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四章 (219/254)

동산 분지.

“후퇴! 후퇴하라!”

빙곡에서부터 서산의 함성이 전해진다.

옆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생생하게 메아리쳤다.

“도울 필요는 없나.”

주서천이 서산을 힐끗 쳐다보고는 중얼거렸다.

“후퇴! 후퇴하라아아!”

또 같은 말이 반복됐다.

이번엔 정말로 옆에서 들렸다.

“물러나라!”

샤만은 겁먹은 채, 설화족의 전사들을 물리면서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천이었던 전사들은 천 아래로 떨어진 지 오래였으며, 사기는 진작 빙곡의 나락까지 추락했다.

나무 가면이 부서지면서 드러난 어린 얼굴의 소녀, 설화의 지도자이자 주술사는 연신 악을 썼다.

결국, 설화 역시 사하처럼 북해빙궁에 의해서 별다른 힘을 쓰지도 못한 채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됐다.

“여기까지다, 설화의 주술사여.”

주서천이 동설련을 지나쳐 맨 앞에 서서 말했다.

“그만 항복해라.”

“항복?”

벅벅.

샤만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헛소리!”

설화족은 만년빙정에 사활을 걸었다.

그동안 희생된 전사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인데,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이방에서 이주해 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대지와 바다를 멋대로 짓밟고, 약탈한 건 너희 이민족이 아니더냐!”

샤만의 목소리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찼다.

“어린 데도 품은 증오심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주서천이 샤만의 표정을 보고 중얼거렸다.

“어리지 않습니다.”

하와르가 말했다.

“정확한 연령은 알 수 없으나, 설화의 주술사는 최소 마흔입니다.”

“마흔?”

주서천이 화들짝 놀랐다.

“무인이나 주술사가 노화가 느리다곤 하지만……”

노화가 늦다고 한들, 아직도 소녀를 벗어나지 못한 건 심했다.

권동제만큼은 아니나 그래도 이상했다.

‘주술인가?

아니, 그러고 보니 북해궁주도……’

북해궁주도 육십 세 이상의 노파다.

그런데 노년은커녕 중년의 모습도 채 되지 않았다.

의문이 답을 내놓기 위해 꼬리를 물었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북해의 일에 중원의 힘을 빌리다니.

과연, 잡종으로 이 루어진 부족답구나!”

샤만이 비꼬듯 조소를 담아 외쳤다.

“너희가 그리 나온다면 나 역시 가만히 있진 않겠다!”

휘이이잉!

잠시 벚었던 빙설의 폭풍이 다시 거세졌다.

“북해의 자식들이여, 분노해라!”

샤만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

주서천은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낯익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천해(天海)를 유린한 이들에게서 생명을 빼앗고 그 오만함을 절망으로 짓밟아라!”

샤만이 외친다.

아니, 주문(呪文)을 외웠다.

굳이 듣기 어려운 고대의 언어를 외울 필요도 없었다.

말보다는 목소리에 실린 주력(呪力)이 중요했다.

성대로 낸 소리가 고막을 지나서 뇌신경을 자극했다.

이에 뇌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신호가 육체를 움직이는 신경까지 집어삼키면서 특수한 힘을 냈다.

“쿠오오오오!”

“캬아아아!”

설화족의 생존자, 수백에 이르는 전사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함성보다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죽여라!”

샤만의 명이 시작이었다.

설화족이 야수처럼 사납게 울부짖으며 돌진해왔다.

투두두두!

눈으로 된 구름이 피어오른다.

설화족이 시야를 희뿌옇게 일그러뜨리는 안개를 헤집고 나와 덮쳤다.

설화족의 기세는 거칠었다.

새끼를 잃은 짐승처럼 분노에 차 있었다.

넘치는 힘 역시 부담스러웠다.

팔이 잘리거나, 가슴에 구멍이 나도 무시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는 고통인지 아니면 분노 탓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최후의 발버둥일 뿐이다!”

북해빙궁은 설화족의 기세에 잠시 멈칫했으나, 총지휘관이자 상천육좌의 목소리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무엇보다 주서천이 선봉장인 동설련보다 앞서서 활약을 보이는 모습은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낙매분분(落梅粉粉).’

매화처럼 피어난 검격이 어지러이 날렸다.

‘낙매성우(落梅成雨)!’

화산의 절기가 북해에 펼쳐졌다.

자줏빛의 검기 자락은 나비처럼 너울거리다가, 곧이어 설화족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파바바밧!

“꺄아아아악!”

“크읏!”

“커억!”

주서천의 발걸음 위로 핏방울이 튀었다.

빙설 속에서 자줏빛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비명이 터져 나온다.

조심성없이 덤빈 이들의 최후였다.

눈보라 속에서 산책하듯 거는 모습은 마치 귀신과 같아, 무심코 설귀(雪鬼)라는 이름이 절로 나왔다.

“죽어라, 설귀!”

열댓 명의 설화족이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날렸다.

전후와 측면은 물론이고 머리 위에선 적이 새처럼 날아오고, 땅 밑에선 두더지처럼 머리를 들었다.

‘열하나.’

시야를 비롯해 감각이 잡아낸 적의 숫자였다.

다음 발을 내디딘 순간, 천근추의 수법으로 발을 굴렀다.

콰앙!

눈으로 된 기둥이 위로 솟구쳤다.

충격에 휘말려 공중으로 떠오른 설화족만 해도 셋이었다.

‘해남일검류.’

방향을 상단으로 주고, 횡으로 긋는다.

서걱!

머리 위의 적 네 사람의 몸이 둘로 갈라졌다.

상체와 하체가 깨끗하게 갈렸다.

발을 구르고, 검을 한 번 휘두른 것만으로 일곱 명이 북해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다음으로 일 보 전진할 땐, 발밑에 실린 무게 중심을 주먹으로 옮겨 강격권을 펼쳤다.

쿠웅!

정면의 설화족 전사는 가슴 정중앙에 주먹을 맞아 갈비뼈가 부서지고, 내장이 파열되어 숨이 끊어졌다.

주먹에 맞은 몸은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며 날아가 뒤의 아군에게 박혔다.

“중원인!”

열하나의 설화족 전사는 둘밖에 남지 않았다.

좌우에서 고래 뼈로 된 칼을 휘둘러 곡선을 그려 냈다.

휘리릭!

다리가 지면에 박힌 채, 고정되어 있던 몸을 반바퀴 회전한다.

방금 전 있던 위치로 칼이 지나갔다.

주서천은 손을 뻗어 코앞에 다가온 적의 목을 붙잡고 힘을 줬다.

우드득!

목 뼈가 쉽게 부러졌다.

적은 비명도 채 내지 못하고 즉사했다.

“이익!”

최후의 설화족이 악을 쓰며 칼을 휘둘렀다.

밑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린 내공으로 목을 노렸으나, 눈앞의 괴물은 고개를 까딱인 것만으로 피했다.

주서천은 목을 쥔 손에 힘을 놓고, 몸을 살짝 숙여 날렵한 몸놀림으로 접근해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설화족은 놀란 나머지 칼도 놓치곤, 지면을 박차고 뒤로 몸을 날렸다가 아차 싶었다.

“꺄아아악!”

그 뒤에는 벼랑이 있었다.

북해빙궁에게 밀려난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최후였다.

“샤만은 어디냐!”

주서천이 호기롭게 외치며 주변을 슥 둘러봤다.

“ 이 쪽에는 없어요!”

좌측에서 낙소월이 답했다.

“싸우는 도중에 한눈을 팔다니!”

낙소월과 공수를 교환하던 티시샤크가 으르릉거렸다.

분노의 외침에 답하듯, 도강이 빙설을 가른다.

푸욱!

“커헉!”

하나, 도강은 애꿎은 허공 외에 아무것도 베지 못한 채 사라졌다.

도를 쥔 손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티시샤크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가,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그곳엔 마치 북해궁주를 보듯, 어떠한 감정도 알아볼 수 없는 소녀가 허리춤에 단검을 꽂은 채 있었다.

소녀, 소령은 허리춤에 박힌 단검에 힘을 주어 비틀었다.

“캬하악!”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몸을 흔들어 소령을 떼어 낼 티시샤크였으나, 이미 낙소월 탓에 지쳐 있던 상태였다.

끝내 발버둥을 치지 못하곤 옆으로 쓰러졌다.

소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곤, 옆구리에 꽂힌 단검을 뽑아 회수했다.

“고, 고마워……”

얼떨결에 도움을 받은 낙소월이 소령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여기에도 없습니다!”

좌측의 반대편에서 동설련의 외침이 들려왔다.

설화족이 대강 정리되는 중이었다.

몇몇은 전의를 상실했는지, 머리에 손을 올리곤 항복했다.

짐승처럼 포악해졌다고 한들, 마교나 혈교처럼 완전히 이지를 상실한 건 아니었다.

야수라도 공포를 느낀다.

강자에겐 굴복하는 게 당연했다.

방금 전까진 주술사의 목소리로 잠시 공포를 잊고 있었지만, 보아하니 그 효력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아래입니다!”

막마르가 정찰대장답게 샤만을 찾았다.

“샤만이 빙곡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 * *

“항복! 항복하겠다!”

사하는 설화와 달리 공포를 막아주는 주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항복하는 자가 속출했다.

북해궁주의 신위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이겨 낼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하는 생각 이상으로 지쳐 있었다.

북해빙궁이야 궁전에서 나온 날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하는 분지에 도착한 지 상당히 오래됐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산빙곡, 북해에서도 춥기로 소문난 지옥에서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었다.

특히나 사상 최악의 식량난 탓에 지급되는 군량도 적다 보니 힘을 제대로 낼 수도 없었다.

“네 이년들!”

노르가 분노했다.

“이 겁쟁이 놈들아, 뭐하고 있느냐!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욕심에 눈이 멀어 어디까지 추해질 생각이더냐.”

냉악비의 차디찬 목소리가 노르의 분노를 식혔다.

“냉악비!”

노르가 냉악비의 말에 낮게 으르릉거렸다.

“본 궁이 그리 탐이 났느냐.”

냉악비가 노르의 성질을 건드렸다.

“……”

빙궁은 어떠한 구조인지는 모르나 북해의 어떠한 곳보다 따스했다.

굳이 이상 기후가 아니더라도, 일 년 내내 강추위에 사람이 죽어 나가는 북해에선 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노르, 나아가 사하는 이 빙궁을 탐했다.

만년빙정으로 절대의 힘을 얻으려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빙궁을 사하의 터전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마음 같아선 본 궁에 북해의 주민을 받아들이고 싶지만, 이미 너무 많도다.”

북해인은 거의 전원 무림인이다.

살기 위해서 빙한공을 수련하게 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그러나 모두가 무사이거나 전사인건 아니었다.

무공이 필수인 것과 싸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북해의 의식주를 위해 장인이나 혹은 숙수 등 다른 삶을 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무사를 제외하고, 일반 주민을 포함하면 빙궁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다.

사하 역시 북해빙궁만큼 주민이 상당하기에, 전부 수용할 순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주하겠다……”

노르가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냉악비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노르 앞에 섰다.

사하의 지도자는 죽음이 임박하기 전까지, 무릎을 꿇지 않고 증오로 점철된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언젠가, 언젠가 빙궁 또한 이 북해에 잡아먹힐 것이다!”

노르는 냉악비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다가, 뒷걸음질 쳤다.

그 뒤로는 끝없이 펼쳐진 얼음 계곡뿐이었다.

“북해와 빙궁에 저주가 있으리라!”

노르는 증오와 저주를 퍼부으며, 그대로 몸을 던졌다.

북해의 지도자치곤 허무한 최후였다.

냉악비는 노르를 집어삼킨 빙곡을 내려다보다가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북풍대주.”

“말씀하십시오!”

설영이 부복한 채 답했다.

“위를 맡길 테니, 부대주를 포함해 정예 몇몇을 뽑아 아래로 내려보내라. 검신과 합류하러 가겠다.”

“명!”

* * *

두 개의 산 사이의 얼음 계곡.

생명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짐승은 물론이고 식물조차 이 죽음의 계곡 안에선 살아남지 못했다.

얼음으로 된 길은 구불구불했고, 험난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과 같았다.

만년빙정이 모습을 드러낸 이후, 이산빙곡은 어떠한 생명체도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 됐다.

북해의 고수조차 섣불리 들어오지 못했다.

얼음의 대지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북해빙궁도 이 위험을 잘 알고 있기에, 소수만 데리고 아래로 내려왔다.

“검신.”

“북해궁주.”

주서천과 냉악비가 계곡 아래에서 만났다.

그 뒤로는 오십에 이르는 북해의 고수가 따르고 있었다.

중원의 상천과 북해의 상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짧게 교환한 채로 앞으로 걸었다.

때때로 얼음이나 된 산이나 강을 건너고, 바람이 끊길 때쯤 눈에 띄는 얼음 덩어리 앞에 섰다.

“왔구나!”

만년빙정의 앞, 설화의 주술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가를 비틀며 조소를 흘렸다.

“샤만!”

동설련이 질렸다는 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기다려라.”

동설련이 앞으로 나서려 하자 냉악비가 손을 들어 막았다.

“으흐흐!”

샤만의 모습이 무언가 이상했다.

얼어붙은 머리카락은 그렇다 쳐도, 입과 턱이 짐승처럼 앞으로 나왔으며, 몸집도 배는 커졌다.

아니, 커지고 있었다.

사 척, 오척, 육 척 …… 이윽고 팔 척이 지나자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동공은 뱀처럼 세로로 갈라졌으며, 눈자위는 시커멓게 물들었다.

손과 발 부근의 털가죽이 부풀더니, 찢어지면서 얼음으로 된 발톱이 자라났다.

“나를, 분노하게 한 걸…… 후회하게, 해 주마……”

목소리 역시 변질됐다.

사람이 아닌, 짐승의 것이었다.

주서천은 그 목소리에 눈을 부릅떴다.

‘용후(龍吼)?’

아까 전 낯익었던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머릿속에서는 혹시 하고 어떠한 이름이 떠올랐다.

“쿠오오오오!”

샤만이 짐승의 손을 움직여, 만년빙정을 쥐었다.

쩌저적!

하나 그 손은 쥐기 전, 손이 닿자마자 얼어붙었다.

발톱 끝부터 시작해 허옇게 물들더니만, 이윽고 팔까지 전해져 예의 얼음 조각상처럼 변했다.

“사람인 이상, 만년빙정은 품을 수 없다.”

냉악비가 샤만을 보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다.’

북해의 기후에조차 영향을 끼치는 물질이다.

무인이건 주술사건 사람인 이상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흡수가 아닌 파괴를 선택했다.

쩌적! 쩌저적!

몸이 얼어붙는다.

손이 아니라 발도 얼어 버렸다.

피부 위에 얼음 조각이 꽃처럼 피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손과 발끝에서 시작된 얼음꽃이 목 위의 머리까지 덮은 순간, 샤만의 눈매가 휘었다.

“그으래……”

샤만의 입가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 말이 시작으로 샤만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우득! 우드득!

뼈 소리가 나자, 몸이 부풀어 올랐다.

마치 환골탈태를 하듯, 골격이나 근육이 형태가 바뀌었다.

팔 척에 이르던 신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십 척을 아우르더니만, 가볍게 초월해 버렸다.

나무처럼 신장만 높아진 것만이 아니다.

팔이나, 다리 등 몸집도 그에 따라 커져, 압도적이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몸을 집어삼킨 얼음 역시 하나가 된 것처럼 자라난 것이었다.

“거북……이?”

하와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샤만의 몸은 사람이 아닌, 거북이와 같았다.

다만 일반적인 거북이와는 달랐다.

이 세상에 십 척을 넘어서는 높이의 거북이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등과 어깨가 꼽추처럼 심히 굽어지며, 그 위를 덮은 얼음도 자연히 둥글게 말려 등껍질처럼 변했다.

눈, 아니 얼음으로 덮인 손과 발은 짐승의 것처럼 앞발과 뒷발로 변해갔다.

손가락, 발가락 대신 시커먼 발톱이 자라나면서 지면에 구멍을 뚫었다.

목도 뱀처럼 쭉 길어지다가 멈췄다.

얼굴도 변했다.

사람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새하얗던 피부는 오염된 것처럼 시커멓게 물들었고, 쩍 벌어진 입 사이로 무시무시한 이가 보였다.

입과 턱을 앞으로 오리처럼 내밀었으며 산발처럼 흘렀던 머리카락은 얼어 있다.

“용……?”

냉악비가 올려다보는 채로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현무인가요……?”

낙소월이 확실치 않은 듯이 말했다.

용의 머리와 거북이 등껍질은 사방의 신수인 북방의 현무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꼬리이자 또 하나의 머리인 뱀이 존재하지 않아 확신할 수 없었다.

굳이 생김새를 묘사하자면 흑룡과 현무의 모습을 반반씩 뒤섞은 모습이었다.

여러모로 특이했다.

몸 군데군데 얼음도 꽃처럼 피어 있기까지 했다.

“아니, 그보다 사람이 용으로 변하다니……?”

낙소월이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광경이었으나 믿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방금 전 본 광경을 이야기한다면, 주정뱅이나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리라.

북해의 주민들도 황당하긴 매한가지인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북방흑룡?’

주서천 역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놀란 부분이 다른 사람과는 좀 달랐다.

‘사해용왕(四海龍王)!’

중원의 신화에 따르면 동서남북의 바다 밑에는 용왕이 용궁을 짓고 군림한다고 전해진다.

동방의 청룡, 서방의 백룡, 남방의 적룡, 북방은 흑룡이다.

주서천은 이중 남방의 적룡을 만나고 왔다.

정확히는 적룡의 이름을 잇는 신비 문파, 남해용문이었다.

‘남해용문을 보고 또 다른 사해용왕의 이름을 잇는 자들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설마하니……’

꿀꺽.

‘설화의 주술사가 북해용왕이었다니!’

남해용문의 무공, 용후를 북해의 주술사가 펼치자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 의문이 풀렸다.

용후란 건 용의 울음소리를 흉내낸 무공이며, 용과 대화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샤만이 정말 용에 준하는 생물로 승화한 힘을 가지고 있던 것이라면, 사용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크콰아아아아아아아아!”

흑룡인지 현무인지 모를 샤만이 울부짖었다.

쩍 벌어진 아가리 사이로 대자연의 기가 한데 모였다.

낮아진 기온의 원인, 만년빙정이 틀림없었다.

쿠구구구!

샤만의 포효가 얼음 계곡 곳곳에 퍼져 나가며 메아리쳤다.

큰 진동이 찾아오며 지축이 뒤흔들렸다.

얼마 없는 햇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절벽이 불안하게 떨리더니만, 일부분이 부서지면서 아래로 떨어졌다.

콰아앙!

“조, 조심해!”

“빙곡이 무너지고 있다!”

북해빙궁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우박이나 조각 수준이 아니었다.

눈사태, 아니 얼음 사태였다.

운석이 머리 위로 떨어진 것과 같았다.

계곡의 지형이 바뀔 정도의 충격이었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근처에 없어 피할 수 있었다.

그 대신 앞으로의 일이 문제였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턱 막혀 벌써부터 걱정이 들었다.

하나 그보다 신경 써야 할 건, 포효의 주인인 샤만이었다.

“이 주변이 쑥대밭이 되기 전에, 처리하겠다.”

남해용문과의 관계나 사해용문에 대해서 궁금했으나, 잡념이나 의문은 잠시 옆으로 치웠다.

혼자라면 또 모를까 하나뿐인 사매를 포함해 지켜야 할 사람이 여럿 있는 탓에 여유가 없었다.

타앗!

얼음으로 된 지면을 박찬다.

빙판길을 미끄러지듯, 아니 정말로 미끄러지면서 나아갔다.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무게 중심을 앞으로 실은 것만으로도 ‘주르륵’ 하고 밀려났다.

앞의 경관이 스쳐 지나갔다.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속력을 내면서 샤만과의 거리를 좁혔다.

부웅!

공기를 찢는 소리가 무겁고 길게 늘어졌다.

샤만이 앞발을 들었다가 힘껏 내리치면서 낸 소음이었다.

그리고 소음이 굉음으로 변하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콰아앙!

앞발에는 경천동지할 위력이 담겨있었다.

거구의 육체에서부터 나온 힘인지, 만년빙정의 기운 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고 질릴 정도였다.

얼음의 대지가 앞발을 중심으로 움푹 주저앉았다.

돌 대신에 얼음 바위가 조각나며 반쯤 치솟았다.

그야말로 대자연의 재앙이었다.

땅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고, 충격의 파도가 덮쳐 왔다.

“크읏!”

“꺄아아악!”

“잡아!”

북해빙궁의 무사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덮쳐 온 충격파에 휘말린 이들은 마치 용권풍에 쓸려 나가는 모습과 비슷했다.

이산빙곡에 발을 들일 만한 실력자가 아니었더라면, 내상을 입거나 진작 날아가 빙벽에 처박혔을 것이다.

“크콰아아아아!”

샤만이 포효하면서 앞발을 다시 구르려 했다.

“어림없지!”

주서천이 아래에서부터 솟구치며 발바닥에 꽂혔다.

파지직!

살을 짓누르며 구멍을 내는 감각은 아니다.

앞발이 얼음으로 덮여 있는 탓에 부서지는 느낌 이었다.

혹시나 이 얼음이 호신강기나 흑철갑주처럼 내부를 보호하고 있는 건 아닐까 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캬아아악!”

샤만이 포효한다.

살의에 뒤섞인 건 고통이었다.

쿵! 쿵! 쿵!

용인지 현무인지는 몰랐으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계곡이 흔들렸다.

그 육중한 몸으로 난리를 쳤는데 주변이 멀쩡할 리 없었다.

근처의 얼음벽에 부딪치기라도 하면, 위에서 얼음 조각, 아니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서 위협했다.

“캬오오!”

샤만의 입이 쩌억 벌어진다.

적의 심장을 멈추기 위한 용후가 아니었다.

웅웅웅!

차가운 바람이 입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듯 불었다.

대기 중에 흩어진 눈꽃이 떠오르더니만, 이내 아가리로 빨려 들어가며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대기의 기온을 한층 더 떨어뜨리는 극한의 기운.

주서천은 범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경고했다.

“막아!”

피융!

샤만이 입 안에 모인 기운을 내뱉는 순간, 수면 위에 돌이 떨어진 것처럼 파장이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파장의 뒤에서 빛줄기가 궤적을 그려 내며 북해빙궁의 정면에 유성처럼 쏘아졌다.

“후폭풍에 주의해라.”

북해궁주, 냉악비가 유성의 정면으로 손을 들었다.

파스스슷!

냉악비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손바닥 정중앙에 빛줄기가 닿은 순간, 상천육좌와 전력으로 부딪친 것처럼 충격량이 밀려 왔다.

북해의 기운을 수백, 수천 년 이상 흡수한 만년빙정 다운 힘이었다.

만약 현경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얼어붙었을지도 모른다.

몸이 절로 떨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아압!”

주서천은 냉악비의채고 나섰다.

흔들림을 눈치그녀의 뒤에 선 낙소월과 소령 이걱정됐다.

타다닷!

샤만의 손등을 박차고 달린다.

팔이 얼음으로 되어 있어 아래로 미끄러질 때마다, 다시 박차고 몸을 날렸다.

달리는 것이 아니라, 위로 비상한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다리!’

얼음으로 된 등껍질을 발판 삼아 다시 뛴다.

그저 오른 것만이 아니다.

공중에서 화려하게 회전했다.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꽉 쥔 채, 힘을 실어 앞으로 쭉 뻗었다.

쿠아앙!

‘퍼억’ 하고 무언가 맞는 소리가 아니었다.

폭음이 터지면서 샤만의 고개가 옆으로 팍하고 돌아갔다.

얼음으로 된 부위는 목이 심히 꺾이면서 만신창이가 됐다.

“캬하아악!”

입 안에서 흘러나오던 빛줄기가 방향을 잃었다가, 이내 산산이 흩어지면서 존재감을 감췄다.

‘생각보다 그리 안 단단한데?’

단단하다.

만년한철 정도는 아니나 그 강도는 평균을 상회하는 정도였다.

주서천이 비정상적이었다.

강격권을 대성하진 못 했지만, 그대신 북해의 넓이에 비유할 만큼 무식한 내공량이 뒤를 받쳐 줬다.

머리는 울리고, 아픔은 몸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주서천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샤만의 목을 타고 쭈욱 내려가 등껍질 위에 착지했다.

‘만년빙정은, 이 아래쪽인가?’

머리엔 없었다.

심장이나 뇌가 뼈에 보호를 받듯, 샤만의 만년빙정 역시 등껍질에 숨어 있었다.

주서천은 주저하지 않고 절초를 날렸다.

‘자하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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