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二章 (217/254)

하와르가 말했던 것처럼, 북해인도 설인은 잘 보지 못한다.

전설 속에 나오는 괴물인 건 매한가지였다.

“힘은 무척 세고, 몸은 날쌔다!”

“몸은 또 어찌나 단단한지……”

“음한진기에 내성이 있다고?”

북해의 정예, 빙궁의 무사들조차 설인과 싸우며 혀를 내둘렀다.

최초에 전설을 목격한 흥분은 없었다.

그 대신 설인에 대한 경각심과 공포, 질린 감정만이 남았다.

뇌부터 시작해 몸을 장악하는 포효를 들었을 땐 여기에서 죽는 건가 싶었지만, 검신의 등장 덕에 살았다.

“검신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도 않아.”

“검이 아닌 권법과 장법이라는 점이 더 무시무시하군.”

“설인이 반딧불이라면, 검신은 태양이다.”

검신은 위기에 빠진 순간에 맞춰 귀신같이 나타나 도왔다.

주먹을 내지르면 머리가 부서지고, 손바닥을 내밀면 내장을 토해 냈다.

검을 들 땐 몸이 갈렸다.

빙궁의 무사는 검신의 도움에 사기가 끝까지 올라가 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두머리를 맞이했다.

“괴물이다!”

“도, 도대체……”

“북해의 땅에 이러한 괴물들이 숨어 있었던 건가?”

설인의 우두머리는 존재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낙소월의 얼굴이 굳은 것처럼, 빙궁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도 단번에 그 힘을 알아보고 긴장했다.

“아무리 검신이라고 해도……”

“도움이 필요할 터!”

그녀들은 여태껏 받은 도움에 답할 겸,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몸을 막 날리려 했었다.

“……”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 우두머리조차 불과 몇 합을 나누지도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검신은 인간인가?’

‘궁주께서도 대단하시긴 하지만……’

‘중원제일, 아니 천하제일의 검수로구나!’

검을 어떻게 휘두른 건지도 알아낼 수 없었다.

벽을 넘어서는 기량의 차이에 입을 떡 벌렸다.

전력을 낸다면 도대체 얼마 정도일지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크, 크르르!“

“쿠오오오!”

한편, 백여 마리밖에 남지 않았던 설인의 무리는 얼마 가지 않아 사기가 밑바닥까지 추락해 패퇴했다.

오랫동안 설원을 힘으로 지배해 온 우두머리를 잃자 전의가 빠르게 소실됐다.

끝내 오십 마리 정도 남자 체구가 작은 순으로 도주를 택했다.

“잡아라!”

선발대는 설인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힘든 산맥에서 습격을 받는 건 사양이었다.

앞으로 맞이해야 할 설화족과의 격돌만 해도 골치 아프다.

복수에 눈이 먼 설인을 상상하니 끔찍했다.

“제기랄, 흩어진다!”

“쫓아!”

막마르를 필두로 한 정찰대가 뛰어난 경공으로 추격 을 보여 주었다.

그 과정에서 열 마리를 죽였다.

다만, 추격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설인이 하나같이 지능이 높다 보니, 흩어져서 도망치며 지형까지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무작정 쫓다가 절벽을 보지 못하고 떨어질 뻔했을 땐 간담이 다 서늘했다.

“추격 중지!”

이 이상의 추격이 힘들다는 걸 깨달은 주서천이 명령을 내리자, 설인의 악몽도 드디어 막을 내렸다.

“정찰대장, 얼마나 놓쳤소?”

“삼십입니다.”

막마르가 송구스럽다는 듯이 답했다.

그 눈동자에는 강자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났다.

“그 정도면 괜찮소.

어차피 우두머리를 잃은 데다가, 힘의 격차를 깨달았으니 덤비지 못할 거요.”

짐승의 사회는 무림, 아니 마교만큼이나 힘이 중시되는 곳이다.

힘이 곧 전부요, 모든 걸 갖는다.

아무리 배를 굶주려도 목숨만큼 중요치는 않으니 쉽게 접근해 오지는 않을 것이리라.

“좋소. 그러면 설인의 털가죽과 먹을 부위의 고기를 해체하도록 하시오”

엄연히 사람인 자가 들어가긴 하지만, 설인은 사람의 형상을 닮았어도 짐승이었다.

조금 거부감이 있어도 극심한 식량난을 겪는 북해인 입장에선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주서천은 막마르를 비롯해 동설련에게도 뒷정리를 부탁한 다음, 가슴에 구멍이 뚫린 우두머리에게 갔다.

“어디 보자……”

시신 앞에 쪼그려 앉아, 털가죽과 속살까지 갈랐다.

검강 덕에 막힘이 없었다.

“분명 이쯤에…… 아, 있군.”

입가에 짙은 미소가 저절로 번졌다.

하복부 부근 내장 밑 둥그런 덩어리가 잡혔다.

밖으로 꺼내 눈 위에 굴려, 피를 슥슥 닦아 내자 한기를 뿜어내는 새하얀 내단이 드러났다.

영물답게 내단을 품고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양을 품고 있었다.

“소령……”

“예.”

소령이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나타났다.

“손 내밀어.”

“예.”

“두 손.”

소령이 두 손바닥을 내밀었다.

주서천은 소령의 손바닥 위에 설인의 내단을 올려 두었다.

그녀의 손이 새하얗게 물드는 게 보였다.

“그거 챙기고 있다가, 복용하라고 할 때 먹어.”

명.”

소령이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낙소월에게 건네 줄까 싶었지만, 인면지주의 내단을 복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소령에게 건냈다.

영약이나 내단도 과하면 좋지 않은 법.

탈이라도 나면 곤란해서 소령에게 복용시키기로 했다.

“그나저나, 설인의 털가죽을 얼마나 챙겨야 하지?

당장 만들어 입을 수는 없고……”

주서천이 고민에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와르가 주서천의 중얼거림을 듣고 말을 걸었다.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북해의 추위를 버티려면 방한복은 필수다.

잘못되면 목숨과 직결되기에 어릴 때부터 훈련받았다.

특히나 안내인이나 정찰대 등 외부에 오랫동안 나가 있는 사람들의 경우엔 그 실력이 몹시 뛰어났다.

“좋군요. 그러면 정비할 곳을 찾은 다음, 부상자를 치료하고 옷까지 만든 뒤에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설화 부족의 주둔지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이제 곧 정상이니, 다시 내려가기만 하면 금방입니다.”

“후발대의 연락만 기다리면 되겠군요.

그러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갑시다.”

선발대는 설인의 시체를 해체했다.

북해는 생존주의라 그런지 각자 해체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털가죽과 못 먹는 부위를 제외한 고기를 빼낸 뒤, 짐에 넣었다.

그 외에도 사망자를 땅에 묻고 명복을 빌어 주었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십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설인이 생각보다 강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적에 비해 피해가 작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만 했다.

“이대로 묻고 장례 없이 끝나는 건가요?”

낙소월이 물었다.

그녀의 쓸쓸해보이는 눈빛은 눈 속에 묻힌 빙궁의 무사로 향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와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아니에요.”

낙소월은 쓴웃음을 지은 채 머리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무림에 속해 있다고 해도 문화가 다르구나.’

북해에 괜히 사람이 적은 게 아니다.

이 혹한의 땅은 죽음의 땅으로 불리며 하루에도 수십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간다.

죽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중원의 경우 시체 썩는 냄새, 시독(潭毒), 그 밖에도 여러 질병을 걱정해 화장하거나 땅 깊숙히 매장하지만 이 얼어붙은 땅에선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피와 살점, 그리고 질병이나 독도 극한의 추위 앞에선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아서 얼어붙으니까.

낙소월은 눈으로 덮인 무덤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합장하며 명복을 빌어 주었다.

한편, 선발대는 약 하루를 소비해 부상자의 치료, 그리고 방한복을 제작했다.

아무리 손재주나 기술이 좋다고 한들 사백하고도 육십여 명의 것을 만들어야 했으니 시간이 좀 걸렸다.

참고로 설인에게서 해체해 온 털가죽은 백오십이지만, 한 마리당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수는 충분했다.

주서천이나 낙소월, 소령 등 옷을 만드는 재주가 없는 사람은 설인의 고기로 요리를 했다.

“노린내가 좀 심하지만…… 먹을만하네.”

“곰 고기?”

설인의 고기는 곰 고기와 비슷했다.

육식 동물 특유의 노린내를 풍기며 육질은 조금 질겼다.

그래도 과하게 질기지 않아서 쫄깃쫄깃한 식감이 나, 나름 괜찮았다.

“웅장(熊掌)의 맛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주서천이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웅장, 곰의 발바닥은 황제의 수라상에나 올라오는 진미이다.

다만 설인의 손과 발만큼은 곰이라기보단 사람이나 원숭이에 가까워서 먹지 못했다.

이후, 선발대는 배를 채운 다음 새로 만든 방한복까지 챙겨 입은 뒤에 산의 정상을 넘어섰다.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인지라 빙설의 폭풍 속을 지나쳤다.

“생각보다 그리 춥지 않은데?”

“설인이 왜 추위 속에서 멀쩡한지 몰랐는데, 이러한 이유였군.”

설인의 털가죽을 이용해 만든 방한복은 호평이었다.

털가죽이 두꺼워 칼날 같은 바람을 전부 막아 냈다.

내부도 몹시 따스해서 좋았다.

무거운 게 흠이었지만 말이다.

* * *

선발대가 남부 산맥을 넘어서 동산에 도착할 무렵, 냉악비가 이끄는 후발대도 서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후발주자이고 대군이다 보니 진군의 속도가 잘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별 피해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또한 혹여나 선발대의 존재가 들키지 않도록 남부 산맥이 아닌 다른 경로를 이용해서 움직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북해에서도 대군에 속하는지라, 사하의 감시대의 눈에 띄어 적군에게 전해졌다.

“빙궁의 주인이 드디어 납시셨군그래.”

사하의 지도자, 노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다.

북해의 세력이 으레 그렇듯, 사하 역시 여성이 중심인 사회답게 지도자가 여성이었다.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며, 눈매는 표독스러웠다.

굳게 닫힌 입술에는 고집이 묻어났다.

지도자라는 것을 증명하듯,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있었다.

“전에는 놓쳤지만, 이번에는 목숨을 끊어 주마.

북해의 지도자가 나라는 것을 똑똑히 알려 주지.”

빙궁의 조사대가 만년빙정을 발견한 뒤, 냉악비가 파괴를 위해 직접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소식이 이미 사하와 설화에게도 알려져, 냉악비는 만년빙정 근처에 다다른 순간에 양군의 습격을 받았고, 결국 물러나야만 했다.

“전력의 수는 얼마냐 되느냐?”

“그게… … 이천여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하의 경비대장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빙궁의 전력은 이미 파악된 이후인지라, 삼천 중 겨우 이천이 움직인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사활이 걸린 것치곤 적다는 느낌이 들었다.

“흥, 빙궁의 무사가 삼천이니 이천만 온 것이라면 뻔하지 않겠느냐.

오백은 궁에 두고 나머지 오백은 정예만 뽑아 원주민에게 보냈을 터.

이상할 것 없다.”

삼파전이 된 이상, 한곳만 노리고 전력전을 하기에는 다른 세력이 부담스러웠다.

최대 전력인 북해빙궁 입장에선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힘을 분산해 견제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만년빙정은 사하의 것이다.”

* * *

이천에 이르는 대군, 후발대이자 본대가 서산을 올랐다.

때로는 신이 깎은 듯한 빙벽을 오르고, 계속 위를 올려다봐야 하는 언덕을 오르기도 했다.

선발대가 겪은 것처럼 빙설의 폭풍이 그들을 반겼고, 북해인조차 지독한 추위에 눈살을 찌푸렸다.

“으으으, 추워 ……”

“만년빙정의 근처라서 그런가?”

“북해에서도 악명 높은 곳이잖아.”

북해의 최북단, 이산빙곡은 북해에서도 춥다.

안 그래도 예외적인 이상 기후라 더더욱 추웠다.

“선발대는 괜찮으려나……”

북해의 전투부대, 북풍대(北風隊)의 대주(隊主) 설영(雪永)이 걱정되듯 중얼거렸다.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쇄골까지 내려오는 은빛 머리칼이 반짝였다.

“본대와 다르게 식량도 적을 텐데……”

배 터지게 먹고 있다.

별미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진군의 속도를 위해 방한복도 그리 껴입지 못했고……”

설인의 털가죽 덕에 따뜻해서 졸릴 정도다.

“대주, 지금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실눈에 여우 인상의 북해인, 북해의 얼마 없는 남고수, 다와가 말했다.

“크르르르!”

“컹! 컹!”

“아우우우우!”

언덕의 너머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늑대……”

설영은 고운 눈썹을 찌푸리면서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후발대의 분위기 또한 긴장으로 번졌다.

발목에 이르는 눈 더미에 발자국을 남기고, 언덕을 오르자 처음으로 광활한 평지가 나타났다.

만약, 전쟁터로 향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무심코 감탄을 토해 냈을지도 모른다.

평지의 너머 보이는 산은 사람을 압도하는 대자연 그 자체였으며, 그 위용을 보면 넋을 잃을 정도였다.

새하얀 눈이 쌓여 있는 산의 거대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고, 위쪽에 낀 구름은 당장이라도 신선과 선녀가 내려올 정도로 신비감이 묻어났다.

이 분지의 끝에는 만년빙정이 위치한 얼음으로 된 계곡을 볼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전의 대지였다.

“사하 부족!”

대지의 위엔 천막이나 얼음집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엔 적의로 가득찬 적군과 회색 늑대가 보였다.

설영이 늑대의 울음소리를 듣고 주의한 건, 늑대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주인이 사하였던 탓이었다.

“북풍대주는 신호를 보내거라.”

본대의 중앙, 냉악비가 무표정인 채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설영은 명을 받들겠다는 듯,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곤 냉악비에게 목례한 뒤에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전군!”

북풍대주가 목청껏 소리 질렀다.

“빙궁의 힘을 보여 줘라!”

* * *

얼음으로 된 계곡을 사이에 둔 동산과 서산의 중턱에는 분지가 공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분지를 통해서 중앙으로 가면 가파른 빙벽이 나타나고, 그 아래엔 문제의 계곡이 나타난다.

산도 산이지만, 계곡도 사이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서로 소리를 지르면 반대편 쪽에서도 잘 들렸다.

동산의 분지땅 위에는 눈을 벽돌처럼 쌓아 올린, 둥근 형태의 집이 즐비했다.

“와아아아아!”

서산에서부터 들려온 빙궁의 함성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지자, 설화족의 진지에서 전사들이 튀어나왔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눈부신 반응이었다.

“왔구나.”

얇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전사들이 부복했다.

몸짓에는 존경이 묻어났다.

뚜벅뚜벅.

그들 사이로 작은 몸집의 사람이 나왔다.

특이하게도 알록달록한 채색이 된 나무 가면을 쓰고 있어, 어떻게 생긴지는 알 수 없었다.

옷차림 역시 북해인답게 털가죽이 소재인 두꺼운 방한복이라서 체형 역시 알아볼 수 없었다.

북해인은 하나같이 미형이고, 여자처럼 생긴 남자도 흔해서 성별을 알 순 없었다.

“샤만 님.”

설화의 지도자이자 주술사, 샤만이었다.

주술이 발달해 본고장이라 불리는 남만과 다르게 북해의 주술사는 극히 소수였다.

그 탓인지 북해에서 주술사의 위치는 몹시 높았으며, 신이나 다름없는 경외를 받았다.

“동산에서 저주받은 약탈자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 싸움을 시작했구나.”

샤만의 입에서 꼴좋다는 듯, 조소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아, 분지를 떠날 준비를 해라.

그년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 싸우는 동안 우리는 바다의 원천이자, 어머니를 데리러 가야겠구나.

계곡으로 향한다.”

“지도자시여. 실례하오나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허락한다.”

“저들이 저희를 내버려 두고 사하만 공격한 것이 신경이 쓰입니다.

혹시 무슨 함정이 아닐는지요.”

“좋은 지적이로구나. 네 말대로다.”

“분명 이 동산에도 우리를 견제하기 위한 이들을 보냈을 것이다. 하나 그건 걱정할 것 없다.”

“그게 ……?”

“그럴 줄 알고 다 준비를 해 두었느니라.”

나무 가면에 숨겨진 얼굴에서 음침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흐흐흐……”

동부 산맥을 포함해 남부 산맥에 숨은 영물, 눈의 거인을 주술로 자극해 움직였다.

“설인……!”

질문을 던진 전사가 감탄사를 흘려냈다.

“오오오……”

“설인을 움직이다니……”

“과연 샤만 님이로다!”

북해 전설의 괴물, 설인.

그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설화족 역시 알고 있었다.

최근에는 그들 역시 설인을 본 적 없었으나 옛날만 해도 전사의 증명을 위해 설인을 상대하곤 했다.

“설사 빙궁에서 정예를 보냈다고 한들, 이 이상 기후 속에서 산의 주인인 눈의 거인을 상대하긴 힘들 터. 아마 지금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것이다.”

샤만은 산책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보란 듯이 팔을 쫙 벌렸다.

“자아, 눈을 신발(靴) 삼아 걷거라!

빙곡의 아래에 잠든 어머니의 힘을 취하고, 북해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어라!”

“우오오오오!”

“시조께서 내려 주신 땅을 더럽히고, 욕심에 눈먼 약탈자들에게 북해의 주인이 누군지 말해 주어라!”

샤만의 불길하고 위엄 어린 목소리가 북해에 울려 퍼졌다.

“북해의 바다에서 태어나, 자연을 벗 삼고 눈의 거인조차 조종하는 우리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이니!”

나무 가면의 눈 부근이 형형하게 빛났다.

“호호호호!”

* * *

“흠……”

설인의 털가죽을 쓴 막마르가 침음을 흘리며, 등 뒤를 돌아봤다.

“그렇다는데, 어찌합니까?”

“할 말 다 한 것 같으니까 이제 갑시다.”

주서천이 얼른 가라는 듯이 검을 휙휙 휘둘렀다.

한 시진 전, 선발대는 일찍이 동산의 분지에 도착해 서산에서 보내올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컨대 설화족의 움직임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보고 있다는 걸 뜻했다.

설마하니 설인을 주술로 자극해 유도했을 줄은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눈의 거인은 고기와 털가죽으로 해체됐다.

“가자―!”

선봉장, 동설련이 외치며 몸을 날렸다.

“와아아아!”

그 뒤로 사백육십 명의 외침이 이어졌다.

눈이 수북이 쌓인 산림 속, 북해빙궁이 함성을 내지르면서 언덕 아래의 분지를 향해 달렸다.

내리막길인 만큼 속도가 대단했다.

“무, 무슨 일이냐!”

“뭐야!”

“뒤다!”

설화족은 갑작스런 함성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이 근방이 소리가 전달하기 좋다고 한들, 등 뒤에서부터 들려온다면 그건 잘못됐다.

아니나 다를까.

산림을 헤치고 나온 적의 등장에 하나같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나 눈의 거인을 주술로 유도했던 장본인, 샤만은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동설련?”

동설련은 북해에서도 이름난 고수다.

북해빙궁의 실력자인 만큼 얼굴도 잘 알려져 있었다.

샤만은 동설련을 보고 습격자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봤다.

“말도 안 돼!”

대충 봐도 오백에 가까운 전력이었다.

이 정도 되는 수가 멀쩡히 동산을 밟은 게 이해가 안 갔다.

“눈의 거인 탓에 이곳에 올 수 없을 텐데!”

설인은 낯을 많이 가려 사람을 피해 다니지만, 지금은 다르다.

굶주려 있는 데다가 주술로 유도당했다.

짐승인 만큼 후각이나 청각이 사람의 수십 배인지라 이 정도 되는 인원을 놓칠 리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을 때, 북해빙궁의 옷차림이 어딘가 모르게 낯익다는 걸 깨달았다.

“눈의 거인?”

샤만의 목소리가 불신과 경악으로가득 찼다.

“온다!”

“샤만님을 지켜라!”

쿠구구구구.

설산이 흔들렸다.

천도 아닌 사백육십 명임에도 일으키는 진동이 보통이 아니었다.

북해빙궁은 먼지 구름, 아니 눈구름을 일으키며 언덕 위에서부터 내려와 설화족과 충돌했다.

“죽어라!”

“크아악!”

“아악!”

사백육십 명의 다민족과 이천여 명의 원주민이 충돌하자마자 금속음보다 비명이 더 크게 터져 나왔다.

눈으로 지어진 집은 빙궁의 무사에게 짓밟히고, 부서졌다.

적과 아군이 뒤엉켰다.

새하얀 눈 위로 피가 번지는 모습은 도화지 위에 흩어진 먹물과도 같았다.

“밀어붙여!”

동설련의 목소리가 동산 전체에 메아리쳤다.

“오오오!”

선봉장이 길을 열자 북해빙궁도 함성을 내지르며 따라갔다.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돌파력을 집중시킨 쐐기 진형으로 돌진했다.

“아아아악!”

“커헉!”

구 할 이상이 여성 들로 이루어진 전장이었으나, 그 참혹함은 중원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검에 베이면 내장이 쏟아지고, 동맥을 찌르면 뜨거운 피가 꿀렁꿀렁 넘쳤다.

머리카락이 길면 방해였다.

적의 손에 잡혀 끌려 들어가 난도질당하고, 얼굴에 주먹을 맞아 멍이 들었다.

미인 천지인 북해인이나, 그 얼굴이 참담하게 변하는 건 한순간에 불과했다.

“뭐하고 있느냐!”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한 함성,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의 틈 사이에서 샤만의 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전멸이다.’

샤만은 믿고 있던 설인의 무리가 사냥당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가, 비명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언제까지고 놀랄 수는 없었다.

“적의 숫자는 고작 사백을 조금 넘을 뿐이다!”

설화족은 이천이다.

전력 차는 두배 이상이었다.

“눈을 걷는 자들의 힘을 보여 주어라!”

샤만이 나무 가면을 들썩이며 외쳤다.

“우오오오오!”

“막아라!”

샤만의 목소리는 설화족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단순히 사기를 끌어 올리는 수준이 아니다.

전의를 끌어올리며, 두려움을 없애고, 통각을 줄인다.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 감각이나 감정을 조종하는 주술이었다.

주술사는 상징적인 존재인 동시에 천지의 조화를 일으키는 요술사이다.

그 힘은 진짜였다.

아쉬운 건 적의 뇌에 영향을 끼치는 못하는 점이었다.

설화족이 주춤거렸던 것도 잠시, 샤만의 주술을 등에 업은 전사들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어딜!”

모처럼 잡은 승기를 내어줄 동설련이 아니다.

북해빙궁의 선봉장답게 그에 걸맞은 전력을 보여 주었다.

빙한지기가 흘러나오며 검신이 은은하게 빛났다.

서걱!

동설련의 검은 북풍한설처럼 매섭고, 지독하게 차가웠다.

피부가 조금이라도 닿으면 동상을 입었다.

몸은 뻣뻣해지고, 박동은 늦어진다.

전의로 인한 열기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차가워졌다.

파바바밧!

북해제일의 검수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비명이 난무했다.

안개처럼 뿜어진 핏방울은 눈송이가 됐다.

“동설련!”

팔이 잘린 설화족의 전사가 몸을 돌려 뼈로 된 칼을 횡으로 그었다.

복수를 위해 안간힘을 쥐어 짰다.

채앵!

불행하게도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화족의 여전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남자 따위가!”

고래의 뼈로 제작된 도를 막아 낸 건, 막마르였다.

막마르는 여전사의 칼을 비껴 쳐올린 뒤, 제자리에서 화려하게 반바퀴 돌아 적의 목을 베었다.

암살자처럼 고요하면서도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정찰이 주인 부대이나, 우두머리인만큼 무공도 범상치 않았다.

“약탈자 년들아!”

설화족의 대전사, 티시샤크가 나서서 고함을 질렀다.

“죽여 주마!”

왼쪽 눈 위에서부터 오른쪽 뺨 부근까지 발톱이 새겨진 흉터가 인상적이다.

그녀가 몸을 날렸다.

몸집만큼 체중이 상당한지, 걸을 때마다 땅이 쿵쿵 울렸다.

아군의 심장도 진동에 맞춰 맥박 쳤다.

“꺄, 꺄아악!”

정면에 선 빙궁의 무사가 질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몸을 옆으로 날려 피하고 싶었지만, 공포로 인해 다리가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면 티시샤크의 입가에는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눈앞의 적이 땔감처럼 쪼개지는 모습이 보였다.

째애앵!

“아니?”

불꽃이 튀었다.

병장기가 부딪치면서 낸 마찰음이 터졌다.

티시샤크의 눈도 크게 떠졌다.

“물러나세요!”

낙소월이 티시샤크의 경골도(世克骨刀)를 밀어냈다.

적에게 한 말이 아니다.

위험에 빠진 아군이었다.

“내 칼을 막아 내?”

티시샤크의 얼굴이 울긋불긋 해졌다.

이름 없는 자에게 막혔다는 치욕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오냐, 이것까지 막아 내나 보자!”

티시샤크가 코웃음 치면서 음한진기를 끌어 올렸다.

원주민이건, 이민족이건, 다민족이건 간에 북해인 태반이 빙한공을 수련한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단전에서부터 힘을 끌어 올리자 경골도에 새하얀 아지랑이가 맺히나 싶더니만 결집됐다.

쩌저적!

낙소월의 검에 새하얗게 서리가 끼었다.

적의 공력이 침투했다는 증거였다.

“어떻……”

티시샤크가 비아냥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었어야 할 검이 순식간에 서리를 날려 버리면서 매향을 내뿜었던 탓이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검에 맺힌 기의 결집체였다.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티시샤크는 질겁했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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