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퍽!
선녀가 머리를 감았다던 연못이 짓밟혔다.
“다른 것들은 무시한다! 유정목을 잡아라!”
약 서른에 이르는 무리가 독단 행동에 나섰다.
옷차림은 삼악검파의 도복이었으나, 무언가가 이상했다.
우선 목표여야 할 정휘련을 무시한 것이었다.
“유정목!”
파바밧!
삼악검파의 제자들에게서 나오지 말아야 할 것이 나왔다.
소맷자락이 부풀어 오르더니 암기가 나왔다.
“흡.”
심옥련과 합을 맞추던 유정목이 흠칫 놀랐다.
‘암기?’
삼악검파가 무림맹, 나아가 정파를 배신한 건 문파로서의 열등감이다.
아무리 막장이라 하지만 그 근원이 무공, 그것도 검이라는 자존심이다보니 암기를 택할 만큼 미치진 않았다.
“하압!”
유정목은 혹시라도 암기가 곁의 심옥련에게 날아가지 않도록, 검을 재빠르게 움직여 암기를 쳐냈다.
‘내 이름을 불렀다.’
정휘련도 심옥련도 아니었다.
무공은 물론이요 머리까지 비상한 유정목답게 판단력 이 빨랐다.
“장문인을 보호해라!”
유정목이 외치며 초예사태와 심옥련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예상대로 정체불명의 무리가 따라왔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다소 거친 방법을 써도 상관없다!”
삼십인 중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외쳤다.
“유정목을 잡아!”
“크윽!”
유정목은 대화가 소용없다는 걸 깨닫곤, 상궁에서 물러나며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장문인이 휘말릴 것을 우려한 행동이었다.
혹시라도 함정이라면 어쩌나 싶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들은 정휘련에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딜!”
불명인이 꼬리처럼 달라붙어 검을 쭉 뻗었다.
쐐애액!
정면에서부터 검을 찔러 들어왔다.
‘으음?’
그러나 갑작스레 방향을 틀었다.
최초에 노리던 흉부가 아닌 손목이었다.
‘살의가 없다.’
유정목은 의아하면서 손목을 노린 검을 쳐냈다.
째앵!
“타아압!”
검을 쳐내자마자 연이은 공격이 들어왔다.
정면의 불명인 옆으로 각각 두 명씩 달려들었다.
좌우 상단에서부터 검이 수직선을 그려 내고, 바로 아래에서 옆구리를 노리고 쏘아졌다.
‘이건……’
유정목의 의아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순간에서도 적의 의도가 무엇인지 추측했다.
“훗!”
크거나 늘어지지 않은 기합.
침착하게 가라앉은 숨을 내뱉곤, 검초를 상하좌우로 넓게 펼친다.
꽃봉오리처럼 오므린 내공은 이윽고 공력으로 전환되며, 만개하듯이 매화를 피며 장막을 이루었다.
채채챙!
“말도 안 돼!”
정면의 무리가 경악했다.
아무리 살심을 배제했다고 한들, 움직일 수 없도록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퇴보하는 도중에 전부 다 막아 냈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칠절매화검(七絶梅花劍)!”
누군가가 유정목의 검초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만화성막(萬花成幕)인가!”
“으드득!”
이십사수매화검법은 매화검수에게만 주어진다.
주서천이야 워낙 특이하다 보니 예외인 경우지만, 보통은 매화검수나 예검수, 혹은 은퇴한 검수에게만 허락됐다.
유정목은 건강 탓에 매화검수가 되지 못해 전수를 받지 못했고, 지병이 나았을 땐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택한 것이 이 칠절매화검이었다.
“합!”
유정목은 문파는 물론이고 무림에서도 성격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별호도 부드럽고, 유려하며 언제나 입에 머금은 자애로운 미소 덕에 소유검이라 붙었다.
하나 그렇다고 연약한 건 아니다.
이 강호에서 살인을 주저할 정도의 애송이는 아니며, 이상주의자는 더더욱 아니다.
“크아악!”
“아악!”
여섯 명에 이르는 불명인이 검에 베여 쓰러졌다.
“큭!”
이십 하고도 네 명이 혀를 차며 주춤거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포위하는 건 잊지 않았다.
“과연.”
유정목이 포위한 이들을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의 정체는 암천회인가?”
“누가 주서천 사부 아니랄까 봐 눈치 한번 빠르구나.”
불명인, 아니 암천회의 칠성사병이 짜증을 냈다.
“그대들이 정녕 삼악검파 출신이었다면 장문인을 코앞에 두고 나를 따라올 리 없네.”
“겨우 그 이유만으로 답에 도달한건가?”
“이 보잘것없는 중년의 무인에게 뭐가 있다고 끝까지 따라오겠는가.
검초에 살의가 깃들어 있지 않은 걸 보아하니 날 어디론가 데려갈 생각인가 본데…… 답은 뻔하지.
나에 대한 원한이 없는 것이라면, 제자인 서천이를 협박하기 위해 인질로 쓸 생각이겠구나.”
유정목은 화산파에서 장문인만큼 유명한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검신의 스승이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그 검신이 평소에 유정목에 대한 찬양을 끊이지 않고 하다 보니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좋으니 이야기가 빠르구나, 유정목.”
지휘관이 손을 들자 칠성사병이 포위망을 좁혔다.
‘과연, 암천회로구나. 하나하나가 절정의 고수다.’
유정목은 겉으론 평온한 표정이었으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여러모로 긴장한 상태였다.
최소 경지가 절정이고, 나머진 최절정이다.
화경의 고수는 보이지 않았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심지어, 방금 전에 초예사태와 격전을 이룬 후였다.
“쉽지는 않을 걸세.”
유정목이 검을 세우자, 강기가 맺혔다.
“검강!”
“화경의 고수였다니……”
칠성사병은 전장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
초예사태와의 격전에서 유정목이 검강을 쓰는 걸 보지 못했으니 경지도 몰랐다.
‘화경이라는 건 듣지 못했거늘……’
무엇보다, 유정목의 경지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초절정에서 최상승에 있다는 것만 알았다.
알려지기 좋아하는 무림 특성상, 보통 본인이 아니어도 사문의 제자가 무공의 극의를 이루면 사문의 이름이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알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유정목은 스스로 나서는 걸 딱히 좋아하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그렇지 않아도 검신의 사부라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서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랐다.
현 장문인인 정휘련은 동경하는 무인이자 우일문 다음으로 존경하는 주서천의 스승이 하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것이 바로 유정목의 경지가 알려지지 않은 연유였다.
“후우……”
유정목은 제자 덕에 지병 아닌 지병을 해결한 뒤, 마치 그동안의 답답함을 풀 듯 수련에 집중했다.
매화검수에 들지 못한 것도 사실상 지병 탓이지, 재능이나 실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건강 체조랍시고 내공 없이 스스로 절벽을 등반했던 양반이다.
무공의 수련도 노력 부분의 상식이 이상하게 결여되어서 누구나 다 혀를 내두를 만큼 독한 수련을 자행했다.
유명세 탓에 강호에 출두하지도 않고 끝없이 수련한 덕분인지 화경에 오를 수 있었다.
“주서천이 오기 전에 해결한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유정목을 데려가라!”
“천기님의 말씀을 명심해라!”
* * *
덜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손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과 처절하게 검을 교환했다.
수로 밀어붙이면서,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했다.
승산이 보였다.
화산파의 무명이 무색하게 보였다.
하나, 어떠한 사람의 등장으로 상황이 돌변했다.
“누, 누구라고……?”
매화 잎이 흩날린다.
날씨가 따스함에도 한겨울처럼 추웠다.
악몽이었다.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갑자기 날아오듯이 공중 위에 나타나더니만, 자색의 빛이 번쩍이는 순간 사형제들이 비명을 내지 르면서 쓰러졌다.
“상천육좌(上天六座).”
절대고수가 걸어왔다.
그 눈에는 어떠한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귀찮은 것을 보는 것 같았다.
“검신(劍神).”
분명 언덕 아래에 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마치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주서천.”
그 이름에 전장, 아니 화산이 요동쳤다.
“우……”
누군가의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고……
“우와아아아!”
곧 함성으로 바뀌었다.
“거, 검신?”
“주서천?”
화산파의 경우, 마치 완승을 거둔 것처럼 환희했으나 삼악검파는 그 반대였다.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해지거나, 혹은 얼어붙어서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말도 안 돼!”
“검신이 어째서!”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경악과 불신, 그리고 공포 등의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처럼 움직였다.
놀라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크, 큰일이다!’
‘어떡하지?’
주서천의 북해 행은 극비로 붙여졌으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특히나 암천회의 요주의 인물인 주서천이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 보니 이상함을 느꼈다.
행적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암천회는 검신이 자리를 비운 지금에야말로 화산파를 무너뜨릴 천재일우라며 꼬드겼다.
즉, 주서천은 존재만으로 억제력 그 자체라는 의미였다.
한데 그 억제력이자 공포의 상징이 전장에 나타났으니, 혼란을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최고의 원군이 도착했다!”
위지결이 이때다 싶어 진두지휘에 나섰다.
“화산의 검을 똑똑히 보여 줘라!”
“오오!”
방금 전만 해도 배나 되는 전력 차이에 지쳐 가던 화산파였다.
주서천의 등장만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위지결은 태산파검을 앞에 두고도 무시한 채, 목소리를 쩌렁쩌렁하게 외치면서 화산의 검수들을 움직였다.
“이, 이놈!”
눈앞에서 대놓고 무시당한 태산파검의 낯빛이 울긋불긋 해졌다.
이마예선 퍼런 핏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당장 달려들 기세였으나,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위지결을 쳐다보다가도 주서천이 신경 쓰이는지 힐끗힐끗 살펴봤다.
‘제이식.’
삼악검파의 후위, 주서천이 검을 높이 들었다.
‘화우선형!’
굳이 무형의 강기를 동원할 필요도 없다.
하단전에서부터 끌어 올린 자하진기를 넓게 퍼뜨렸다.
콰르릉!
고막이 찢어질 정도의 굉음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우렛소리가 들렸다.
검에서 쏟아진 대량의 자하진기는 부채꼴처럼 펴지면서 정면, 삼악검파의 후위대를 덮쳤다.
콰드드득!
자하검결이 지면을 훑고 지나갔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리고, 바위가 솟구쳤다.
“아아악!”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절대고수가 어찌하여 상천이라고 빗대어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어떻게든 막아 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검을 든 채로 몸이 날아가거나, 막지 않은 부위가 베였다.
“크, 크으윽!”
“쿨럭!”
자하의 폭풍에 내상을 입은 자도 속출했다.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쑥대밭이 됐다.
“위 장로님!”
주서천이 위지결을 부르며 바라봤다.
‘이만하면 됐다.’
위지결이 머리를 위아래로 느릿하게 흔들었다.
‘좋아!’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나, 사문이 곤란에 빠졌는데 못 본 척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만약에 도와주지 않을 경우, 유정목 성격상 어찌하여 외면했냐면서 화낼 것이다.
“뒤는 맡기겠습니다!”
주서천이 몸을 활등처럼 굽혔다.
그리고 다시 펴는 순간, 마치 튕겨나가는 것처럼 쏘아졌다.
전력을 낸 궁신탄영은 후폭풍까지 일으켰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 흩날린다.
“휴우!”
태산파검은 주서천이 떠나는 걸 보고 안도했다.
그러나 곧 그 얼굴은 자존심처럼 구겨졌다.
‘안도했다고?’
검신의 이름을 들은 순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감정이 곧 공포에서 파생됐다는 걸 깨달은 순간, 용암처럼 끓어오르던 감정이 폭발했다.
치욕이었다.
“이, 이, 이익!”
화가 너무 난 나머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또다시……!”
평생 동안 화산파를 넘기 위해서 노력했다.
어딜 가도 화산파에게 밀리는 취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악검파에 화산파가 먼저인 게 짜증 났다.
언젠가 넘어야 할 대상이며, 동시에 그들을 증오했다.
코를 납작하게 해 줄 것을 맹세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납작하게 해 주기는커녕 겁먹은 개새끼처럼 꼬리를 내린 채 숨죽였다.
검신에게 기다리라고 말하기는커녕 그 무위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으아아아악!”
가슴이 뜨거웠다.
심장이 쿵쿵 뛴다.
하복부, 단전이 감정에 반응하듯 성난 소처럼 날뛰었다.
태산파의 문주가 기어코 이성을 잃었다.
오악 위에 우뚝 솟아야 할 검강은 아래로 추락한 지 오래였다.
정순함은 온데간데 없고, 그 대신 질척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역류하듯 분출했다.
“무엇이 그리 이렇게까지 망가뜨렸나.”
위지결은 태산파검을 보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호승심이 아닌 열등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언제부터 고장 난지 모를 이 무림인가.”
* * *
서로를 마주 본 채 출발한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콰앙!
물질과 물질이 아니었다.
대자연의 힘을 무술의 극의로 승화시킨 기운이 충돌한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겹겹이 쌓인 대기층이 부서졌다.
충격파가 파도가 되어 주변을 훑었다.
“크읏!”
심옥련이 침음을 흘렸다.
유정목이 후퇴한 이후 결국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절매산엽검식이라는 상성의 검법과 더불어 주화입마로 폭주하기 시작한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죽어라!”
초예사태가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찔렀다.
‘이런!’
심옥련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에 지쳐 잠시 틈을 보인 게 문제였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피해만이라도 최소화하자며 몸을 기울이며 고통을 기다렸다.
째앵!
그러나 그 순간, 또 다른 검이 파고 들었다.
“장문인!”
“정휘련!”
정휘련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검에 실린 자줏빛 실 자락이 일렁였으나, 그 색은 한없이 옅었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하나, 정휘련은 약관도 되지 못한 아이다.
화경일 리가 없었다.
검신의 가르침과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고 한들,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화경에 오르지 못한다.
“최고가 되는 것이 그리 중요한가?”
어린 장문인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타올랐다.
“오랫동안 이어 온 신념을 내던지고, 남을 짓밟고, 문도를 대거 희생시켜야 할 정도로 중요하냐는 말이다.”
정휘련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비교란, 결국 행복의 끝이며 불행의 시작이다!”
“그 비교를 시작한 것은 이 무림이 아니더냐!”
초예사태가 피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무공이나 출신에 따라 우위를 매기고, 멋대로 누구보다 강하다, 약하다 등의 순위를 정하고.”
검을 쥔 손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행복까지 겨루며,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경쟁뿐인 사회를 만든 것은 잘난 무림인이지 않느냐!”
채애앵!
초예사태가 정휘련과 심옥련의 검을 힘껏 받아쳤다.
가공할 수준의 공력에 두 사람은 대경했다.
검에 실린 강기는 마치 분노와 같이 활활 타올랐고, 금속끼리 부딪치면서 만들어 낸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교와 뭐가 다르더냐!”
태어난 순간부터 경쟁이 약속됐다.
열심히 공부해 타인의 위에 오르라고 들었다.
남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고 들었다.
누군가를 넘어서서, 짓밟으라고 들었다.
이 정도의 행복으론 부족하다며, 더한 행복을 사로잡으라며 속삭였다.
“힘이 곧 전부라는 족속들과 뭐가 다르냐고!”
규율로 가득한 곳을 나가니 세상은 더한 곳이었다.
대화 없이 재능이나 출신만을 보고 판단했다.
“……주…다.”
비구니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입 바깥으로 피가 꿀렁꿀렁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지옥 아래에서 올라온 것처럼, 목소리는 고통과 절규로 가득했다.
피로 가득한 눈은 섬뜩했다.
“저주다……!”
툭툭걸을 때마다 핏줄이 터졌다.
관절 부분이 삐걱거렸다.
뼈가 부러지고 근맥이 뒤틀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새하얗게 질린 머리카락은 피와 땀으로 범벅이었다.
“무림을…… 저주하겠다……!”
“……”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압도당한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정휘련과 심옥련은 검을 내려놓았다.
압도당해 패배를 인정한 게 아니었다.
검을 들 필요가 없었다.
숨이 점차 꺼져 간다.
맥박도 낮아졌다.
눈과 입, 코에서 피란 피는 다 쏟아졌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여전했다.
약해지기는커녕, 더더욱 강렬하고 증오 어린 안광을 내뿜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