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二章 (245/254)

이튿날. 새벽.

안개가 걷힐 무렵, 정적이 끝나고 발소리가 울렸다.

합비의 주민들은 문을 닫은 채 숨죽였다.

무림맹의 본부이자 정파 무림의 중심지였던 만큼, 합비는 무림과 밀집해 있다.

그러나 최근처럼 합비가 연달아 전장의 소용돌이가 된 것 자체는 흔한 일이 아니다 보니 그들 사이에서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관리의 경우도 지속적으로 뇌물을 받았다 보니 직접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으나,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주시하고 있었다.

일만 오천여 명씩이나 모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전 무림맹 본부. 그리고 현 암천회 본부의 출입구이자 팔진도였던 여덟개의 문은 새롭게 단장됐다.

간판에는 무림맹 대신 암천회라는 이름이 새겨졌고, 색채도 거무튀튀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약 사천 가량의 무인들과 암천의 지도자이며 현 천하제일인인 암천회주가 있었다.

휘이잉.

겨울에 들어서인지 바람이 매서웠으나, 추위를 느끼기는커녕 잔뜩 달아오른 열기 탓에 더웠다.

“왔군.”

암천회주가 맞은편 너머를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하나, 둘, 셋…… 팔천. 천기가 생각한 대로구나.”

전력의 수는 딱 두 배, 팔천여 명이었다.

“천선성, 천기에게 알려라, 약 이천 가량이 뒷구멍으로 향했고……”

약 일 년 전, 무림맹이 암천회에게 본부를 습격당했을 무렵, 정면을 내주고 뒷문, 대나무 숲을 통해 퇴각할 수 있었다.

햇빛도 들지 않는 데다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나열한 대나무 숲은 길도 길이지만, 기문진법 때문에 나가는 건 물론이요 들어오는 것 역시 힘들다.

그러나 그 죽림을 설계하고 운용한 제갈세가라면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양측에서부터 공격해 올 것이라 생각했다.

“주서천도 그리 갔다고.”

무림 연합은 군대를 연상시키는 암천회와 달리 그 움직임이 화합을 이루진 못했다.

사상은 물론이고 호흡법이나 발걸음도 다르니 당연했다.

소리가 동시에 울리진 않았다.

그리고 그 연합을 이끄는 건 네 사람이었다.

선두에 선 건 북해궁주와 검마였다.

그리고 그 뒤로 대군의 중앙에 무림맹주와 사도천주가 보였다.

무림 연합군을 둘로 나눴다.

팔천의 본대가 정문에서 맞서고 있는 사이, 주서천이 이끄는 이천의 별동대는 대나무 숲에 들어섰다.

“무림맹주와 사도천주께서 절 대신해 말씀해 주셨으니, 따로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갑시다.”

진입한 지 약 반 각의 시간이 흘렀으나, 그 움직임은 그리 빠르지 못했다.

“이 앞의 기문진은 더 이상 제갈세가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지략뿐만 아니라 기문진에도 능한 천기이니, 분명 손을 대서 고쳤을 확률이 높아요.”

제갈수란이 말한 대로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뜯어고쳐 재구성하는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바꾸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하루아침도 아니고 암천회가 무림맹 본부에 깃발을 세운 지 제법됐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좀 걸려도 안전하게 갈게요.”

시간이 걸린다고는 말했으나, 결코 느린 것이 아니었다.

모략뿐만 아니라 진법에도 천재적인 그녀이기에 나아갈 수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안으로 들어오기는커녕 아직도 입구에 서 있었을 것이다.

“사방을 경계해라.”

주서천은 혹시 모를 움직임에 대비했다.

별동대원들 역시 촉각을 곤두세운 채 경계했다.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적의 본거지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과하다 싶을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결코 실수하지 않는 점이 또 정예다웠다.

다들 소리에 민감해진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처럼, 기분 나쁜 정적이 이어지고 있던 도중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쐐액!

“어딜!”

주서천이 검을 번개같이 출수했다.

햇빛이 반사한 것도 아닌데 섬광이 뿜어지며 날아온 비수를 쳐냈다.

째앵!

“적이다!”

별동대원이 깜짝 놀라 외쳤다.

“어디지?”

“정면!”

“뒤다!”

“이쪽에도 있다!”

“사방팔방에 있다!”

시야도 제한됐고, 적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없었다.

괜히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위치 파악과 보고부터 했다.

“제갈 소저! 어찌합니까?”

모사이자 진법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했다.

“토지의 용맥(龍脈), 그리고 팔문이 꼬여 있어요.”

제갈수란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간단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주서천이 칠성사병의 목을 하나 베며 소리쳤다.

“생문을 찾아 돌파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부수진 못하나요?”

낙소월이 도를 코앞에 스쳐 지나가게 한 뒤, 화려하게 반회전하여 적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합비의 무림맹 본부와 역사를 함께해 온 기문진이에요.

그리 쉽게 부술 수도 없을뿐더러, 부수려 할지라도 너무 많은 시간이 걸……”

“소용없다.”

제갈수란의 말은 누군가에 의해 가로막혔다.

“저게 뭐야!”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무심코 머리를 들었을 때, 무림맹 소속 무사가 경악 어린 외침을 터뜨렸다.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사방팔방에서 숨을 멈추거나 혹은 외침이 터졌다.

“이, 인영(人影)?”

평범한 인영이 아니었다.

신화 속의 거인을 방불케 하듯, 몇십 척이나 되는 그림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주서천은 그림자를 보자마자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말았다가 힘껏 튕겨 자색의 빛을 쏘았다.

화산파에 얼마 없는 탄지공, 자하지가 유성처럼 긴 궤적을 그려 내며 그림자를 꿰뚫어 구멍을 냈다.

“제갈수란, 모략만이 아니라 진법에도 능하더니만 그 말대로구나.

아무리 제갈세가가 설계했다곤 하나, 그래도 이 몸이 꼬아 둔 것을 단숨에 파악하다니 칭찬할 만하구나.”

거대하기 그지없는 그림자의 아래, 외팔이 학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주서천은 그 광경을 보자마자 재차 오지(五指)를 반쯤 구부렸다가, 동시에 쫙 폈다.

손가락에 공처럼 둥글게 모였던 공력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 눈부신 속도로 학사의 몸에 당도했다.

콰아앙!

하나 다섯 줄기의 선은 닿지 못했다.

아니, 그대로 통과해 뒤쪽에 꽂힌 대나무를 박살 냈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주먹이 절로 떨려 왔다.

입가를 질끈 깨물었다가 놓는다.

감정이 격해지며 삼라만상의 조화로 이룬 환영이 희뿌옇게 일그러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주서천.”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눈을 감으면 부모나 회주보다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몇 십, 몇 백, 몇 천 번 죽이는 상상을 했다.

오랫동안 쌓아 올린 탑을 무너뜨린 자.

최대의 적이자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

‘이자만 아니었더라면……’

주서천은 천기를 보고 주먹을 꽈악 쥐었다.

두 번째 삶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미래를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했다.

정사마 할 것 없이 천하가, 무림이 한 사람의 손아귀에 놀아났다.

그리고 그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천기!”

천하는 제갈세가에 세 천재를 보냈다.

그러나 무림에는 천기가 있었다.

‘빨리!’

제갈수란은 곧장 돌파구를 찾는 데 집중했다.

눈앞의 적은 놀라고 있을만큼 여유가 있지 않다.

조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으나 머리를 털어 떨쳐 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기문진을 떨쳐 낼 방법을 찾았다.

“으아아악!”

“크악!”

“죽여라!”

그사이, 주변의 격전도 재개됐다.

만약 적이 암천회만 아니었더라면 바로 싸우진 않았을 것이다.

암천회는 약간의 틈도 허용치 않았다.

잠깐만 동요하거나 멈칫하면 그 사이를 노려 위협해 왔다.

오로지 두 사람만이 마주 본 채 서 있었다.

“두 번째인가?”

주서천이 물었다.

“그래. 하지만 얼굴을 맞대는 건 처음이지.”

정마대전 때, 천기가 마교의 군사 겸 지휘권을 갖고 있는 걸 알고 있어 위치 정도는 파악했었다.

그러나 직접 보지는 못했다.

마교의 부대나 천마 탓에 바쁘기도 했고, 천기가 워낙 철저해서였다.

천기도 먼발치에서 얼굴 정도는 본 적은 있으나,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쿵광쿵광 뛰고, 숨이 가빠지며 머리가 아파온다.

당시 주서천의 생환에 얼마나 화가 났었는가.

눈에 띄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고함을 질렀었다.

“주서천,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구나.”

“할 수 있다면 해 봐라.”

주서천이 심드렁한 어조로 받아쳤다.

‘어디지?’

겉으로 언뜻 보면 천기와의 대화에 집중하는 것 같았으나, 속임수였다.

눈만 안 굴리고 있지, 허상이 아닌 실체를 찾느라 바빴다.

‘자하지가 닿았을 때, 흔들리진 않은 걸 보아하니 적어도 태(免)는 아니다.’

기문진이란 곧 삼라만상의 조화를 이루는 사람의 기술이다.

근원이 되는 진법의 시작은 곧 구궁이요, 팔괘다.

기문진은 이 중 팔괘를 기초로 하였고, 조화의 도구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손(興)은 바람을 일으키거나 한다.

태는 연못의 표면처럼 흔들려 착시 현상을 만들어 낸다.

주서천은 과거에 서적에서 본 지식, 그리고 제갈수란에게 들은 것을 떠올려 천기의 실체를 찾았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하는 일을 족족 방해하느냐.”

천기가 낮게 으르릉거렸다.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을 떠올려 보지그래.”

주서천이 싸늘한 표정으로 답했다.

“천기, 널 보면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시간을 끌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목적만은 아니다.

정말로 순수하게 의문이 들어서기도 했다.

“뭐냐.”

주서천은 천기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도대체 왜, 무슨 목적으로 무림을 뒤집으려는 거지?”

암천회는 본래 명의 황제에게서 도망치고 숨기 위한 모임이었다.

그리고 이 목적은 성공했다.

관료는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대로 암천회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나 싶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자기 무림사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 암천회주 탓이었다.

“왜냐, 천기.”

암천회주는 천기와 요광을 시작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그중에서도 천기는 특히나 주요 인물이었다.

무력의 화신인 암천회주를 대신해 모든 일을 세우고 조정하여 본보기가 됐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요광의 경우엔 맹강처럼 전쟁뿐인 삶에 지쳤다.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기로 마음먹었다.

“왜냐고?”

천기가 주서천의 물음에 조소를 흘렸다가.

“하하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림인이란 작자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습기 그지없는 놈들이구나.”

주서천은 천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반대로 내가 물으마.

무림인은 왜 그렇게 싸우기를 좋아하는 것이냐?”

천기의 눈빛에는 모멸감이 어렸다.

“묘가검문과 폭섬도문의 내전이 왜 시작됐는지 알고 있느냐?

바로 무공이다! 수십, 수백 명이 죽어 나간 이유가, 단순히 검법이 최고니 도법이 최고니 하는 시답잖은 이유만으로 죽었단 말이다!”

“……”

“이번만이 아니다. 무림은 오래전부터 정말 같잖지도 않은 이유만으로 서로 싸워 오고 목숨을 빼앗았다.

정파만 사파만 보아도 보이지 않느냐.

신념과 신념의 대립? 헛소리하지 마라.”

천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따위 이유만으로 수백만 명이 죽고 죽인 역사를 지닌 주제에 왜 무림을 뒤집으려고 하냐고?”

입가에 맺혔던 미소도 지워졌다.

“무림 정복을 위해 이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를 보았을 때, 내가 처음으로 한 생각이 무엇인지 아느냐?”

주서천은 천기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진짜? 진짜 이따위 이유로 싸웠다고?”

으아아악!

주변에선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좋다, 주서천. 날 웃게 해 주었으니 그 물음에 이번만큼은 어떠한 꾀도 없이 진실한 대답을 들려주마.”

천기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한때, 이상을 꿈꾼 녹존이라는 학사가 있었다.

그 학사는 단순히 금의환향만이 아니라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대의도 없이 욕심 탓에 나라를 망가뜨리는 이들을 벌하고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다면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궁에 발을 들였을 때 그꿈이 헛된 것이라고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목소리에서는 짙은 혐오감이 실려 있었다.

“미천한 빈민 출신의 학사의 꿈을 이루어 줄 세계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출신이 미천하면 차별하며, 뇌물이 없다면 제대로 된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옳은 말을 하면 목이 날아갔고, 이에 서서히 썩어 가는 이들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 내 능력을 썩히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나타났다.”

천기가 회상에 젖은 듯 말했다.

“암천회에 홀로 남은 자, 암천회주가.”

“손영관.”

주서천이 그 본명을 읊었다.

도찰원의 종육품 관직 경력(經歷).

감찰 기관의 기록자이다.

“잘 알고 있구나.”

“그 이름과 신분을 알아냈을 당시에는 나도 의아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보다 적절한 신분이 없더군.”

천마에게 전해 듣고 주요 삼인방인 회주와 천기, 그리고 요광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다.

혹 속거나 잘못 알아낸 건 아닌지 조사하길 수 차례, 그것을 알아낸 뒤에도 여러 방면으로 공을 들였다.

“그래, 네 말대로다. 황제는 관직에 앉은 자가 살아 있는 꼴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권세에 뜻이 없거나 낮은 직책의 실무자는 살려 두었다.

관료를 살피고 보고하는 감찰 기관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

관료라는 이유만으로 숙청 대상이 됐다.

농담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욕심을 보이면 죽임 당했다.

본인은 물론이요 일가친척까지 죄다 목이 베였다.

괜히 그동안 쌓은 권세를 포기하고 도망치려 했던 게 아니었다.

측근과 개국공신까지 죽는 걸 보고 일말의 희망도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황태손이 그만 좀 죽이라고 간청했다는 일화는 유명한 일화다.

“먼 옛날 한림원의 어떤 학사가 나라가 걱정이라며 정세를 논하다가 들켜 대대적인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회주의 눈에 들어가게 됐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지.”

“동문서답하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라. 무림을 뒤집으려는 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지?”

주서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손영관과 녹존이 만난 거야 둘째치고, 현 정세를 한탄하고 증오하면서 무림에 개입한 게 이상했다.

명의 정세가 문제였더라면 끝까지신분을 유지하고 무림에 오지 말았어야한다.

“무림을 정복해 얻은 힘으로 반란…… 혁명이라도 일으킬 생각이냐?”

만약, 그런 거라면 정말로 위험한 사상이었다.

관부가 여태껏 무림을 손을 대지 않은 건, 위험분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무림은 온갖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나 결코 국가의 정세만큼은 관여하지 않았다.

설사 있다 할지라도 각 지도자들에게 처형됐다.

아무리 무공이란 것이 있다 한들, 황궁 역시 무예란 것이 있으며 수적인 차이가 터무니없어서다.

전란의 시대처럼 대규모 전쟁의 시기라 해도 한 세력당 많아 봤자 이만에서 삼만이 한계다.

그에 반면 국가 규모는 다르다.

요광이 무림의 전쟁을 우습게 본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뭐? 하하하.”

천기가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주서천.”

먼 옛날, 이상을 좇았던 학자는 더 이상 없다.

“혁명만큼 의미 없는 행동은 없다. 설사 조정이 바뀐다 한들, 결국 기득권층이 달라진 것에 불과하다.

검을 들었을 때는 평화와 공평을 부르짖을지는 몰라도, 검이 아닌 권세를 쥐게 된다면 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사람이라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천기는 숨을 토해 내곤 다시 말을 이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순자가 말한 대로 인간의 성품은 결국 악한 법.

타인보다 욕망을 중시하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해 결국 똑같은 행동을 저지를 것이다.”

“성악설에 대해서 논할 생각이냐?”

“굳이 논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변하지 않았는데 나라와 사회가 바뀔 것 같으냐.”

천기는 진심으로 혐오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내 장담컨대, 무림이건 뭐건 어떠한 힘으로 나라를 뒤집는다고 해도 결국 바뀌지 않을 것이다.

설사 수천 년이 지나도 민족, 성별, 연령, 인종, 도덕적 관념…… 무엇이든 상관없다. 사람은 결국 서로를 차별하고, 잣대로 판단하며 미워할 것이다.”

꿈을 버린 학사는 턱을 살짝 들어 오연한 표정을 지었다.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라느니, 태평성세를 만들기 위해서라느니 그따위 헛소리는 하지 않겠다.

이 내가 천기라는 이름을 입에 담게 된 건 그저, 그동안 해 온 노력과 공부를 썩히기 싫어서일 뿐이었다.”

그의 말에는 약간의 거짓도 없었다.

현실에 지쳤기에 미쳐 버린 정신 따위도 없었다.

“회주께는 능력을 쓸 수 있게 해준 이유로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만약 그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의미 없이 기록만 하거나 혹은 욕심에 눈이 먼 놈들에게 전부 빼앗긴 채 시체가 됐을 테니까.”

누군가를 위해서라거나, 혹은 필요악이라거나, 또는 견해의 차이라거나 그런 복잡한 철학 따위는 없었다.

꿈을 꾸었던 학사는 현실에 절망했고 증오했고, 체념했다.

그러나 이제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주서천은 천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별말 없이 검을 쥐지 않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날 찾느라 모처럼 시간을 끈 모양이나, 실패한 모양이로군. 안타까워서 어쩌나.”

천기가 이죽거렸다.

“걱정 마라. 다른 건 실패하지 않았으니까.”

“주 공자!”

제갈수란의 목소리게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찾았어요!”

대화로 시간을 번 건 천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녀라면 해결할 것이라 생각했다.

“모두, 이쪽이에요!”

“아가씨를 따라오시오!”

제갈세가의 일류 무사가 소리쳤다.

제갈세가답게 기문진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주서천 역시 제갈수란이 안내한 길에 올랐다.

만약을 위해서 주변을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갈수란은 가까스로 생문을 찾아 활로를 열었다.

약 이백여 명 정도가 죽고 다치며 지쳤지만,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빠져나간다는 생각에 힘을 냈다.

또한 파진법을 완벽하게 알아냈다는 듯, 어딜 가도 따라오던 천기의 환영도 흐릿해지며 사라져 갔다.

“환영이 사라진다!”

“정신 차려!”

“파진에 성공했다!”

“시야가 돌아온다!”

제갈수란의 도움이 있어 사문(死門)에 들어서는 건 피했으나 전원이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격전을 치르던 칠성사병이 문제였다.

병장기를 맞대고 발걸음을 놀리다보면 가끔씩 안전 반경을 벗어나 기문진의 영역에 빠지기도 했다.

땅이 늪처럼 변해 빨려 들어가는 건 기본이요, 어떨 때는 불지옥에 삼켜져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그 외에도 발을 조금만 잘못 디디면 절벽이 나타나 떨어지거나 날카로운 바람에 베여 난도질 당했다.

또는 적인 줄 알고 병장기를 휘둘렀는데 아군이 나타나거나, 아군인 줄 알았는데 적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지옥도 이제 끝이다.

주변에서 안도와 더불어 환호성이 흘러나왔다.

“하.”

천기가 실소를 흘렸다.

“하하하하!”

제갈수란은 천기의 웃음소리를 듣고 불안해했다.

웃음소리는 전처럼 사방이 아닌 정면에서 들려왔다.

성량도 주변이 흔들릴 정도로 크진 않았다.

환영이나 환청은 아니다.

적어도 기문진의 활로를 걷는 건 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혹시 하는 마음에 기문진을 확인해 봤지만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제갈수란, 내 아까 전 칭찬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나는 널 높이 평가하고 있다.”

대나무 숲 너머, 천기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정파의 후기지수 중 오룡삼봉은 본 회의 살생부의 상위에 이름이 올라온다. 설사 어리다 할지라도, 범재와 다른 능력을 품고 있는데 어찌 우습게 보겠느냐. 열등감이나 질투 탓에 시야를 가리는 병신들과 같은 취급하지 마라.”

암천회는 방심하지 않는다.

천기는 자만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천기는 훗날 위기가 될 어린 새싹조차 용서치 않는다.

그 철저함은 두려울 정도다.

미래를 아는 데다가 상식을 넘어 미쳤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주서천이 워낙 변칙적인 것뿐이었다.

천기는 제갈수란을 고평가했다.

장소에 상관없이 어디든지 진법을 펼칠 수 있도록 고안해 낸 여인을 천재라 여겼으며, 자신의 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너를 보고 천군사의 동생이란 위광을 받은 것뿐이라 생각하지만 크나큰 착각이다.

너는 천군사와는 별개로 또 다른 천재다, 모사미봉.

너라면 반드시 사문을 피해 생문으로 빠져나올 거라 생각했다.”

실패한다면 준비한다가 아니었다.

실패를 전제로 준비했다.

“안 돼요!”

제갈수란이 그 말을 듣고 새파랗게 질렸다.

“당장 물러나야 해요! 함정……”

“늦었다.”

쿠웅!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굉음이 터졌다.

이를 시작으로 땅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수백, 수천, 아니 그 이상의 수를 이루는 대나무가 춤을 추듯 마구 흔들렸다.

쭉 길게 뻗은 장대가 서로 부딪치면서 소리가 났다.

잎사귀가 후두둑 떨어졌다.

“설마!”

제갈수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관?”

“그래.”

천기가 차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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