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비, 암천회.
“천기님, 급보입니다.”
천선성이 천기에게 보고를 올렸다.
“화산에 주서천이 등장, 유정목의 납치는……”
칠성사병이 마지막 부분에서 말꼬리를 흐렸다.
천기의 붓이 멈췄다.
“실패했냐.”
“……예.”
“쯧!”
천기는 그리 실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대충 예상했다는 느낌이 묻어났다.
“제 스승의 일 아니랄까 봐 기가 막히게 맞춰 오는구나.
됐다. 완벽히 성공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
흥, 하고 코웃음 치는 천기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략은 성공적인 편이었다.
삼악컴파의 배신은 무림에 큰 충격을 불렀다.
“오악검파가 분열했다!”
오악검파라 하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다음으로 이름이 알려진 정파연합이다.
한데 그 연합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배신하였으니, 그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현 무림에서 천하제일을 다투는 문파를 습격하다니, 간도 크군!”
“화산의 중턱의 검산목(劍山木)에 대해서 들었냐?
기룡이 기관을 설치해 두었다던데, 소문에 의하면 그 위력이 경천동지할 정도라고 하더군. 그 오악검파, 아니 삼악검파가 꼼짝도 하지 못했다고 하니 말이야.”
화산파의 전황은 무림으로 세세하게 알려졌다.
목격자가 한둘도 아니고, 화산파 내부에 하인이나 의원 등의 외부인도 들어와 있었으니 당연했다.
“검신이 화산으로 되돌아왔다더군!”
“삼악검파도 멍청하지…… 다른 곳도 아니고 검신의 사문을 건드리다니 말이야. 쯧쯧쯧!”
“일팔구로, 태산파검, 초예사태…… 삼악검파의 삼문주가 사망했다고 하네.”
“그러면 이제 그 삼문은 어떻게 되는 건가?”
“무림맹과 화산파, 그리고 형산파가 의견을 조율한 끝에 봉문을 결정했내 향후 백 년, 혹은 이백 년 정도는 강호 활동을 일체 금지하기로 한 모양이야.”
명문정파라 하여도 봉문은 치명적이다.
제자를 못 받는 건 아니나, 자유가 제한되어 강호 출두가 불가능한 문파에 입문할 리가 없다.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그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삼악검파의 생존자는 무림맹, 형산파의 인솔하에 사문으로 돌아가 은거하기로 결정됐다.
그러나 아직 사건이 일단락된 건 아니었다.
삼악검파의 배신은 정파, 아니 무림에 후폭풍을 가져왔다.
“요즘, 정파가 정말 옳은 것인지 의아하군.”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왜 그리 생각하지?”
“그 왜…… 얼마 전에 삼악검파 말일세.
중소 문파야 그렇다 쳐도, 구파일방이냐 오대세가 다음가는 정파연합이 산산이 조각나지 않았나.”
“그게 왜?”
“이보게, 잘 생각해 보게나. 이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하네.
명문정파가 정파 무림을 신뢰하지 못하고, 기어코 차별 대우 탓에 배신하지 않았는가.”
“어허, 큰일 날 소리! 오악검파의 수장인 화산파는 현 세대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여러 고수를 배출하고 성과를 이루었네.
삼악검파의 불신이란 건, 결국 열등감에 지나지 않아.”
“ 아니, 그 말은……”
삼악검파의 배신은 무림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배신의 시작점이었던 중소 문파는 이로 인해 힘을 등에 업었고, 한층 더 격렬해졌다.
암천회의 천기성과 천선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악소문을 일으켜서 선동하고, 불만을 이끌어 냈다.
“보았는가? 이것이 현 무림의 실태다!”
“오악검파조차 차별을 받으며, 신뢰하지 않는다!”
“검악만이 부패했다고 생각하면, 크냐큰 착각이다!”
당연하지만 정사 연합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암천회의 음모다.”
“내부에서부터 분열시키려는 선동이니, 주의할 것.”
“혁명과 개혁이라 부르짖지만, 합리화일 뿐이다!”
이런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허, 참.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쯤 되면 정사 연합에서 암천회로 갈아타야 하는 거 아니야? 정파의 전력이 또 감소하지 않았는가.”
“이봐, 암천회에 입회하지 않겠나? 이 잘못된 무림을 바로잡자고.”
“정사 연합? 암천회? 둘 다 관심없어.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든데 무슨……”
“자네처럼 무관심한 사람 탓에 세상은 바뀌지 않는 거야!”
“세상이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이봐, 나에게 은자 석 냥만 주면 내 친히 귀 닫고 들어 줄게.”
비난하는 사람, 무언가를 바꾸려는 사람, 반박하는 사람, 그리고 어떠한 관심도 없는 사람.
그 다양한 반응 속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은 암천회의 군사, 천기였다.
“계획대로 흘러가는군.”
언제나 그렇듯, 이 사태를 준비하고 일으킨 건 암천회였다.
“설사 정파의 심법으로 무공의 극의를 이루었다고 한들, 사람인 이상 마음에 틈이 있어 자격지심을 느끼거나, 남을 원망하거나 불만이 쌓이는 법이지.”
‘무서운 사람이다.’
칠성사병은 천기의 중얼거림을 듣고 몸서리쳤다.
‘구파일방, 오대세가, 오악검파. 모두 이 사람 앞에선 무의미하구나.
역사를 자랑하는 단체를 간단하게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다니…… 그야말로 암천의 군사다.’
천기가 정녕 무서운 건 사람의 마음, 특히 틈을 잘 파고 드는 점이었다.
지략도 지략이지만, 마음을 내다보는 능력 또한 귀신같아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주서천도 참으로 대단하지.’
가끔씩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보이는 천기지만, 그 천기조차 어찌해볼 수 없던 사람이 바로 검신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속을 뒤집고, 계획을 망가뜨렸다.
새삼 주서천도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자아, 그럼 …… 주서천도 나타났으니 슬슬 이 무림을 다시 전란으로 되돌려야겠구나.”
천기의 멈췄던 붓이 움직였다.
* * *
주서천은 요 며칠 동안 화산파에 머물며 무림맹과 서신을 주고 받고, 의견을 교환했다.
무림맹 상층부는 주서천의 북해 여정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 탐탁지 않아 했다가, 상천육좌의 북해궁주가 친히 도움을 주겠다는 말에 몹시 기뻐하였다.
금의상단에 안부 연락을 보내고, 그 외에는 실로 오랜만에 재회한 사부, 그리고 사형제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얼마 뒤, 무공 비급을 풀어 전력을 보강했던 암천회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움직였던 탓이었다.
“급보입니다.”
냉전이 끝났다.
“합비에 움직임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겐가?”
학송이 물었다.
무더운 날씨 탓인지, 아니면 불안한 마음인진 몰라도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곧바로 상궁 회의가 열렸다.
물론, 정보원 중 유령곡은 제외였다.
“암천회가 군을 각각 남과 북으로 진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속도가 보통이 아닙니다.”
“올 것이 왔군!”
조무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악검파가 분열하고, 화산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상황이니 움직일 수밖에요.”
심옥련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느껴졌다.
‘과연 목적의 성공이란 이 뜻이었나!’
무림맹.
“천기의 목적은 크게 셋이었을 것입니다.”
제갈상이 검지, 중지, 약지를 폈다.
“하나, 오악검파의 전력 감소입니다.”
암천회에 대항할 전력 자체가 줄어들었다.
“둘, 명문정파의 배신으로 인한 정파의 불신 촉진입니다.
사기 하강뿐만 아니라, 입회의 제안에 고민하던 이들을 사로잡을 수 있지요.”
“끄응.”
장로진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최근 그 일로 여러모로 골치였다.
삼악검파의 배신의 파장이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마지막은 무엇이오?”
팽군평이 물었다.
“검신, 주서천의 위치 파악 및 유도입니다.”
“주서천?”
“예.”
제갈상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얼마 전, 암천회가 신원 미상의 절정 고수 삼십을 투입하여 삼악검파의 소란을 틈타 그의 스승, 소유검 유정목을 노렸다고 합니다.”
제갈상은 주서천에게 전해 들은 바를 말해 주었다.
“암천회 입장에선 최대의 훼방꾼인 검신이 몇 개월 동안 나타나지 않자 그 사안이 몹시 거추장스러웠을 겁니다.”
상천육좌, 특히나 주서천은 암천회가 하는 일마다 족족 방해한 불구대천의 원수다.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 스승을 건드려 억지로 불러낸 건가?”
“예.”
주서천의 스승 사랑은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다.
검신이 된 이후로도 천하제일검은 유정목이라거나, 혹은 상천 위에 소유검을 올려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암천회가 유정목을 노린 건 당연했다.
도리어 지금까지 안 노린 것이 의아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어쨌거나, 주서천을 부르는 방법 중에서 유정목을 건드리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또 없었다.
“아!”
황견이 무언가 눈치챈 듯 감탄사를 흘렸다.
“유도라는 건 그런 뜻이었구려……”
혜노가 중얼거렸다.
“화산파로 불러들인 뒤, 북부와 남부를 동시에 공략하여 한쪽의 개입을 막기 위함이었나!”
“바로 그겁니다.”
암천회는 하는 일마다 주서천에게 방해를 받았다.
그래서 이번엔 개입 자체를 불허하기로 마음먹고 수를 썼다.
바로 북부와 남부의 동시 공략이 다.
“상식적으로, 지리상 북부에 가까우니 북부에 참전하는 것이 맞지요. 하나 이 생각이 허점을 만듭니다.”
“북부는 미끼일 경우로군.”
주서천이 무력의 전략 그 자체라면, 천기는 지략의 전략 그 자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불확실, 혼란을 불러 들였다.
‘만약, 주서천을 북부에서 묶으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 의문 탓에 많은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둘 다 선택할 수는 없는 거요?”
“하아.”
팽군평의 물음에 황견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이봐 검신이 신선에 올라 구름을 타거나, 혹은 축지법을 쓰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해.
지금 막 진군하기 시작하긴 했지만, 며칠만 지나도 거리가 상당히 벌어질 텐데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그 말대로입니다. 무엇보다 합비의 아래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성가신 이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림도!”
중원을 북과 남으로 나누는 최대의 강이었다.
“말 나온 김에 묻는 것이지만, 해남검파는 어찌 된 것이지요?”
경인사태가 물었다.
“이틀 전에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마 때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이니, 남부 전선에 힘을 줄 것입니다.”
눈엣가시이자 골치였던 수림도도 해결됐다.
그러니 더더욱 고민이었다.
“검신을 북부로 보내고, 패신군을 남부로 보내면 되지 않은가!”
팽군평이 ‘이거다.’ 라는 표정으로 외쳤다.
“애석하게도……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사도천주가 패신군은 특수 임무를 수행하느라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다고 합니다.”
“끄응! 뭐 이렇게 답답한지!”
팽군평이 가슴을 두드리며 짜증 냈다.
장로진 역시 비슷한 심정인지 침음을 흘렸다.
“결국 선택은 검신의 몫이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명심해야 할 거요. 괜히 주저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수 있소.”
우백의 말에 장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서천은 고민했다.
‘북부냐, 남부냐.’
북부엔 북해빙궁이 도움을 줄 것이고, 남부엔 해남검파가 있다.
지원병력만 보자면 문제는 없다.
상천의 경우에도 무림맹주와 사도천주가 있었다.
정파가 중심인 북부의 경우엔 수가 적은 대신 고수가 많다.
사파가중심인 남부는 수가 많은 대신 고수가 적다.
‘서로 장단점이 있으니 더 어렵구나.’
언제까지고 생각만 할 순 없었다.
전황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내가 갈 곳은……’
한여름인 여덟 번째 달도 곧 끝나간다.
암천회의 전(前) 병력은 약 구천이었다.
그러나 요 몇 개월 동안 무공비급을 풀거나, 혹은 중소문파를 위주로 배신을 부추겨 전력을 보강했다.
그 숫자가 무려 육천여 명이었다.
그들의 군세는 순식간에 만 오천이 됐다.
암천회는 대담하게도 만 오천 중 만 사천을 각각 칠천씩 나누어 북부와 남부로 진군시켰다.
북은 하남, 남은 강서로 향했다.
목적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정사 연합군의 본거지였다.
다행히도 정사 연합 역시 암천회의 결전에 대비하여 편성을 끝낸 상태였다.
연합군의 병력은 각자 경계선에 자리 잡았다.
합비, 아니, 안휘의 동북부 부근엔 하북팽가, 소림사, 화산파, 종남파, 사천당가, 모용세가가 집결했다.
장강 유역 너머 남부엔 남궁세가, 제갈세가, 무당파, 점창파, 아미파, 청성파가 모였다.
무림맹과 사도천, 그리고 금의검문은 북부와 남부로 골고루 흩어져서 포진됐다.
“저 왈패 같은 놈들이랑 합을 맞추라는 말이오?”
“저 위선자 놈들이랑 합을 맞추라는 말이냐?”
정사 연합군이 서로 뒤섞이다 보니 불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요에 의해서 손을 잡았다곤 하지만, 수백 년 이상 묵은 원한은 그리 간단히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닙니다.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떠올려 주십시오.”
“머리가 왜 목 위에 있는지 잘 생각해라.”
그렇지 않아도 삼악검파 사태로 불안한 상황이다.
지도부는 내부의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 * *
북부.
전선 북부에 약 오천의 병력이 집결했다.
본래라면 팔천여 명이었어야 하나, 북악인 항산파에서 숭산파와 태산파가 제외된 탓에 그 수가 줄었다.
게다가 화산파의 경우엔 얼마 전 사태로 부상자가 속출하였기에 동원된 전력 수가 그리 많진 않았다.
북부 전선장이자 천군사, 제갈상이 보고서를 재확인했다.
무림맹 千 금의검문 千 개방 千 서문세가 六百 팽가 五百 당가 二百 화산파 百 소림사 三百 종남파 三百
수적으로는 무림맹과 금의검문, 개방도가 제일이었다.
무림맹은 본대 중 일부이고, 개방도야 워낙 많으니 그렇다 쳐도 금의검문의 지원이 생각보다 많았다.
비록 그들의 신뢰는 돈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고용주가 사람을 잘 다룬다는 상왕이니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본 가에서 육백여 명이나 데려왔으니, 잘 운용해야 할 것이다. 천군사.”
서문이진이 오판을 내리면 각오하라는 듯 쏘아붙였다.
“예의를 지키시오, 뇌승도.”
종남파의 은하노사가 탐탁지 않은 듯이 지적했다.
“비록 그가 어릴지 몰라도, 무림맹의 군사님이오.”
“그래. 무림맹의 군사일 뿐이지.”
자신은 사도천 소속이니 상관없다는 어조였다.
“전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갈상이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은하노사는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으나, 불협화음을 만들지 말라는 당부를 떠올리고 그만두었다.
그래도 서문이진은 사도천주에게 들은 것이 있어서 그런지 더 이상 비꼬거나, 도발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라면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데, 서문세가라면 절강에 있지 않냐?”
훤칠한 체구에 아무렇게나 자랐으나 지저분하지 않은 머리카락, 코 부근에 가로로 그어진 흉터.
겉모습으론 삼십 대 초중반이나, 실제 나이는 사십 대 중반에 이른다는 하북팽가의 가주, 팽자호(彭姿岵)가 물었다.
“서문세가는 전부터 이 근방에 주둔하여 반역자의 진압을 도왔다고는 들었지만…… 굳이 남부를 내버려두고 뻥 돌아와서 북부를 도와줄 필요가 있는지 의아하군.”
의심이나 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해서였다.
장강의 주인, 적림십육채가 암천회와 손을 잡은 이후로 강북으로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됐다.
목숨을 걸고 건너거나, 혹은 빙 돌아가야 했다.
절강의 경우엔 그래도 바로 앞이 바다여서 금의상단이나, 그 외의 선박을 이용하면 강소나 산동을 통해서 북부 지방으로 갈 수 있었다.
“정사가 아무리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다곤 하지만, 그것들과는 죽어도 함께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것들?”
“남궁세가다.”
“아아, 과연.”
안휘의 남궁세가, 절강의 서문세가.
각각 정파와 사파를 대표하는 세가이다 보니 성향이 정반대인데다가, 지리적으로도 가까워 충돌이 많았다.
특히나 서문이진은 남궁세가 현 가주의 동생, 남궁재영과는 앙숙으로 이름 높았다.
칠검전쟁 때만 해도 죽일 듯이 싸워 온 사이다.
그동안 쌓인 게 많다보니 아무리 명령이라 하지만 연합군에서 등을 맞대고 싸울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사도천주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어, 괜히 사고가 날 것을 우려하여 서문세가를 북부로 보냈었다.
과거에 정파의 소란을 진압하려고 보냈던 것인데, 다행히도 오늘날 이렇게 도움이 됐다.
“그나저나, 팽가의 가주를 볼 줄이야.”
서문이진이 팽자호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하북팽가는 장강 아래론 잘 내려오지 않는다.
과거, 마교를 배신하고 탈주한 남양호법을 척살하러 따라온 사건처럼 북부의 경계를 위해서였다.
이렇다 보니 강남에 포진된 사파 특성상 팽가의 인물, 그것도 주요인물은 특히 보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시급한 때라는 거지.”
“하기야 그 검신과 북부에서 합류하기 전까진 무방비하니, 하북의 호왕(岵王)이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서문이진이 화산파의 대표, 위지결을 보고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검신이 정파의 무력을 대표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도 모처럼 걱정해 주신 것 같으니,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소림사의 현 방장, 홍진이 중얼거렸다.
“그러니 부디 양측 다 그만 진정해주시길 바랍니다.”
홍진이 손목에 감은 염주 알을 굴리며 말했다.
만약, 그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화산파를 제외한 이들이 나서서 불같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천기의 작전 중에 주서천 외에는 별로 신경 쓸것이 없다는 의중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던 탓이다.
아직까지도 그들의 감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휴우, 벌써부터 삐걱거리는구나.’
제갈상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남부 전선.
위치상으론 강서가 코앞인 합비의 남부 지방이다.
사파의 세력권인 남부답게 사도천이 대다수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남부 연합군의 수는 개미 떼를 방불케 했다.
대충 세어 봐도 약 만에 이르렀다.
지휘 막사 안.
남부 전선의 모사, 제갈수란이 보고서를 재확인했다.
사도천 五千五百 묘가검문 千 소음문 六百 사독문 千 남궁세가 二百 점창파 二百 무당파 五百 아미파 五百 청성파 五百
북부 전선과는 전력의 수부터가 달랐다.
괜히 물량의 사파라고 불리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사도천 본대 소속만 오천 오백 명이었다.
묘가검문의 경우, 과거에 폭섬도문과의 분쟁에서 승전한 뒤 급속도로 이름이 높아진 덕에 잃었던 문도를 금세 보충할 수 있었다.
또한, 사문반란 이후로 사도천주의 신뢰를 얻게 되면서 자연스레 영향력이 커진 것도 한 이유였다.
그 덕에 지금 천여 명에 이르는 문도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천의 주축이자 명문인 사문은 대체적으로 이러한 연유로 천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힘을 얻었다.
하나, 전(前) 암천회였던 소음문만은 달랐다.
전대 문주이자 상천이었던 음신을 잃게 되면서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비주류의 무공인 음공으로 버텼던 것도 상천 덕분이었다.
지금은 사도천주의 비호 아래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 수준이었다.
어쨌거나, 정파와 달리 사문반란 이후 배신자가 없다시피한 사파는 전력의 수가 많이 줄지 않았다.
“모사님.”
막사를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창룡 대협.”
창룡, 남궁선유였다.
“남부의 암천군, 칠천여 명이 장강을 넘었다는 소식입니다.”
남궁선유의 표정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이 전선이 결전이 되진 않겠지만, 남궁세가의 운명이 달려 있어서였다.
남궁세가는 전 무림맹주, 흑역사이자 천하제일악인인 검악으로 인해 가세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남궁세가 또한 협박의 피해자라 알려져 있다 할지라도 무림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기에, 어떻게든 일정한 공적을 내세워야 하는 입장이었다.
만약 별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결국 남궁위무의 그림자에 가려진 이들 답다며 조롱당할 것이다.
끄덕.
모사미봉, 제갈수란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손에 쥔 보고서를 정리한 뒤, 막사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경비 중이던 사도천의 무사가 경례했다.
제갈수란은 품 안에 쥔 보고서를 고운 손가락으로 북북 찢은 뒤, 막사 근처의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혹시라도 유출될까 소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곤 등을 돌려 눈앞의 광경에 작게 감탄했다.
‘……대단해.’
사도천은 무림맹과 다르게 자유로운 분위기다.
사파인답게 정파의 질서나 규율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대부분이 난잡하고 소란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사파인만 거의 팔천에 이르는데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경박하기는커녕 진중했다.
숨 하나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야말로 폭풍 전의 고요라는 말이 걸맞은 광경이었다.
암천군과의 충돌을 코앞에 둔 탓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부 전선의 분위기 는 소란스러웠다.
제갈수란의 힘만으론 통제하기가 힘들었었다.
그러냐 며칠 전, 사도천주의 특수임무로 참전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한 사람이 등장하면서 바뀌었다.
정도, 사도, 마도도 아닌 패도(覇迫).
패도의 절대고수는 등장만으로 주변을 압도했다.
‘패신군……’
일만에 이르는 남부 연합군의 선봉장.
상천육좌 중에서도 비밀에 싸인 상천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