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하군은 능선을 타 암천회주를 따돌리려 했다.
금주봉개, 손일산의 희생으로 분위기는 숙연했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지쳐 있었지만, 손일산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리에 힘을 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보고에 그 당찼던 발걸음에도 힘이 빠졌다.
“끄흐윽, 끅!”
개방도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뭐라 말하려 했다.
결과 보고를 위해 산기슭에 남겨두고 온 개방도다.
전멸하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일이 있다면 복귀하라고 명령해 두었는데, 문제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적어도 반 시진 뒤에 왔어야 한다.
“정신 차리게!”
신도균이 개방도를 진정시켰다.
다 큰 어른이 눈물 콧물 흘리는 모습이었으나 결코 추해 보이진 않았다.
방도들이 희생당하는 걸 직접 보고 있었음에도 나서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 누구보다 분했으리라.
“금주봉개를 비롯하여 그대 형제들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 겐가!”
“……!”
개방도는 신도균의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피와 먼지투성이인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슥슥 닦아 낸 뒤, 그제야 간신히 보고할 수 있었다.
“금주봉개를 포함한 사백여 명! 전멸했습니다!”
북하군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특히 개방의 제자들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현실과 마주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벌써?’
신도균의 낯빛이 꺼멓게 죽었다.
“접촉한 뒤 얼마나 버텼는가?”
“일각, 겨우 일각입니다.”
“허어!”
홍진이 커다랗게 탄식을 흘리며 불경을 외웠다.
서문이진은 얼굴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렸다.
‘안 돼!’
신도균이 절규 어린 비명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반 시진, 아니 이각은커녕 일각이라고?’
나빠도 이보다 더 나쁠 수가 없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반 시진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설마하니 이각도 버텨 내지 못할 줄은몰랐다.
이 근처 지형에 익숙한 것도 아니고, 주변에 즐비한 나무의 수도 상당해 도망이 쉽지 않았다.
떨어질 때로 떨어져, 더 이상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사기와 더불어 체력을 소진하게 되면 필시 잡힌다.
“제기랄!”
누군가가 결국 참지 못하고 울분을 토해 냈다.
“개죽음이란 말인가?”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그거야말로 개죽음이다.”
외침을 기점으로 동요의 파도가 아군을 휩쓸었다.
다들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계속된 추격전으로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암천회주가 존재만으로도 압박이었다.
방금 전 개방도가 일각 만에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공포와 불안이 급증했다.
“멈추지 마시오!”
신도균이 진정시키기 위해 고함을 질렀다.
“금주봉개 및 개방의 동도들이 모처럼 일각의 시간을 벌어 주었소.
지금 여기서 멈추거나 주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고결한 희생을 더럽히는 일이라는 것, 명심하시길 바라오.”
“……”
신도균의 말에 정사인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었다.
“이 일각이란 시간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당장 시간을……”
바스락.
“누구냐!”
그때였다.
측면의 수풀에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들 예민한 탓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히, 히이익!”
수풀을 헤치자 겁에 질린 모자(母子)가 나타났다.
“부, 부디…… 사, 살려 주세요”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은 살의가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케 도망치지 않고 어린 아들을 숨기듯이 품안에 껴안았다.
“민간인……?”
서문이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안 돼……’
신도균은 모자를 보고 좋지 않은 걸 떠올렸다.
아주 잠깐 동안, 그 시선이 홍진을 거쳐 갔다.
“나무아미타불. 많이 놀라셨다면 대단히 죄송합니다.”
홍진이 모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나섰다.
“소승은 소림사의 홍진이라 합니다.
두 분을 해칠 의도는 전혀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소, 소림사요?”
소림사라는 말에 여성의 공포가 조금 줄어들었다.
무림 문파인 동시에 중원 불학의 중심인 절답게 일반 백성들에겐 안심할 수 있는 단체였다.
“지금 이럴 시간인가?”
서문이진이 홍진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쏘았다.
“미안하오. 잠깐이면 되오.”
홍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잠깐 지나가는 길이었을 뿐이니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의도하진 않았으나 놀라게 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아니에요……”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홍진이 모녀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춘 채 인사했다.
“그나저나, 행색을 보아하니 약초꾼은 아니신 것 같고…… 어찌하여 이런 곳에……?”
“그, 그게…… 이 아이가 뒷산에 놀러 간다고 하더니만,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된 나머지……”
홍진의 입가에 웃음이 지워졌다.
“안 돼……”
신도균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무림인도 아니고 일반인, 하물며 아녀자가 그리 멀리 갈 리가 없다. 그 말은 즉……’
신도균이 차마 그다음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 근처에 마을이 있는 것입니까?”
“네, 네…… 뒤의 저 언덕을 넘으면 금방 나와요.”
심장이 철렁 주저앉았다.
“당장 출발한다!”
서문이진이 손을 들어 고함을 질렀다.
모녀는 깜짝 놀란 나머지 목을 움츠렸다.
“기다리십시오.”
서문이진의 말이 끝냐기 무섭게 홍진이 말했다.
“기다리긴 뭘 기다려?”
서문이진이 눈을 매섭게 빛냈다.
“시간이 이미 너무 많이 지체됐다.”
“이 앞에 마을이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냥 지나가면 된다.
암천회주는 우리에게 밖에 관심이 없다.”
“제가 비록 전략에 능하지 않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홍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만약, 만약의 일입니다. 아니, 만약이라 할 필요도 없겠지요. 정황상 저희는 추격을 따돌리지 못할 것이고, 결국 암천회에게 따라잡힐 것입니다.
그 후 격전을 치를 것이고…… 승패에 상관없이 그들은 보급 및 재정비할 장소가 필요하겠지요.”
신도균이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들이 승리한다면 피해를 복구하고,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코앞의 마을을 점거할 것입니다.
설사 패하거나 추격전이 장기화된다고 할지라도, 부상자가 발생하면 마을로 보내 회복하거나 전황을 보고 하기 위해서 합비에 연락하겠지요. 제 말이 틀립니까?”
“틀리다. 우리야 저 모자를 우연찮게 발견해서 마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지만, 이들을 보내면 발견될 리는 없다.”
“추적자는 눈앞의 흔적만 쫓지 않습니다.
그 외의 도주로를 확인하거나, 혹은 뒤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사전에 정찰을 보내 확인해 두겠지요. 암천회주 곁에 천기성이라는 군사진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홍진이 서문이진의 말에 반박했다.
서문이진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만 성큼성큼 걸어가선 홍진의 멱살을 잡았다.
“저, 저런!”
“방장 사형!”
소림사 측에서 숨을 멈추거나, 혹은 불같이 분노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동맹을 맺었다고 한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문의 존장의 멱살을 잡으니 역정을 낼 수밖에.
홍진은 소림사 측으로 곁눈질해 진정시켰다.
‘망했군.’
신도균은 모자를 보자마자 이와 같은 상황을 예상하고 불안을 느꼈다.
“잘 들어라, 소림 방장.”
서문이진이 홍진과 마주 보며 낮게 으르릉거렸다.
“네놈이 북두소림의 방장일지는 몰라도, 한낱 중일 뿐이다.
부처가 아닌 이상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포기할 수밖에 없다.”
“뭐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까?”
“말이라고 묻느냐?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네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서문이진이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질렀다.
“뒤에선 천하제일인, 암천회주라는 재앙이 이 순간에도 바짝 다가오고 있다. 방금 전 손일산의 희생으로 안 그래도 부실한 우리 전력은 줄어들었으며, 무엇보다 검신이나 패신군이라는 형편 좋은 영웅 나리도 없단 말이다!”
어쩔 수 없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저 지독하게 운이 나쁘다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이 산골에 처박힌 마을에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많아 봤자 이백여 명 정도.”
“그 이백여 명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그래, 사람이다. 우리와는 눈곱만큼도 관여되지 않고, 구해 봤자 아무런 힘도 없는 나약한 사람들!”
서문이진이 홍진과 이마를 맞댔다.
“무림의 운명을 건 싸움이란 말이다.
향후 정사의 운명이 결정짓는 싸움이거늘, 그저 지나가다 발견한 전혀 상관도 없는 연놈들을 위해서 모든 걸 망치겠다고? 지랄하지 마!”
정파와 사파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방식은 서로 다르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반목했다.
“다시 한번 물으마. 어떻게 할 거지?”
“구할 거요. 원치 않는다면 뇌승도께선 물러나시오.”
“육시랄! 왜!”
서문이진은 홍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홍진은 그 물음에 잠시 눈을 감았다.
‘사형, 사형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거요?’
죽고 없는 사형에게 묻는다.
그리고 홍진은 다시 눈을 떠서 그 질문에 대답했다.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림사의 방장이 말을 잇는다.
“무림에 관여되지 않은 사람들, 무림인의 전쟁 탓에 죽게 둘 수는 없습니다.”
홍진이 서문이진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사람을 돕는 것에 이유는 없습니다.”
“영웅 놀이라도 할 생각인가?”
“영웅이 아닙니다.”
홍진이 서문이진에게 말했다.
“소림사의 한낱 중일 뿐이지.”
“못 들어 주겠군!”
서문이진이 홍진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저, 저놈!”
“방장 사형!”
소림사 측에서 분노로 가득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잘 들어라, 소림사!”
서문이진이 소림사 무리를 보고 외쳤다.
“뒈지고 싶지 않다면, 현실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꽉 막히기만 한 중은 내버려 두고 따라와라.”
“뇌승도! 입조심하시오!”
자비와는 거리가 먼 인상의 노승이 외쳤다.
“계율원주, 혜정.”
서문이진이 잘 말했다는 듯이 그 이름을 불렀다.
“오냐, 소림의 율법을 관장하는 중이라면 뇌가 물렁한 자보단 낫겠지. 냉정하게 판단해 봐라.”
계율원은 자비를 내세우는 소림사에서 유일하게 엄한 곳이다.
율법을 관할하는 만큼 냉정하고 객관적이었다.
“현실적으로, 정말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나?”
“……”
혜정은 서문이진의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전 괜찮습니다, 계율원주님.”
홍진이 고민에 잠긴 혜정의 손을 감싸 안았다.
“방장이란 참선의 방향을 인도하는 중일 뿐, 소림의 승려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못난 중의 고집 탓에 사형제를 억지로 위기에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홍진도 현실을 모르는 건 아니다.
서문이진이 역정을 내는 이유나 스스로의 행동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계율원주님…… 아니, 혜정 사숙.
이 뒤를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진이 씁쓸하게, 그리고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아……’
혜정은 홍진을 보고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방장 사형……’
방장 사형이란, 홍진을 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대의 전대, 신승이라 존경받았던 혜만이었다.
혜정은 홍진을 보고 무심코 혜만을 떠올렸다.
솔직히, 자신과 혜만은 그리 맞지 않았다.
혜만은 자비와 용서를 중시했다.
계율원주로서 율법을 중시하고 자비와 용서를 중시하는 입장과는 달랐다.
지도자의 성향만 보면 혜만보다는 홍고와 잘 맞았다.
‘전대 방장, 홍고는 이해득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소림에 문제가 되는 자가 있으면 최소 십 년 이상의 면벽 수련 형을 내렸고, 혹은 죄질이 좋지 않을 경우 뇌옥에 영원토록 가두었지.
반성하든 말든, 문제가 됐을 경우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홍고는 소림사가 완전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문제가 될 것은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워낙 심하다 보니 엄하기로 소문난 계율원주조차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혜정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전과 달라진 소림을.
‘자비와 용서가 아니라 공포로 통제한다면 마도나 사도와 무엇이 다른가. 그래선 아니 된다.’
인상법유부(人上法有不).
사람 위에 법이 있는 게 아니라.
법상인유(法上人有).
법 위에 사람이 있다.
“한 가지만 묻겠네.”
혜정이 홍진의 손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방장 사질은 왜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그들을 구하려 하는가?”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홍진이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저들에겐 저희밖에 없습니다.”
올곧은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우리가 저들을 버리면 누가 저들을 구합니까.”
혜정은 홍진의 말에 입가에 미소를 그려 냈다.
“그렇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주변의 혜자 배 노승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웃음은커녕 표정 변화 없기로 소문난 혜정이다.
실제로 오랫동안 보아온 혜자 배도 본 적이 없었다.
“뇌승도, 질문에 답하겠소.”
혜정이 서문이진에게 말했다.
“그대가 말한 대로 이건 목숨을 버리는 행위요.
그러나 곤경에 처한 자들을 보고도 외면할 수는 없소.”
“물은 내가 병신이지!”
서문이진이 혜정에게서 소림사 무리를 돌아봤다.
“소림사, 아무래도 네놈들의 윗대가리는 다 하나같이 병신인 모양이다. 더 이상 말을 나누는 건 의미가 없으니, 뒈지고 싶지 않은 놈들은 나를 따라오도록 해라!”
“저 역시 괜찮습니다.”
홍진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나 사형제들이 주저할 것 같아 용기를 더해 주었다.
“두려움이란 당연한 감정입니다.
제가 방장이라고 한들, 여러분의 의사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비난하지도, 비난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해 주십시오.”
“……”
소림사의 승려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모습은 서로 눈치를 보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방장께선 저희의 도움이 필요 없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직면하게 될 적은 재앙이요, 죽음입니다.
솔직히, 한 사람이라도 더 도움을 구하고 싶은 심정이지요.
하지만 말했듯이……”
“그러면 됐습니다. 전 남겠습니다.”
“소승도 남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사형께서 나서신다면……”
그리고 한두 사람씩 손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선 여전히 두려움이 보였다.
“아니, 어째서……”
홍진도 당황스러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누군가가 한 걸음 나서서 말했다.
무림인이라고, 소림사의 승려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방장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들에게 우리밖에 없다고.”
“지랄을 해 대는군!”
서문이진이 등을 돌리곤 성큼성큼 걸어갔다.
“신도균! 이렇게 된 거 소림사를 미끼로 삼아 물러난다!”
“하, 하지만……”
“네놈까지 설마 지랄을 하는 건 아니겠지!”
서문이진이 서슬 어린 눈으로 신도균을 쏘아봤다.
“귀주 출신에 사고가 유연한 네놈이라면 어찌 될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게 아니라면, 죄다 개죽음으로 만들 생각이냐?”
“끄응!”
신도균은 서문이진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정파인 중에서도 사고가 유연하며 신념보다는 생존에 중점이 되어 있다.
만약 감성에 휘둘려 이곳에 남았다면 진작 죽었다.
귀주의 난전 속에서 아군을 버리는 경우는 심심찮게 일어난다.
다수의 생존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킨다.
지휘관으로선 당연한 생각이다.
“그가 말한 대로입니다.”
홍진이 신도균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렇게 된 것, 저희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그러니 이 앞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누군가는 원군을 요청해야 하며, 이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송구하오나……”
한시가 부족한 상황이다.
방금 전 말다툼으로 잃은 시간만 해도 아까울 지경이었다.
설득하느냐 안 하느냐 문제가 아니다.
설득이란 것 자체를 떠올리는 것이 어리석었다.
“그러면, 아직 죽기에는 이른 승려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장!”
“너희까지 잃는다면 소림이 어찌되겠느냐!”
혜정이 눈을 부릅뜨며 꾸짖었다.
“오십 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무림맹 오백, 개방도 오백, 금의검문 백, 서문세가 육백.
그리고 소림사 오십 명이 재편성됐다.
천칠백오십 명은 따로 떠나기로 결정됐다.
주로 혜 자와 홍 자 배분이 남기로 했다.
“이백오십 명으로 얼마나 버티겠다고.”
서문이진이 떠나기 전 이죽거렸다.
“걱정해 줘서 감사합니다. 나무가 많으니 이 지형을 최대한 살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홍진이 옅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너희가 여기서 목숨을 버린들, 암천회가 인근 마을을 못 볼 것 같다고 생각하나?”
“예, 저희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남게 된다면, 멀리서도 훤히 보이니 굳이 근처를 수색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흔적을 따라 지나가겠지요.”
“됐다!”
서문이진이 더 이상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신도균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몸짓에선 나름대로의 경의가 담겨있었다.
“……”
홍진은 천칠백오십 명이 떠나는 걸 바라보다가, 입가에 웃음을 지우고 등을 돌렸다.
‘사형……’
전대의 소림 방장, 홍고가 떠올랐다.
‘사형이셨더라면…… 분명, 저 마을을 무시하셨겠지요.’
홍진은 홍고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물론 패륜에 대해선 그 역시 알지 못한다.
주서천이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끝까지 숨겼던 탓이었다.
암천회에게 선동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조금이 라도 흘러 나가면 그것이 헛소문이 되도록 신경 썼다.
어쨌거나, 이러한 사실을 제외하곤 혜만 정도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평생을 함께한 사형제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소림의 방장에 오른 뒤 곁에서 보좌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소림의 주요 무력이 집결한 상태입니다.
이곳에서 괴멸한다면 소림사는 또다시 퇴보할 것입니다.
사형이시라면 결코 그 꼴을 보지 못하시겠지요.’
홍고가 패륜을 저지를 정도로 미쳐있던 건 모르지만, 그래도 무시 못할 수준이란 건 알고 있었다.
사문을 사랑하는 걸 넘어 집착하는 수준의 홍고라면, 향후의 일을 생각해 무고한 이들을 저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소림사가 제일이어야 한다며 부르짖던 사형이었으며, 그 일로 위의 배분과 반목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래선 아니 됩니다.’
산 밑 구름인지 파도인지 모를 이들이 밀려온다.
“입적하신 신승, 혜만 대사께선 항상 중생을 구제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진이 밑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천수천안(千手千眼), 천 개의 손으로 중생을 도우며 천 개의 눈으로 구제해야 할 이들을 보리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승려들이 무심코 보살의 이름을 외웠다.
딱. 딱. 딱.
이 시급한 순간에도 목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승려답다면 승려답다고 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소림사의 승려들은 합장한 채로 염주 알을 굴리며 불경을 외웠다.
지저귀던 새도, 나무를 갉아 먹던 벌레가 속삭이는 소리도 없었다.
산림 안에서 목탁음이 울렸다.
너무나도 청아한 소리였다.
머리를 어지럽게 하던 잡념이 사라지고 대신 편안함을 주었다.
그리고 반 각 뒤, 일순간 소리가 사라졌다.
무언가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뚝 끊겼다.
“호오.”
왔다, 라고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이백하고도 오십 명이 눈을 뜬다.
“흐읍!”
순간, 숨이 멈췄다.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 주변의 생명체 또한 머리를 숙였다.
암천의 지도자가 등장하자마자 공기가 바뀐다.
청록 빛깔의 나무가 거무튀튀하게 변해 간다.
빛이 몸을 감추고 어둠이 찾아왔다.
아니, 정확히는 자의적으로 감춘 것이 아니라 잡아먹혔다는 표현이 올바르다.
“개방도 다음에는……”
암천회주가 눈을 빛냈다.
“소림사와 서문세가인가?”
“방금 뭐라……?”
홍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서문이진!”
“뇌승도!”
홍진 외의 승려들도 놀랐다.
누구보다 먼저 등을 돌렸던 남자, 서문이진이 사파의 무리를 이끌고 등 뒤에 나열한 채로 서 있었다.
“어찌하여……?”
“착각하지 마라.”
서문이진이 홍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고작 이백오십 명 따위가 시간을 얼마나 끌겠냐.
북두소림이라 해도 자의식 과잉이다. 이왕 이렇게 된거, 차라리 약간의 힘을 더해 조금이라도 버티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홍진은 서문이진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감격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반쯤 숙여 인사했다.
서문이진은 홍진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그 대신 등 뒤를 따라온 무인들과 소림사 구성원을 살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