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권-第一章 (232/254)

유소가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지만, 암천남군의 지휘 체계가 이미엉망이라 제대로 듣질 못했다.

좌우도 좌우지만, 정면의 중앙이 문제였다.

상천육좌를 어떻게 해 볼 아군이 없었다.

칠성사병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간다.

“패신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유소가 패신군을 향해서 소리쳤다.

“암천에 입회해라!”

목하흑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역전할 기회를 찾았다.

“회주님께선 관대하신 분이다.

비록 그대가 대계에 훼방을 넣었다고 한들, 너 정도 되는 무인이라면 능히 용서해 주실 것이다!”

몸을 낮춘 채로 달리면서, 오른손을 등으로 옮겨 세 개의 화살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꺼냈다.

눈앞에 일류 무인 수준의 칠성사병이 다섯 잡힌 걸 보고 시위에 화살을 전부 걸었다.

꾸우욱.

앞으로 뻗은 왼팔을 사선으로 돌린다.

시위와 한 몸이 된 세 개의 화살은 뒤로 밀렸다.

옷 속의 단단하고 탄력 있는 삼두근과 이두근이 울긋불긋 해졌다.

내력이 기맥을 타고 쭉 미끄러져 화살에 당도했다.

파바밧!

화살이 시위에서 동시에 떠났다.

비바람이 불었지만 어떠한 영향도 없다.

괜히 궁신의 무공이 아니었다.

일월신궁은 백발백중이었다.

푹! 푸부북!

“윽!”

“케헥!”

다섯 명 중 셋이 화살에 꽂혀 쓰러졌다.

각각 머리와 목, 심장 부위에 맞아 다신 일어나지 못했다.

화살을 날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무음의 공포요, 곧 다가오는 죽음이었다.

순식간에 셋이나 당했으나, 칠성사병의 반응은 무미건조했다.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주서천을 노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상천에 오르는 절대고수 앞에서 한눈을 팔 수는 없었다.

칠성사병은 왼손에 쥔 검을 앞으로 힘껏 뻗었다.

쐐애액!

대기에 구멍을 뚫으며 내는 소리가 섬뜩했다.

일반적인 무인이 보기에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깨끗하며 재빠른 완벽한 찌르기였다.

하나 주서천에게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공격 전에 잠깐 본 것만으로도 형태와 검의 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앞으로 보는 시선은 여전하다.

눈동자는 자리를 지켰다.

그 대신 몸이 반 회전하여 검을 피해 냈다.

검이 소맷자락을 지나간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 같으나 계산된 행동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살통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화살을 시위에 거는 재주까지 부렸다.

“……”

검의 주인은 절초가 빗나가자 크게 당황했다.

급히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주서천은 칠성사병을 지나치지 않고, 서로 등을 맞댄 채로 손에 쥔 시위를 놓았다.

파앙!

화살이 시위를 떠나면서 회전한다.

화살의 끝자락, 깃이 날개를 펄럭이듯 움직였다.

머리로 둔 화살촉 역시 돌았다.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치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곧은 선을 그려 내다가 목표인 정면의 적의 하복부에 도착했다.

푸우욱.

촉을 중심으로 옷자락이 짓이겨졌다.

잘 단련된 복근 역시 빨려드는 것처럼 요동치다가 구멍이 났다.

피부가 사라지고, 살과 근육이 찢겨졌다.

그 안의 내장에도 구멍이 나면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커헉!”

칠성사병이 눈을 부릅 뜨더니만, 하복부에 꽂힌 화살대를 붙잡은 채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되돌아왔다.

“암천회에 들어오라고?”

주서천이 화살이 떠난 오른손으로 등을 맞댄 칠성사병의 팔을 쥐어 잡았다.

우드득!

“으아아악!”

휘리릭!

손아귀만으로 팔뼈가 바스라졌으나, 그 고통이 지나치기도 전에 몸이 공중에 떠올라 빙글빙글 돌았다.

정면의 머리 위에서 포물선을 그려낸 칠성사병은 유소를 지나쳐서 그 뒤의 강물에 처박혔다.

콰아앙!

물기둥이 솟구치면서 굉음이 터졌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이마에선 빗방울인지 땀방울인지 모를 물방울이 떨어졌다.

사람을 던진 소리가 아니었다.

투석기로 바위를 날린 것 같은 굉음과 충격이었다.

“그래! 너만 한 절대고수가 입회만 한다면, 원하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회주께선 친히 베풀 것이다!”

유소가 옳다구나, 하면서 소리쳤다.

“절대의 신공, 나라를 흔들 정도의 미녀, 천만금, 어느 쪽이든 간에 상관없다!”

유소는 패신군을 향해서 손을 건댔다.

“설사 무림이라는 사회의 일부를 바꾸고 싶다면, 그리하도록 하여라! 암천회는 원망(願望)의 법보다!”

“하하.”

주서천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가,

“무언가 착각을 하는군.”

입가에 웃음을 싹 지워 냈다.

“내가 암천회의 적이 된 건 무언가를 얻고자 한 것이 아니다.”

빈 화살통을 바닥에 버렸다.

패신군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활을 등에 매달은 채로 앞으로 걸었다.

매섭게 뜬 눈 사이로 북풍한설처럼 한기가 흘렀다.

“나는, 암천회가 죽도록 싫다.”

다음 발을 내밀자, 세상이 바뀐다.

색이 지워지며 흑백으로 나누어졌다.

현재의 광경 위로 과거의 기억이 덮어졌다.

칠검전쟁, 아니 그 이전부터 무림은 암천회라는 흑막에 이용당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최소 십 년 이상을 그들의 손에 놀아났다.

사람의 욕심을 자극해 서로를 죽이게 만들고, 미워하게 하고, 선의로 시작된 신념은 전쟁의 도구로 전락했다.

어제 사람이 죽었다.

오늘도 사람이 죽었다.

내일도 사람이 죽을 것이다.

가끔씩 그 기억이 떠오른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처럼 흘렀다.

다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왜냐……!”

유소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물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패신군은 상천육좌, 아니 전 무림인을 통틀어 정체불명인 신비인이었다.

사문은 물론이요 이름과 나이도 밝혀진 게 없었다.

인간 관계조차도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애초에 무림에 나타난 횟수 자체가 적다.

그러나 나타날 때마다 무림에 이름을 떨쳤다.

지금에 와선 주서천에 준할 정도로 암천회의 대계를 망친 원수 중 한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유소 입장에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떠한 연고도 없는 자가 뚝 떨어졌다.

가족이나 친구가 살해당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증오심은 무엇인가.

그게, 도저히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고?”

탓탓탓!

이를 꽉 깨물고, 다시 달렸다.

진흙을 튀면서 앞을 향해 똑바로 달렸다.

회색으로 번진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도 서 있지 않은 대지가 바뀌었다.

여전히 시체가 보였지만, 그래도 주변에 많은 이들이 서 있었다.

정파와 사파가 고함을 내지르고, 울부짖고, 화내고, 살의를 내뿜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막아!”

유소의 다급한 외침에 여섯의 호위가 나섰다.

파바밧!

육각 진형을 짠 여섯 호위가 덤벼들었다.

하나같이 개양성 소속인지라 경지가 범상치 않았다.

절정도 아닌 초절정뿐이었다.

화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부담스러워할 숫자였다.

“왜냐고!”

주서천이 다시 한번 되물으면서 접촉했다.

부웅.

정면의 호위가 일도양단의 기세로 도를 내리쳤다.

주서천이 적의 심장부를 향해서 돌진하다가, 우측으로 몸을 꺾어 도를 피해 냈다.

부웅.

왼팔을 뒤로 잡아당긴다.

배에 힘을 꽉 주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좌권을 힘껏 위로 올렸다.

부웅.

인생의 결의만큼이나 무거운 소리.

그리고 주먹이 아래에서 위로 수직을 그려내 턱에 꽂힌다.

콰아아앙!

비명 따윈 없었다.

현경의 고수가 전력으로 낸, 그것도 강맹함이 특징인 권법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턱에 꽂힌 순간 목 위로 머리가 과실처럼 터져 나갔다.

죽음을 느끼지도 못한 채 죽었다.

다음의 호위가 그 틈을 노려 온다.

쐐액!

질리도록 들은 검의 비명이다.

대기가 갈렸다.

적의 공격이 아니다.

주서천은 원래부터 하나의 무공을 운용한 것처럼 검으로 동작을 이었다.

‘해남일검류!’

바람이 된 쾌검이 공간을 잘랐다.

초절정의 고수나 되는 네 명의 호위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됐다.

최후에 호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물러서진 않은 것이 장했다.

“무슨……!”

그러나 필사의 각오는 얼마 가지 않고 황당함으로 번졌다.

휘이익!

패신군이란 자가 대뜸 검을 던진 것이었다.

아무리 사파인이라곤 하지만, 설마하니 상천씩이나 되는 자가 병장기를 투척할 줄은 몰랐다.

결국 당혹감을 느낀 채로 화살처럼 쏘아진 검에 가슴을 꿰뚫려서 꼬챙이 신세가 됐다.

‘안 돼……!’

유소가 몸을 급히 돌렸다.

그 발걸음은 전장을 떠나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발걸음도 결국 전력으로 날아온 패신군에 의해서 멈췄다.

주서천이 등을 돌린 유소를 낚아채 잡았다.

“커흐윽!”

유소는 주서천이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자, 숨이 막힌다는 듯 기침을 거세게 토해 냈다.

“날 봐!”

암천회의 숙적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유소는 겁먹은 듯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날 보란 말이다, 천기성!”

주서천이 소리쳤다.

“이득을 취하려고 이간질하고, 유린하고, 속이고, 바보 취급하고, 학살을 했는데, 지금 왜냐고 묻는 것이냐?”

당연했다.

싫은 건 당연했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그랬다.

정복을 위해 짓밟고, 죽였다.

단순하게,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걸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못됐으니까.”

북부 전선.

북부의 연합군은 전투에 앞서 전략을 확인했다.

“개방의 정보에 의하면 현재 칠천에 이르는 암천북군은 안휘성 북부, 화북(華北) 평원 부근을 지나고 있다고 해요.”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정면충돌이겠군요.”

전(前) 귀주 전선장, 신도균이 말했다.

“무림맹 본부로 발령이 난 지 얼마되시지도 않았는데, 이 주변 지리를 벌써 외우셨군요. 하기야, 겨우 귀주에서 벗어나셔서 본부로 오셨는데 출세하시려면 허튼 생각 하지 마시고 뼈 빠지게 일하셔야죠.”

당혜가 허튼 생각 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그, 그렇소.”

신도균의 피부 위로 땀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이제 좀 본부로 와서 쉬나 싶어 좋아했는데, 올라오자마자 또다시 최전선에 끌려오다니!’

무림맹 상층부는 암천회와의 결전 및 합비 탈환에 맞춰서 인재를 끌어모았다.

귀주 전선장이자 뛰어난 지휘관으로 이름난 신도균이 본부에 배속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도균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드디어 지긋지긋한 귀주에서 벗어날수 있다며 뛸 듯이 기뻐했다.

‘하하하 맹초혁과 조명 그 두 놈을 뭐 빠지게 교육시킨 보람이 있었구나. 좋다, 좋아.’

그동안 귀주를 벗어나지 못한 건, 마땅한 후임이 없어서였으나, 지금은 그 문제가 해결됐다.

맹초혁과 조명이 가끔씩 과한 경쟁탓에 으르릉거리는 것이 좀 걱정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본부에 도착하면 어떤 직무를 맡게 될지 궁금하군.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리 편히 지내진 못 하겠지만, 그래도 최전선에 있는 것보단 낫겠지?’

그러나 그 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났다.

도착해 보니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귀주의 전선장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천군사 제갈상이 반겨 줘서 기뺐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북부 전선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당일에 지휘관으로 임명받고 전선으로 보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팽자호의 지휘고문 겸 작전 참모, 그리고 지휘관 등의 업무를 맡게 됐다.

출세라면 출세, 그것도 파격적이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정사의 최전선인 귀주에서 십 년 넘게 지휘를 맡았으며, 암천회와의 최초 격돌 때도 큰 공을 세웠다.

출신이 그리 대단하진 않으나, 부패로 인해 붕괴할 뻔한 무림맹이기에 그것을 걸고 넘어질 리 없었다.

애초에 그걸 따질 만큼의 상황도 아니며, 신도균 본인도 정사에서 호의적인 인물인 점이 컸다.

정파의 경우엔 본부로 배속받으려고 온갖 공을 세우고, 상부의 비위도 잘 맞추는 이다. 

나쁘게 볼 수가 없다.

과거에 쌓아 올렸던 처세술 및 능력이 좋게 적용됐다.

지휘관에 딱 알맞은 인재였다.

정작 장본인은 피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본 연합군은 하남의 동부의 평원에 자리 잡고 있소.

화북 평 원과 이어져 있지요.”

“서로 움직임이 뻔히 보인다는 거군.”

은하노사가 끄응, 하고 침음을 흘렸다.

“은하노사의 말씀 대로요.

드넓게 펼쳐진 평원에선 숨거나 눈을 속일 곳이 마땅히 없소.

그렇다 보니 움직임이 한정되어 있는 탓에 사실상 전략이라고 할 것 없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될 거외다.”

“나쁘지 않아.”

팽자호가 입술을 혀로 적시며 사납게 웃었다.

호전적인 팽가의 가주다운 성향이었다.

“과연, 하북의 호랑이다운 용맹스러운 면모이십니다.

하나, 전선장님, 정파의 후일을 생각하시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저희의 전력이 이천 정도 적습니다.”

신도균이 팽자호의 눈치를 보면서 주의를 줬다.

“농담일세.”

뇌까지 근육으로 평가되는 팽가이나, 아무리 그래도 가주 정도 되는 무인이 막 나갈 리는 없었다.

성향을 감출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기본적인 상식이란 걸 지켰다.

“구체적인 방안은 있는가?”

“예.”

신도균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편안하게 근무하고 싶고, 전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였으나 그래도 일할 때는 철저했다.

괜히 귀주에서 불려와 팽자호의 지휘 고문으로 배속된 게 아니라는 듯이 뛰어난 처리 능력을 보여 줬다.

“기룡의 기관을 이용할 예정입니다.”

“제갈승계의?”

“그렇습니다.”

“흐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장된 기술인 기관이다.

예전 같았더라면 뭔 개소리냐면서 윽박질렀겠으나 최근에는 취급은 물론이요 시선부터 달랐다.

귀주에서의 제갈승계의 활약상은 널리 알려졌다.

그뿐만이랴, 비록 합비의 본부를 빼앗겼으나 기관의 도움을 받은 덕에 피해자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또한 얼마 전 화산파의 검산목으로도 위명이 자자했다.

“그의 기관이라면 믿을 만하오.”

위지결이 보증한다는 듯이 말했다.

“이다음은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신도균에게 모인 시선이 당혜에게로 모였다.

“거리상으로 아군과 적의 중간쯤에 기관을 설치해 두었으니, 이리로 유도하여 전력을 줄일 예정입니다.”

“유도만 하면 되는 건가?”

“기관의 발동 및 조율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기룡과는 친분이 있어 종종 여러 도구를 만들기도 했고, 근방의 기관의 주의나, 사용법도 들었거든요.”

“그 외의 문제는?”

“수용 인원의 한계.”

당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삼천에서 사천 정도. 그 이상은 문제가 생겨요.”

“전력의 분산……”

팽자호가 중얼거렸다.

“아군이 분산한다면 적군 역시 그에 맞춰 재편성할 테니 전력을 나누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도균이 대신 나서서 설명했다.

상대의 움직임이 훤히 보이는 평원의 특성이었다.

서로 간에 지형의 우위는 없지만, 연합군 측에는 기관이 존재해서 든든했다.

“다만 적이 눈치챌 가능성이 문제입니다. 만약 도중에 지원이 도착한다면 유도나 기관의 발동이 수포로 돌아가겠지요. 그러니 설사 눈치채더라도 쉽게 도와줄 수 없도록 부대의 거리를 벌려야 합니다.”

“으음!”

은하노사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위기에 빠져도 도와줄 병력이 없다는 소리군.”

손일산이 말했다.

“적도 마찬가지지만요.”

당혜가 손일산의 걱정을 받아쳤다.

“약 오천에 이르는 아군을 반으로 나누면 각각 이천오백…… 적의 경우에는 각각 삼천오백.”

팽자호의 눈빛이 사납게 불타올랐다.

“군을 나누겠다.”

* * *

우는 것처럼 떠들어 대던 천둥도 멈췄다.

지긋지긋하게 내리면서 바닥을 두들기던 장대비도 끝이다.

장마 구름도 모습을 조금씩 감춰 갔다.

정사 연합군은 남부 전선의 승전 소식을 알렸다.

“무림맹 만세! 사도천 만세!”

“해남검파 만세!”

“패신군 만만세!”

“우리의 승리다!”

승전의 환희로 가득 찬 함성이 장강에 울렸다.

암천남군이 배수진에 잡힌 순간부터 승부는 정해졌다.

사기는 곤두박질쳤고, 전의도 금세 잃어버렸다.

연합군에게 등을 돌렸던 천여 명의 배신자 무리는 과거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하, 한 번만 봐줘!”

“지랄!”

“크아악!”

남부 연합군, 특히 사도천 측은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주요 인물 일부만 남겨 두고 목을 잘랐다.

아직 여름인 탓에 시체가 썩어 악취를 풍기거나, 역병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한꺼번에 모아 불태웠다.

“대인, 대인! 제발 목숨만은!”

“도적 나부랭이 주제에 까분 대가다.”

“아악!”

적림십육채, 정확히는 수림팔채도 박살났다.

“용이, 용이……”

“용신이시여, 죄송합니다. 비나이다.……”

“끄흐윽!”

자연재해, 이무기와 남해용문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장강의 지배자니 뭐니 떠들던 수림도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선박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난파됐다.

이무기의 몸과 부딪친 대가였다.

수중으로 몸을 던져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몇몇 운이 좋은 이들은 도망치는데 성공했으나, 후에 도착한 해남도 세력에게 끝내 사망했다.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지휘부는 뒷정리로 분주하다.

참모진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전선에 나서지 않고 보호받는 만큼의 일을 해야만 했다.

전쟁이란 이긴다고 전부가 아니다.

그 뒤로도 많은 문제가 쌓여 있다.

승전 소식의 보고에서부터 시작해 사상자의 처리, 주변의 경계, 적의 처분 등 정말 산더미같이 많다.

주서천도 제갈수란을 도와 뒷정리를 도왔다.

북부의 전황이 신경 쓰여 오래 있을 수는 없었으나,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떠나지 못했다.

“목하흑.”

“끄…… 으윽……”

진지의 근방, 장강에서부터 이각 정도 되는 거리에 인적이 드문 동굴이 있다.

주서천은 이 동굴로 목하흑, 유소를 포함하여 암천회 및 수림팔채의 몇몇 인물을 데리고 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포로로서 대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꽤 버티는군.”

눈앞에는 만신창이가 된 유소가 있었다.

“과연 천기의 측근이란 건가.”

그 천기에게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머릿속에 있을 정보가 보통이 아닐 텐데 그냥 죽일 순 없었다.

그래서 먼 곳까지 따로 데려와 심문에 들어갔다.

쉽게 입이 열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하니 입 하나 뻥긋하지 않을지는 몰랐다.

“죽여…… 라……”

유소가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지독한 놈.”

주서천은 유소의 끈질김에 혀를 내둘렀다.

“다시 한번 생각해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내놓는다면, 목숨만큼은……”

“흥.”

유소가 끓는 목소리로 코웃음 쳤다.

“그리 뻔한, 거짓말을 하니까……말하지 않는 거다.”

퍼렇게 부어 버린 눈꺼풀을 천천히 뜬다.

입과 코에선 피가 흘러 굳어 엉망진창이었다.

이도 몇 개 나가고, 머리는 산발이라 거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말해도 죽고, 안 말해도 죽일 것 아닌가?”

“좋아. 적어도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 주마.”

“흐…… 흐하하하!”

유소가 광소를 터뜨렸다.

“여기서 문제다, 패신군!”

힘겹게 뜬 눈은 무언가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할 것 같으냐? 네놈이 사문의 원수라서?

아니다. 그리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소음문의 몰락은 음신의 사망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그 철천지원수가 바로 패신군이었다.

주서천은 유소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저 그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유소가 히죽 웃었다.

“상천육좌씩이나 되는 절대고수가 머리 조금 똑똑하고, 목소리 큰 자에게 놀아나는 꼴이 말이야.”

눈 밑에 검은 기미가 짙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중소 문파에게조차 무시 받는 소음문도!”

유소의 광소는 점차 커져 갔다.

“그 소음문도가 지금은 무림을 양분화하는 세력의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상천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눈에서도, 웃음에서도 광기가 번져갔다.

인정받지 못한 자의 설움, 그리고 누군가의 인정으로 인한 자기만족이 느껴졌다.

“으하하하! 썩 괜찮은 최후가 아닌가!”

주서천은 웃음을 터뜨리는 유소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암천회, 그 새끼들 사람 마음 파고드는 데는 정말 귀신같구나.’

그 뒤로 몇 자례에 걸쳐 심문했지만 소용없었다.

유소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수림도의 경우엔 건드리기도 전에 울먹이면서 아는 것을 다 이야기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쓸모없는 정보뿐이었다.

‘더 이상의 심문은 의미가 없겠군.’

주서천이 한숨을 내쉬며 동굴 밖으로 나왔다.

“응? 제갈 소저?”

동굴 밖으로 나와 보니 이무기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제갈수란이 보였다.

해를 등 뒤에 지고 있어 후광이 비추는 듯했다.

“아, 주 공자……”

제갈수란이 설명하려던 찰나, 이무기가 반갑다는 듯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다만 그 탓에 제갈수란이 그만 균형을 잃고 머리 위에서 미끄러졌다.

“꺅!”

제갈수란이 깜짝 놀라며 작은 비명을 질렀다.

“이런!”

주서천이 떨어지는 제갈수란을 팔로 들어 안았다.

“괜찮습니까?”

“……!”

제갈수란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뺨을 붉히면서 머리를 아래로 숙였다.

잠시 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휴우!”

주서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중요한 때에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천군사의 뒤를 이어 정파를 이끌었던 여인이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을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좀 조심해라. 귀하신 분이니까.”

이무기는 주서천이 핀잔을 주자 머리를 낮췄다.

사람으로 치면 시무룩한 느낌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제갈수란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잘 보면 뺨이 옅게 불그스름한 걸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무기는 언제 길들이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그게, 눈에 잘 띄기도 해서……”

“과연.”

“그리고 겸사겸사 향후의 일이나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있거든요.”

“마침 잘됐군요. 저도 심문의 결과를 보고 하려던 차였습니다.”

주서천은 제갈수란과 근처 바위의 평평한 부분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남검파와 남해용문에서 주 공자를 찾았지만, 다른 임무가 있어 이곳에 없다고 대답해 드렸어요.”

“저 때문에 고생 많으십니다.”

이무기야 어차피 사람의 말 따위 하지 못하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 위해선 직접 볼 필요가 있었다.

설사 남해용왕이 대신 말을 전해주었다곤 해도, 정작 도착했는데 주서천이 없다면 속았다는 생각에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맞대면했다.

“정리는 어찌 됐습니까?”

“거의 다 끝나 가요. 아, 해남검파와 남해용문, 더불어 해남도 세력은 종전될 때까지 장강 유역을 사수해 준다고 해요.”

“그게 정말입니까? 반가운 소식이군요.”

서장 무림, 포달랍궁처럼 도와주고 돌아갈 거라 생각해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주서천은 뜻밖의 소식에 기뻐했다.

“네. 해남제이검께서 안부 소식을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저 대신에 감사의 인사를 전해 주시겠습니까?”

끄덕.

“제갈 소저께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그래도 덕분에 믿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부로 가시는 건가요?”

“예. 대비는 해 두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어서요.”

남부의 경우에도 해남검파, 남해용문이 제시간에 맞춰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크게 패했을 것이다.

그 천기가 건재한지라 보이지 않는 곳이 걱정이었다.

무엇보다 정보력을 동원하더라도, 천선성이나 천권성 등이 훼방을 놓다 보니 전달의 시차도 발생했다.

“패신군의 이름으로 사도천주에게 연락을 해 두고 먼저 가 있겠습니다.”

“통솔하는 데 수월하겠군요.

정리가 끝난 뒤 연합군을 이끌고 합비 근처에 주둔해 있도록 할게요.”

굳이 뒷말을 이을 필요가 없었다.

지성의 제갈수란답게 말하지 않아도 이해했다.

옆에서 보면 십수 년을 함께한 부부 같았다.

“아, 그리고……”

주서천은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결코, 결코 다치지 마십시오.”

“네, 물론……”

“저에게 있어, 소저가 없으면 곤란합니다.”

암천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

제갈수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 누구도 제갈 소저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제갈수란 사후 무림맹의 지략의 수준이 퇴보했다.

제갈상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소저가 전장에 계실 때 혹여나 다치시거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전생처럼 암천회에게 암살당했을까 봐.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무림이.

“그러니까…… 제갈 소저?

얼굴이 빨간데 혹시 몸이라도 안 좋으신 겁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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