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상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잠영방이 상대하는 동안, 당명인은 부대를 이끌고 배후를 잡았다.
그 탓에 애초 목적이었던 기관의 발동은커녕 유도조차 실패한 탓에 낭패를 보고 말았다.
계획의 일부가 아닌 전부였던 게 흐트러지자 북상군의 패색이 짙어졌다.
“아아악!”
“크악!”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안 돼.’
당혜의 두툼하고 고운 입술에 이자국이 남았다.
‘다들 너무 지쳐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우면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쳐 버렸다.
그에 반면 당명인과 그 부대는 멀쩡했다.
잠영방은 절반 이상 전멸했다지만 그 외의 부대가 만반의 태세로 덤벼오니 답이 없었다.
“이 이상은 무의미하다는 건 알고 있지 않느냐.”
당명인이 공허한 눈으로 여동생을 쳐다봤다.
“닥쳐!”
당명인과 달리 당혜의 눈빛은 처절했다.
‘어떻게 하지?’
필사적으로 두뇌를 굴려 본다.
계책을 떠올렸다.
포위당한 채로는 살상력이 높으나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암기를 쓸 수도 없으니 동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힘을 내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현실적인 문제가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최대 무력인 팽자호가 뒤에서 잡힌 것이 문제였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사전에 먹어 둔 약의 효력도 다 끝났으니 소모가 심할 것이다.
‘어떻게……!’
탈출로가 보이지 않는다.
해결 방안도 없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패배하는 건가하고 생각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순간.
“명인아, 내가 너만 보면 막, 이 심장이 저릿하고 그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럴까?”
“……”
당명인이 고개를 휙 돌렸다.
“혹시, 나 없는 동안 독은 개량은 했니?
난 널 위해서 많은 걸 준비해 왔는데……”
“이럴 수가……”
전장의 분위기가 바뀐다.
절망이 희망으로 된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기가 위로 수직 상승했다.
“잘 지냈냐. 무형지독 아끼지 말고 팍팍 써 보자.”
그곳엔 주서천이 있었다.
북상군은 독운인무 탓에 수백 명의 피해를 봤다.
이천육백에서 육백을 잃어 이천으로 감소했다.
문제는 이 이천이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전력이라는 것이었다.
부상도 부상이고 심적으로 지쳤다.
이 상황에서 배후까지 잡혔으니 울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최고의 원군이 나타났다.
당혜는 입술을 닫은 채로 옅게나마 환하게 웃었다.
“검신!”
단리화가 주서천을 알아보고 별호를 외쳤다.
“검신?”
상천육좌의 별호에 주변인들이 반응을 보였다.
“주, 주서천 대협!”
“주서천 대협이시다!”
주서천은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정도의 미남은 아니다.
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입을 다물고 있거나 무력만 보이지 않는다면, 알아채지 못한다.
동네에서 볼 법한 준수한 외모의 청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경지도 숨겨져 존재감도 낮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한 번 인식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상착의가 워낙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전 무림에서 주목받는 인물이다 보니 안 알려질 수가 없었다.
“바, 방금 뭐라고?”
“주서천이라고?”
암천군이 술렁였다.
방금 전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모습은 없었다.
당혹스러운 듯, 눈을 부릅뜨고 불안함을 보였다.
“그래.”
주서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화산파의 주서천이다.”
주서천의 수긍에 좌중이 얼어붙은 것처럼 침묵에 잠겼다.
방금 전의 난전이 거짓말 같았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의 기분 나쁜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북상군의 함성이었다.
“우……”
“와아아아아아아!”
하늘이 울린다.
땅이 흔들렸다.
터질 것 같은 함성에 심장이 절로 떨려 왔다.
이천이 아니라 이만의 무림인이 내는 소리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평원 한가운데서 흘러나온 함성은 지평선까지 넘보며 끝없이 울려 퍼졌고, 천지를 가득 메웠다.
“주서천이다……”
“검신은 없던 게 아니었나?”
“아니, 주서천이 왜……”
반면 암천회의 분위기는 축 가라앉았다.
의문과 당혹감부터 시작해 걱정, 그리고 두려움까지 묻어났다.
숙적의 등장도 등장이지만 상천육좌라는 의미가 더 컸다.
일당백(當百), 아니 만인지적(萬人之敵)이다.
“사형!”
“주 사제다!”
“주서천!”
화산파가 무척 기뻐하며 주서천을 반겼다.
북상군 내에서도 사기의 상승 폭이 제일 높았다.
새삼스레 주서천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느라 좀 힘들었다.”
가벼이 보이나 농담이 아니다.
실제로 숨이 터질 기세로 달려왔다.
식사와 수면도 포기한 채 유령신공으로 무게를 줄이고 화산파의 경공인 암향표를 극성으로 펼쳤다.
전황을 파악할 시간도 아까웠을 정도였다.
“주서천……”
당명인이 주서천의 이름을 읊조렸다.
난감했다.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본부에 있는 천기에게 주서천의 부재를 보고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왜 이제 와서 나타난 건지 그것은 둘째 치고, 천기가 보고에 맞춰 작전을 수정하고 있을 터.
‘이미 너무 늦었다.’
상천육좌를 앞에 두고 허튼짓도 할 수 없었다.
전서응이 날아오른다면 분명 두 조각 날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거리를 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 당명인. 나다.”
주서천은 당명인과 마주 봤다.
그에겐 심장이 조각나 죽을 뻔했다.
만약 조금만 늦다거나 운이 좋지 않았더라면 큰일 났을 것이다.
“네 덕에 사람을 끝까지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끝까지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다시금 명심하게 됐다. 고맙다.
그런데 아직도 그때 맞은 뒤통수가 얼얼하더라.”
정말 생각지도 못한 뒤통수였다.
그때 된통 당한 이후로 어떤 때에도 확신을 갖지 않게 됐다.
최후의 최후까지 의심을 놓지 않았다.
의심도 의심이지만 생각도 많아졌다.
터무니없는 가능성까지 떠올리며 예측하는 능력도 길렀다.
“분명, 그때 확실히 죽었을 텐데……”
당명인은 주서천을 보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천조차 위협할 수 있는 무형지독이다.
등을 잡아 허를 찔러 중독시킨 것도 모자라 심장도 조각냈다.
상천이 아니라 상천 할아버지가 와도 죽어야 한다.
정마대전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두 귀를 의심했다.
혹시 사기 증진을 위해 거짓 인물을 내세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죽을 뻔했지.”
만약, 소령과 심상구현이 아니었더라면 염라대왕을 만나 다음 회귀를 위해 협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서 돌아왔다.”
당명인은 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진정하고 태세를 정비해라. 아직 형세가 뒤집힌 건 아니다.’
괜히 정파에서 어둠이자 비밀이 아니다.
무언가 숨기는 것은 도가 탔다.
표정은 물론이요 기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당명인이 정녕 무서운 건 연령에 맞지 않은 성숙함, 그리고 들으면 치를 떨 정도의 경험이었다.
애초에 흑영부, 그리고 당가가 권리를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사기가 높아진다고 신체적, 정신적 부담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속이는 것. 그러니 정면으로 부딪쳐도 주춤할지언정 밀리진 않을거다.’
독룡의 눈꺼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말이나 몸짓만이 아니라 눈빛만으로 사고가 읽힐 수 있어서다.
‘적에 비해 아직 아군의 수가 더 많다.’
정파는 양보다 질이다.
사파는 질보다 양이다.
그리고 암천회는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아챘다.
암천남군의 구성원은 대다수 비교적 최근 입회한 이들이지만, 암천북군은 아니었다.
수준부터 달랐다.
그 요광이 양성한 정예의 칠성사병, 그 외에도 오래전에 입회하여 힘을 기른 고수들도 다수였다.
정사 연합, 정확히 말해선 북상군은 이천 명이다.
그에 비해 암천군은 아직 삼천씩이나 남았다.
평균적인 무력이나 수 등, 순수한 전력 면으론 단연 이쪽이 우세했다.
‘주서천이라는 변칙이 나타났으나, 정 문제가 되면 천여 명으로 발을 묶고 나머지를 전멸시키면 된다.’
개개인으로서 승리해도 실속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초의 군주이자 무신으로서 직접 군사를 이끌어 무패를 자랑했던 항우의 일화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항우는 무력이나 전술적인 측면에선 승자였으나, 그뿐이었다.
정치적으로나 지도자로선 무능해 몰락했다.
나라가 패하고 몰락했는데 개인의 승리가 무슨 상관인가.
어떠한 의미도 없다.
‘예상보다 피해가 클지 몰라도 승세는 이쪽에 있다.’
당명인은 감았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무엇보다, 주서천이 나타남으로써 이목이 집중되어, 잠영방이 건재하다는 사실이 잊혀졌다.’
잠영방은 삼류나 이류 집단이 아니다.
흑도는 물론이요, 무림에서 인정받는 조직인 만큼 강하다.
‘그러니, 본대의 격돌 이후 앞으로 내세웠던 칠성사병과 잠영방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독룡.”
당명인은 주서천과 다시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리운 별호를 들었다.
“말했을 텐데.”
주서천이 웃었다.
다만, 입가와 다르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더 이상, 조금도 방심하지 않는다고.”
끄아아아아악!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북상군 후미, 독운인무 속에서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이 참혹하게 울려 퍼졌다.
아아악!
“무슨……?”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비명이 연달아 울렸다.
“전쟁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혼자서 할 수 없어서 전생에서 활약한 인재들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서천은 허리춤에서 검을 느릿하게 뽑았다.
눈빛이나 태도에선 어떠한 자만도 오만도, 그리고 여유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적군에 상천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필사적인 기색이 엿보였다.
“아무리 만인지적의 절대고수가 도착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들, 어디까지나 ‘희망’일뿐이다.
현실이란 그 어떠한 것보다 냉혹하고, 잔혹하지.
희망이 생긴다 해도 바람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가 없다면 패한다.”
희망이 중요하지 않은 건 결코 아니다.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작할 수 없다.
그러나 실현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
“많은 걸 준비해 왔다고 말하지 않았나.”
크아아아악!
“천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고함은 적인지 아군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나 어디까지나 정사인의 입장에서였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온 잠영방은 제외였다.
낮보다는 밤이 편안했고, 빛보다는 어둠이 아늑한 그들에게 있어서 독인운무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당명인! 이 겁쟁이 새끼가!”
“크크큭!”
잠영방주는 노성이 섞인 고함을 버럭버럭 지르는 팽자호를 바라보면서 음침하게 웃어 댔다.
“어디 있느냐, 당명인!”
팽자호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당명인이 일대일 승부를 할 것처럼 말하더니만,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내뺀 것이었다.
그리고 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잠영방의 무리에 그제야 농락당한 걸 깨닫고 악을 질러 댔다.
“이 노옴!”
팽자호는 고수다.
과연 팽가의 수장다웠다.
그러나 아무리 고수라고 한들,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는 암흑에 최적인 이들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휘리리릭!
“어딜!”
팽자호가 어림없다는 듯, 은밀하게 다가온 륜을 도로 휘둘러 쳐냈다.
째앵!
은회륜을 어찌어찌 쳐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적은 한둘이 아니었다.
“크윽!”
푸슛!
통나무처럼 굵직한 대퇴부에 혈선이 그어졌다.
피부가 갈라지면서 그위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깊다.’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크흐흐, 팽자호. 네놈도 여기까지다.”
잠영방주가 음습하게 웃었다.
“이 겁쟁이 새끼들아, 사내답게 정정당당히 맞붙자!”
“혹시 자객에 대한 개념을 잘못 알고 있는 거냐?
우리보고 정정당당해지라는 건, 뒈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뇌에 근육만 찬 머저리 같은 놈아.”
잠영방주가 대놓고 비웃었다.
“큭!”
팽자호는 도병을 꽉 쥐었다.
‘좋지 않다.’
허벅지의 통증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약효가 끝나 해독 탓에 내공이 지속적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저 씹어죽일 놈들이 근접해 오면 모를까, 내 주변을 배회하며 륜을 던지는 탓에 제대로 된 반격도 할 수 없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아직까지 버틴 것이 용하다.
적이 한 사람도 아니고 다수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결국 지쳐서 죽을 것이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다음 륜이 날아올 때, 튕겨낸 다음 달려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겠다.’
팽자호가 결사한 듯 숨을 가다듬고.
“오냐, 누가 이기나 보자!”
그대로 뛰쳐나갔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잠영방주가 복면 속에서 웃음을 지었다.
“네놈의 목을 바쳐 회주께 인정받겠다!
잠영방의 전설에 제물이 되는 걸 영광으로 여겨라! 하하하!”
휘리리릭!
륜이 손에서 떠났다.
극성으로 펼쳐진 은회륜은 바람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팽자호의 목을 노렸다.
둥근 외날이 팽자호에게 당도한 순간, 튕겨 내는 소리가 유난하게 크게 들렸다.
째애앵!
“지금이다!”
서걱!
“어?”
무언가가 잘렸다.
그러냐 당초 예상과는 달랐다.
팽자호는 놀라면서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를 휘두르기도 전에 무언가가 튕겨져 나간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내, 내 팔이?”
잠영방주의 얼굴이 곧 경악으로 물들어져 갔다.
“명령 확인 및 전달. 아군의 보호.”
팽자호는 흠칫 놀랐다.
분명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거늘,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요?”
팽자호가 물었고……
“적의 섬멸.”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소녀가 답했다.
피부 위에서 고문자가 어둡게 빛나며 꿈틀거렸다.
“명.”
주변에서 수십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잠영방주는 괜히 일류 자객이 아니었다.
팔꿈치 밑으로 신체 일부가 잘려나갔음에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지혈을 위해 곧장 점혈을 짚었다.
잠영방주는 오른팔을 붙잡은 채, 파악에 나섰다.
‘방금 전, 수십 명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어떻게 된 거지?
숨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는다.’
잠영방의 비시인공으로 증폭된 오감 능력은 특정 동물에 준할 정도다.
마음만 먹는다면 죽기 직전 미약한 숨소리까지 잡아낸다.
괜히 제 삼의 눈이 되는 게 아니었다.
‘지척에 있는 것이 분명하거늘, 그걸 잡아내지 못하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복면 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디냐.”
잠영방주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감히 잠영방 앞에서 귀식대법으로 숨다니, 어디의 자객방이냐!”
들리지 않는 게 아니다.
애초에 숨을 내뱉지 않았다.
귀식대법을 운용중인 것이 틀림없었다.
독연 속에서 잠영방주의 노기 어린 고함이 울려 퍼졌으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유령 중 그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독인운무에 동류들이 숨어들었다!”
잠영방주가 근처에 떨어진 륜을 주웠다.
“죽여……”
퓻!
만약, 앞이 환하게 보였다면 섬광이 번쩍였을지도 모른다.
손가락만한 암기가 독연을 뚫고 날아왔다.
“그쪽이냐!”
잠영방주가 예상했다는 듯이 외팔로 륜을 크게 휘둘렀다.
둥근 외날이 곡선을 그리며 암기를 쳐냈다.
째애앵!
자객에게 요구되는 건 기술보다는 냉정함이다.
감정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위치를 노출한다면 자객 실격이다.
암살이란 개념을 모르는 병신이다.
그런데도 소리를 친 건, 아군에게 주의를 알릴 겸 아직 파악하지 못한 적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였다.
잠영방주는 암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죽어라!’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앞으로 힘차게 뻗으면서 륜을 날렸다.
부웅.
손가락이 펴지면서 힘이 전달된다.
꽃처럼 활짝 핀 손가락을 스쳐 지나간 륜이 풍차처럼 빙글 돌았다.
날로 이루어진 테두리가 굴렀다.
무게가 제법 수레바퀴처럼 묵직한데도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은회륜이란 이름 그대로 은밀함을 토대로 극대화한 무공, 소리가 무식하게 ‘붕붕붕’ 하고 날 리 없었다.
‘보인다!’
잠영방주의 복면이 웃는 모양으로 깊게 파였다.
오감이 극대화돼서 그런지 일순간 주변이 보였다.
발음체가 일으키며 흩뿌린 진동이 지면 혹은 적의 신체에 부딪친 걸 토대로 모습을 예상할 수 있었다.
제 삼의 눈에 소녀의 모습을 한 적이 막으려는 듯 왼팔을 드는 것이 잡혔다.
‘좋아, 그대로 막아라!’
참으려고 해도 조소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잠영방의 수장이 평범한 자객일줄 알았느냐!’
손가락으로 전달된 힘은 근력만이 아니다.
거무튀튀하면서도 붉은빛이 감도는 기가 언뜻 보였다.
물처럼 넘실거리던 아지랑이가 몇 차례나 중첩되면서 얼음처럼 굳어간다.
륜강(輪罡)이었다.
강호에는 이 할의 힘을 숨겨 비장의 수로 두라는 말이 있다.
자객의 경우엔 삼 할 이상을 숨겨 둔다.
사도의 무공만큼 벽을 깨고 화경의 성취를 이루기 어려운 것이 자객이다.
만약 알려지게 된다면 명성을 얻을 수 있으나, 잠영방주는 이처럼 만약을 위해 숨겨 왔었다.
‘죽어라!’
은회륜의 또 하나의 장점은, 평소 수련 방식이 양손인 점이었다.
우수건 좌수건 동일한 위력을 냈다.
무엇으로 막건 간에 팔은 깨끗하게 잘려 나갈 것이며, 뒤로 빙글 돌아 목을 벨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휘잉.
륜이 돌아간다.
외날이 적의 왼팔에 닿았다.
채앵!
‘말도 안 돼!’
귀를 의심했다.
아니, 감각 전부 의심스러웠다.
왼팔에 닿은 것이 분명 보였다.
그런데 살을 베기는커녕 쇠에 부딪친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슥.
유령 가라사대, 암살에 중요한 건 적을 방심시키고 속이는 것이라 하였다.
그 말대로다.
소령은 잠영방주의 흔들림을 귀신같이 포착했다.
유령공으로 몸을 깃털처럼 만든다.
발과 지표면이 부딪치는 소리를 줄였다.
호흡은 끊긴 지 오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건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항상 눈을 천으로 가리고 다니는 유령이다.
몸에 달라붙으면서 면적이 좁은 옷차림이 도움이 됐다.
옷자락이 바람에 부풀려져 휘날리는 걸 막았다.
‘아뿔사!’
잠영방주가 뒤늦게 제정신을 차렸다.
뇌가 명령도 내리기 전에 몸이 반응한다.
과연 고수다웠다.
동시에 오감이 적의 정보를 캐낸다.
‘숨소리나 발걸음 소리는 물론이고, 기척도 없다고?’
알 수 없었다.
살필 수 없었다.
그러나 있었다.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잡히지 않았다.
‘마치 실체하지 않는 것 같……’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어 대기 시작했다.
감정의 분수가 콸콸 넘쳐흘렀다.
“이제야 나타나다니, 그럴 리 없단 말이다!”
잠영방주가 목이 터져라 외치며 현실을 부정했다.
“아아아아아악!”
고함인지 괴성인지, 절규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괴성조차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시선 끝자락에 장갑이 닿았다.
촉감의 판단은 천이나 가죽, 실이 아닌 철이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보호구라 생각하지만 무언가가 틀렸다.
손가락 부위가 맹수의 발톱처럼 뾰족하고, 조금 길었다.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덮인 건 확인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잠영방주는 소령에게 머리째로 손아귀에 잡혔다.
소령은 잠영방주의 외침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감정은 물론이요 적을 향한 살의조차 없다.
체내의 기맥에 내공이 고요하게 순환한다.
피부 위에 새겨진 주술문이 음침한 빛을 내뿜었다.
콰직!
외마디의 비명조차 없었다.
마치 손에 사과를 쥐고 힘을 줘서 부순 것처럼 머리통이 박살 났다.
뇌수와 핏물이 뒤섞여 끈적하게 뚝뚝 떨어졌다.
털썩.
목의 살점이 뜯겼다.
머리와 연결된 몸이 분리되며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바, 방주!’
‘방주가 순식간에 죽었다!’
여태껏 곁의 동료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잠영객 무리 사이에서 동요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적을 쫓던 이들도 뒤를 돌아보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다들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윽!”
“아악!”
무너진 평정심의 대가는 목숨이었다.
수십에 이르는 유령들은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주변의 동요를 확인하자마자 슬쩍 접근해 암살했다.
화려함은 없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단순했으며, 고요했다.
근처에 숨어 있다가 유령보로 접근해 비수로 동맥에 꽂는다.
턱을 잡고 돌려 목 뼈를 부러뜨렸다.
악몽이었다.
“으아아악!”
“크악!”
“케헥!”
유령곡은 적의 입을 막지 않았다.
도리어 소리를 더 잘 낼 수 있도록 때로는 일부러 살려 두었다.
딱딱딱!
잠영방의 무리 중 누군가가 최초로 몸을 떨었다.
턱뼈가 서로 부딪치면서 소리를 냈다.
복면 위로 보이는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무지는 공포가 된다.
사람들이 귀신 등의 미신을 두려워하는 건……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데다가 어찌할 수도 없다.
무지이자 공포는 곧 자신들, 잠영방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주인이 바뀌고 말았다.
우위를 가지지 못했다.
무언가가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있으나 없다.
실체하지 않는 무언가가 목숨을 앗아 갔다.
사방팔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에 정신적인 압박을 받았다.
“도대체……?”
팽자호, 그 외에 북상군들도 어안이 벙벙했다.
도움을 받는 건 좋았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싸우는 도중에 적이 갑자기 쓰러졌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와중이었는데 추격자가 사라졌다.
심지어 부상자 몇몇은 치료까지 받았다.
“누, 누구요?”
“어디서 온 원군이요?”
“이보시오.”
어떻게 된 일이냐며 물어봤으나 유령은 대답 대신 퇴로의 방향만 알려주고 사라졌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으슬으슬하군.”
주변에선 비명이 끊이지 않았을 땐 깜짝 놀랐지만, 자신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으나 아직 독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등 뒤로는 잠영방, 그리고 칠성사병의 절규가 간간이 울릴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