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해까지 흔쾌히 동행해 준 사매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낙소월은 좋아서 따라온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힘들다고 말한들, 무엇이 달라지기라도 하나?”
날이 선 목소리가 도중에 끼어들었다.
주서천과 낙소월의 시선도 저절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빠르군.’
이상 기후는 북해의 역사에서도 이례적이다.
아무리 추위에 익숙한 북해인이라고 한들, 극한의 환경 속에서 불만이 안 생길 리가 없었다.
그동안은 궁주의 명이 있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외부인, 그것도 중원인의 통솔을 받아야 하는 사실도 탐탁지 않았다.
결국 참아온 불만이 폭발했다.
‘다소 거친 방법을 동원해도 괜찮다고 했으니 …… 음, 좋아. 마침 무공의 시험 상대가 필요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얇고 곧은 눈썹, 오뚝 선 코와 두툼한 입술에 이목구비는 뚜렷했다.
정수리의 뒤편으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은 화려하진 않으나 곱게 느껴지는 은빛이었다.
치켜 뜬 눈꼬리 탓에 인상이 사납게 느껴졌고, 굳게 닫힌 입술은 어딘가 모르게 고집이 느껴졌다.
방한복 차림임에도 가슴 부근이 눈에 띄는 걸 보면 상당한 몸매의 소유자인 듯했다.
연령은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으며, 웬만한 남자들만큼의 장신이었다.
북해빙궁의 최고수, 동설련(冬雪連)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주서천을 노려보듯이 쳐다봤다.
‘남자, 그것도 이런 애송이 따위가 검신이라고?’
음한진기가 주력 무공인 북해에선 여자는 강자고, 남자가 약자인 게 보편적이다.
중원과는 반대였다.
중원처럼 북해도 남고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서천처럼 터무니없이 어리진 않았다.
특히 그런 그가 검수의 정점이자 동경의 대상인 검신이라는 점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동설련.”
주서천이 동설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시선엔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은 동설련에 대한 걸 떠올리고 있었다.
‘북해궁주 다음의 최고수이자 북해제일의 검수, 동설련.’
출발 전 냉악비와 하와르에게 동행할 몇몇의 주요 인물에 대해서 들었다.
동설련은 그 대표 격이었다.
겉보기엔 자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나지 않는 것 같지만, 올해 불혹을 넘었다고 들었다.
“힘들다고 말한들, 무엇이 달라지기라도 하냐고 말했다.”
동설련은 적의 가득한 눈으로 답했다.
“힘든 사람이 한둘은 아닐 텐데.”
“중원인과는 달리 북해의 무인은 힘들어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네요.”
낙소월도 면전에서 받는 모욕은 참기 힘든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허리춤의 검으로 옮겼다.
이에 주서천이 낙소월에게 손을 내저어,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몸짓을 보였다.
“동설련!”
주서천이 동설련과 마주 보며 말했다.
“음한공을 익히지 않은 중원인이 북해의 추위에 힘들다고 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하물며 북해에서도 예외적인 이상 기후니, 이상할 건 없다.
무엇보다 나의 사매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다.”
“흥.”
동설련은 콧방귀로 답했다.
“동설련.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면 명백한 시비로 받아들이고, 상관에 대한 모욕으로 처벌을 내리겠다.”
“상관에 대한 모욕?”
동설련의 사나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중원인이 어찌하여 상관이 될 수 있겠는가.”
얇고 긴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내 위에 계신 분은 궁주님 한 분뿐이다.”
“나는 그 궁주의 명으로 공동지휘관으로 임명됐다.
그 말은 곧, 날 위로 두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냐?”
“간교한 혓바닥으로 잘도 지껄이는구나.”
스릉.
동설련의 허리춤에서 새하얀 검신을 자랑하는 명검이 매끄럽게 빠져나왔다.
“동설련공.”
하와르가 동설련을 막으려 한 걸음 앞섰다.
“괜찮습니다.”
주서천은 하와르에게도 나서지 말라는 몸짓을 보냈다.
“마침 본보기가 필요했는데, 잘됐군.”
북해의 사회는 약육강식이다.
아무리 냉악비에게 인정받았다고 한들, 직접 힘을 보이지 않는다면 북해인은 따르지 않는다.
또한 하수는 고수의 경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탓에 그 강함을 눈으로 보기 전엔 믿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나 주서천은 북해인도 아닌, 외부인인 중원인이니 반감이 더욱 심했다.
상천이라 해도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실제로 이곳까지 오면서 동설련 외에도 그를 고깝게 여기는 시선이 반이상이었다.
이 상태로 전투에 임하면 통솔을 받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 사전에 기강을 바로잡을 필요성이 있었다.
“나와라.”
동설련이 동굴 밖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됐네.”
“검신이라고 해도 결국은 중원인일 뿐.”
“천하의 무학이 중원에 있을지 몰라도, 천하제일의 무학은 북해지.”
“중원은 북해처럼 숨을 쉬는 것만으로 얼어 죽는 혹독한 땅도 아니지 않나. 결국 울타리 안의 양에 불과해.”
강자생존인 북해인은 명문정파 못지 않게 자부심이 상당했다.
대놓고 얕보는 발언을 남발했다.
“검을 뽑아라.”
동설련의 차가운 눈동자에 편히 서 있는 주서천이 비쳐졌다.
“나름 준비된 거니까 와라.”
주서천이 눈 위를 발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동설련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냐며 화를 내려다가, 발목 높이까지 쌓인 눈 위에 서 있다는 사실에 목너머로 치밀어 오르던 분노를 집어삼켰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지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가……’
동설련은 오른손에 쥔 검을 바로 고쳐잡았다.
오백여 명의 북해인과 두 명의 중원인의 시선 속, 먼저 움직인 것은 적의를 보냈던 동설련이었다.
타앗!
동설련이 지면을 박차고 눈 위로 몸을 올렸다.
발이 약 칠 촌(寸) 높이로 쌓인 눈을 밟았으나, 신기하게도 가라앉지 않았다.
마치 지면을 달리는 듯했다.
등평도수처럼 경공의 상승기법인 답설무흔(踏雪無狼)이었다.
눈을 밟고 뛰는데도 발자국이 없었다.
‘화산의 검이 빙궁의 검에 얼어붙는 걸 보여 주마.’
하복부에서부터 내공, 음한진기를 끌어 올렸다.
북해의 대자연에서 쌓인 차가운 기운이 피어올라 몸의 내부를 거쳐서 손끝을 지나 검에 실렸다.
빠드득!
대기 중의 수분이 얼어붙으며 안개가 서렸다.
검이 지나간 곳에 생긴 안개는 마치 얼음꽃과 같았다.
동설련은 빙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주서천에게 나아가 음한진기가 일렁이는 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 시간 역시 공기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게 아니다.
주서천의 사람을 상회하는 감각 덕분이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검 끝에 새하얀 아지랑이가 얼음처럼 굳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검강.’
선발대의 구성원은 고수가 가득한 북해 내에서도 정예이다.
검강이야 놀랄 것이 아니었다.
동설련은 특히나 북해빙궁의 최고수로 알려져 있다.
그 무력은 화경의 경지에서도 상위에 속해 있었다.
스윽.
주서천은 유령보로 가벼워진 발걸음을 보여 주었다.
오른발을 한 걸음 퇴보하고, 몸을 우측으로 트는 동시에 좌장(左掌)으로 공진장을 펼쳤다.
좌에서 우로 움직인 손바닥이 동설련의 새하얗게 물든 검강을 후려쳤다.
손바닥이 닿은 순간, 검강에 실린 극한의 진기가 공력으로 전환되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리석은 놈!’
동설련은 끝내 검을 뽑지 않고, 손으로 대응하는 주서천을 보고 속으로 비웃었다.
‘북해의 이대신공, 빙령신검(氷靈神劍)을 무기도 아닌 맨손으로 대응한 순간부터 끝이다.’
빙령신검은 북해궁주의 빙백신공과 견줄 정도의 절세신공으로 이름 높았다.
북해에서도 극한이자 극음에 이르는 빙한공으로서, 접촉한 부분은 물론이고 공기까지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악명 높았다.
추위에 내성이 있는 북해인조차 고음한 진기, 아니 빙한진기(氷寒眞氣) 앞에선 속수무책일 정도였다.
그러나 동설련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무슨……?’
매섭게 뜬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원래라면 놀라 물러서야 하거나, 혹은 갑작스런 내상을 입었어야 할 주서천이 그대로였던 것이었다.
‘과연 이것이 말로만 들었던 빙령신검인가.’
동설련에 대해서 들었는데, 빙령신검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때문에 주서천은 그녀가 어떤 무공을 펼칠지 잘 알고 있었다.
생각 없이 맨손으로 쳐낸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한서불침과 넘치는 내공이었다.
한서불침이란 건 이름 그대로 한기와 열기가 불침하는 경지를 뜻한다.
이는 곧 내공의 소모 없이 추위나 더위를 버틸 수 있다는 걸 뜻한다.
빙령신검처럼 극한의 무공에 있어서 한서불침은 상성인 데다가 우위에 속해 있어, 공력을 최소화시킨다.
심지어 압도적인 내공량이 있는지라 정면으로 부딪친 빙령신검의 빙한기를 말끔히 소멸시키기까지 했다.
동설련에게 있어선 악몽이었다.
동시에 주서천은, 검에 실어 얼음처럼 굳힌 강기를 공진장으로 흔들어 순간적으로 분산시켰다.
빙령신검이 통하지 않은 건 물론이요, 순식간에 무력화되자 동설련의 예쁜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중소보.’
쿠웅!
주서천이 제자리에서 운기를 바꿨다.
신행백변의 묘리 덕에 성질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벼움을 버리고, 대신 묵직함을 가져온다.
발이 ‘푸석’ 하고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강격권으로 친다.’
좌수와 우측으로 밀려난 허리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그러자 무게를 더한 근육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주서천은 묵직함이 실린 하체는 내버려 둔 채, 허리에 이어진 상체만을 살짝 틀면서 오른손 주먹을 아래에서부터 사선을 그려내 동설련의 복부에 꽂았다.
퍼어억!
“커허억!”
동설련이 눈을 부릅떴다.
피가 나오진 않았으나, 입에선 고통스러운 숨이 크게 흘러나왔다.
복부에서부터 시작된 충격은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몸 전체를 훑었다가, 기어코 뇌를 흔들었다.
상체는 아래로 쏠리고, 등은 활등처럼 굽어졌다.
이윽고 그녀의 몸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동설련은 경악과 불신 어린 감정을 꺼져 가는 의식 속에 빼앗기며, 그몸을 주서천의 어깨에 맡겼다.
“……”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일동은 침묵에 잠겼다.
‘방금 뭘 본 거지?’
오백여 명 전원 얼음처럼 굳어선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그들의 감정 역시 경악으로 가득 찼다.
몇몇은 너무 놀랐는지 입을 쩍 벌린 채 닫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특히 하수들은 고수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지 못해 인지 부조화를 일으켜 의심하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건, 북해제일의 검수가 중원의 검신을 공격했다가 순식간에 당했다는 것이었다.
검이 아닌 주먹 그것도 일격에 말이다.
‘……응?’
한편, 장본인인 주서천도 어이없긴 마찬가지였다.
‘힘을…… 너무 썼나?’
공진장이나 강격권이나 적의를 가진 상대에게 제대로 된 일격을 가한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화경의 고수, 그것도 환경적으로 유리하니 나름대로 전력을 다해 상당한 공력을 끌어 올렸다.
한데 생각보다 위력이 대단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주서천의 경지는 현경이다.
아무리 익숙지 않은 무공이라 해도, 현경의 깨달음과 답습이라는 심상구현도 있으니 그 위력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과거에 싸워 본 소류금처럼 상성으로도 우위에 있으니 그 결과야 볼 것도 없이 당연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북해인들은 혀를 내두르고는, 경외의 시선으로 주서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궁주께서 괜히 저자를 인정한 것이 아니로구나.’
‘검도 아닌 주먹 그것도 일격으로 제압할 줄이야!’
‘아까 전에 내가 한 욕을 들은 건아니겠지?’
‘원인이라고 상천을 얕보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무섭도다.’
북해의 사회는 약육강식이요, 강자생존이다.
마교만큼이나 힘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었다.
겉으론 준수하게 생긴 청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북해의 강자를 일격에 쓰러뜨리자 태도가 바뀌었다.
다들 슬금슬금 눈치를 보곤, 침을 꿀꺽 삼켰다.
‘전에는 유령이더니만, 이번엔 권법까지……’
낙소월은 아까 전의 기분 나쁨을 보이기는커녕, 어딘가 모르게 고심이 깊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동문의 사매답게 방금 전의 움직임이 화산의 어떠한 무공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였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동설련이 의식을 차리자마자 한 말이었다.
“식견이 부족하여 실례를 범하였소.”
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목소리나 몸짓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사과할 사람은 한 명 더 있는 것 같은데.”
“매화검봉께도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소.”
그 말에 동설련이 순순히 인정하고 사죄했다.
“생각보다 시원시원하시네요……”
낙소월이 진이 빠지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검신의 무공을 인정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타고난 전사인 그녀는 공수를 교환한 상대가 강자라면 인정하고, 존중하지요.”
하와르가 답했다.
“그러면 아까는 어째서 말리신 건가요?
혹시 사형께서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아니오. 그녀의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궁주의 명을 무시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와르는 충신이었다.
동설련을 막아서려고 했던 건, 궁주의 명을 간접적으로 무시한 언사 탓이었다.
“좋아.그러면 나도 용서하겠다.
앞으로는 선발대의 선봉장으로서 도와주기를 바란다.”
“물론이오.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만 물어봐도 괜찮겠소?”
“뭐지?”
“중원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화산파는 검의 명문이라 들었는데…… 나를 일격으로 쓰러뜨린 권법이나, 보법도 화산파의 무공인거요?”
주서천은 동설련의 물음에 침묵했다가 답했다.
“……적당히 움직였을 뿐이다.”
“으음, 이상하구려.
눈 위를 달린거야 답설무흔이라 쳐도…… 검신을 후려친 장법이나 권격은……”
동설련은 화경의 고수다.
그것도 타고난 무사였다.
무공에 대해서 나름대로 여러중원의는몰라도그리 자세히가지에 조예가 깊어 아는 것이 많았다.
주서천은 그녀의 예리한 질문에 버무렸다.
“동설련. 그대는 상천인가?”
“그건…… 아니오.”
“그러면 나보다 하수겠군.”
“그렇소.”
“그러면, 북해는 하수가 고수의 여u 움직임을 보고 그 원리나 경지에 대해서 완벽히 알 수 있는가?”
“그렇지 않소.”
“그런 거야.”
동설련은 아직 무어라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으나, 주서천의 논리에 막혀 끝내 항변하지 못했다.
“그런 것보다 눈 폭풍이 멎고 있으니, 출발할 태세를 갖추도록.”
“그리하겠소.”
동설련과의 비무는 명령 체계의 변화를 불러왔다.
따르기는 해도 탐탁지 않아 하던 오백여 명의 무사들이 이제는 불만없이 따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주서천을 만족하게 했다.
빙궁의 무사가 채비를 갖추는 동안, 주서천은 주요 인물을 불러 목적에 대해 재차 설명을 들었다.
“검신께서 북해를 방문하기 전 본궁은 이산빙곡에 진군한 적이 있습니다만 생각보다 많은 북해의 여러 세력이 포진되어 있어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표 세력은 정찰대장, 막마르가 설명해 줄 것입니다.”
막마르는 이십 대 초반에, 머리카락으로 왼쪽 눈 부근을 가린 단발의 북해인이었다.
오른쪽 눈은 청안이었다.
북해빙궁은 중원인, 달단인 등의 이민족과 북해의 원주민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국적인 생김새는 이상할건 없었다.
다만, 주서천이 막마르를 보고 놀란 이유는 중원의 웬만한 여인보다 아름다운 사람인데도 남자라는 점에 있었다.
“ 이 산빙곡에 주둔한 부족 중 눈여겨봐야 할 이들은 이민족의 사하와 원주민족의 설화(雪靴)입니다.”
목소리 또한 낮지도, 높지도 않은 저음인지라 중성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사하는 빙궁이 북해를 밟은 뒤, 시간이 흘러 의견이 맞지 않아 흩어진 이주민을 시조로 두고 있으며, 수가 많습니다.
설화는 빙궁이나 사하가 도착하기도 전, 고대부터 이 북해에서 얼음으로 된 집을 지으며 살아온 원주민인데 소수 부족인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일기당천의 기백을 지닌 전사들입니다.”
“사하와 설화……”
“그중에서도 저희가 싸워야 할 적은 후자의 설화가 될 것입니다.”
“소수 정예끼리의 싸움이로군.”
“그렇습니다.”
냉악비가 통솔자인 후발대는 정예가 아닌 수적으로 승부한다.
그 상대는 단연 사하가 될 것이리라.
“이산빙곡은 엄밀히 말하자면 세 개의 산맥에 둘러싸인 장소이나, 양옆의 산의 위용이 유난히 눈에 띄어 이산빙곡이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서산(西山)으로는 사하가, 동산(東山)으로는 설화가 주둔해 있으며 선발대는 이산빙곡의 남부 산맥을 타고 동산에서부터 습격할 예정입니다.”
“사하와 설하 양측 다 외부인에 대한 배척이 심해 서로 간에 동맹은 없을 것이니 외부 세력의 지원은 걱정하실 필요 없소.
궁주께서 서산의 사하를 맡으실 테니, 안심하고 동산의 설화를 공격하면 되오.”
동설련이 덧붙여 설명했다.
“문제는 남부 산맥을 통해 이동하는 일입니다.
안 그래도 험준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상 기후로 인해 더 괴상하게 변하였습니다.
지면인줄 알고 밟았는데 눈뿐이라 절벽 밑으로 떨어지거나, 혹은 위에서 얼음 조각이 날아와 즉사하는 일도 빈번합니다.”
막마르의 미려한 눈썹이 찡그려졌다.
앞으로의 여정이 여러모로 걱정이었다.
* * *
선발대가 이산빙곡의 남부 산맥에 진입했다.
빙설의 폭풍은 잠시 멎었으나, 극한의 기온 탓에 성가셨다.
찬바람이 뺨을 스칠 때마다 칼로 베이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물론 내공이 약한 자들에 한해서다.
“그래서, 그 무공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
옆에 동행한 낙소월이 뱀새눈으로 추궁했다.
허연 김을 내면서 잘도 말한다.
‘사매에겐 딱히 숨길 일은 아니지만……’
천하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 건 둘째 치고, 이미 유령신공의 절기를 터득한 것도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성질이 다른 무공 여럿을 익힌 것을 알려 줘도 문제는 없긴 했다.
‘하지만 사파의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듣게 되면 여러모로 충격받을지도 모르고……’
낙소월이 정파인 특유의 고집이나, 꽉 막힌 부분이 없다 치더라도 담담히 받아들이진 못할 것이다.
주서천은 그 점을 걱정했다.
물론 낙소월이니 사파의 무공을 익혔다고 배신자 취급을 하진 않겠지만,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것이 걱정됐다.
사랑스러운 사매가 그로 인한 내적갈등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매.”
주서천은 고심 끝에 낙소월의 양 어깨를 붙잡곤 마주 봤다.
“네, 네?”
낙소월은 주서천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당황했다.
극한의 추위 속인데도 뺨에 열기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마주 본 시선 속에서 무언가가 흘렀다.
“미리 말하지만, 사매를 신뢰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다만,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사실을 알려 줄 수가 없어 …… 사매가 그 점을 부디 이해해 줬으면 해.”
“가, 가까워요. 사형.”
낙소월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떨렸다.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처럼 작았다.
“미안해. 하지만…… 모든 일이 끝나면, 반드시 이야기하겠다고 약속할게.”
주서천은 낙소월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누구보다 소중하기에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사형……”
낙소월도 주서천의 진지한 표정에 말꼬리를 흐렸다.
“분위기가 한창인데 죄송하오나, 일이 생겼습니다.”
선두의 막마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낙소월은 그제야 남들이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곤, 부끄러운지 황급히 뒤로 물러나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일? 적이군.”
주서천의 예리한 감각 속에 살의가 잡혔다.
“아직 남부 산맥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누구요?
사하? 설화?”
“둘 다 아닙니다.”
막마르가 검지로 한곳을 가리켰다.
“설인(雪人)입니다.”
쿠오오오오―!
막마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으로 가득한 산에 괴성이 메아리치며 울렸다.
쿠구구구.
산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울렸다.
가파른 언덕에 쌓인 눈 더미가 움직일 기미를 보였다.
눈사태인가 싶어 다들 흠칫 놀랐지만, 다행히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대신, 괴성의 주인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얼굴을 굳히며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설인……?”
주서천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설인에 대해서 모르십니까?”
“아니,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요괴이지 않습……”
주서천은 말을 잇다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눈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얀 털이 손과 발, 얼굴을 제외하고 뒤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팔 척에 이르는 신장에선 위압감이 절로 느껴졌다.
게다가 단순히 큰 것만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근육질이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웠고, 쩍 벌어진 입 안에 강철 같은 송곳니가 보였다.
전설로 전해지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수십에 이르는 설인이 선발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저, 정말로 설인?”
낙소월도 설인을 보고 놀란 모습이었다.
“……뭐, 인면지주도 있는데 설인정도야.”
주서천 입장에선 그렇게까지 놀랄 것까지도 없었다.
남해에선 용으로 불리는 이무기도 보고 왔다.
“다만, 설인에 대해선 듣지 못해 당황스럽군.”
“저희도 설인을 보는 건 처음입니다.”
하와르가 사나운 울음소리를 내는 설인을 보고 말했다.
“설인은 낯을 많이 가려 사람과 접촉하기 꺼린다고 들어 북해에서도 목격담이 손에 꼽힙니다.”
하와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북해의 식량난이 사람만이 아니라 설인에게도 영향을 끼친 모양이군요.”
“그리고 문제는 그것이 불행히도 그리 좋은 영향은 아니라는 거다.”
동설련이 손에 쥔 검이 새하얗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