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돌려, 아직 화산에 있을 때의 일이다.
북부 전선과 남부 전선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무림맹의 전령에게서 제갈상의 연락을 받게 된다.
“남부 전선에서 적림십육채를 동원할 것 같다…… 인가. 과연.”
적림십팔채가 비록 십육채로 줄어들었으나, 그 세력은 아직 건재하다.
그래서 먼 남해까지 다녀왔다.
제갈상은 장강의 항구 마을, 안경을 거론하면서 암천남군이 연합군을 장강으로 끌어들일 걸 암시했다.
‘암천회의 움직임을 눈치챈 거야 그렇다 쳐도, 내 고민을 예상했다는 듯이 순간에 맞춰 온 답변…… 언제나 생각하지만 괜히 천군사가 아니로구나.’
주서천은 그의 조언에 감탄하면서 남부로 향하기로 했다.
‘원래는 단순히 남부 전선에 참전할 생각이었는데…… 설마하니 이러한 작전을 세울 줄이야.’
제갈상의 누이이자 동시에 또 한 사람의 천재인 제갈수란 역시 이 계획에 가담하여 작전을 세웠다.
그녀는 산동에 있다가 삼악검파의 배신이 정리될 무렵 주서천이 남부로 떠날 걸 알고 장소를 옮겼다.
그리고 도중에 그와 합류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암천회라면 그리고 천기라면……해남검파의 동원을 모를 리 없어요. 정보원을 동해와 남해로 통하는 길로 보내 두고, 첩자에게도 말해 두었으니 곧 해남검파를 경계하는 세력에 대해서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첩자는 언제 심어 두었습니까?’
‘육천여 명의 무림인을 급히 모으는 것만큼 빈틈이 생기는 순간도 없으니까요.’
‘과연, 그렇군요 대단하십니다.’
‘벼, 별거 아니에요…… 그보다, 이번이 골치 아픈 수림도를 일망타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요.’
‘무슨 생각이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경계 탓에 도착이 늦어지는 해남검파를 대신해서…… 남해용문에게 도움을 요청해 볼까 해요.’
‘아! 과연, 배가 아닌 수중으로 이동하여 매복할 생각이시군요.
이해했습니다. 제 이름을 걸면 얼마든지 도와줄 겁니다.’
‘죄송해요…… 그렇지 않아도 너무 늦으면 곤란할 것 같아서 작전 개요와 더불어 존함을 빌려 서신을 보내두었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올바른 판단이십니다.
음, 그러면…… 이무기의 도움도 받아 봐야겠군요.’
전서응을 중원의 남부인 광동으로 보낸다.
그리고 광동의 사도천 소속무사가 급히 해남도로 떠났다.
마침 기후가 멀쩡하기도 하고, 전과 달리 남해용문의 기문진도 없어 신속한 소식 전달이 가능했다.
남해용왕은 주서천에게 연락을 받고 용후를 이용, 이무기에게 전달한 뒤 남해용문도까지 동원한다.
이 모든 일이 불과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남해용문도를 태운 이무기는 무서운 속도로 중원으로 헤엄쳤다.
수룡과 인어라는 이명답게, 출발했던 해남검파를 뒤쫓은 걸 넘어 오히려 추월해 장강에 도착한다.
‘설마하니 그가 패신군일 줄은.’
그리고 이 과정에서 패신군의 정체를 밝혔다.
제갈수란이야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 데다가, 전선의 지략가인만큼 중요한 정보가 필수였다.
‘안 돼…… 놀라는 건 나중이야. 집중해야 해.’
제갈수란은 머리를 털어 잡념을 지워 냈다.
“저게 뭐야!”
적림총채주, 홍하랑이 입을 떡 벌렸다.
“요, 용?”
“으아악! 용이다! 수룡이야!”
“꿈, 꿈인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이무기의 겉모습은 용과 뱀 사이의 중간이다.
그런데도 용으로 보이는 건, 터무니없는 크기를 자랑하는 몸집 탓이었다.
상상 속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이 튀어나왔으니 난리가 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용신님께서 노하셨다!”
“수신이다, 수신!”
뱃사람이 미신에 민감한 건, 해남도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수림도도 마찬가지였다.
“들으세요!”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물빛 머리카락, 설화 속의 인어가 아닐까 싶은 고운 미녀였다.
용미, 적수수가 이무기의 몸통 위에 서서 수적 무리에게 소리쳤다.
“저의 이름은 적수수, 남방적룡이자 남해의 용왕의 꼬리입니다!”
“나, 남방적룡?”
“사해용왕이라고?”
사해용왕의 전설을 모르는 자는 없다.
수적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누, 누님!”
수로채에서도 큰 동요가 일어났다.
“쯧!”
홍하랑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요하지 마라! 저건 용이 되지 못한 요물, 이무기다!”
적림총채주는 주변을 휘어잡아 진정시키려 했다.
“저를 비롯하여, 남해용궁의 백성이 멀고 먼 중원의 강을 밟은 것은 침략이 아니라는 걸 알립니다!”
“뭐하고 있어? 죽여 버려!”
홍하랑이 얼굴을 팍 찡그리곤 소리쳤다.
“바다의 진노를 잠재우고, 용궁의 붕괴를 막아 준 은인인 화산의 검신에게 보답하러 온 것…… 까악!”
휘리릭!
홍하랑이 수하의 도끼를 던져 말을 끊었다.
“이 엿 같은 상황은 뭐냐, 목하흑!”
홍하랑이 부글부글 끓던 분노를 토해 냈다.
신경질적인 목소리에선 온갖 안 좋은 감정이 격동했다.
“이딴 건 듣지 못했다고!”
용이 되지 못한 요물이니 동요하지 말라곤 했지만, 그녀 본인도 적지 않게 당황한 상태였다.
손안에 잡히는 뱀도 아니고 집채만한 크기를 넘어선 괴물이다.
“천기성, 이 개새끼야! 뭐라고 말좀 해 봐!”
“무, 무슨……”
목하흑 유소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난 듯이 조소를 흘리던 모습은 없었다.
창백해진 낯빛을 보면 그야말로 병자였다.
“이, 이봐.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제기랄!”
“줄을 잘못 탄 건 아니겠지?”
남부 연합군의 후미에서도 동요가 벌어졌다.
개중에선 후회막심한 얼굴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 기회를 엿보는 자들도 존재하였다.
암천남군도 역시 안색이 어두웠다.
“수를 내다보고, 그다음 수를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 수조차 내다보았지.”
패신군, 주서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스읍.”
숨을 크게 들이쉬고……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다시 한번 용의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이번엔 이무기 역시 동시에 울어댔다.
지상과 지상 위에서의 전투가 시작됐다.
“제, 제기랄! 막아라!”
유소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이 얼굴에서부터 폭포처럼 쏟아졌다.
머리 위로 먹구름이 보였다.
방금전만 해도 자기들만의 것이라 생각했던 암천이 불길해 보였다.
“으아악!”
쿠아아아앙!
장강의 물살이 더 거세졌다.
이무기가 몸통을 채찍처럼 휘두르자, 정면에 서 있던 선박이 정통으로 맞고 박살이 났다.
장강 한가운데에 충격으로 인한 소용돌이가 생기고, 그 위로 조각난 선박의 잔해가 빨려 들어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수공을 익혀 장강에 빠져도 살아남을 순 있었지만, 안도할 수는 없었다.
꼬르르륵!
당황한 나머지 숨을 잘못 쉬어 물거품을 내뱉었다.
수적의 앞에 보이는 건 삼지창을 쥐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바다에서 온 악마, 남해용문도였다.
해남검파는 남해의 무인들과 중원을 밟았다.
해남검파에서 백여 명과 해남도의 중소 문파 사백여 명을 더해 오백 명의 무림인이 배에 올랐다.
“주서천 대협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돛을 올려라! 출항의 준비다!”
“검신께 은혜를 갚을 때가 왔다!”
“남해의 용왕의 비호를 받는 배를 누가 막으랴!”
해남도의 주민은 주서천에게 호의적이었다.
당시, 해남검파를 필두로 한 해남연합에 소속되어 있던 중소 문파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누가 말하지도 않았거늘, 주서천이 도움을 요청했다는 말에 솔선수범하여 배에 올라탔다.
상선으로 개조된 해적선, 그리고 해남도가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상선을 통해 중원으로 향했다.
“장강에 가려면 동해로 좀 돌아가야겠군.”
“동해에 왜구가 있소.”
“올 테면 와 보라지. 왜구 따위 두렵지 않다.”
“동해용왕 전하께선 남해용왕 전하의 형님 되시는 분이지. 길을 열어주실 것이 분명하다.”
해남도의 자신감은 미신에서부터 나왔다.
남해용문과 화해한 이후론 바다에게 비호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정말로 비호를 받아서인지, 아니면 운인지는 모르나 해남 연합은 정말로 항해 도중에 어떠한 문제에도 직면하지 않았다.
바다가 좀 거칠었어도 폭풍이 불 정도는 아니었으며, 동해의 왜구도 접근하지 않았다.
아니, 접근하지 못했다는 것이 알맞았다.
“선장님, 금의상단 소속의 상선이 보입니다.”
“금의상단? 놔둬라. 몸집이 너무 크다.”
“그럼 더 털 게 많지 않을까요?”
“목숨이 아깝다면 덤비지 마.”
금의상단의 명성은 왜구에게까지 알려졌다.
아무리 탐스러워 보인다고 한들, 호위로 보이는 무림인이 수백씩이나 보이는데 건들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바다 한가운데 아니라, 대륙의 인근 해역로를 이용하고 있잖느냐. 괜히 접근했다가 명나라 수군의 눈에 띄어 오해를 받으면 곤란하니, 지나가게 놔둬. 얻는 것에 비해 잃는 것이 많다.”
“넵, 알겠습니다.”
해남 연합은 남해에서 동해로 북상, 이후 강소를 통해 장강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림팔채와 맞닥뜨리게 된다.
유소의 명을 받고 매복해 있던 수림팔채는 해남 연합이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습격을 시도했다.
“크하하, 이 몸이 수림팔채의……크하악!”
“혀, 형님!”
그러나 습격은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간다.
“수적이다!”
“수림팔채!”
“천군사가 말한 대로다!”
해남 연합은 사전에 들은 것이 있어 수림팔채가 매복해 있을 것이란 걸 예상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제갈상이 매복지를 추려서 보내 준 덕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배에 구멍을 뚫어!”
“뭐, 뭐 이리 단단해!”
“어림없다!”
해남 연합이 타고 온 배 중 일부는 본래 명나라 수군에 대적하기 위해 왜구가 개조한 전함이다.
또한 남해의 지랄 맞은 날씨에도 버티기 위해서인지 수림팔채의 공격에도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
무엇보다 가만히 내버려 둘 해남연합이 아니었다.
“바다에선 해적이 날뛰더니만, 강에선 수적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구나!”
해남제이검, 전수국이 검을 휘둘렀다.
그 뒤로 구십구 명에 이르는 해남검파의 검객이 선상을 지배했다.
“제, 제기랄!”
“배 아래에선 뭐하고 있는 거야!”
“빨리 배를 침몰시켜!”
선상 위에서 싸우던 수적 무리가 악을 썼다.
“꼬르륵!”
그러나 배 밑의 상황도 안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해남검파의 경우엔 수공보단 검공을 택해 수중에서 싸울 이들이 몇없으나, 그 외의 문파는 달랐다.
검공보단 작살이나 창, 그리고 수공을 택했다 보니 수림팔채에 필적할 정도의 수중전을 자랑했다.
아니, 필적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위에 있다는 것이 알맞았다.
“수, 수공?”
“으아악! 고수다!”
중원의 무림 문파가 정사할 것 없이 수림팔채에게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건, 바로 이 수공 때문이었다.
설사 하수라 할지라도 수중전에선 그 어떠한 육지의 고수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해남도의 문파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수적은 수적 나부랭이군. 무공이 형편없다.”
“남해용문의 인어에 비하면 어린아이나 다름없지.”
“작살이란 이렇게 사용하는 법이다!”
괜히 남해, 해남도의 분쟁까지 해결해 준 게 아니다.
해남검파도 해남검파지만, 해남도 세력 자체가 그동안의 고생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활약했다.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 도망이다!”
“물귀신이다!”
“퇴각해라! 퇴각!”
수적은 수적이다.
결국 오합지졸에 불과한 집단이었다.
한번 밀리기 시작하자마자 도주를 택했다.
“전진!”
“주서천 대협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남해 무림의 힘을 보여 줘라!”
* * *
남부 연합군은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 전력이 천이나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기는 여전했다.
아니, 내려가기는커녕 먹구름을 뚫듯이 치솟았다.
비바람 아래에서 무림인들이 뒤섞여 싸웠다.
“우오오오오!”
주서천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고함을 내질렀다.
비바람 치는 와중에도 조금도 묻히지 않았다.
패신군과 마주 본 칠성사병 무리는 몸을 움찔 떨었다.
“크, 큭……!”
고막이 찢어지는 느낌이다.
뇌는 충격으로 앵앵 울렸다.
오싹한 감각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순간이지만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숨이 턱 막혔다.
‘간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발뒤꿈치를 올린다.
그리고 곧장 지면을 밀어내듯 박차면서 신형을 날렸다.
“살……”
칠성사병이 목숨을 위협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려던 찰나였다.
복부에 충격이 가해졌다.
콰아앙!
주먹에 맞는 소리가 아니었다.
벼락이 친 것 같은 굉음이었다.
“……”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공에 눈이 멀어 앞장섰던 칠성사병은 속으로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후회하며,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아아악!”
“우왁!”
패신군의 주먹을 맞고 날아온 칠성사병 탓에 전위의 부대는 난리도 아니었다.
수십 명에 이르는 무리가 넘어지거나 날아가 다쳤다.
그 광경을 본 칠성사병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막아!”
유소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 들었다.
“막으란 말이다, 이 멍청이들아!”
유소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지만, 패신군과 마주 본 무리는 대부분이 공포에 질려 쉽게 나서지 못했다.
보다 못한 암천회 소속 고수가 뒷걸음질 친 칠성사병 한 사람의 목을 쳤다.
서걱!
“물러서지 마라!”
암천회의 고수가 눈을 벌겋게 뜨고 고함쳤다.
“겁을 먹고 물러선다면 탈영죄로 목을 치겠다!”
“상천육좌도 한낱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목이 잘리거나, 장강에서 물귀신이 되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 나아가라!”
불과 일각 전까지만 해도 장강의 물살이 무섭지 않던 암천남군이었으나, 지금은 그 반대였다.
장강에 빠져도 구해 줄 사람이 없다.
무엇보다 일정한 시간마다 울음소리를 내는 이무기가 두려웠다.
“제길, 제길, 제길!”
유소는 연신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지휘에 힘썼다.
비바람 탓에 시야가 가려지고, 이성이 터질 정도로 뒤통수를 맞은 상황인데도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괜히 칠천에 이르던 암천군의 지휘를 맡은 게 아니었다.
천기에게 인정받은 만큼 능력이 출중했다.
“그, 그래! 패신군도 결국 사람이다!”
“수백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순 없을 터!”
“죽여랏!”
암천남군의 전위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압도로 인해 굳어 버린 머리를 털어 내곤 덤벼들었다.
“금방 가마.”
주서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팔과 다리, 어깨와 등허리, 허벅지와 발목에 힘을 준다.
숨을 들이쉬자 대해와 같은 내공이 움직였다.
무릎을 굽히자 대퇴근이 부풀어 수축한다.
하단전에서부터 흘러나온 기를 발바닥으로 옮겨 분출했다.
쿠웅!
주서천이 도약했다.
거의 일 장에 이르는 높이였다.
‘만중검!’
손에 쥔 검을 뽑아내며 동공을 운용했다.
천근추의 수법을 운용한 무공으로 무게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나비처럼 날았던 몸은 마치 별똥별이 된 것처럼 사선을 그려 내며 지면에 처박혔다.
콰아아앙!
머리, 아니 몸이 흔들렸다.
발이 지면에 닿은 순간 비바람으로 인한 진흙이 출렁였다가 위로 솟구쳤다.
일차적인 피해는 발이 지면과 부딪친 순간 벌어진 충격파였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금이 생기나 싶더니만, 이윽고 원형으로 움푹 파이면서 바닥이 꺼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이들은 그 아래로 빨려 들어갔고, 설사 피하려던 이들도 충격파에 휩쓸렸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폭풍이몰아친 것처럼 몸이 빙글빙글 돌면서 여기저기로 날아가 버렸다.
“우와아악!”
“어푸우!”
이차적인 피해의 원인은 솟구친 진흙이었다.
마치 용오름과 같이 치솟았던 진흙의 기둥은 파도가 되어 암천남군의 전위를 집어삼켰다.
모래라면 모를까, 계속된 장맛비 탓에 질척해진 흙더미가 되자 그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파도의 힘에 못 이겨 목뼈가 부러지거나, 혹은 입 안을 가득 채워 숨을 쉬지 못하고 질식사했다.
평지에서 생매장을 당한 이들만 수십이었다.
평지 한가운데에 그리 높지 않은 구릉이 생겼다.
“무, 무슨……”
딱딱딱!
한 번이다.
고작 일격에 백여 명이 넘게 죽고 그 이상의 부상자가 생겼다.
몸이 다시 떨리기 시작한다.
턱이 부딪치면서 소리를 냈다.
피가 차갑게 식은 걸 넘어 얼어붙었다.
“패신군……”
괜히 패신군이 아니다.
별호에 걸맞은 무력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작은 재해를 만들어내 공격했다.
“가라!”
주서천은 구릉 위에 우뚝 서서 검을 머리 위로 들었다.
“와아아아아!”
우르르르!
구름처럼 몰려든 전위의 부대가 구릉을 넘었다.
“패신군을 따르라!”
“이 거만한 새끼들, 우릴 아주 없는 취급하네!”
“죽여 버려!”
“으하하하, 사파의 고수의 힘을 보여 주마!”
철퍽 철퍽!
최소 이천의 사파인이 발을 구른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진흙이 튀었다.
아래에 묻혀 있던 이들이 살려 달라고 팔을 바깥으로 꺼내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그게 곧 표적이 됐다.
푸욱! 푹!
“아래에 먹엇감이 많다!”
“자비를 보여 주지 마라!”
사도의 무리가 신난 듯이 싸웠다.
격전도 이러한 격전도 없었다.
피가 쉴 새 없이 튀었지만 비바람과 진흙에 씻겨 사라졌다.
“이, 이럴 순 없……”
유소가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쐐애애액!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화살이 날아왔다.
“커헉!”
유소가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당황으로 얼룩진 눈동자에 비친 건 화살을 대신 맞은 호위였다.
“맙소사!”
유소는 호위가 죽건 말건,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고 경악했다.
“이 비바람을 꿰뚫고 저 거리에서 맞췄다고?”
시선의 끝자락에는 활시위를 당기는 패신군이 보였다.
“뭐냐……”
유소가 이를 뿌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대체 뭐냐는 말이다!”
목하흑의 절규 섞인 고함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비바람 속, 주서천이 매의 눈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힘을 모았다.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전생에서 활약한 영웅들이 죽지 않도록 노력했다.
혼자만의 힘으론 부족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부탁을 들어줘서 빚을 만들었다.
향후 몇십 년 동안 유례없는 학살이 벌어질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 안간 힘을 썼다.
오로지, 이들에게 절망감을 맛 보여주기 위해서.
“암천회의 적이다.”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수림팔채, 회류채주는 고수다.
비록 채주는 대형으로 모셨던 이를 죽여서 빼앗은 자리지만, 그렇다고 실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도적 떼의 수장이란 곧 힘의 상징, 얕보이게 된다면 그걸로 끝이다.
어쨌거나, 무려 초절정의 반열에 드는 회류채주는 장강에서라면 화경의 고수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수공을 익히지 않은 상대에 한했다.
‘제, 제기랄! 정말로 인어야 뭐야?’
꼬르르륵!
바로 옆의 수하가 삼지창에 꿰뚫려 죽으면서 핏물을 흘려 시야를 가리자, 회류채주는 옆으로 피했다.
콰르륵!
강 아래에서부터 삼지창이 사선을 그려 내며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자, 회류재주가 기겁하며 대응했다.
부웅.
손에 쥔 창이 움직인다.
일반 무인이라면 물의 압력 탓에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했겠지만, 수공을 익혔다면 별 상관없었다.
지상에서만큼은 아니나 충분한 힘과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상대방도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쿠와앙!
적의 공격을 막아 내는 건 어찌어찌 성공했으나, 공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팔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크읏!’
회류채주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부르르! 부륵!
그 뒤로 삼지창이 또다시 날아왔다.
한 자루가 아니라 예닐곱 자루에 이르렀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목표였다.
회류채주 대신 뒤에서 주춤거리던 수하들이 작살에 걸린 물고기처럼 삼지창에 꽂힌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휴우.’
회류채주가 가슴을 쓸어넘기며 안도했다.
그러나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눈을 감았다가 뜬 회류채주는 ‘흐억!’ 하고 기겁했다.
슈우욱!
선녀, 아니 인어였다.
등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이 용의 꼬리처럼 출렁였다.
만약, 단순하게 접근해 온 것이라면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에 무심코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물귀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휘리릭!
용의 꼬리, 적수수가 수중에서 화려하게 돌았다.
남해용문의 수룡미각이 회류채주를 덮쳤다.
쿠우웅!
“꼬르륵!”
회류채주가 무심코 비명을 질렀다가 물거품을 냈다.
방심한 탓에 어깨에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적수수의 발길질에 뼈에 금이 간 것도 모자라 상체를 지탱하던 척추뼈까지 크게 휘었다.
‘도대체 어디서 온 자들이더냐!’
입수하기 전 보았을 때 머리카락 색을 확인했다.
중원인, 아니 새외인 중에서도 물빛은 별로 없다.
한둘도 아니고 수십 명이 넘는데 모를 리 없었다.
무엇보다 개개인이 하나같이 수공의 정예인 것에 어안이 벙벙했다.
해남도에서 증원을 부를 줄 알았지만, 이러한 자들이 있다곤 듣지 못했다.
‘제기랄!’
회류채주는 이를 꽉 깨물곤, 고통을 참아냈다.
탈골이라면 뼈의 위치를 다시 옮기면 되겠지만, 금이 간 것이니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래서 고통을 견뎌내고, 쥐어짜내듯이 힘을 끌어 올려 대응에 나섰다.
‘나, 회류채주! 여기에서 죽을 순 없다!’
회류채주가 최후의 발버둥을 치듯 창대를 꽉 쥐었다.
숨을 참고, 복근에 힘을 준다.
울퉁불퉁하게 부풀어오른 근육 위로 힘줄이 돋았다.
그리고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퓨뷰뷰븃!
창이 앞으로 쭉 밀렸다가 되돌아가고,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막히는 건 없다.
물을 대기처럼 갈랐다.
공력의 전부를 넣은 덕에 위력과 속력이 늘어났다.
파밧!
적수수는 굳이 막지 않고 회피를 택했다.
수중에선 옆은 물론이고 위, 아래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으니 수공만 익혔다면 쉬운 일이었다.
경지가 낮았다면 모를까, 남해용문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적수수에겐 어렵지 않았다.
정말로 하반신이 물고기가 된 것처럼 환상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약 반 각 정도 공방을 주고 받았을 때였을까, 적수수가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려 멈춰 섰다.
‘어떠냐!’
회류채주가 보란 듯이 웃음을 지었다.
‘크흐흐, 이 몸의 무공에 겁을 먹었구나.’
쉴 새 없이 몰아치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마음에 여유가 찾아왔다.
‘오호라, 가만 보니 저년의 미색이 보통이 아니로군.’
마음에 여유가 찾아오니 딴생각이 피어올랐다.
‘안 그래도 백마채 그 병신 같은 놈들 탓에 경계해야 한다니 뭐니 하면서 여자를 맛본 지 오래됐는데, 잘 됐다. 인어라,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궁금하군.’
회류재주의 눈동자에 음험함이 실렸다.
입가는 기분 나쁘게 비틀렸다.
수적은 수적, 흑도의 무리다.
여자를 억지로 범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죽인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자아, 날 성가시게 한 죄를……응?’
회류채주는 생각하는 도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변이 갑작스레 어두워진 탓이었다.
혹시나 타고 온 배가 머리 위를 가렸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쩌억!
“끄르아윽!”
회류채주는 위를 본 순간, 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입에선 거품이 터졌다.
황급히 창을 휘두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접근한 이무기가 아가리를 닫았다.
콰지직!
송곳니에 의해 허리가 반으로 쪼개지고, 손에 쥐던 창은 충격에 튕겨져 나가 강류에 휩쓸렸다.
여덟 명밖에 남지 않았던 채주가 허무하게 죽었다.
약간의 발버둥조차 치지 못하고 즉사했다.
수령신과의 파수꾼, 이무기는 바다가 아닌 강임에도 이렇다 할 적응없이 제 힘을 보여 주었다.
전설에 나올 법한 몸체를 움직일 때마다 장강의 물살과 흐름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자연재해였다.
쿠구구구.
이무기가 강 아래에서 선회했다가 수면으로 틀었다.
적수수도 그 몸에 올라타 밖으로 향했다.
“푸하!”
쿠아아아아앙!
적수수가 숨을 내뱉는 소리는 잠시였다.
이무기의 부상은 요란스러운 걸 넘어 천지가 무너지는 듯했다.
느릿하게 그 몸체를 드러낸 것이 아니라 속도를 내서 부상한 탓에 파장의 규모가 보통이 아니었다.
머리와 더불어 굵직굵직한 물기둥이 치솟았고, 그 뒤로 큰 파도가 연달아 배의 측면을 후려쳤다.
끼기기긱.
“으아악!”
“침몰한다!”
수면 위는 난리도 아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물살은 미친 소처럼 날뛰었다.
방금 전 일격으로 수적의 배 하나가 뒤집혔다.
배의 밑바닥이 고스란히 보이고, 그 위로 다치거나 지친 이들이 올라왔다.
그 외에는 물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거나 수중에서 대기 중이던 남해용문도의 먹잇감이 됐다.
그 광경을 보다 보면 비바람이나 바다를 관장하는 신이 왜 용의 모습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몸체를 흔들면 큰 파도가 집어삼키고, 잠수했다가 부상하면서 부딪치면 난파됐다.
악몽 그 자체였다.
“병신같이 뭘하고 있는 거야!”
홍하랑이 수림도를 보고 호령했다.
“용이 되지 못한, 한낱 뱀일 뿐이다!”
탓탓탓!
홍하랑이 갑판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뱃머리를 박차고 높이 도약했다.
“하아아압!”
적립총채주는 엿 바꿔서 얻은 게 아니다.
비바람 속에서도 그녀가 내지르는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기세만 내세운 게 아니라는 듯, 도신에서는 붉은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있었다.
째애애앵!
“뭐, 뭣?”
홍하랑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전속력으로 달려서 도약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힘을 더해 최대의 공력으로 휘둘렀다.
아무리 몸체가 크다곤 하지만, 설마하니 비늘에 흠집도 내지 못할 줄은 몰랐다.
“큭!”
홍하랑은 미끄러지는 듯 싶었으나, 몸체에 도를 박아 멈췄다.
살을 뚫은 것도 아니고 비늘에 걸쳤다.
“무슨……”
단단해도 너무 단단했다.
도에 실린 공력이 이렇다 할 내상을 주기도 전에 산산이 흩어졌다.
“이무기에요.”
홍하랑의 고개가 번개같이 돌아갔다.
“단순한 뱀이었다면, 남해용문이 고전했을 리도 없겠죠.”
적수수가 제자리에서 통통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