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상군의 총지휘권은 팽자호.
북하군은 신도균이 맡았다.
‘으으, 또 최전선의 책임자라니!’
신도균이 속으로 치를 떨며 질색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팽자호의 곁에서 지휘 고문 및 부관으로 남으려했는데, 그것조차 물거품이 됐다.
본래 소림사의 방장인 홍진에게 넘기려 했으나, 무공이 약하더라도 경험이 다분한 자신이 추천받았다.
출세를 생각하면 좋다면 좋은데, 최전선을 지긋지긋하게 경험한 입장에선 그리 좋지 않았다.
‘무림맹 오백과 구백여 명의 개방도, 금의검문 백에 서문세가 육백, 소림사 삼백을 합해 이천사백여명.’
그래도 유능한 지휘관 아니랄까 봐 할 일은 했다.
작전 내용은 머릿속에 넣어 두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몇 번이나 재확인한다.
각 배치된 구성원 및 특징을 떠올리고 연결시키면서 대응에 준비했다.
“옵니다.”
호위 무사가 말했다.
“그래, 보인다.”
산더미처럼 쌓이려던 푸념을 멈추고 앞을 살폈다.
“삼천.”
“빠르구려.”
금주봉개, 손일산이 감탄했다.
“별거 아니오.”
전력의 수를 파악하는 건 지휘관의 필수 능력이다.
사실, 굳이 지휘관이 아니더라도 귀주처럼 툭하면 적이 몰려오는 환경에선 싫어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기관으로 사천?”
서문이진이 우려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슬아슬하지만 괜찮을 거요.”
신도균이 서문이진의 걱정을 안심시켰다.
딱 반으로 쪼개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전력의 수 차이가 천씩이나 나도, 무력의 평균을 조절해서 편성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전투를 준비……”
신도균이 말을 이으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뭐, 뭐냐.’
신도균의 눈이 점차 커졌다.
‘그, 그럴 리가…… 없다.’
머리 위로 들려다가 어깨 부근에서 멈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눈빛엔 불안감이 묻어났다.
신도균은 남들보다 눈이 좋다.
북방의 오랑캐와 견주어도 최상위에 속할 정도다.
오랫동안 전장을 바라보면서 단련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무림인답게 내공을 운용하면 그 시력은 천하제일이라 논할 정도로 높아진다.
그러다 보니 곁의 무림 고수들보다 암천의 무리를 세세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중에 있지 말아야 할 얼굴이 있었던 것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우중충하게 느껴졌다.
아직 황혼이 찾아오기는 이른 시간이다.
그런데도 어둡게 느껴졌다.
평원 위에 그림자가 지나간다.
구름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시커먼 그림자이자 파도였다.
“지도자가 무림의 최고수이면서도 어찌하여 선봉에 서지 않는지 그 연유를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앞, 장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금적금왕(槍賊摘王). 적을 사로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아야 한다. 우두머리가 잡히면 군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도자이자 우두머리는 설사 최고수라 할지라도 몸을 숨겨야 하지.”
장년 사내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하나……”
사내, 암천의 주인이 다음 말을 잇는다.
“당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앞에 선 건 사병도 아니고, 장수도 아니었다.
“자아, 막을 수 있다면 막아 봐라.”
선봉(先錄), 암천회주(暗天會主).
“으악!”
신도균이 암천회주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암천회주의 정체는 불과 일 년에서 이 년 전만 해도 오리무중이었으나, 현재는 아니다.
합비의 본부를 빼앗겼을 때만 해도 직접 나셨다.
운광과 제갈상 및 무림맹 소속 무사들의 목격담을 토대로 초상화가 만들어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암천회, 이 미친 새끼들!’
신도균은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총력전도 아닌데 선봉을 지도자가 맡는다고?’
무림맹주와 사도천주가 본부에서 쉽사리 떠날 수 없는 건, 본인이 당할 경우의 파장을 생각해서다.
전쟁 중이라면 상식이요, 요즘처럼 시국이 어수선할 때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특히나 사도천주처럼 중앙 집권이라면 그 여파는 사파의 혼란 및 붕괴를 불러일으키리라.
‘미친놈!’
전략이고 뭐고 따지기 전에 상식적인 부분이다.
군사라면 지금 당장 직책을 반납해야 한다.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이냐며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다.
“오만하군.”
서문이진이 눈살을 찌푸린 채로 한 마디 했다.
“그렇소. 오만하오. 하지만……”
신도균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뒷말을 이었다.
“또 효과적이지 않을 수가 없소.”
신도균이 오른손을 들었다.
“퇴각! 퇴각이다!”
신도균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기수는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라!”
“퇴각이라니?”
손일산이 신도균의 외침에 이의를 제기했다.
“북상군 측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는 것이 작전 아니었소?”
“작전은 동일하오. 다만, 충돌하지 않고 도망쳐서 발을 묶을 거요.”
“도망?”
손일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파의 사회적 분위기가 아무리 전과 다르다곤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명예에는 여러모로 민감했다.
“적과 싸우기도 전에 도망치겠다는 말이오?”
손일산이 찝찝한 표정으로 물었다.
“쯧쯧 누가 정파인 아니랄까 봐 꽉 막혔구나.”
서문이진이 손일산을 보고 혀를 찼다.
“금주봉개. 눈앞에 폭풍이나 산사태와 정면으로 맞서서 싸우기라도 할 생각인가?”
서문이진이 손일산을 어리석다는 듯이 쳐다봤다.
“사기의 문제로 천하에 알려지진 않았으나, 무림맹주와 권동제가 합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치명상 하나 내지 못한 자가 바로 암천회주다.
상천이 있는 것도 아니요, 하물며 전력의 수도 적은 우리가 어찌해 볼수 있는 적이 아니다.”
손일산은 반발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분하지만 맞는 말이오.”
신도균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암천회주와 접촉한다면 필패(必敗)요.”
만약, 주서천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기뻐했을 것이다.
전생과 다르게 쓸데없는 고집을 안 부려서다.
전란의 시대에선 정파인이 특유의 사고방식 탓에 고집을 부려 어이없이 패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생엔 암천회에 대해서 꾸준하게 경고하고, 여러모로 당했던 점이 적용됐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오?”
“일단, 저 인재(人災)가 눈치채고 북상군에게 가지 못하도록 후퇴를 거듭하여 거리를 벌리고, 시간을 벌 생각이오.
북상군의 작전이 성공한다면 금세 도움을 주러 올 거요.
혹은 천군사께서 지금 보낼 전서구를 받고 때에 맞춰서 도움을 주기를 기도해야 하오.”
“만약, 실패한다면 어찌 되는 거요?”
“죽을 거요.”
신도균이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전부.”
* * *
북상군은 북하군이 후퇴를 시작한 걸 눈치채지 못했다.
분산될 때부터 제법 거리를 둔 탓이었다.
그러나 설사 지척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적을 유도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었다.
“당 소저.”
당혜가 시량의 부름에 눈동자만 굴렸다.
“적의 지휘관이 확인됐습니다.”
“말씀하세요.”
“소저의 오라비요.”
시량은 일부러 오라비라는 걸 부각시켰다.
당혜가 현실에 회피한 채, 후에 혹시라도 직면하게 됐을 때 주저하거나 혼란을 일으킬 것 같아서였다.
“왜요, 제가 멍청하게도 감정에 휘말려 작전을 망칠 것 같아서 걱정이라도 되시나요? 개룡.”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시량이 멋쩍은 듯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걱정 마세요.”
당혜는 웃지도, 착잡하지도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오룡 중에서 활약도 적고 존재감이 낮은 데다가, 억지로 인원 채우는 역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개룡께서 그리 말하지 않으셔도 잘 알고 있답니다.”
시량이 어색하게 웃었다.
‘저 신랄한 독설은 여전하구나.’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닌지라 놀랄 것도 없었다.
당혜는 시선을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렸다.
“당명인이 설사 저와 피가 이어진 오라비라 할지라도, 정파의 배반자이자 암천의 수뇌인 천추로 알려진 이상 주저하는 경우는 없을 거예요.”
당혜의 시선 속에선 살의도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담담하면서도 냉철했다.
“이야기는 끝났는가?”
팽자호가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물었다.
“실례했습니다.”
당혜와 시량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팽자호는 괜찮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부관의 의견은?”
“아직 기다려야 합니다. 곧 시작될 거예요.”
무엇이, 라고 물어볼 사람은 없었다.
북상군의 수뇌부는 입을 다물고 정면을 주시했다.
초록으로 물든 풀 위로 파도가 멈춰 섰다.
처억, 척!
사 리(里) 바깥, 암천의 무인들이 진군을 멈추고 오와 열을 맞춰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자리 잡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동작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처처척!
일렬종대에서 오백의 무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아니, 정확히는 독인이었다.
어린아이 몸만 한 표주박을 품 안에 안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열어라.”
전 오룡삼봉이면서 흑영부의 수장.
정파의 배반자, 당명인이 명령을 내렸다.
“독연이다!”
은하노사의 고함이 평원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퐁.
표주박의 입구를 틀어막던 마개가 열렸다.
이윽고 그 입구에서부터 불길한 연기가 뿜어졌다.
아니, 쏟아져 나왔다는 말이 더 알맞았다.
불길할 정도로 시커먼 연기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아니라, 폭포처럼 쏟아지면서 파도가 됐다.
물이 아닌 연기가 된 독연은 낮게 깔린 채 진군하더니, 순식간에 평원을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려 갔다.
낮게 깔린 독연은 바로 얼마 전의 장마를 보듯이 먹구름이 되어 대지를 가득 메웠다.
치이이.
춤을 추듯 힘차게 몸을 흔들던 풀잎이 굳었다.
마음까지 건강해질 청록색은 영혼을 잃은 것처럼 색을 잃어버려 최후엔 힘을 잃고 바스러졌다.
부글부글.
수백 수천 년 이상의 땅이 오염된다.
독연은 곧 죽음이었다.
새외에서 끝없이 부러워하던 중원의 대지 위에 용암처럼 기포가 끓어올랐다.
지면 밑의 뿌리는 고통스러워하듯이 몸을 뒤틀고, 썩어 문드러져 갔다.
토양 또한 색채를 잃기 시작했다.
“허……”
은하노사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저게 뭐야!”
경악을 금치 못하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색을 보아하니 유황으로 된 독연은 아닌데……”
저처럼 독으로 된 연기를 독연이라 부른다.
그리고 저 정도의 대규모라면 보통, 옛적부터 사용된 유황 연기가 있다.
혹은 재나 석회, 고춧가루 등이 종종 사용된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색은 어두컴컴한 자줏빛에 가까웠다.
“일 리? 이 리?”
“세상에, 커도 너무 크지 않나.”
이 주변 평원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말하는 순간에도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독운인무(毒雲人舞).”
당혜의 눈빛이 살벌함으로 불타올랐다.
“독운인무?”
팽자호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이 물었다.
“독연에 대한 개념은 알고 계신가요?”
“군부의 무기처럼 유황으로 된 연기를 만들거나, 혹은 독공의 고수가 독기를 방출하는 것이 아닌가.”
“맞아요. 독운인무는 후자를 응용한 방법이에요.”
“으음, 암천회에 독공의 고수가 그리 많았냐?”
팽자호가 믿기지 않는 듯 침음을 흘렸더.
독기를 방출한다고 할지라도 한계가 있다.
저리 오래 남지도 않으며, 초목은 둘째 치고 대지가 부식될 정도로 강하지도 않다.
저 정도의 위력을 내려면 초절정고수, 그것도 비주류인 독공의 초절정이 오백 명 이상이어야 한다.
“아뇨. 후자여도 방법이 조금 달라요.”
“방법이 다르다니?”
당혜는 말을 이으려다가 입을 닫았다.
팽자호 곁에 있던 은하노사가 답답한 마음에 어서 말해 보라고 말하려다가 흠칫 놀랐다.
독하기로 이름난 당혜였으나, 지금은 평소보다 더 표독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어서였다.
“내성약!”
당혜가 뾰족한 목소리로 외쳤다.
북상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약을 꺼내 복용했다.
독에 대한 내성과 저항력을 높여 주는 약이다.
당명인이 사독문의 독에 대비한 것처럼, 당가 역시 당명인의 독에 대비했다.
독의 대비는 사실상 연합군 측이 한 수 위였다.
당명인이 대단하다 할지라도 결국 그 근간에는 당가가 있다.
당가가 아군인 이상 대비는 완벽했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야겠구나.”
팽자호가 허리춤에서 도를 꺼냈다.
독연이 북상군의 코앞까지 왔다.
“그 독운인무라는 것, 막을 수 있겠냐?”
“약을 복용했으니 반 시진 정도는 버티겠지만, 전투가 장기화된다면 물러나야 해요.”
“단점은?”
“앞이 보이지 않을 거예요.”
“암천이라는 이름에 걸맞군.”
팽자호가 흥, 하고 코웃음 쳤다.
독구름이 앞으로 몰려온다.
일각, 아니 반 각이란 시간이 흐르면 암흑 속에서 싸워야 한다.
“부관은 뒤로 물러나 있도록 하라.”
“어찌하실 생각이죠?”
“어차피 물러날 예정이었으니, 잘됐다.
독연 탓에 물러난 것이라면 적도 의심하지 않고 따라오겠지.”
과연, 하북의 호랑이.
그 용맹함은 보통이 아니었다.
두려워하기는커녕 상황을 적극 이용하기로 했다.
“팽가의 가주께선 제 마음에 쏙 드는군요.”
단리화가 죽립을 살짝 들어 웃었다.
“격돌을 앞에 두고 물러나는 건, 전희가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하려던 찰나 아랫도리가 죽어 버리는 것과 다름없죠.”
팽가의 가주도 단리화의 음담패설을 피할 수는 없었다.
“뭐? 크하하하!”
팽자호가 단리화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 말대로다.”
팽자호가 앞으로 걸으며 전의를 끌어 올렸다.
여태껏 숨죽인 채 대기 중이던 북상군의 기세도 거칠어졌다.
여기저기서 병장기를 꺼내는 소리가 났다.
“다들, 서문이진 그놈이 떠나기 전에 검신이 없다면서 얼마나 덜덜 떨며 걱정을 했는지 기억하나?”
팽자호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게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보여줘라.”
끄덕.
“우린,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팽자호가 웃음을 지우고 정면을 쳐다봤다.
“정도에 따라, 무림을 도우러 왔다.”
“와아아아아!”
“가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