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앙!
“캬아아아악!”
샤만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주서천은 힘을 아낄 생각이 없었다.
딱히 지쳐 있는 것도 아니고 정찰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자하개벽으로 등껍질을 두드린 뒤, 팔을 뒤로 젖혔다가 재차 앞으로 쭉뻗으며 찌르기를 선사했다.
“크콰아아아아아아아!”
샤만의 엎어졌던 목이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목의 근육은 유연한지 후위로 잘만 돌아갔다.
등 위에 올라온 인간을 죽이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러나……
“ 머리는 본 녀가 맡으마.”
북해의 괴물, 냉악비가 콧등을 짓누르며 착지했다.
움푹 파인 눈덩이 안, 세로로 갈라진 동공에는 기회를 엿보는 감정이 묻어났다.
북해궁주의 무공, 빙백신장도 결국은 한빙공이다.
아무리 잘난들 만년빙정 앞에선 무의미.
샤만은 냉악비의 공격을 막아낸 뒤,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숙여라.”
냉악비의 손바닥이 샤만의 이마를 후려쳤다.
콰아앙!
짜악, 하고 뺨을 후려치는 느낌이 아니다.
철퇴로 머리를 그대로 내리찍는 듯한 모양새였다.
겨우 세운 머리가 다시 꺾이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제야 좀 보기가 편하구나, 설화의 지도자여.”
냉악비는 바보도, 하수도 아니다.
만년빙정을 빙한진기로 대적할 어리석은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상천육좌 정도 되는 절대고수가 되면 본질의 힘 외에도 순수한 힘을 끌어내는 재주는 간단하다.
그래서 일부러 빙한진기를 배제하고 장력(掌力)만으로 후려쳤다.
“……”
한편, 뒷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전설에서나 전해지는 신수였지만, 불쌍할 만큼 일방적으로 후려 맞고 있었다.
무인의 정점 상천육좌가 둘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여기에 내려올 필요가 있었을까……?’
북풍부대주, 다와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쿠웅.
결국, 용인지 현무인지 모를 샤만은 분노와 고통으로 가득 찬 울음소리만 내다가 무너져 내렸다.
샤만의 생명은 잔재가 되어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여전히 용인지 현무인지 모를 몸통이 잔존해 있었지만, 알맹이가 빈 껍데기뿐이었다.
얼음으로 된 조각상과 다름없었다.
살도, 피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날뛰던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 봤지만,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막마르가 정찰대원을 데리고 돌아와 보고했다.
혹시나 난리 통에 어디론가 빠져나가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끝내 찾진 못했다.
위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며 감시하던 무사들에게도 목격 증언은 없었다.
“만년빙정에 삼켜진 것 같구나.”
냉악비가 정면의 얼음 조각상을 살펴봤다.
전설 속의 북방흑룡처럼 시커멓던 몸도 이젠 색만 거무튀튀할 뿐, 손으로 문지르면 얼음이었다.
세로로 갈라져 섬뜩한 빛을 뿜던 동공도 마찬가지였다.
살의와 분노로 점철됐던 때가 무색하다.
살점을 찢어발길 송곳니조차도 툭치면 떨어질 것만 같은 고드름처럼 보였다.
만년빙정은 북해가 품은 모든 걸 흡수했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그리고 사람까지도.
“아쉽군.”
주서천이 빙상(氷像)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샤만에게 남해용문과의 관계, 그 외에도 주술 등에 대해서 물어볼 생각이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혹시 냉악비가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었다.
“사해의 용왕 말이더냐.”
북해빙궁은 다민족 세력이다.
중원의 문화가 섞여 있기도 하고, 신화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북해(北海)와 밀접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단연 알고 있다.
“설화의 주술사가 용의 후예라는 말은 듣지 못했느니 라.
하나, 예로부터 토속 신앙이 발달했으며 북해 주술의 집합지이지.
용으로 변해도 놀라울 건 없다.”
“용으로 변해도 놀라울 것이 없다, 고?”
주서천이 어이없다는 듯 냉악비를 쳐다봤다.
“북해궁주, 고건 그대만의 생각인것 같다만.”
주서천이 엄지로 등 뒤를 가리켰다.
북해빙궁 무리가 만년빙정 탓에 빙상에 차마 접근하진 못하고, 수군거리며 구경하는 모습이 보였다.
“보, 보고도 믿을 수 없군.”
“설화족의 주술이 기상천외한 건 알았지만……”
“눈보라를 일으키더니만, 현무로 변해?”
북해인 입장에서도 믿기 힘든 광경인 듯했다.
이 정도면 냉악비의 무반응이 놀라웠다.
“원한다면 뒷정리를 끝내고, 설화족의 포로에게 캐묻도록 하여라.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은가.”
냉악비의 시선 끝에 만년빙정이 보였다.
산산조각이 난 등껍질 위에 꽃처럼 피어 있었다.
“그 말대로다.”
이상 기후의 원인, 만년빙정이었다.
법보이자 대자연인 동시에 재앙이었다.
“상성을 생각하면 나보단 그대가 안성맞춤일 것이다.
본 녀가 고정할 것이니 파괴하도록 해라.”
냉악비는 노르나 샤만처럼 탐욕을 보이지 않았다.
힘에 대한 열망은커녕 꺼림칙한 기색이었다.
혹시나 욕심에 눈이 멀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으나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
* * *
북해의 종착점의 일도 이로써 끝났다.
만년빙정을 둘러싼 내전도 막을 내렸다.
누군가가 욕심에 배신한다거나, 혹은 눈속임으로 가짜를 준비하고 진짜를 숨기는 일은 없었다.
주서천과 냉악비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최대의 전력으로 만년빙정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박살 냈다.
지고의 법보에 속해서 상천육좌조차도 전력을 퍼부어 지치긴 했으나, 파괴에 성공했다.
또한, 문제의 이상 기후도 멈추었다.
만년빙정이 박살 나자마자 눈보라가 거짓말같이 멈추었다.
질리도록 보았던 먹구름이 걷히고, 몇 년 동안 제대로 본 적 없던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세! 만만세!”
“북해빙궁 만세!”
“북해궁주 만세!”
“검신, 주서천 만세!”
내전의 종료와 만년빙정의 파괴 소식이 북해 곳곳에 퍼졌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소문이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곳곳에서 칭찬이 쏟아졌다.
북해에 중원인의 이름이 알려지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교류가 없다시피 하니 사람들도 잘 몰랐다.
냉악비처럼 주변 정세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는 요직을 제외하면, 상천육좌조차도 별호만 아는 정도다.
“화산파? 중원 최고의 문파가 아닌가!”
“검신의 무공이 그리 대단하다고 하던데……”
“협객이지, 협객!”
북해를 도운 건 사실 상호 이득을 위한 일이었으나 일반인들이 이러한 속사정을 제대로 알 리 없었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북해인 입장네선 최악의 식량난을 해결해 준 영웅이나 마찬가지였다.
북해빙궁과 화산파, 그리고 냉악비와 주서천의 이름이 퍼지면서 찬양이 흘러나왔다.
북해인들은 오랜만에 바깥에 나와 물로 몸을 씻거나, 혹은 눈밭을 산책하며 즐겁게 뛰어놀았다.
여전히 추운 날씨이나 북해인 기준으론 따뜻해서 잔치까지 열렸다.
한편, 북해빙궁은 내전의 뒷정리에 집중했다.
사하와 설화는 지도자를 포함한 대전사, 상층부를 잃은 피해 탓에 곧바로 항복 의사를 밝혔다.
내전의 원인조차 사라졌는데 더 이상 싸울 이유도 없을 뿐더러, 여력도 닳아 없어져 존재하지 않았다.
북해빙궁은 이에 항복 의사를 받아들였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을 내밀고 평화 협정을 맺었다.
“포로는 어떻게 할까요?”
“그야 대가를 지불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이라도 받으라는 거요?”
“돈보다는 먹을 것이 낫소.”
“반대하오. 사하와 설화는 본 궁보다 상황이 좋지 않소. 특히나 설화는 내전으로 대부분의 전사를 잃어, 사냥에도 차질이 생겼소.
만약 먹을 것을 달라고 한다면 이성을 잃고 덤벼들 것이요.”
“그 말에 동의하는 바요. 학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외다.
북해의 여러부족이 빙궁을 비난할 겁니다.”
북해빙궁의 입장에선 북해의 정세도 살펴야만 했다.
고민한 끝에 식량을 요구하는 건 과한 처사라는 결과가 나와 빚의 형태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북해빙궁은 끝까지 적의를 버리지 못해 저항한 주요 인물을 제외하고, 억류한 포로들을 풀어 주었다.
빙궁의 주민을 먹여 살리기도 바쁜데 포로를 오랫동안 데리고 있는 건 손해인지라 처리가 빨랐다.
참고로 주서천은 포로를 풀기 전, 설화족 포로를 찾아가 샤만의 힘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용문(龍文) 입니다.”
설화족 포로 중에 샤만을 보좌하던 이가 있었다.
“용문?”
“그, 그렇사옵니다. 고대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주술이옵니다.”
포로는 두려워하면서도 또박또박 말했다.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래전부터 먹을 것이 귀한 곳에서 자라 온 저희는 위대한 지도자, 주술사의 기도에 의지하였습니다.
역대 지도자 중에선 용으로 승화하여, 눈보라를 자유자재로 다스려 먹잇감을 쉬이 사냥할 수 있도록 해주신 분도 계셨지요.
그분이 남기신 주술이 용문이옵니다.”
“과연.”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용의 힘을 참조하여 특별한 주술을 창조할 수는 있었다.
남해용문 역시 확실친 않지만 용의 힘을 본떠서 무공을 만들었다.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다만, 이로 인해 어떠한 가능성이 생겨났다.
‘사해용왕이란 사실, 인간을 말하는 게 아닐까?’
남해의 용궁의 정체는 수중 동굴이었다.
용왕의 힘은 수공이자 무공이었다.
북해의 용궁은 존재하지 않았지 만, 그 힘은 주술로 전해지고 있었다.
주서천은 혹시나 사해용왕이 과거에 인간이었으나, 신에 준하는 업적으로 신화가 된 게 아닐까 싶었다.
‘혹시, 그렇다면…… 동해용왕과 서해용왕도……?’
확실치는 않으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극의가 화경, 그 위를 넘보려면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만약 그것이 인간을 포기하고 용으로 승화하는 것이라면……”
주서천은 포로가 앞에 있는 것도 잊은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일각이 흐른 뒤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혹시, 주술에 대한 문헌을 볼 수 있나?”
“그, 그게……”
포로가 겁먹은 표정으로 주저했다.
부족의 힘을 밝히는 것을 꺼린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강했다.
“괜찮다. 화내지 않을 테니 말해봐라.”
“용문에 대해 아는 건, 샤만 님뿐이었습니다……”
“허!”
주서천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얼굴에선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후계를 들이지 않은 건가?”
“아, 아닙니다.
출전하지 않았을뿐, 후계는 부족의 보금자리에 계십니다.
다만 아직 실력이 부족하신지라, 고위의 주술에 속한 용문은 아마도……”
“그런 건가.”
주서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이지 아쉽군.’
남만의 자문주술도 익혔다.
용후와 연관된 북해의 주술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북해용왕이라는 힘의 비밀이 영영 밝혀지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북해 주술의 일 인자인 샤만조차도 용문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으니, 전수하지 않은 건 당연하지.’
최후에 본 모습은 완벽한 용이 아니었다.
애초에 용으로 승화했다면 이승에 있을 수 없다.
여의주를 입에 물고 바다나 하늘로 사라졌을 것이다.
무림인으로 치자면 신선의 경지다.
만약 완벽하게 구사했다면 그리 쉽게 당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용후로 대화가 불가능했다.’
용후는 사자후처럼 적을 압도하기 위한 음공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용의 목소리이자, 대화 수단이다.
샤만이 정말로 용이 됐다면, 대화가 성립됐어야 한다.
그 말인 즉슨 불완전했다는 의미였다.
주서천은 수긍하는 한편, 여전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 포로에게 몇 가지 물은 뒤 보내 주었다.
사흘 뒤.
북해빙궁은 도움을 준 주서천을 영웅 취급하며 대접하려 했지만, 정작 장본인은 한사코 거절했다.
북해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주서천은 떠나기 전날 냉악비와 만나 이야기했다.
“검신이여, 빙궁의 지도자로서 그대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는 바이다.
또한, 약조대로 내전의 뒷정리가 끝나는 대로 전력을 이끌고 연합군에 합류하도록 하겠다.”
냉악비가 왼 손바닥에 주먹을 맞대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녀가 먼저 인사해 오자 주서천도 놀랐다.
최소 육십 세 이상, 강호에서도 대선배이며 빙궁의 지도자가 허리를 숙였다.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북해궁주.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물론이다.”
“도대체 몇 살이지?”
“올해로 희수(喜壽 : 77세)다.”
“희수?”
주서천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냉악비가 최소 육십인 건 알았지먄 설마하니 일흔일곱 살일 줄은몰랐다.
생각보다 더 많았다.
“어떻게 그 모습에 희수인 거지?”
냉악비의 외관은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이에 비해 젊어도 너무 젊었다.
권동제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했다.
“북해의 무공의 특징인 것도 있으나, 본 녀의 경우가 조금 특이한 경우니라. 심상구현 때문이다.”
“심상구현이라면 …… 그 얼어붙는 힘 말인가?”
“그렇다.”
냉악비가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본 녀는 극의를 뛰어넘은 순간, 절대적인 힘을 얻는 동시에 몸과 마음도 얼어붙었다.”
“마음이 얼어붙어?”
주서천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냉악비의 뒤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다, 검신이여.
본 녀는 오욕칠정을 비롯한 ‘감정’이란 것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느니라.”
“……”
주서천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냉악비의 말에 유령곡이 저절로 떠올랐다.
‘심살(心殺)?’
마음이 얼어붙는 것이지만 결과가 유령곡의 심살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령은 마음, 즉 사고방식 자체가 결여되는 것이며 그녀는 감정만 배제됐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로 유사했다.
“잠깐만…… 마음이 얼어붙은 것이라면, 심상을 구현하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나?”
심상구현이란, 이름 그대로 마음의 형태를 물리적인 힘으로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공의 경지도 경지지만 사실상 중요한 건 마음이었다.
마음, 곧 정신이나 사상이 붕괴되면 영향을 끼쳐 문제가 생긴다.
권동제가 최후에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벗어난 것이 그 증거였다.
“그리 깊게 생각할 것 없다.
마음이 얼어붙었기에 이 힘을 손에 넣은 것이라고 생각해라.”
“이해했다.”
주서천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心狀)이 냉정심(冷靜心)의 심화라 한다면, 그것만으로 심상구현이란 조건을 성립하는 건가…… 다만, 그러면 이후 깨달음을 얻는 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 건가?”
도약이란 곧 깨달음이다.
무학의 극의인 화경, 그리고 한계를 초월한 현경 역시 그러하였다.
이 앞에 어떠한 것이 펼쳐지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깨달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우문(愚問)이로군.
그 앞은 사람의 사고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이거늘, 어찌하여 인계(人界)의 상식에 한해서 물으려 하는가.”
“……과연.”
주서천이 작게 감탄했다.
“계속해서 이야기하자면, 본 녀의 모습은 심상구현으로 인해 ‘노화’가 ‘얼어붙게’ 된 결과이다.”
“허, 도대체 언제 화경, 그리고 현경을 이룬 거지?”
냉악비는 반로환동을 부정했다.
그말은 즉, 저 모습에서 무공의 극의를 넘어선 경지를 이룩한 뜻이다.
이십 대의 반절도 되지 않은 나이에 상천이 된 주서천이 할 말은 아니지만, 사실 그 속사정에는 회귀라는 특수한 경우가 있으니 예외였다.
“설명이 부족했던 것에 사과하마. 북해의 무공, 빙한공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야겠구나.”
주서천은 냉악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람의 체온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질 경우, 인체는 떨림이나 근육운동 등을 통해서 어떻게든 체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마저 실패하게 되면 힘을 보존하기 위해 신체 기능을 끄거나, 혹은 움직임을 최소화하지.
빙한공에도 이러한 특징이 있다.”
“귀식대법?”
“같은 원리다.”
유령, 아니 자객의 기초 기술인 귀식대법은 호흡을 멈춘 것처럼 늦추고, 심장의 움직임 역시 줄인다.
“아!”
주서천이 무언가 깨달은 듯 무릎을 탁쳤다.
“젊음의 비밀은 신체 시간 때문이었나!”
“정답이다.”
소령이 외관과 다르게 나이가 많은건, 귀식대법의 특성 탓에 신체 시간이 남들보다 느리게 흘러서다.
북해인 역시 이와 같은 특징 탓에 성장의 속도가 이상할 정도로 느렸다.
‘느리게 흐르는 신체 시간, 상위의 경지…… 그런 거였나.’
북해인의 노화는 늦다.
고수는 더더욱 늦다.
환골탈태를 거치면 십 년 이상 젊어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요소를 종합해 보니 의문이 시원스레 풀렸다.
“불로불사라도 노린 건가? 유감이겠군.”
“순수하게 궁금했을 뿐이니 상관없다.”
주서천은 냉악비의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말은 저리 해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령이 저절로 떠오르면서 동정심이 피어올랐다.
“검신이여, 동정할 필요는 없다.”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눈동자에 주서천이 맺혔다.
눈동자 속의 주서천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한다.
“……감정이 없는 것 치곤, 타인의 심정을 잘 헤아리는군그래.”
“사상이나 성격, 목소리나 어투.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을 상정하에 계산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니라.
또한 본 녀는 감정이 제 기능을 못한다고 한 것이지, ‘없다’ 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남들에 비해 감정이 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빠를 것이다.
기쁨이나 노여움, 슬픔이나 즐거움이나…… 그 외에도 사랑이나 증오심, 욕구는 안 보일 정도로 극히 적다. 또한 그걸 굳이 이해할 생각도 없다.
설명하면 그리 되겠군.”
“복잡하군.”
“사람의 마음이란 게 간단하면서도 복잡하지.”
냉악비가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억지로 올렸다.
“요컨대, 이성적인 부분이 최우선이며 감정적인 부분은 얼어붙어서 잘 느끼지도 못할뿐더러, 후 순위라는 거다. 그러니 본 녀에게 감정이란 건 불필요한 것일 뿐이니, 불쌍하게 여길 건 없다.”
후순위 정도가 아니다.
인식하는 경우 자체가 몇 없었다.
감정이라는 것에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굳이 되찾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심상구현이 무너지고, 힘을 잃을 걱정도 없었다.
두려움이나 욕심이 없으니까.
“그런가……”
주서천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흐응, 반응이 조금 이해가 안 가는군.”
냉악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 녀를 사랑하거나, 혹은 감성이 풍부하여 보이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만…… 실망인가?”
“부정은 안 하마.”
주서천이 쓰게 웃었다.
“북해궁주여, 몇 가지 더 물어봐도 괜찮겠나?”
“얼마든지.”
“만약, 만약에…… 마음이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없어졌다면 낫게 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나?”
“흐음.”
냉악비가 잠시 고민했다.
그리 길진 않았다.
“검신이여. 중원에서는 물건을 고칠 경우, 낫는다고 표현하나?”
북해궁주, 냉악비는 새삼스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반문했다.
이튿날.
북해빙궁은 도움을 준 중원인을 성대하게 배웅해 주었다.
주서천만이 아니라 낙소월의 이름도 알려졌다.
소령의 경우, 안 보이는 곳에서 활약한 데다가 눈에 띄지 않게 지내다 보니 존재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다.
냉악비 등의 고수들은 눈치챈듯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은공,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만…… 혹시나 저희가 무슨 결례라도 저지른 것인지요.”
안내인, 하와르가 조심스레 물었다.
북해의 내전 및 문제 해결 후 공식적으로 영웅이자 은인이 된 주서천이었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고향에 혹시나 무슨 일이 있진 않았을까 싶어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주서천은 하와르가 괜한 오해하지 않도록 답했다.
하와르는 주서천이 자신을 배려하여 거짓말을 한 것을 눈치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사형, 무슨 일 있으신가요?”
하와르가 눈치했는데 낙소월이 모를 리 없었다.
귀향길 도중, 따로 있을 때 물었다.
“손에 희망을 쥐었는데, 놓쳐 버렸다고 해야 할까…… 여차여차해서 말이야.”
“아……”
낙소월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쉽네요.”
낙소월은 소령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어딘가 모르게 안타까워 보였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더라면, 실망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 않아요!”
주서천이 씁쓸한 듯 중얼거리자, 낙소월이 격정적인 목소리를 냈다.
“낙 사매?”
주서천이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언성을 높여서 죄송해요, 사형.”
낙소월 스스로도 놀란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방금 전의 외침에 이어서 말을 계속했다.
“확실히,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실망도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떤일이 이루어지도록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곧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걸요.”
그녀는 머리 위의 손을 옮겨 소령을 품에 안았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분명 반드시 방법이 있을 거예요.
가능성을 버리지 말아 주세요.”
낙소월은 조금 낯 뜨거운 듯, 뺨을 붉히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똑바로 마주 보면서 올곧고 깨끗한 눈동자를 보여 주었다.
“그래, 그 말대로야.”
주서천은 낙소월의 말을 곱씹다가 이내 웃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건, 성공할 가능성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그럴 순 없지.”
상천육좌라고 신은 아니다.
하늘로 빗대어 말하는 현경의 경지이나, 결코 절대적이지는 않다.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머리를 들어 위를 올려다본다.
끝없이 내리던 눈이 멎었다.
새카맣게 끼었던 먹구름도 없었다.
“아……”
사형제는 무심코 감탄사를 흘렸다.
극광(極光)이었다.
대체적으로 녹색에 다채로운 빛깔이 낀 장막이 파도처럼 고요하게 일렁이며 장관을 만들어 냈다.
태양이 동산 너머로 막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선인 새벽빛을 보는 듯했다.
북해인은 빛의 장막을 보곤 신의 영혼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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