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239/254)

암천회주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방금 전의 검은 그냥 휘두르지 않았다.

비록 적이지만 집념을 보인 무인을 위해서 진심을 다했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건 앞이었다.

엉망진창이 된 채, 결국 선 채로 숨이 멈춘 뇌승도가 아니었다.

그앞을 막아선 장신의 남자였다.

“누구냐.”

그 남자의 경지가 보이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검마.”

그는 한때 암천의 검이었다.

그는 한때 암천의 오른팔이었다.

“무곡.”

그리고 그는 암천의 적이었다.

암천회주와 검마가 서로 마주 봤다.

주서천은 대책 없이 남부로 향하지 않았다.

만약을 위해 철저한 대비를 해 두었다.

그 대비란 바로 알려지지 않은 절대고수, 검마 무곡이었다.

산동에서 딸인 무선화, 그리고 제갈승계와 이의채의 호위 겸 무력 수단인지라 마침 북부가 가까웠다.

‘그동안 만약을 위해 노출을 피해왔다.’

현경은 무력의 상징이자 곧 전략의 한 축이다.

무림의 전쟁에 있어서 전략의 기본 중 하나가 바로 이 고수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부터 결정된다.

‘비장의 수가 되어 허를 찌를 수 있으니까.’

천기에게 화경으로 인식되느냐, 현경으로 인식되느냐의 차이는 크다.

그래서 일부러 상천에 오르지 않도록 신경 써 왔다.

‘무엇보다 어르신이 자리만 비우지 않는다면 두 사람의 안전은 절대적으로 보장됐으니……’

제갈승계와 이의채.

두 사람은 주서천에게 있어서 여러 의미로 중요했다.그동안 쌓은 정도 정이지만, 암천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자리를 비운 만큼, 도움이 돼야 할 텐데.’

* * *

“무곡?”

암천회주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상왕의 검.”

그리고 무언가 떠올린 듯 중얼거렸다.

정마대전 때 활약하여 일약 천하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사파, 아니 낭인에 가까운 검수이다.

암천회에서는 천하백대고수보다는 주서천의 주변인으로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평가를 전면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시간에 맞추지 못했나……”

무곡이 서문이진을 힐끗 쳐다보곤 안타까워했다.

눈빛은 전의로 활활 타오르고 두 다리는 굳건히 서 있으나 호흡이 느껴지지 않는다.

선 채로 죽었다.

무곡은 머릿속으로 아까 마주쳤던 무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은공, 검신 주서천이 보낸 원군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도움이 필요하나?’

무곡은 도주 중이던 신도균 무리와 만났다.

그러나 신도균은 척 봐도 수상쩍은 무곡을 보고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전장 한복판에서 단독 행동하는 고수다.

안 수상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다행히 북하군에 소속된 금의상단 무사들이 대신 신분을 증명해 준 덕에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무곡은 그제야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고, 암천회주와 대치 중인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회주 외의 암천회가 보이지 않는다.’

무곡이 날카로운 눈썰미로 주변을 훑어봤다.

‘그뿐만이 아니라, 소림사도 보이지 않는군.

상황을 보아하니 서문세가가 미끼가 되어 준 건가?’

소싯적에 전장을 숱하게 굴렀던 무곡이다.

신도균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판단력이었다.

“강호에는 인재들이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더니만, 설마하니 현경씩이나 되는 자가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암천회주가 흥미와 불쾌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전자의 경우엔 새로운 강자의 등장에 의해서였고, 후자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능력 부족의 불만이었다.

‘대계를 이룬 뒤에는 천선의 빈자리부터 채워야겠구나.’

암천회가 무림의 뒷배에서 모든 걸 조율할 수 있었던 건, 천기의 두뇌도 두뇌지만 관부는 물론이고 무림이나 지하 세계 곳곳까지 두루두루 수집할 수 있었던 천선의 정보 능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천선의 사후에도 오늘날 천선성이나 정보력을 운용할 수 있는 것도 그녀가 기존에 만들어 둔 것 덕분이었다.

천기도 천기지만 천선의 공 역시 컸다.

마음 같아선 흉수를 이 잡듯이 찾아내서 잔인하게 고문한 끝에 죽일 정도로 아까웠다.

“듣던 대로 오만하군.”

무곡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너처럼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를, 보통 정저지와(井底之姓)라고 부르지.”

“호오.”

암천회주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무곡이라 했느냐.”

검을 쥔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내 네놈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느꼈는데……”

심연을 밝히는 건 불쾌함의 감정이었다.

“자세히 보니 주서천, 그 성가신 놈과 비슷하구나.”

주서천만이 아니었다.

사도의 영웅, 패신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혜성처럼 갑자기 등장했다.

그러곤 십수 년 동안 쌓아 올린 계책에 훼방을 넣고 무너뜨렸다.

무곡도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업적은 세우지 않았으나, 기존의 두 사람과 겹쳐졌다.

“나에게서 은공의 그림자를 본 거라면 정답이다.”

무곡의 검에도 힘이 실렸다.

“내 검은 오로지 두 사람만을 위한 검이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검신 주서천이다.”

배꼽 아래, 하단전을 회전시켜 내공을 운용했다.

절대고수에 이른 힘이 몸 전체 곳곳을 훑은 뒤에 팔과 손끝으로 옮겨져 검을 감싸 안았다.

겉으론 보이지 않았으나 검을 감싸안은 건 강기였다.

“그런가.”

암천회주의 이마에 주름이 파였다.

“아무리 인재라면 적에게도 관대한 본좌라 할지라도, 네놈과 함께 할 일은 결코 없겠군그래.”

“나 역시 마찬가지다.”

끼이익.

대기가 절규하듯 비명을 지른다.

손톱으로 쇠를 긁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듣기 싫은 소리였다.

이후 검과 검 사이로 보이지 않는 기류가 모여들어 소용돌이를 형성해 폭풍우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 크진 않았다.

찻잔 속의 폭풍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바람이 슥 하고 주변을 훑고 지나가면서 변화가 벌어졌다.

손톱으로 쇠를 긁는 것처럼 들리던 소음이 멈췄다.

아니, 소음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지워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해지더니만……

콰앙!

폭약을 한데 모아 터뜨린 것처럼 폭발했다.

시뻘건 불꽃이 악마의 혀처럼 넘실거리진 않았다.

살갗이 벗겨지며 벌겋게 익는 열기도 없었다.

그 대신, 눈을 뜨기는커녕 숨도 쉬지 못할 정도의 풍압이 주변을 뒤덮으며 마구 헝클어뜨렸다.

절대고수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풍경의 일부인 늘어진 나무들도 몸을 뒤틀 듯 가지를 흔들어 댔다.

“그만.”

무곡이 눈썹을 찡그리면서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하나 위력은 가볍지 않았다.

검으로 일으킨 역풍이 기의 폭풍우가 오지 못하도록 받아쳤다.

그 덕인지 뒤편에 서 있던 서문이진이 무사할 수 있었다.

“자리를 옮겨라.”

“부탁인가?”

“경고다.”

“하하하!”

암천회주가 재미였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건방지구나.”

눈빛이 살의로 번들거렸다.

입가에 맺혔던 웃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좋아, 나도 경고하마.”

쐐액!

암천회주가 팔을 들어 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북하군에게 몸소 보여 주었던 무력과는 수준 차이가 났다.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서문세가에서 보았다면, 그 누군가가 생존했다가 실력의 차이에 깊이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검과 대적하는 무인은 달랐다.

째애앵!

검과 검이 부딪쳤다.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나온 햇볕이 검신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무곡의 검이 암천회주의 검을 정확하게 막아 냈다.

“이 속도에 반응했다고?”

암천회주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손속을 봐준다거나 하는 건 없었다.

적의 위험성을 확인하고도 내버려 둘 암천회주가 아니다.

방금 전의 검초는 전력은 아니어도 나름 진심이었다.

설사 현경이라 할지라도 따라오기 벅차다.

무곡은 암천회주가 놀라는 사이를 놓치지 않았다.

여섯 갈래로 갈라진 복근에 힘을 주는 동시, 검병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는 힘껏 휘둘렀다.

검보다는 둔기로 검술을 펼치는 모양새였다.

‘용중악(龍重類)!’

쿠앙!

무곡의 검이 괴력을 발휘하면서 무거움을 선사했다.

발이 닿은 곳이 움푹 아래로 주저앉았다.

파스슷!

“쾌검이 아니라 중검?”

암천회주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선천검법을 받아쳐서 단연 쾌검이 주무공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위력을 보니 그건 또 아닌 듯했다.

발아래를 보니 땅 위로 밀려난 발자국이 그 증거였다.

“재미있는 놈이로군.”

암천회주가 세 걸음 퇴보하더니, 검을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잡았다.

“……”

무곡의 표정이 암천회주의 자세를 보고 변했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 봐라.”

슈욱!

바람이 날린다.

공기의 층이 둘로 나뉘어졌다.

세상이 반으로 갈렸다.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속도였다.

한층 더 빨라진 검이 무곡의 머리를 노렸다.

“후웁!”

무곡의 입에서 짧지만 힘찬 기합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시간이 천천히 흐리기 시작하고,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검이 눈앞에 나타났다.

무곡은 시각적인 정보가 뇌리에 박히기도 전,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해 검격을 아슬아슬하게 막아 냈다.

“하압!”

암천회주의 입에서도 기합다운 기합이 흘러냐왔다.

‘허!’

무곡이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방금 전 검격만 해도 무지막지했다.

속도도 속도지만 위력이 한층 더 올라가 손이 다 저릿했다.

문제는 그 검을 튕겨 낸 지 얼마되지도 않아 다시 이어지며 폭풍우처럼 몰아친 것이었다.

파바바밧!

공기가 펑펑 하고 작게 그리고 연달아 터졌다.

그 수에 맞춰 섬광도 번쩍이며 앞을 백색으로 물들였다.

상하좌우로 쏟아져 내리는 검격.

무곡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눈동자를 바쁘게 굴리고, 손발을 그에 맞춰 움직여 겨우 막아 냈다.

채채채채채챙!

몇 번인지 모른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마찰음이 공중에서 쏟아지면서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세 자릿수에 당도한 순간 두 절대고수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떨어졌다.

“후우……”

무곡은 그제야 멈췄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네놈……”

암천회주의 표정은 무곡과 달리 심상치 않았다.

“선천검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가?”

선천검법은 본래 한 손이 아닌 양손 검법이다.

검을 두 손으로 잡는 걸 보자마자 표정을 바꾼 무곡은 마치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공발검(先功發劍)에 연한쾌(連限快).”

무곡이 암천회주의 물음에 답했다.

“……”

선천검법의 일식과 이식의 이름이었다.

“과연 명불허전인가. 사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대로다.”

무곡도 이름만 들었을 뿐, 이렇게 직접 상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새삼 그 위력에 전율했다.

특히 방금 전 연달아 이어진 검격에는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눈으로 따라가긴커녕 반은 몸의 감각에 의지했다.

“사문……?”

암천회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무언가 떠올린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과연, 네놈의 사문이란 건 설마……”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건 무의미하군.”

무곡이 검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의 동공이 세로로 쩍 갈라졌다.

“심상구현으로 승부를 보지.”

무곡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단숨에 가겠다.”

변한 건 분위기만이 아니다.

육체도 눈에 띄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이마 끝자락에서 작고 뾰족한 가시같은 것이 돋아나더니, 점차 커지면서 뿔의 형상을 갖추었다.

과할 정도로 크진 않고 적당했다.

뭉툭하고 두꺼운 데다가 약간의 구불거림이 있어 산양이 떠올랐다.

어딘가 모르게 성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것이 특징이었다.

그 외의 변화는 세로로 쩍 갈라진 동공을 가둔 눈동자였는데, 거무튀튀한 금색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손 부근도 눈에 뒤덮인 것처럼 새하얗게 변했는데, 손톱이 짐승의 것처럼 뾰족해진 것이 특징이었다.

“용제문(龍帝門).”

암천회주가 무곡을 보고 적잖지 않게 놀랐다.

“만검을 다루기 위해서 인간을 초월하여 용의 힘을 손에 넣은 신비문파. 각기 다른 성질의 검을 수준급으로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나.”

“천녀문, 아니 응암동의 검성에게 전해 들었나?”

“그에 대해선 본좌 역시 무공 외에는 세세하게 알지 못한다.

그 대신 황궁 무고에 잠들어 있던 천녀문의 비급에서 언급된 몇 가지를 알고 있을 뿐이지.”

암천회주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평생을 검에 매진하느라 강호에 출두하기는커녕 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신비 문파가 버젓이 활동 중일 줄이야……

그리고, 보면 볼수록 사문의 목표와 이름에 걸맞은 심상구현이로다. 용화(龍化)라 불러야 하나?”

“반은 정답이다.”

무곡은 암천회주가 뭐라 부르든 상관없었다.

눈앞의 재앙이라 일컬어지는 절대고수에게 집중했다.

‘단숨에.’

콰앙!

무곡의 발아래가 굉음을 내뿜으며 움푹 파였다.

반구형으로 파인 구덩이 안에는 거미줄처럼 그어진 금으로 가득했고, 모래와 돌은 산산조각 났다.

누런색 먼지만 피어오를 뿐 그 위엔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갖은 충격에도 온전하게 보호된 서문이진이 보였다.

빛이 꺼진 눈동자에 절대고수가 비쳐졌다.

무곡의 등 뒤가 보였다.

전승에서 전해지는 용처럼 꼬리가 달려 있진 않았다.

그 대신 유성이 된 것처럼 길게 늘어지는 빛의 궤적을 남겼다.

‘용제검 (龍帝劍).’

유성처럼 쏘아진 무곡은 공중에서 자세를 바꿨다.

손목을 튕겨 앞으로 쭉 뻗은 검을 회수했다.

왼발은 크게 내디디고, 오른발을 뒤로 쭉 뻗는다.

그리고 어느새 검신으로 옮겨진 왼 손가락을 반쯤 접어 걸치듯이 어중간하게 잡았다.

호흡이 멈춘다.

새하얗게 물든 손등이 번쩍였다.

육체가 순간적으로 인간의 영역을 초월했다.

단전에서 시작된 기류가 장강의 물살처럼 거세고 힘차게 뻗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독맥(督脈)과 임맥(任脈)을 비롯해 충맥(衝脈), 대맥(帶脈), 양교맥(陽躍脈), 음교맥(陰踏脈), 양유맥(陽維脈), 음유맥(陰維脈)으로 이루어진 기경팔맥(奇經八脈)을 회전했다.

동체 시력부터 시작해 내공의 순환, 신경 다발이 반응하는 속도에 근육이 내는 힘은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를 부서뜨린 걸 넘어 그 이상을 넘보았다.

검병을 쥔 오른손에 힘을 준다.

끄트머리가 새하얗게 물든 뾰족한 손가락에 핏줄이 돋으며 움직였다.

‘발룡(發龍)!’

서걱!

무언가가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퓻!

암천회주의 머리카락 일부가 잘려져 나가며 흐트러졌다.

자세히 보면 고개를 기울인 걸 볼 수 있었다.

의아함으로 인한 몸짓이 아니었다.

여태껏 받아치기만 했던 암천회주가 최초로 보인 회피 행동이었다.

“……”

암천회주의 시선이 뒤편을 향했다.

가늘게 떠진 눈매 안으로 들어온 건 산에 새겨진 검상이었다.

“강검(强劍).”

말이 끝냐기 무섭게 후폭풍이 몰아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방금 전의 기분 나쁜 고요함은 흔히들 말하는 폭풍 전의 고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폭음인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터졌다.

귀가 먹먹해지는 정도가 아니다.

산사태를 지척에서 본 것처럼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섞였다.

암천회주의 몸에 검상을 남겼어야 할 발룡이 무려 반 리 바깥, 산 중턱을 집어삼킨 결과였다.

입이 떡 벌어지는 위력이었다.

마치 신화에 나오는 거인이 검을 휘두른 것처럼 반 리 길이의 검상이 숲, 아니 산에 새겨진 게 보였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갈라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가 파였다.

박살이 난 채 빨려 들어간 나무도 보였다.

“쯧.”

무곡이 혀를 찼다.

얼굴에 암운이 끼었다.

잘 보면 위용이 가득하던 뿔도 줄어들었다.

파앗!

아쉬워하는 건 사치였다.

암천회주는 숨을 고르는 시간 따위는 주지 않고 번개같이 틈을 노렸다.

무곡이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주고 검을 위로 들어 올리려고 했다.

“느리다.”

암천회주의 입가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검이 어깻죽지를 노리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사선을 그려 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깨끗한 움직임이었다.

‘재미있었으나 여기까지다.’

선천검법은 안 그래도 극쾌의 검이다.

후초식이 선초식을 따라잡을 수 있는 검.

무곡이 용의 육체로 힘을 냈다 할지라도, 검을 쥐지 않은 쪽의 공격을 막아 내기까진 시간이 걸린다.

고수 간의 승부는 종이 한 장 차이로 나는 법.

무곡의 죽음을 의심치 않았다.

째애앵!

“……”

암천회주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얼굴에 없던 주름이 파였다.

심연밖에 보이지 않던 안광에서 노기가 미약하게나마 흘러나왔다.

“무형검(無形劍)이라고……?”

암천의 검은 무곡의 어깻죽지를 가르지 못했다.

빗나간 것이 아니다.

검에 막혀 멈췄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이 아니었다.

왼손의 검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없다는 표현이 알맞았다.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검이라는 건 있었다.

“아니.”

무곡이 예의 무미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기검(氣劍)이다.”

심상구현, 만검(萬劍).

무곡의 심상은 용화 같은 게 아니다.

용제문의 근간이 되는 건 어디까지나 만검을 다루는 것.

용화는 그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으로선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어 용의 힘을 얻는다고 생각한 것뿐, ‘용이 된다’ 같은 게 아니었다.

용제문의 제자는 평생 만검을 다루는 것에 집중한다.

그렇다 보니 강호 활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흐하아아아압!”

무곡이 힘차게 외치면서 팔에 힘을 주었다.

상완근이 울긋불긋하게 부풀어 오른다.

시퍼런 핏줄이 튀어나왔다.

팔안의 근맥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배와 허벅지에 힘을 꽉 주며 팔을 들어 올렸다.

목 근육에 이어진 날개 죽지가 당겨 왔다.

근육이 꼬인 것처럼 회전했다.

반격의 시작이다.

부웅.

오른 손가락에 잡힌 철검이 수평으로 치솟았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검이 아니라 철퇴를 휘두른 것처럼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암천회주가 한 발자국 퇴보해 우검을 피해 낸다.

앞 머리칼이 위로 솟구친 열풍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와중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감탄스럽기만 하다.

무곡은 왼손에 쥐고 있던 기검을 없애 버린 뒤, 체중을 앞으로 쏟아 회주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기검의 진정한 무서운 점은 보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철검처럼 쥐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손을 놓아 원하지 않을 때 없애면 그만이다.

그리고 공격의 순간 다시 손에 쥐어 구현화한다.

검술이라는 상식과 체계를 무너뜨리는 힘이었다.

“크으옷!”

출룡 탓인지 움직일 때마다 몸이 비명을 질렀다.

뼈는 삐걱거리고 기맥과 혈맥이 저릿하게 아파 왔지만, 고통 따위에 멈칫할 상황이 아니었다.

파바바바바밧!

아픔을 무시하면서 오른팔과 왼팔을 교차한다.

좌에서 우로, 하단에서 상단으로 검격을 쏟아 냈다.

만검을 지향하는 검수답게 쌍검에도 능숙했다.

적이 미처 대항하지 못하도록 쉴새 없이 휘둘렀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무형의 강기가 터지면서 시끄럽게 울어 댔다.

검격이 폭풍우처럼 몰아치며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자리를 옮긴 덕에 서문세가의 시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산림에 수많은 검상이 남겨졌다.

카가가가각!

검이 흙바닥을 그으면서 포물선을 만들어 낸다.

손바닥만 한 돌멩이가 튀었다가 쪼개지고 가루가 됐다.

흙먼지가 사라지기도 전에 뒤에서부터 덮쳐 온 검이 집어삼키고 정면의 적을 향해 검광을 뿜어 댔다.

쾌검을 토대로 드문드문 변칙적인 검을 선보였다.

혹여나 받아치면 아랑곳하지 않고 중검으로 밀어붙였다.

힘이 부족하면 강검으로 필사의 일격을 날렸다.

‘환검(幻劍)!’

검이 흐릿해지면서 잔상을 남겼다.

아니, 잔상인지 아닌지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팔이 여럿인 아수라가 검을 휘두르듯이 수십 개의 검이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몰아쳤다.

“인정하마.”

검의 폭풍우 속, 암천회주가 말했다.

“검마, 무곡.”

용암처럼 뜨겁고 격렬한 분노는 없었다.

대신 차갑게 타오르는 불꽃이 있었다.

암천회주가 두 눈을 슬며시 감았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날 몰아붙일 줄은 몰랐다.”

그에게서 시커먼 아지랑이 같은 게 흘러나왔다.

오한이 절로 들고 소름이 끼친다.

피부에 털이 쭈뼛 서고 고통으로 움직이던 사고가 잠시 멈췄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보여 주마.”

암천회주가 눈을 느릿하게 떴다.

흰자위가 죄다 검게 물든 것이 보였다.

“심상구현.”

암천회주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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