 수 없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운광은 마음이 무거웠다.

요 몇 년 동안 몇 차례나 이어진 전쟁 탓에 많은 사람들이 지쳤고, 죽어 나갔다.

노자의 가르침을 받는 도가의 수장답게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또한 무림맹주로서도 향후의 시대를 위해서라도 피해는 최소화해야만 했다.

“무림맹주여, 도발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 누가 도사아니랄까 봐 어투가 빈약하구나.”

암천회주가 운광을 보고 비웃었다.

“좋다. 받아들이마.”

‘휴우.’

제갈상을 비롯해 연합의 수뇌부가 안도했다.

“대장전에 참전하실 분들은 나와주십시오.”

누가 나갈지 볼 것도 없었다.

무림맹주, 사도천주, 북해궁주, 그리고 검마였다.

무림 연합의 정점인 사인방이 앞에 나섰다.

‘암천회주……’

사도천주는 암천회주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먼발치에서 봤을 때도 보통이 아니라곤 느꼈으나 이렇게 직접 보니 숨이 턱턱 막혔다.

다른 상천과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느껴 본 긴장에 살이 다 떨렸다.

“대장전은 서로 간 방해 없이 비무 형식으로 진행하겠……”

콰앙!

제갈상의 말은 굉음에 묻혀 이어지지 못했다.

방금 전만 해도 밟고 있던 자리가 폭발했다.

암천회주는 없고 깊게 파인 구덩이뿐이었다.

지상에서 사라진 암천회주가 나타난 곳은 바로 사도천주의 코앞이었다.

쐐애액!

상천의 신체 능력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속도.

신속을 자랑하는 암천의 검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미친!”

사도천주가 물러나면서 욕을 내뱉었다.

“듣던 대로 굉장하도다.”

암천회주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방금 전 일검에 전력을 쏟아 냈다.

탐색전이 아니라 목을 찔러 즉살하려 했다.

그러나 사도천주에게 다가가자마자 이상 현상이 벌어졌다.

“패도제공!”

신체에 축적한 내공을 외부로 방출한다.

그저 허공에 날리는 게 아니라, 이 기운으로 일정한 범위의 대기를 지배하는 것이 가능했다.

패도제공을 대성하면 손에 얻는 능력이면서 곧 사도천주의 심상구현이기도 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도 철갑을 두른 것처럼 무거워진다.

무언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다.

“그러나.”

암천회주의 신속 역시 패도제공, 곧 ‘지배’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 미약하게나마 느려졌다.

“본좌와는 그리 상성이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사도천주는 상천에 오른 뒤로 최초로 생명의 위기를 느꼈다.

그 상황 속에서도 상천칠좌라는 이름은 어디 가지 않는지 무의식적으로 심상구현을 최대로 전개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능력은 암천회주에게 잘 통하지 않았다.

위험한 걸 느끼고 몸을 틀려는 순간에 맞춰 암천회주의 손바닥이 시야를 가렸다.

“사도천주.”

콰아아아앙!

운광, 냉악비, 그리고 검마.

세 절대고수가 보는 앞에서 사도천주는 머리가 붙잡힌 채로 땅에 처박혔다.

“긴말하지 않겠다.”

흰자위가 검게 물들며 시커먼 아지랑이가 뿜어졌다.

“한꺼번에 덤벼라.”

“사도천주!”

운광이 화들짝 놀라 도우려고 나서기도 전이었다.

쐐액!

무곡이 선수를 쳤다.

선천검법 정도의 신속은 아니나 그에 준하는 극쾌의 검이 사도천주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암천회주의 팔을 노리고 수평선을 그었다.

“검마.”

반갑다는 듯이 웃는다.

하나 입과 달리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모처럼의 재회인데 말도 없이 검부터 휘두르다니, 섭섭하지 않느냐.”

전혀 섭섭하지 않은 목소리.

그 뒤로 도자기가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쇳소리를 내며 검이 부딪친다.

째애애앵!

암천회주는 어느새 머리를 짓누르던 손을 놓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무곡의 검을 막아 냈다.

“선천검법!”

운광이 희끗하고 긴 눈썹을 구부리며 외쳤다.

대성할 경우, 후(後)초식이 선(先)초식을 따라잡거나 혹은 능가할 정도의 신속을 자랑하는 쾌검.

만약, 전에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무곡의 설명을 듣고도 반신반의했을 것이다.

‘이때다!’

운광이 말을 속으로 삼키며 협공에 나섰다.

대장전의 규칙에 대해서는 잊은 지 오래다.

회주 본인이 한꺼번에 덤비라고 말하기도 했고, 전에 권동제와 힘을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밀렸던 기억이 떠올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슈우욱!

유의 묘리를 담은 검이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무곡의 반대편에서부터 쭉 나아가 목덜미를 노렸다.

“잔재주.”

암천회주는 무곡의 검부터 쳐냈다.

그리고 곧장 반대 방향으로 주어지는 힘을 무시한 채, 팔꿈치의 관절에 튕기듯이 힘을 주곤 검격을 연이어 날렸다.

‘무서울 정도의 쾌검!’

운광의 동체 시력이 회주의 검을 겨우 잡아냈다.

‘쾌검, 그것도 극쾌의 무공에는 무당의 주 본질, 유의 묘리에 상성이 좋지 않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상념이 지나쳤다.

‘무당의 무공은 상대방의 공격을 흘리거나 혹 이화접목의 수단으로 되돌리는 것이 중점이다. 그러나 적이 응용할 틈도 없이 너무 빠르다면 의미가 없다.’

암천회주 개인의 무력도 보통이 아닌데 상성까지 좋지 않았다.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갈하고 고요한 눈빛.

호수와 같이 잔잔한 눈동자의 표면에 검째로 공간이 구부러지는 것이 비친다.

‘이화접목!’

심상의 구현이 법칙을 뒤틀었다.

검의 방향이 꺾였다.

검의 몸체를 감싼 무형의 강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간이 구부러지면서 방향, 힘이 갈 곳을 잃고 엉뚱한 곳을 찔렀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미리 대비해 공간을 구부리면 그만!’

신속의 검이라 해도 맞지 않으면 소용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쩌저적!

암천회주는 등 뒤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공기 중의 수분이 얼어붙으면서 대기의 온도도 급속도로 떨어졌다.

굳이 돌아볼 것도 없었다.

등 뒤를 노리는 건 북해궁주 냉악비.

북해빙궁의 빙백신장이 하얗게 빛났다.

“인정하마.”

예상된 경로에서 벗어난 자신의 검.

목의 동맥을 찔러 오는 적의 검.

그리고 등 뒤에서부터의 빙백신장.

“상천의 절대고수들이여.”

상천칠좌가 괜히 상천칠좌가 아니었다.

“그대들은 강하다.”

사람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비상식적인 힘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줬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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