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습니다.”
무림맹주, 태극검 운광이 말했다.
“그리고 그 끝이 지금이다.”
사도천주가 말했다.
“강호의 동도들이여, 지난 몇 년, 아니 몇십 년 동안 암천회는 정사마를 포함해 무림을 능멸하였습니다.
칠검전쟁부터 시작하여 정혈대전, 사문반란, 정마대전, 삼악검파 등 여러 분쟁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숨어 조장해 오고, 일으켰습니다.”
“암천회에선 혁명이다 개혁이다 뭐다 하고 지껄이고 있으나, 그 목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복이다.
정사는 이를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며, 암천회의 야욕을 막기 위해 오랫동안 이어진 반목을 잠시 접어 두고 힘을 합하기로 하였다.”
“중원인만이 아닙니다. 서장과 남해, 그리고 최근에 북해의 세력까지 평화를 위해 손을 내주었습니다.”
“과거엔 침략자였으며, 원수였다. 그리고 훗날 미래 또한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무림은 두 세력의 지도자의 말에 집중했다.
“우리는 적이었고, 이후에도 적이 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적이 아니라는 걸 알립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할 생각도 없다.
또한 형제라 부를 수 있는 사이도 아니다.”
그럴 수 있다면 진작 그리했다.
사람은 다르다.
그 의견은 결코 다를 수 없다.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작 그리됐을 것이다.
“우리는 등을 맞댈 전우일지 몰라도, 술을 나눈 의형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말벗일지는 몰라도, 신념과 의지를 이은 사형제는 아니다!”
술잔 대신 병기를 높이 들었다.
“우리는!”
와아아아아!
“무림인이다!”
무림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부딪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양 세력은 그동안 격전 탓에 피해가 이래저래 많아 잠시 재정비의 시간을 갖게 됐다.
전쟁이란 건 하루아침에 끝나는 게 아니다.
이동도 필요했고, 보급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아예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무림 연합의 경우, 모처럼 암천회를 합비까지 몰았는데 퇴로를 만들고 싶지 않아 포위망을 구축했다.
정사 연합 구천여 명, 그리고 북해빙궁과 남해 연합을 포함하여 약 만여 명 정도가 합비를 둘러쌌다.
이후 서로 포위망을 뚫거나, 혹은 퇴로를 만들기 위한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으나 피해는 미미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열 번째 달을 넘어 열한 번째 달.겨울이 막 시작됐을 무렵에 양측은 준비를 끝내고 합비 근처에 긴장감이 감도는 채로 대면했다.
무림 연합군, 지휘 막사.
막사 내부에 자리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거물밖에 없었다.
직사각형 탁자 앞에 자리 잡은 다섯 명이 특히 눈에 띄었다.
정면에는 무림맹주, 태극검 운광과 사도천주가 각각 정사의 대표로서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각각 좌측과 우측에는 냉악비과 무곡이 앉았다.
마지막으로 무림맹주와 사도천주 맞은편에 주서천이 있었다.
상천칠좌!
평생 동안 한 사람을 보기도 힘든데, 무려 다섯 명이 한자리에 앉아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광경이다.
“……이상이오.”
무곡이 긴 이야기를 끝냈다.
“뭔……”
“허어.”
사도천주가 뭐 그딴 게 있냐는 듯 반응했다.
운광도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주서천과 냉악비는 전에 들은 바가 있어 그리 놀라지 않았다.
“역천, 그래 말 그대로 역천이로군.”
사도천주가 수긍하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맹주님과 천주님을 부른 건, 결전을 위해 힘이 필요해서입니다.”
이번에야말로 결전이 임박해 온 것을 느꼈기에 무림맹주와 사도천주도 함께하기로 했다.
암천회와의 결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걸 보여 주듯 동원할 수 있는 건 죄다 동원하여 참전시켰다.
하수나 고수, 그리고 은거기인 등 싹싹 긁어모았다.금의검문에선 낭인까지 추가적으로 고용해 보냈다.
임시 본부로 둔 하남의 개봉에 남은 사람이라곤 최소한의 호위, 그리고 부상자들뿐이었다.
사도천 역시 상황은 다를 것 없었다.
그 외에도 북해빙궁, 남해 연합, 화인의원도 포함됐다.
마지막으로 정사 연합의 수장, 상천칠좌의 절대고수 또한 전력에 포함됐다.
다만 무림맹주나 사도천주의 경우에는 사기 및 지휘를 위해서라도 최전선이 아닌 중앙을 맡아 이끌기로 했다.
‘설마, 내가 이러한 자리에 앉게 될 줄은……’
주서천은 주변을 슥 둘러보곤 감회에 젖었다.
회귀 전, 전생의 삶에선 모든 것이 끝날 때 자리에 있기는커녕 제대로 된 회의 하나 참석한 적 없었다.
어디까지나 화산파의 사대제자로서 명령에 따랐을 뿐, 사정이나 진실 따윈 조금도 알지 못했다.
알게 된 것도 화산오장로가 된 이후.
그것도 전부가 아닌 일부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역사의 중요한 때, 그것도 정사와 북해빙궁의 지배자의 회의에 동석했다.
‘묘한 기분이다.’
그토록 꿈꿔 왔던 영웅이라 불리고 있지만, 크게 기쁘진 않았다.
말로 콕 집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한 사람, 자리를 비운 듯한데 상관없나?”
냉악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주서천은 패신군이 거론되자 불편함을 삼켰다.
“패신군께선 현재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천군사, 제갈상이 나서서 대신 답했다.
검신과 패신군이 동일 인물인 것을 아는 덕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보니 이렇게 기밀로 하는 것을 부디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사의 수뇌부 모두 배반 및 첩자로 큰 타격을 입었다.
조심스러워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이해하네.”
예전 같았더라면 끝까지 믿지 못하느냐며 노발대발했을지도 모르는 사안이지만, 현재는 달랐다.
경험이 경험이다 보니 조금 불편해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정보의 공개로 입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면 총회의를 시작하려 합니다만, 심상구현의 이야기가 끝났다면 다른 분들을 불러와도 괜찮습니까?”
제갈상이 지도를 게시해 둔 나무판을 보여 주며 물었다.
“물론이네.”
제갈상은 전령을 불러들여 주요 인물을 소집했다.
약 일각 뒤, 주요 인물이 막사 안을 가득 채우자 작전 회의가 다시 시작됐다.
“현재 연합군은 무림맹 전 본부, 적의 본거지를 원으로 포위하고 있습니다.
문제였던 적림십육채는 두달 전의 대패로 총채주 홍하랑 및 전력을 크게 잃고 소굴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장강에는 남해 세력을 배치하여 만약을 위한 사태를 대비했지요.”
결전 도중 뒤를 잡히는 것만큼 최악이 없다.
장강의 공포를 알고 있어 철저하게 막아 두었다.
“도적 나부랭이, 아니. 도적놈들이 괴멸했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 않소?”
“힘을 잃었다 한들,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적의 군사가 누구인지 명심하십시오.”
제갈상이 아닌 주서천이 답했다.
힘을 잃었다 한들, 혹시 모른다.
적은 그 암천회다.
설사 과한 대응이라 할지라도, ‘만약’이라는 사태를 막기 위해 대비했다.
“지상의 보급로는?”
“이쪽이 맡았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일한 상인이자 상계의 왕, 이의채가 답했다.
“근 두 달 동안 인맥 및 상계를 이용해 보급로로 사용될 곳은 감시하고, 막아 두었습니다. 그 외에도 혹시나 아군의 식량이나 식수에 독이 있을지 몰라 직접 관리했고, 당가와 사독문의 검수도 받았습니다. 혹시 몰라 모사께도 부탁해 삼중에 걸쳐 확인했지요.”
재정비에 괜히 시간이 걸린 게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음!”
이의채는 상왕, 그것도 전쟁 상인이다.
이쪽 분야는 자신만만한 걸 넘어서 장기이다.
“작전 내용만 보면 완벽해서 좋습니다만, 불안하군요.”
신도균이 얼마 전에 당한 일이 떠올랐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게 좋습니다. 그 불안감을 떨치지 마십시오.”
주서천이 경고했다.
좌중의 시선이 한 사람, 주서천에게로 향했다.
주서천은 잠시 눈을 감았다.
시커먼 시야에 먼 옛날, 전장에 혼자 있는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앞에 있었다.
“이기고 있다면 질지 모른다고 생각하십시오.
완벽하다면, 완벽을 의심하십시오. 결코 방심하지 마십시오. 암천회는 그 순간을 노리고 들어옵니다.”
꿀꺽.
“상식에 갇혀 승리를 단정한 순간만큼 쉬운 상대가 또 없습니다.
강적이 있다면 목을 베고, 심장을 찌르십시오.
힘이 부족하다면 비겁해도 좋으니 숨고, 허를 찌르고, 다른 이들의 힘을 빌리십시오.”
주서천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준비해 오고…… 준비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암천회에게 숨어 왔다.
힘이 있어도 최대한 모습을 감추었다.
혼자가 불가능한 걸 깨닫고 다른 이들의 힘을 빌렸다.
‘암천회주여, 그대는 준비됐는가?’
결전의 때가 왔다.
암천회만 무림에 끄나풀을 심어 둔 게 아니다.
정사 연합 또한 그들의 존재가 드러난 이후 첩자를 심어 둔 덕에 상황 보고를 들었다.
“본부 내에 특별한 움직임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니, 예정대로 내일 아침 무렵 진군할 예정입니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상황을 지켜보고 싶지만 첩보원에 의하면 경계가 워낙 심해 확인할 수 없다 하더군요.”
암천회의 수뇌가 천기를 제외하곤 전멸했으나, 칠성사의 기관이 마비된 건 아니었다.
남은 두 사람, 특히 천기는 암천의 두뇌답게 힘이 들어도 어찌어찌 관리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결전만큼 중요한 때라 그런지 내부의 경계 및 감시가 삼엄해 이 이상의 정보를 알아내는 게 힘들었다.
무림 연합은 각각 지휘관이나 군사의 편성 및 작전을 검토한 뒤,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제갈상과 제갈수란은 혹시라도 천기에게 정보가 흘러들어 갈 것을 우려하여 격돌 일시는 알리지 않았다.
중원, 북해, 남해의 무림인들은 자기 할 일을 하며 각자 출전령을 기다렸다.
매화검봉 낙소월 역시 오룡삼봉이나 사형제와 담소를 나누거나 검을 닦는 일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회의 탓에 최근 보지 못한 사형이 궁금해 찾아갔다.
“후우……”
“사형은 여전하시네요.”
“응?”
주서천은 숨을 깊이 내쉬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최근 제대로 씻지 못했는데도 선녀처럼 아름답기만 한 낙소월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여전하다니?”
주서천이 묻자 낙소월은 곁에 앉으며 대답했다.
“수련이요. 사형은 화경, 아니 현경의 성취를 이룬 뒤에도 언제나 부지런하게 수련하고 계시잖아요.”
새벽이나 아침은 그럴 수 있었다.
무림인의 하루는 일반인에 비해 빠르기 때문이었다.
해가 뜰 무렵에 대기의 진기가 풍만하다 보니 운기조식으로 이루어지는 축기의 효율이 뛰어나기에 새벽녘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일찍 일어나지 못하면 재능이 좋더 라도 고수는 꿈꾸지 못한다.
무림인에게 나태는 죄악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림인이라고 할지라도, 일정한 수준의 경지에 오르면 그리 부지런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절정, 즉 고수라 불리기 시작하는 경지가 되면 단련은 둘째 치고 깨달음이 중시되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몸을 과하게 굴릴 정도의 집착이 생긴다면, 깨우침을 얻지 못하고 마음을 다칠 수도 있었다.
물론 아무리 고수라도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드문 광경이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내 능력이나 재능에는 한계가 있으니 말이야.”
“농담이시죠?”
낙소월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서른도 되지 않아 화경은 물론이고 현경까지 이룩했다.
재능이니 뭐니 거론할 수준이 아니었다.
주서천은 낙소월의 물음에 쓴웃음만 지었다.
‘두 번째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화경이야 당시 연령만 해도 일흔이 한참 넘기도 했고,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꼈는지 회광반조(回光返照)의 도움을 받아 오를 수 있었다.
그 후에 어릴 적부터 재시작했으니 다시 이룩하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앞, 현경의 경우는 천운이 닿았을 뿐만 아니라 회귀라는 특별한 경험이 더해져 이룰 수 있었다.
“사형, 이번에야말로 정말 끝일까요?”
“뭐가?”
“전란이요.”
낙소월은 합비를 멀리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요 몇 년 동안, 역사에 남을 싸움이 몇 차례나 벌어졌어요. 죽고, 죽이고, 그리고 잃었죠.”
“……그래.”
“제 말이 어리광인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하루라도 빨리 이 비극이 끝났으면 해요.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테니까요.”
낙소월은 슬픈 듯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풀 사이로 누군가에게 짓밟힌 꽃잎이 보였다.
“지금까지 희생한 분들 덕에 정사, 아니 무림 연합군은 대승을 거두었어요.
사람들은 승자는 연합군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설사 그리 부를지라도, 승자는 없고 패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걸요. 그야, 모두 누군가를 잃었잖아요.”
‘사매……’
주서천은 낙소월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전생에서 그녀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다.
먼발치에서만 등을 봤을 뿐, 어떤 성격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낙소월은 누군가의 아픔에 슬퍼해 주고 행복에 기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사형.”
낙소월은 고개를 들어 주서천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전의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끔씩, 사형을 잃는 꿈을 꿔요. 그럴 때마다 전 사형을 또다시 잃을 것 같아서 두려워요.”
최초는 주서천의 강호 초출 때였다.
도수창병 육대랑을 비롯한 수림도에게 잃었다.
그다음은 정마대전 이전이었다.
당시 소림 방장이자 신승인 혜만대사에겐 죄송한 말이나 주서천의 사망 소식만 들려 큰 충격을 받았다.
전자건 후자건 간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낙소월은 그 후부터 주서천을 또다시 잃을 것을 두려워했다.
“저도 나서지 말라는 허무맹랑한 소리까진 안 해요.그래도 사형이 조심하셨으면 하는 걸요.”
낙소월은 손을 뻗어 사형의 팔 근처에서 멈칫하고 헤엄쳤다.
그러나 이내 다짐한 듯 손등을 덮었다.
“사형, 전 사형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요.
그야, 누구보다 사형을 소중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걸요.”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뺨에는 붉은빛이 감돌았다.
“이 연심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언제부터인가 사형을 쫓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형이 보이지 않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항상 조마조마하고, 걱정했고요.
잃었을 땐 왜 제 마음을 진작 전하지 않았을까 후회했답니다.”
주서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형, 사형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단순히 무공적인 면만 보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낙소월은 주서천의 손등을 덮었다가, 이내 깍지를 껴선 살며시 잡았다.
“상천이라는 절대고수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자만하기는커녕 언제나 겸손하신 점이 좋아요.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아요.
남들이 강요한 것도 아닌데도 누군가를 도우려 하고, 무림을 구하려고 하는 게 굉장하다고 생각해요.
주변에 피해가 가는 걸 두려워해서 혼자 짊어지려던 모습이 괘씸하지만, 그 점이 또 굉장하고 대단히 상냥해서 좋아요.”
맨 처음, 암천회에 대해 전해 들었을 때 특히 그랬다.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남들 몰래 무림을 구하려고 노력한 것, 그리고 주변인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신경 쓰는 점이 좋으면서도 안타까웠다.
“사매, 난…… 사매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위인이 아니야.”
주서천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무림을 구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았어. 그뿐만 아니야.
필요에 의해 옳지 않은 걸 방관한 적도 있고, 사람을 도구로 이용한 것에 경멸하면서도 나 역시 어쩔 수 없다면서 도구로 쓴 적도 있으니까.”
주서천은 몇십 년 동안 이어질 전쟁을 단축했다.
갖은 노력 끝에 수많은 희생을 최소화했다.
하나 그렇다고 그동안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암천회는 둘째 치고 수령신과만 봐도 알 수 있다.
악인이 아닌 자에게 기회를 빼앗았다.
미래가 바뀌면서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기도 했다.
흑영부처럼 무림의 어둠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필요악이고 어쩔 수 없다며 방관했다.
무엇보다, 유령곡을 무림을 구하기 위해서라며 쭉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형의 그런 점이 좋아요.”
낙소월은 언제나처럼 미소 지었다.
어느 때보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좋아해요, 사형.
아니, 저 낙소월은 주서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주서천은 낙소월의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눈치채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언젠가부터 어렴풋이 약간은 알고 있었다.
다만 전생에서부터 동경해 왔던 사람에게 연정을 받는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이런 자격이 있는 건지 마음이 걸렸다.
머릿속의 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엮였다.
천기의 수를 읽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낙소월은 주서천이 마주 본 채로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짓자,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먼저 말했다.
“결전이 코앞인데 마음을 어지럽혀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래도 또 전처럼 후회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대답은 나중에 해 주셔도 괜찮아요.
제 어리광을 들어 주셔서 고마워요, 사형.”
“나야말로…… 고마워, 사매.”
주서천은 낙소월과 앉은 채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괜찮아?”
단리화가 물었다.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움은 없었다.
“별로.”
당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돌렸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볼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