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一章 (242/254)

‘얼어붙어라.’

눈을 돌린 건 검의 방향이나 속도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다.

북해를 품은 심상의 구현을 위해서였다.

쩌적! 쩌저저적!

사람의 마음이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의지만으로 검, 아니 대기가 얼어붙었다.

‘검은 안돼.’

상대가 고수가 아니라면 또 모른다.

그러나 동등한 경지의 절대고수라면 쉽게 얼리지 못한다.

검에 실린 공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피부와 뇌가 움찔하고 떨렸다.

그감각을 참조해 다른 곳을 노렸다.

대기 중의 수분이다.

대기층에 보이지 않는 얼음벽이 솟구쳤다.

하나 둘 수십여 개가 검을 막아 내고 끼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부 막아낼 수는 없었다.

절대의 검에 죄다 갈라졌다.

그러나 속도만큼은 늦출 수 있었다.

‘피한다.’

타앗!

발뒤꿈치를 든 뒤, 발가락 힘만으로 땅을 밀어내듯 박차면서 몸을 위로 떠올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왼 손바닥을 아래로 내려, 회주의 목을 슬쩍 쳐낸 힘을 사용해 공중으로 떠오른 몸을 비틀어 회전시켰다.

휘리릭!

허리를 노렸던 검이 빈 허공만을 가른다.

그 위로 냉악비가 두세 바퀴 회전했다가 내려와 착지했다.

팟!

암천의 검이 방향을 꺾었다.

한 방향으로 힘이 주어질 경우, 보통 반대 방향으로도 힘이 작용된다.

그렇기에 쉽게 멈출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곧장 멈추는 걸 넘어 원래부터 반대로 검을 휘둘렀다는 듯 움직였다.

냉악비가 고대로 허리를 폈다면 목이 잘렸겠지만, 그녀는 예상이라도했다는 듯 쌍장으로 되받아쳤다.

콰아아아앙!

“……!”

냉악비의 허리가 뒤로 꺾였다.

최초의 일격부터 범상치 않았지만 이번에는 더했다.

한 손도 아닌 두 손, 그것도 대해와 같은 공력을 쏟아 막아 냈음에도 밀려났다.

기맥이 저릿하게 아파 오고 근육은 찢어질 것 같았다.

손목에 이어진 팔 관절도 삐걱거렸다.

파앙!

충격을 이기지 못한 몸이 부웅 뜨더니 뒤로 쭉 날아갔다.

확실히 이번 일격은 제대로 막지 못했다.

충격을 완전하게 줄이지 못한 탓인지 몸이 저릿했다.

냉악비는 버티는 걸 포기한 대신, 바로 뒤편에 앉아 있던 무곡의 목덜미를 붙잡고 함께 날아갔다.

콰과과광!

상천씩이나 되는 절대고수가 바닥을 몇 번 굴렀다.

체면이 말이 아닐지는 몰라도 머리 등 주요 부위를 보호한 덕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부딪치면서 충격을 분산한 다음 공중에서 몸을 틀어 비교적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후우……”

입술 밖으로 숨이 흘러나왔다.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비단처럼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매혹적이었다.

사파인이나 낭인이라면 훌륭하다고 박수 칠 나려타곤을 굴렸음에도 행색은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다.

흙이 묻은 것도 아니며 옷자락이 찢기지도 않았다.

“북해궁주.”

암천회주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하여 그대가 중원의 땅을 밟고 있는가?”

암천회주는 무력의 화신이나 결코 멍청하지 않다.

공방전 중에도 의아해했다.

“……”

긴 속눈썹이 내려앉았다가 올라온다.

눈꺼풀 아래의 청백색 눈동자를 마주 봐도 속을 알 수 없었다.

“우문이로군.”

냉악비가 입술을 달싹였다.

“기색을 보아하니 이미 짐작 가는 것이 있는 듯한데, 어찌하여 그리 묻는지 이해가 안 가는구나.”

“주서천.”

암천회주의 표정에 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이맛살은 찡그려지고 목소리엔 노기가 퍼졌다.

“본 녀가 말한 대로 알고 있지 않느냐.”

냉악비는 무표정인 채로 답했다.

“전력을 보강하는 동안 보이지 않더니, 남해도 모자라 북해까지 가서 도움을 청했나…… 재주도 좋군.”

분노로 타오르는 검붉은 안광을 보면 칭찬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성가신 놈.’

암천회가 아무리 터무니없는 조직이라 할지라도 엄연히 한계가 있다.

중원이라는 넓은 땅의 무림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지리상으로 먼 새외무림까지 신경 쓰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북해의 지도자이자 빙궁의 주인이여.”

암천회주가 턱을 들고 오연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굴복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이 시간부로 중원 무림의 일에 끼어들지 마라.

만약 그리해준다면 북해의 식량난을 해결해 줄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맹세하마.”

“거절하마.”

냉악비가 즉답했다.

“본 궁, 복해병궁은 화산파의 검신, 주서천에게 은혜를 입고 협조하기로 약조하였다. 또한, 그 문제의 식량난을 검신이 해결해 주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암천회주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과연, 북해궁주가 몸소 중원에 올만한 연유로다.

좋다. 협상이 결렬됐으니 굳이 주저리주저리 떠들 필요가 없겠구나. 방해가 되니 이만 죽도록 해라.”

“오만한 암천의 주인이여, 충고하도록 하마.

빙궁의 주인인 본 녀가 호위도 없이 혼자 왔을 것 같나?”

냉악비도 오연함이 묻어나는 시선으로 암천회주와 시선을 마주했다.

“검신이 말하길 그대는 오만하나 현명한 군주라고 하였으니 본 녀의 물음이 어떤 뜻인지 잘 알 것이다.”

“……”

“또 하나 묻겠다. 암천의 주인이여, 그대의 충성스런 군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암천회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냉악비가 말한 대로였다.

암천회주는 머리가 좋다.

판단력도 빨랐다.

금세 냉악비의 말뜻과, 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쯤 본 궁의 정예들이 정사 연합과 싸운 탓에 지쳐 있는 암천의 군사들을 유린하고 있을지도 모를텐데,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나?”

“북해궁주, 냉악비. 상천이라고 본좌를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그대가 괴물이란 건 직접 손을 섞은 본 녀 또한 알고 있다. 하나, 한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절대고수를 상대하려면 아무리 그대라 해도 성가시지 않겠는가.”

냉악비의 옆에 무곡이 섰다.

한손, 아니 두 손에 보이지 않는 검이 하나씩 쥐어졌다.

“본 녀가 확신하건데, 그대는 결사한 절대고수를 막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그대의 충성스런 군사는 본궁에서 온 정예 및 정사의 연합에 의해 전멸할 것이니라.

자아, 해볼테면 해 보거라.”

냉악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암천회주여.”

“네년……”

“본 녀는 북해의 지도자, 빙궁의 주인……”

휘이잉!

“냉악비로다.”

‘서로 다른 분야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협업하면 터무니없는 결과물이 나오게 되는구나.’

한철로 된 문 앞에 선 주서천이 생각했다.

누구와 누구의 연계인지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열겠습니다.”

끼이익.

한철문이 육중함을 자랑하듯, 소리를 내며 느긋하게 위로 올라갔다.

“험!”

이번 일을 위해 기관진식을 약간이나마 공부해 온 금의검문 무사가 문 뒤의 광경을 보고 숨을 멈췄다.

당혜 역시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하네.”

시산혈해.

말 그대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바다처럼 흘렀다.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평원에 참혹하게 울려 퍼지던 절규도 비명이 끊어진 지도 시간이 흘렀다.

산 자는 보이지 않고 죽은 자만 보였다.

혈교도가 본다면 환희하고도 남을 광경이었다.

“다 끝난 건가?”

주서천이 문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누가 만든 건지 알고 있으니 안심할 수가 없었다.

“삼천에 이르는 대군을 집어삼켰으니 웬만한 건 발동했겠지만, 그래도 괜한 건 건드리지 마.”

당혜도 경계의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 뒤에서 대기 중이던 일행에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당신들도 쫓아오지 말고 그쪽에서 기다려.”

툭 까놓고 말하면 고수가 아니라면 방해만 된다.

당혜의 경우엔 제갈승계에게 전해들은 지식도 있고, 그녀 한 사람 정도는 주서천의 보호 범위 내였다.

“……”

주서천은 도중에 멈춰 서서 오감에 집중했다.

시야는 수백 개에 이르는 돌기둥에 가려 제한됐다.

그래서 귀를 열고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던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주서천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걸었다.

얼핏 보면 산책하는 것 같았지만, 어떤 틈도 보이지 않았다.

달칵.

다음 발을 내디딘 순간,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양측에 쭉 나열한 돌기둥에 자그마한 구멍이 생겼다.

퓨뷰뷰븃!

독을 발라 둔 침이었다.

눈에 잘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고, 뾰족한 침이 수십 개씩이나 쏘아졌다.

하나 그 어떠한 것도 닿지 못했다.

만독불침의 위엄을 보여 주기도 전에 호신강기에 막혀 튕겨졌다.

“참 나……”

당혜가 앞의 광경을 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별로. 새삼 당신이 얼마나 괴물인지 알았을 뿐이야.”

당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답했다.

“아무리 독침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화경의 고수가 강기로 공격해온 것도 아닌데 호신강기라니.

당신에게 한때나마 내화외빈이라는 별호가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아.”

무공의 극의라 일컬어지는 화경도 지상미궁 앞에선 끝내 버티지 못했다.

사실, 함정 한둘이라면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기 앞에선 한철, 만년한철로 된 터무니없는 물건을 제외하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수천 개의 화살 비가 쏟아져도 호신강기만 두르면 안전하다.

회전하는 칼날도 얼마든지 부술 수 있었다.

하나 강점만큼이나 단점도 존재했다.

바로 내공의 극심한 소모 탓이었다.

화경이라고 강기를 물처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호신강기의 경우는 특히 더 심했다.

“내공만 받쳐 주면 누구나 할 수 있……”

휘릭!

당혜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앞서가던 주서천이 말을 끊고 갑작스럽게 몸을 휙 돌렸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틈도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상황 인식조차 늦어졌다.

주서천은 손을 뻗어 당혜의 팔을 낚아챈 뒤, 다치지 않도록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쐐액!

동시에 왼손으로 주먹을 뻗는다.

속도도 속도지만 위력도 범상치 않았다.

쾅!

“어째 이곳에 들어온 이후 뒤통수가 얼얼하더니만, 그 음험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천추.”

주서천이 차갑게 웃었다.

곧게 뻗은 주먹을 맞댄 손바닥.

그 맞은편에는 당명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껌뻑였다.

“이럴 수가.”

목소리에선 경악과 불신이 묻어났다.

“한 번이면 몰라도 두 번은 통하지 않는다.”

직감대로였다.

당명인은 쉽게 죽을 위인이 아니다.

또한, 전처럼 생각지도 못한 틈을 노려 공격해 올 것이라 생각했다.

“무형지독이 통하지 않는다고?”

무형지독이 무서운 이유는 중독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하독을 전혀 눈치챌 수 없다는 것과 중독 이후의 무시무시한 위력 때문이다.

설사 현경의 성취를 이룬 절대고수라 할지라도 독공이 주류가 아닌 이상 중독되면 최소 전신 마비다.

당명인은 전에 이를 통해 주서천의 심장을 조각낸 적이 있었다.

“무형지독만이 아니다.”

주서천이 낮게 읊조렸다.

“더 이상 어떠한 독도 내게는 닿지 않는다, 당명인.”

“쿨럭!”

당명인이 피를 울컥 토해 냈다.

무형지독은 쉽게 다룰 수 있는 독이 아니다.

잘못 다루면 사용자조차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당명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목표에게 닿지 못한 무형지독은 역류하여 그대로 되돌아왔다.

독에 관해서만큼은 불세출의 천재이나, 현경의 성취를 이루지도 못한 자가 멀쩡할 리 없었다.

“하……”

당명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빠져나왔다.

“만독불침?”

“그래.”

주먹에 닿은 손에서 힘이 빠진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내공의 순환이 멈췄다.

“이해가…… 안 가는군.”

당명인이 힘없는 발걸음으로 물러났다.

주서천도 당혜를 품 안에서 놓아주었다.

“왜 전에는 당했던 거지?”

“그때는 아니었으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고 있나.

만독불침은 본인이 되고자 한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천독불침만 해도 사방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만독불침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

전설로만 알려진 체질이다.

체질이란 건 말 그대로 체질이다.

고수에게 독이 잘 통하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내공으로 불태우거나 침입하지 못하도록 밀어내서였다.

괜히 두 눈 붉게 뜨고 사위로 삼으려던 게 아니었다.

‘지고의 영약이냐 내단, 그리고 상승의 독공과 깨달음이 주어진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주서천은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괜한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혹여나 암천회의 생존자가 동료의 시체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패신군이 아닌 검신 주서천이 독공을 수련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여간 골치 아파지는 게 아니다.

“네가, 아니 너희 암천회가 아는 것이 세상의 진리요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

당명인은 주서천을 보고 그가 사실대로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의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토를 달거나 묻지 않았다.

“당명인. 네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성년도 되지 않아 무림의 어두운 부분을 끌어안아야 하는 현실을 강요받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부모의 정을 받기도 전에 사람을 고문하는 법부터 가르침 받았다.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도 네가 저지른 행동은 정당화할 수 없으며, 긍정도 동조도 할 수 없다.”

암천회은 전무후무한 최악의 조직이다.

무림의 썩어 빠진 현실이나 사회를 고쳐야 한다는 말은 결국 듣기 좋은 명분이요, 목적을 위해 이용했을 뿐이었다.

“당혜.”

스릉.

“할 이야기가 있다면, 지금 하도록 해.”

굳이 인질로 삼아 정보를 캐낼 필요도 없었다.

흑영부의 수장 정도 되는 자라면 고통에 내성이 있을 테니 단연 고문같은 건 별 효력을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 암천회의 천추가 그리 녹록할 리 없다.

도리어 잘못된 정보 탓에 놀아날 확률이 높았다.

암천회의 수뇌에게 ‘혹시라도’ 라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 할지라도 필요 없다.

당혜만 자리에 없었다면 진작 목을 베었다.

“……”

당가의 핏줄이 서로 마주 봤다.

당명인도 당혜도 어떠한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모르게 공허한 눈빛으로 서로를 담았다.

기분 나쁠 정도의 침묵을 깬 건 당혜였다.

“동경……”

먼 옛날, 당명인은 우상이었다.

당가 역사상 최고의 천재이며, 인재.

주변은 물론이고 가족에게도 너무나도 먼 사람이었다.

당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면 항상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했었을지도 몰라.”

데일 것처럼 타오르는 증오나 분노는 없었다.

오물을 보는 것처럼 혐오 어린 눈초리도 보이지 않았다.

“실망시켜서 미안하구나.”

당명인 역시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연령에 비해 숱한 주름이 유난히 짙어 보였다.

“하나만…… 여쭤 볼게요.”

여동생이 오빠에게 묻는다.

“독운인무, 오라버니가 제조하셨나요?”

당명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옛 추억을 상기시키는 호칭으로 불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질문의 의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표정을 파악할 틈도 없이 원래대로 되돌리고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흑영부에 있던 걸 가져와 사용했을 뿐이다.”

“그런…… 가요.”

당혜는 납득했다는 듯, 몸을 돌렸다.

“먼저 갈게.”

등을 돌린 탓에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모르게 쓸쓸해보인다고 주서천은 생각했다.

“주서천.”

여동생에게서 오빠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누군가의 피로 점철된 가슴 위로 검 끝이 닿았다.

“시간을 줘서 고맙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평온해 보였다.

눈 밑에 낀 검은 기미, 나이에 맞지 않게 가득한 주름살은 여전했지만 어째선지 낯빛이 편해 보였다.

“아쉽구나.”

옷자락이 검에 빨려 들어간다.

피부와 근육도 갈라졌다.

“저 아이가…… 숙명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걸…… 보지 못하다니……”

“……!”

주서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너, 설마……”

“주서천.”

당명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빛에는 그림자가 생기는 법이다.

남궁위무도 그리했듯이, 언젠가는 또다시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불려오겠지.

어쩔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으니 되돌렸다. 

필요악이란 그러한 것이다.”

시야와 의식이 희미해진다.

입술이 마른 사막처럼 갈라졌다.

“어떠한 노력을 한들,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더럽다며 눈을 돌리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터무니없는 것인지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입가에는 조소가 맺혔다.

“적어도, 적어도 그것만큼은 저지해야 한다.

누군가가 권세에 눈이 멀어, 지독한 짓을 저지르는 걸……”

“내가 널 동정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당명인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 행동은 악행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싸웠다는 게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동정심 따윈 손톱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아니…… 변명하거나, 정당화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

그저……경고일…… 뿐이다……”

당명인의 숨이 옅어졌다.

“나는…… 악(惡)이요…… 독(毒)이다.”

눈꺼풀이 자츰 무거워졌다.

천근처럼 느껴져 뜰 수가 없었다.

“무림맹의 그림자이자…… 정파의 독……”

“……”

어린 시절, 누군가와 뛰어놀던 광경이 떠올랐다.

“독인(毒人)…… 당명인이다……”

천추, 당명인이 숨을 거뒀다.

주서천은 마지막까지 자만하지 않고, 당명인의 심장을 몇 번이나 찔러 확인 사살까지 끝낸 뒤에야 지상미궁을 벗어났다.

밖에 나와 다 끝났다는 듯 검을 높이 들자 긴장한 채 대기하고 있던 북상군은 그제야 함성을 내지르며 기뻐할 수 있었다.

“검신”

“화산파의 사대제자가 팽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사형제와 합류하려던 찰나, 팽자호가 다가왔다.

수라장을 다녀왔다는 듯, 행색이 지독했다.

팽자호는 상천씩이나 되는 절대고수가 예의 바르게 인사해 주자 뿌듯한 듯이 웃었다.

“정도, 아니 무림의 영웅이자 상천씩이나 되는 분에게 이렇게 인사를 받다니 영광이나 그만 머리를 들어주시오. 내 듣기론 위험하던 찰나 검신께서 나타나 도와주셨다고 들었소.

북부 전선의 대표로서 감사 인사를 드리오.”

“아닙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소. 그나저나, 여쭤볼 게 하나 있소만.”

“무엇입니까?”

“이 근처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자들, 혹시 검신께서 데려오셨소? 보아하니 자객처럼 보이던데……”

“아아, 네. 그렇습니다. 다만 제가 아닌 금의상단에 고용된 자들입니다. 적은 아니니 안심해 주십시오.”

전설의 암살 집단 유령곡이며 그 수장이 눈앞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거짓말했다.

“수고스럽겠지만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대신 전해 줄 수 있겠소?”

“감사 인사…… 말입니까?”

주서천이 의외란 듯 물었다.

오대세가, 하북팽가는 불의를 참지 못하며 협을 중시하는 정파다운 정파 중 한 곳이다.

다만, 그 성향이 조금 심한 감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정도에 벗어나거나 하면 참지 않고 화를 낸다.

그렇다 보니 마도이세나 사파는 물론이요 낭인이나 자객방처럼 돈에 신념과 영혼을 판 곳을 혐오한다.

팽자호는 주서천의 의아하다는 표정을 보고 웃었다.

“하하하, 확실히 본 세가나 나나, 정도와 어긋난 방식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을 그리 좋아하진 않소. 하지만 아무리 맞지 않고 싫다 할지라도,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을 만큼의 쓰레기도 아니오.”

“과연, 알겠습니다. 대신 전하겠습니다.”

팽가의 성품이 호쾌하고 하더니만 그 말대로였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럴 때가 아닌 듯 싶소. 다른 곳이 걱정이오.”

“북하군 말입니까?”

“들으셨소?”

“지상미궁을 위해 둘로 갈라진 것까진 들었습니다.

다만 그 이후의 소식은 저 역시 모르는지라, 정보가 필요합니다.”

“일단은 보고부터 해야겠구려. 본부로 당장 서신을 보낼 예정이오. 같이 가겠소?”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서 따로 가겠습니다. 금방 쫓아가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잠시 후에 뵙겠소.”

팽자호가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주서천은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소령.”

“예.”

언제나 그렇듯, 최초부터 곁에 있었던 것처럼 나타났다.

“하북팽가의 가주가 감사하다고 전해 달란다.”

“이해.”

하아.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소령 입장에선 전해 들은 것으로 끝이었다.

이에 관한 의문은 물론이요 소감 따위 조금도 없었다.

방금 전 대답은 ‘감사 인사를 전달받았다.’라는 의미일 뿐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대답에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아니, 됐다.

그보다 흑철장갑(黑鐵掌座)은 어떻지?”

“우수.”

소령이 왼팔을 들어 새로운 무구를 보여 주었다.

척 봐도 일반적인 장갑과는 달랐다.

손가락 끝 부분이 맹수의 발톱처럼 뾰족한 것이 특징이었다.

손을 덮은 부위도 제법 길었다.

손 부근에서 끝나지 않고 팔목 전체였다.

“만년한철로 만든 건데, 우수하지 않을 리 없지.”

만약 이 자리에 이의채가 있었더라면 침을 질질 흘리며 값을 매기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흑철장갑의 소재가 되는 건 무려 만년한철.

주서천에게 훼손된 진시황의 법보였다.

무형강기조차 막아 낸 만년한철을 회수한 것까진 좋았지만, 손상이 심해 다시 녹여 새로 만들어야 했다.

주서천은 고민한 끝에 소령을 위해 재사용하기로 했다.

‘좋은 무기가 나쁜 건 아니지만, 무인 특성상 무기에만 의존한다면 그리 좋지 않다.’

주서천 본인만 해도 무기에 그리 구애받지 않는다.

사부님이나 낙소월에게 선물할까 했지만, 괜히 높은 경지에 오르는데 방해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소령이 활약할 일이 많으니, 나쁘지 않지.’

주서천은 흑철장갑을 뻔히 쳐다보다가 소령의 허리 뒤쪽으로 눈을 돌렸다.

“각도(角刀)는?”

스릉.

소령이 여기 있다는 듯, 칼집에서 이 척 가량이 되는 칼을 꺼냈다.

도신의 색도 흑철장갑처럼 검었다.

“상시 독을 발라 두어도 부식하지 않습니다.

강도나 내구도 역시 뛰어나며, 강기 또한 막아 줍니다.”

“과연, 칠각사의 뿔.”

칼의 소재는 독혈곡의 주인, 칠각사의 뿔이었다.

주서천은 옛적에 애뇌산에서 칠각사를 사냥하고 내단과 여섯 개의 뿔을 얻었다.

본래 일곱 개였으나 하나는 단하성에게 협력 및 입막음용으로 건냈다.

‘원래라면 진작 사용했어야 했지만, 뿔을 다룰 수 있는 장인이 없었다 보니 이제야 사용되는구나.’

주서천은 제작 관련으로는 간야자에게 일임했다.

금의상단에서 보관 중이던 각종 재료도 내주었다.

칠각사의 뿔은 유령의 무기, 그 외에도 기관 장치의 재료로 쓰였다.

“잠시 물러나 있도록 해.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는 거지만, 유령에 부상자가 있다면 버리지 말고.”

“이해.”

유령은 스스로는 물론이고 동료도 도구 취급한다.

효율이 없거나 방해된다고 생각하면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기밀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목숨까지 앗아간다.

유령곡이 괜히 신비로운 집단이 아니다.

기밀 유지만큼은 지독한 걸 넘어 미쳤다고 생각될 수준이다.

“앞으로……”

암천의 수뇌가 회주와 천기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새삼 감회에 젖었다.

문뜩 고개를 들어 보니 어스름한 밤하늘이 보였다.

황혼은 아직 다 걷히지 않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어두운 장막이 주변을 덮었다.

“둘.”

주서천의 눈길을 끈 건 구름 사이에 낀 달이 아니었다.

국자 모양을 한 일곱 개의 별이었다.

“대협! 주서천 대협!”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령으로 보이는 무림맹 소속 무사가 황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크, 큰일입니다! 북하군이……!”

“무슨 일입니까?”

주서천은 전령을 따라 급히 지휘 막사로 돌아갔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팽자호를 대신해 북하군의 지휘권을 맡은 신도균이었다.

척 봐도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검신!”

신도균이 주서천을 보자마자 크게 반겼다.

“무슨 일이 있었죠?”

“그게……”

선도균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분위기가 영 좋지 못했다.

특히 개룡, 시량이 금주봉개, 손일산과 개방도가 시간을 끌려다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자 폭발할 뻔한 걸 참았다.

그 뒤로 후퇴 도중 인근에 마을이 발견되어 소림사와 서문세가가 남았다는 걸 들었을 때는 하나같이 아연실색했다.

‘안 돼.’

주서천의 안색도 새하얗게 질렸다.

“소림의 방장을 연달아 잃었다고?”

은하노사가 이럴 수는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상승 곡선이었던 사기가 다시 밑으로 뚝 떨어졌다.

소림사는 정파, 나아가 무림의 기둥이다.

백팔나한의 무명 또한 두말할 것 없다.

이로써 소림사의 방장은 세 번에 걸쳐 암천회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것이 된다.

절망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었다.

주서천은 신도균의 입에서 무곡의 이름이 나오자 반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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