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七章 (238/254)

발목 부근까지 무성하게 자라난 풀이 짓밟혔다.

생명의 색을 잃어버린 풀은 잿빛이 되어 흩어진다.

“하아, 하아!”

갈라진 피부 위로 핏방울이 흘러내린다.

고통 대신 가려움이 느껴졌다.

몸도 으슬으슬해지기 시작했다.

낙소월은 숨을 가다듬고 감각에 의지했다.

휘리릭!

보이진 않았으나 측면의 광경을 추측할 수 있었다.

예리한 날을 단 테두리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륜이 도중에 곡선을 그려내며 방향을 꺾어 측면을 노렸다.

“하압!”

낙소월이 위로 향해 검을 직각으로 꺾었다.

째애앵!

머리 위로 날아온 륜이 검에 맞고 튕겨졌다.

“매화검봉!”

잠영방의 일류 자객이 그녀의 별호를 불렀다.

낙소월은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몸을 돌리는 척하다가 검을 역수로 쥐었다.

“청각에만 의지하지 마세요!”

낙소월은 주변에 경고하면서 역수로 쥔 검을 옆구리 사이로 통과시켰다.

옆에서 보면 등 뒤로 검이 등을 뚫고 나온 것처럼 보였으나, 구멍을 낸 건 등 뒤를 노린 자객이었다.

“커허억!”

자객이 믿을 수 없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손에서 힘이 풀리며 쥐고 있던 륜이 떨어졌다.

곧이어 그의 몸 역시 병기를 덮으며 지면과 입 맞췄다.

“시각 다음으로 청각이 파악하기 편하다고 의지한다면, 그 외의 틈이 노려질 거예요.

암살이란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노려 죽이는 것이라는 걸 명심하셔야 해요!”

낙소월의 외침에 잠영방은 몸을 움찔 떨었다.

‘어떻게 알았지?’

‘암살의 방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이 어둠 속에서 움직임을 읽는 건 불가능하다.’

‘매화검봉이 암습에 익숙했던가?’

‘정말로 약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경험이다.’

움직임은 물론이요 마음까지 읽히는 심정이었다.

낙소월의 조언은 효과적이었다.

비록 앞은 보이진 않지만 목소리로 인한 전달은 가능한 덕분에 북상군의 생존율을 높여 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도 쉽게 당하지 않고 잠영방의 공세를 건실하게 버텨 낼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대응이 확실하려면 암살의 방식에 알고 있는 자객 본인이거나 경험이 다분한 노련한 고수 정도다.

그러나 낙소월은 고수일지는 몰라도 노련한 고수는 아니었다.

이립은커녕 이제 약관이었다.

그렇다고 어릴 적에 화산오장로에게 거두어지고 차기 매화검수로서 교육받은 그녀가 자객일 리는 없다.

잠영방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낙소월은 정면은 몰라도 암습에는 익숙지 않다.

암습은 물론이요 자객이 적인 적도 손에 꼽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객 출신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 주변엔 잠영방보다 수준 높은 자객이 있었다.

“어디서 배웠어?”

당혜가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 사형이 가르쳐 주셨어요.”

그 자객이란 단연, 유령곡주인 주서천이었다.

주서천은 암천회의 표적이 된 이후로 주변 사람이 암살을 당할 것을 우려해 왔다.

천군사나 모사미봉, 제갈 남매야 어차피 주변의 보호를 받고 중심에 있으니 최소의 안전은 보장됐다.

이의채나 제갈승계는 금의검문이나 무곡, 그 외에도 유령곡이 있으니 괜찮았다.

어차피 이 넷의 경우엔 전투 인원이 아니니까 접촉할 일도 적다.

그러나 낙소월은 달랐다.

전장에 나서다 보니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를 걱정한 주서천이 낙소월에게 유령곡의 전법이나 기초 상식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

바로 얼마 전 북해로 여정을 떠나면서 가르칠 시간도 충분했으니 제격이었다.

성심성의껏 전수받았다.

소령도 거들어 줘서 도움이 됐다.

“슬슬 네 사형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당혜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낙소월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

“그나저나……”

당혜가 손 위로 독으로 된 아지랑이를 모았다.

“슬슬 물러날 시간이야.”

약효의 시간이 다 됐다.

아무리 그럭저럭 버텨 내고 있다고 한들, 독연에서 싸우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고수들이라면 약효가 지나도 어찌어찌 버텨 낼 수는 있으나 그 외의 부대원들은 그러지 못한다.

또한 설사 고수라 할지라도 해독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탓에 내공의 소모가 극심했다.

“알겠어요.”

낙소월이 당혜의 곁에 바싹 붙었다.

“전군!”

당혜의 뾰족한 목소리가 독연 속에서 울려 퍼졌다.

“퇴군!”

“퇴군이다!”

당가의 호위 무사 무리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퇴군?”

시각 외의 감각에 집중한 만큼 반응도 빨랐다.

“퇴군 명령이 떨어졌다!”

“후퇴해! 시간이다!”

북상군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혹시라도 괜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약효가 다 됐다는 걸 들으라는 듯이 외쳤다.

너무 노골적으로 들으라는 듯이 언급하진 않았다.

연기도 과하면 수상쩍게 보이는 법이었다.

다들 작전의 중요성을 아는 만큼 주의했다.

“과연, 해독제의 시간이 다 됐구나!”

잠영방주의 복면 아래로 미소가 번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도망치는 걸 노려야 한다!”

자객은 일반적으로 독에 대한 내성이 높다.

당가냐 사독문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암살 특성상 독도 다루다 보니 내성 역시 상당한 편이었다.

당명인이 괜히 잠영방을 내세운 게 아니다.

암전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독연을 버티는 시간도 길었다.

“크아아아악!”

“어딜 도망가느냐! 으하하!”

“이거 놔!”

“커흐윽!”

난전이 따로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물러나는 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지체한다면 독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압박이 은근 심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서걱!

“케헥!”

낙소월은 시종일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매향이 은은하게 퍼지며 힘을 주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일세!”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에 억지로라도 힘을 쓰게 됐다.

“중독된 이가 있다면 이리로 와라!”

“해독을 도와주겠다!”

당가는 길잡이가 되는 동시에 걸어다니는 해독제이자 의원이었다.

부상자가 있으면 부축해지고, 잠영방의 무기에 중독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대신 해독해 주었다.

비록 응급 치료이긴 해도 이동 중에 해독을 돕는 실력은 꽤나 경이적이었다.

괜히 독의 명가가 아니었다.

“도착했다!”

정신없이 진행된 후퇴가 일각 끝에 종료됐다.

‘이제부터야.’

당혜는 북상군의 인도 와중에도 작전을 검토했다.

‘전력의 소모가 생각만큼 크지 않아.’

낙소월의 조언이나 활약이 생각보다 컸다.

‘그러니, 목적지로 그대로 유도하면……’

장막이 걷힌다.

최초로 독연을 헤치고 나온 이들은 길잡이 및 유도를 맡은 당가와 금의검문이었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어둠이 끝났다.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림인답게 신체 능력이 우수했다.

한동안 받지 못했던 빛이었으나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뭐……?”

당혜는 정면의 시야를 확보한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앞서던 부대도 멈췄다.

“우와앗!”

“뭐야, 무슨 일이야?”

당가와 금의검문을 둘러싼 화산파도 덩달아 멈췄다.

앞이 아닌 뒤를 보며 경계하던 중이었는데, 선두가 갑자기 멈춰 서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낙소월 역시 등에 바싹 붙어서 호위하던 중이었는지라 앞이 막히자 덩달아 멈췄다.

“왜 갑자기 멈추…… 신……”

낙소월은 말을 잇지 못했다.

뒤가 아닌 앞을 본 순간,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그다음으로 속속히 도착한 북상군도 마찬가지였다.

왜 작전대로 계속 물러서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 의문은 곧 좋지 않은 쪽으로 풀렸다.

“시간이 지나면 후퇴할 것을 뻔히 아는데, 포위하지 않을 머저리가 어디 있냐.”

정면에서부터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북상군의 등 뒤를 막아선 건 적의 지휘관, 정파의 배신자이자 암천의 수뇌인 천추 당명인이었다.

“팽가의 가주께서 그대를 맡고 있을 텐데?”

은하노사가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그래, 처음엔 그랬다.”

당명인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나라 할지라도 그 팽자호와 정정당당히 싸울 리 없잖은가. 지금쯤 수십 명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저놈이!”

“비겁한 놈! 부끄럽지도 않으냐!”

팽가의 무사들이 노기를 내뿜었다.

“당명인..…!”

당혜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 * *

“허억, 허억!”

신도균은 숨이 터지도록 달렸다.

그 외의 복하군의 일부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말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렸다.

도중에 이탈자가 생겼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모처럼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이제와서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늦는다.

홍진도 서문이진도, 그리고 소림사와 서문세가는 전멸할 것이다.

신도균은 헛된 희망을 믿지 않았다.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힘을 다했다.

“정면!”

누군가가 목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도, 도착했나? 북상군인가?”

신도균의 노랗게 질린 낯빛에 기대가 감돌았다.

“아닙니다! 한 명뿐입니다!”

“뭐 라……”

신도균이 놀란 나머지 정면의 누군가를 살폈다.

“당신은……!”

“방장,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서문이진이 홍진에게만 들리도록 소리 죽여 말했다.

“적군이 합비로 퇴군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소식이다.”

“나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홍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눈을 잃은 고통이 남아 있는 듯했다.

“암천회주, 저 괴물이 남았다.”

서문이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무공이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대놓고 무시당할 줄이야……”

적군과 달리 아군은 삼백여 명이 넘게 남았다.

약 반절 정도가 당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수다.

아무리 상천육좌라고 하나 혼자서 삼백여 명의 무림인과 싸우겠다니.

오만을 논하기 전에 미쳤다.

“그렇다면…… 설마.”

홍진이 경악 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고작 한 사람이 이 지옥을 만들고 있는 겁니까?”

“그래.”

“아아아악!”

“살려 줘!”

앞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리는 확실히 들었다.

가족의 이름을 부르거나, 혹은 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밖에는 고통과 두려움이 찬 비명이었다.

“목숨을 불태우니 그래도 봐줄 만하도다.”

소림사와 서문세가는 그동안 빽빽하게 늘어진 나무와 언덕이라는 지형을 적절히 응용해 싸워 왔다.

본인들 역시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무가 방패 역할도 하고 시야도 가려져 그럭저럭 쓸 만했다.

그러냐 암천회주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그 무엇도 암천의 주인의 앞을 가리지 못했다.

끼이익.

햇빛을 먹고 잘 자라난 나무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굉음을 토해 냈다.

초목이 바스러지면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면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앞이 잠시 동안 누런 먼지 탓에 뿌옇게 일그러졌으나 금세 윤곽이 잡혔다.

최초엔 나무를 방패 삼아 살아남은 무인들인 줄 알았으나 달랐다.

허리에 한일 자로 혈선이 그어지면서 몸이 둘로 나누어졌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수십에 이르는 무인들이 암천회주의 일검에 목숨을 잃어 갔다.

“작전을 변경한다.”

서문이진이 정면을 주시한 채로 말했다.

“작전을 변경한다 하면……?”

“암천회주만 남았으니, 굳이 여기에 남을 필요가 없어졌다.”

“아……”

소림사와 서문세가가 결사하면서까지 잔존한 건 인근의 마을이 발견되지 않기 위해서다.

“합비로 부랴부랴 복귀한 것이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근의 마을을 발견할 가능성이 사라졌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더 이상의 싸움은 정말로 무의미한데 고집을 부릴 생각은 아니겠지?”

“알겠습니다.”

홍진도 서문이진의 말에 동의했다.

“물러나도록 하지요.”

“단, 둘로 나뉘어 움직인다.”

서문이진이 칼자루를 꽈악 쥐었다.

“서로 부상자까지 챙긴다면 속도도 느려질 것이고, 어차피 붙어서 합공해 봤자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둘로 나뉘어져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주한다면, 적어도 한쪽은 살아남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홍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좋아.”

서문이진이 도를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들어라!”

좌중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됐다.

“이 시간부로 작전을 변경! 소림사는 북서쪽, 서문세가는 북동쪽으로 퇴각을 실시한다!

또한, 계율원주는 방장의 눈이 성치 않으니 부축하여 물러나라!”

“호오.”

암천회주가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비추었다.

그 시선이 닿는 곳에는 서문이진이 있었다.

“잠깐……”

혜정이 서문이진을 보고 주저했다.

“계율원주, 이견은 받지 않는다!

혹시나 태산북두가 뒤를 보일 수 없다는 등의 헛소리는 금한다!

정파의 그 잘난 명예 탓에 목숨까지 버릴 생각이냐!

도대체 언제까지 그 자존심 때문에 일을 망치려 하는가!”

서문이진이 혜정을 향해 노성으로 내뱉었다.

“일단은 살아라! 살란 말이다!”

“아니, 그렇지만……”

“혜정 사숙!”

홍진이 서문이진의 말을 듣고 외쳤다.

눈이 보이지 않아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습니다! 저 역시 동의한 사항입니다! 나중을 기약하셔도 괜찮습니다! 소림의 명예가 실추된다 할지라도,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우선입니다!”

“……”

혜정은 홍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무언가 결심한 듯 그를 향해 합장했다.

“뜻대로 하겠소!”

“퇴각! 퇴각해라!”

서문세가가 목청껏 소리쳤다.

산에서부터 시작된 고함이 계곡과 바람을 타고 크게 울렸다.

그 뒤로 대대적인 퇴각이 시작됐다.

혜정은 언덕 위로 몸을 날렸다.

피로 얼룩진 법복의 소맷자락이 바람에 휘날려 펄럭였다.

“방장 사질, 부축하겠습니다.”

아무리 화경의 고수라고 한들, 나무가 이리 많은데 앞이 보이지 않은 상태로 혼자 달릴 수는 없었다.

원래부터 맹인이라거나, 혹은 눈을 잃은 뒤로 단련했다면 모르겠지만 현 상황에선 불가능했다.

“그러면……”

혜정이 서문이진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서로 간에 인사는 짧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달렸다.

소림사는 북서쪽을 향해서 퇴각을 시작했다.

‘만냐서 반가웠습니다, 서문이진.’

홍진은 헤정과 자리를 떠나면서 생각했다.

‘함께 남아 준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만약, 암천회주가 저희를 쫓아온다면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

서문이진의 은혜에 답하리라.

그리생각했다.

“왜냐.”

서문이진이 물었다.

“왜, 가만히 있었지?”

“궁금해서다.”

암천회주가 서문이진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이해는커녕 평생 동안 미워하던 놈들이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 말이야.”

서문이진은 앉아 있었다.

손에 쥐었던 도를 지면에 꽂은 채로 앉아 있었다.

방금 전 앉은 게 아니었다.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켰을 때부터 제자리에 앉아선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약 백 오십에 이르는 서문세가의 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려 나간 나무 대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퇴각 도중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왜 우리는 물러서지 않냐면서 의아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죽기 싫다면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서문이진이 앉은 걸 보자마자 당연하듯이 남았다.

소림사가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를 지켰다.

“그게,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서문이진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소림사와 서문세가, 소림방장과 뇌승도.

이 둘을 저울질하면 어디가 살아남을지는 결정되어 있다.”

손을 뻗어서 칼자루를 쥔다.

지면에 박혀 있던 도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소림사는 정파의 기둥이요, 희망이다.

그리고 정파와 손을 맺은 사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문이진의 입가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왜냐하면 그들이 뇌가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머저리이고 호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형제도 아니며, 벗도 아니며, 심지어 이웃도 아니고 면식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평생을 수련해 온 무학을 남을 위해서 사용한다니, 제정신이냐?”

등을 맞대도 이해할 수 없다.

사파는 정파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싸워 왔다.

방금 전만 해도 알 수 있다.

소림방장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서문이진, 자신부터 지키려 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답답해지는 놈들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믿을 수 있다.”

서문이진이 늘어뜨린 도를 천천히 들었다.

“유구한 역사 동안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꼿꼿이 지켜 낸다.

설사 향후 몇십 년 동안 전쟁이 계속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끝없이 그 잘난 부처의 말을 반복하며 몸을 불태울 거다.

다른사람이라면 몰라도, 홍진이 방장이면 분명 그리할 거야.

그러니까 희망인 거지. 더불어 그만큼 무력도 받쳐 주고 말이다.”

사도를 걷는 자는 가능성 없는 희망을 믿지 않는다.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판단해 이익을 잰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소림이 그리 믿음직스럽나?”

“아니.”

서문이진의 안광이 불타올랐다.

“내가 믿는 가능성을 믿을 뿐이다.”

서문이진은 손에 쥔 도를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들어라!”

뇌승도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 누구도 우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숨이 터지도록 외친다.

“영웅호걸이 곁에 있는 것도 아니며, 하물며 적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지도 못했다!”

쿠웅!

서문이진이 발을 힘차게 굴렀다.

“후대의 사람들에겐 ‘암천회주에게서 도망치다 뒈진 놈들’이라고 남겨질 것이 눈앞의 현실이다!”

사파인은 꿈을 꾸는 이들이 아니다.

현실을 보여 준다.

노력하기 전에 포기한다.

그 대신, 다른 방안을 찾는다.

이상을 이룰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살아가려 한다.

“그러면, 왜냐! 알고 있으면서 왜 남아 있느냐!”

답은 없었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서문이진이 무릎을 굽혔다가 나갈 준비를 했다.

“설사 남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만족의 일종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야말로 벼락과도 같았다.

“소림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라, 서문세가.”

쿠아앙!

서문이진이 벼락이 됐다.

발자국이 남은 지면에서 시퍼런 섬광이 튀었다.

패도적이고 빠르기로 이름난 만큼 그 속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언덕 아래를 향하는 지형을 살려 속도를 높였다.

옆에서 보면 우레가 내리치는 듯했다.

‘뇌전강기!’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근육에 무리가 온 모양인지 북북 찢어지는 감각이 통각을 거칠게 두드렸다.

서문이진의 하단전은 과열된 지 오래다.

기맥에 쌓인 잔재까지 끌어모아서 일순간에 폭발시 켰다.

목숨을 담보로 한 만큼 속도도 힘도 빨랐다.

공간과 공간 사이를 접는 것처럼 이동했다.

우르르릉!

뒤늦게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서문이진은 순간적으로 빛이 됐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피부가 벗겨지며 살갗이 노출됐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적을 베겠다는 일념하에 서문세가의 최상승무공인 뇌전도법을 펼쳤다.

시퍼런 불똥이 튄다.

유성처럼 궤적을 그려 낸 천둥이 도에 실렸다가 폭발하듯이 뿜어졌다.

그리고 영혼까지 태운 그 일도가 암천회주의 목에 닿으려던 순간, 잘려 나갔다.

서문이진의 오른팔이.

‘아직, 오른팔을 잃었을 뿐이다.’

서문이진이 동공만 옆으로 굴렸다.

도를 쥔 오른팔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도는 게 보였다.

왼손을 급히 뻗어 얼른 회수하려 했다.

“하찮군.”

퍼엉!

“커허억!”

서문이진이 피를 울컥 토했다.

부릅뜬 눈에 비춰지는 건 걸레짝처럼 된 몸이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몰라도 갈비뼈 바로 아래로 허리 부분이 반 정도 구멍이 나 버렸다.

“이럴 수……”

“있다.”

암천회주가 파리를 내쫓듯 손바닥을 휘둘렀다.

그 손바닥은 고스란히 서문이진의 몸을 후려쳤다.

콰앙!

끝이 보이지 않은 공력이 손바닥의 접촉 부위로 전해지더니, 파도가 되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뼈는 잘게 부서지고 내장은 찢어지고 터졌다.

이목구비에서 피가 안개처럼 뿜어졌고, 몸은 멀찍이 날아가 근처의 나무에 처박혔다.

“죽어라, 암천회주!”

“와아아아아!”

“간다아앗!”

그 뒤로 백여 명 정도가 서문이진을 뒤따랐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현실은 잔혹하고, 다르지 않았다.

화경의 고수도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됐다.

절정이건 초절정이건 간에 그 결과는 다를 것 없었다.

하물며 암천회주는 쾌검의 절대고수다.

받아치는 건 물론이요 적을 죽이는 데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방팔방에서 화살 비처럼 검격이 쏟아져도 피하면 그만이다.

못하면 호신강기를 펼치면 문제없었다.

결국 이후 펼쳐진 광경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호음.”

약 일각의 시간이 흘렀다.

암천회주의 발이 피 웅덩이에 올라왔다.

“끝인가.”

허무했다.

결사한들 변하는 건 없었다.

오래버텨 봤자 이각조차 되지 않았다.

심지어 상처조차 주지 못했다.

사람이 벌레를 무참히 짓밟는 것과 다름없었다.

암천회주는 주변을 슥 훑어보다가, 어디에서도 숨소리가 나지 않아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척.

불현듯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못…… 보…… 내……”

“호오.”

암천회주이 감탄사를 흘렸다.

“실수로다.”

암천회주의 등 뒤에 선 건, 서문이진이었다.

왼손에 쥔 도는 반으로 조각나서 깨졌으며 얼굴은 반쯤 뭉개졌다.

심장 바로 밑 부근은 살점이 뜯겨져 없다.

옷차림은 걸레짝이 된 지 오래며 부풀어 오른 눈꺼풀 아래에는 초점을 잃은 눈이 언뜻 보였다.

팔을 잃은 부위에선 핏물이 ‘후두둑’ 하고 떨어졌다.

눈에서 빛은 보이지 않았다.

숨도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굳건히 서 있었다.

“그대 정도 되는 무인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암천회주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사도팔문 중 서문세가부터 포섭했어야 했다.

그 정도로 아까운 사내였다.

“잘 가라, 서문이진이여.”

암천회주의 검이 다시 흐릿해졌다.

째앵!

검이 살을 벤 것이 아니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마찰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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