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의 중부에는 강에 이어 바다와 이어진 호수가 위치해 있다.
그 크기는 몹시 컸는데, 왜 내해로 불리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날씨는 이리 추운데도 호수나 강이 얼지 않은 게 신기했다.
“내해와 연결된 강의 물살이 거세서 잘 얼지도 않거니와, 최북부에서부터 흘러들어 오는 ‘얼지 않는 강’이 온천수라 따뜻해 생각보다 차갑지 않습니다.
여름이 되면 이 강에 몰려 계절 내내 물고기를 잡고, 물장난을 치기도 하지요.”
하와르가 주서천의 의문에 친절하게 답해 줬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북해에 대한 지식을 알려 줬고, 덕분에 약 일주일 동안 심심하진 않았다.
북해에 도착한 일행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궁전을 보곤 감탄사를 감추지 못했다.
“와아……”
“오……”
낙소월과 주서천은 눈앞의 장관을 살펴봤다.
호수, 아니 북해를 등 뒤로 두고 극한의 땅 위에는 위용을 실감케 하는 궁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전해지는 말처럼 얼음으로 지어진 건 아니고, 눈처럼 새하얀 대리석이었다.
다만 눈에 쌓여 있고, 워낙 하얗다 보니 햇빛에 반사되면 속이 투명한 얼음으로 착각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점이었다.
눈보라 탓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 시야가 가려진 덕일까, 왠지 모르게 신비로움이 묻어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분위기였다.
주서천과 낙소월, 그리고 소령은 하와르의 안내를 따라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빙궁의 내부도 특이했다.
외관을 보면 척 봐도 중원이 아닌 이국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그러나 궁의 내부를 구경하기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그만두어야 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군요.”
“얼마 전부터 배식(配食)의 할당량이 줄은지라 다들 예민한 상태입니다.
또한, 중원인이 빙궁을 방문하는 것은 몇십 년이나 더 된 일인지라……”
“경계로군요. 이해합니……”
주서천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피 냄새?’
코끝으로 미세하게나마 혈 향이 찔렸다.
무인인 만큼, 그리고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신체 능력을 가진 절대고수다 보니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힐끗 돌려 봤지만 외부인을 경계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여인들밖에 없었다.
평소 눈을 가리고 다니며 오감이 발달한 소령도 눈치챈 모양인지, 방한복의 소맷자락이 흔들렸다.
주서천은 눈짓으로 수령에게 일단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린 다음, 마음을 가다듬었다.
‘무언가 있다.’
그것도 순탄하지 않은 무언가가.
북해는 유난히 미인이 많다.
그 아름다움은 워낙 이름나 있어, 중원은 물론이요 새외까지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는다 하면 몇십 년 전부터 이름을 알린 빙궁의 주인이었다.
“만나서 반갑도다. 본 녀가 빙궁의 주인, 냉악비(冷岳飛)니라.”
주서천은 냉악비의 얼굴을 보고 절로 감탄했다.
눈처럼 흰 피부 위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고대의 신이 빚은 것처럼 완벽했으며, 이마를 살짝 드러내는 머리카락은 양옆으로 갈라져 폭포수처럼 쏟아졌는데, 그 색채는 빙하처럼 청백색이었다.
눈이 내리면 쌓일 것 같은 속눈썹 아래에는 북해처럼 깊고 깨끗했으나,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속내를 알아볼 수 없는 신비감이라기보단, 세상과 단절한 것처럼 얼어붙어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또한,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옷차림이었다.
북해인이라 해도 하와르를 비롯한 이들은 털가죽으로 된 방한복을 입었는데, 그녀는 백의 차림이었다.
놀랍긴 하지만 이상하게 여길 건 아니다.
현경의 고수, 그것도 빙한공의 절대자가 추위를 느낀다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었다.
‘생각보다 젊다.’
외관을 보자면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 정도로 추정되나 당연히 그게 진짜 나이일 리는 없었다.
‘북해궁주, 냉악비……’
북해 무림의 일인자이자 지도자, 북해궁주는 대대로 절대고수에 천마처럼 빠짐없이 이름을 올린 강자다.
냉악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들은 것에 비하면 냉악비의 최소 연령은 육십 이상인 노파일 텐데…… 절대고수에 오르면 잘 늙지 않는다고 해도, 너무 젊다.
권동제처럼 특수한 경우인가?’
주서천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인사에 답했다.
“북해의 상천을 만나 영광이다.
화산파의 사대제자이자, 상천육좌인 검신 주서천이다.”
“궁주님 앞에서 예를 보이시오.”
궁주 혼자 주서천을 보러온 게 아니었다.
궁주의 알현실로 부름을 받은 공식적인 자리였다.
냉악비를 보좌하는 몇몇 노파들이 주서천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됐다.”
냉악비가 새하얗고 긴 손가락을 들어 제지했다.
“검신, 상천육좌라면 본 녀와 대등한 고수이니, 나 혼자만 하대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주서천을 탐탁지 않아 하던 이들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태도를 보니 궁주의 권위가 빙궁 내에서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검신이여, 도움을 받아들인 것에 감사하는 바이다.”
“서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거래이니 그리 감사하게 여길 건 없다.”
주서천은 불안감에 대비하여 일을 확실히 했다.
만약 무언가 이상한 게 껴 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걱정할 것 없도다. 법보를 파괴한다면 본 녀가 직접 빙궁의 정예를이끌고 암천회와 싸울 것이니라.”
“알겠다. 그러면 당장 법보의 파괴를……”
“법보를 둘러싼, 북해의 부족을 물리친다면 말이다.”
주서천이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거래는 끝이다, 북해궁주.”
그 얼굴은 볼 것도 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주서천은 북해가 먼 탓에 수많은 고민을 한 뒤에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제갈상은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전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면서 오래 걸릴 것 같으면 그냥 돌아오라고 경고했다.
지금까지 멀리 돌아온 것이 아깝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이들이 막아 내면 북해와 척을 지고,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낙소월과 소령에게 언제든지 무기를 뽑을 수 있도록 눈짓을 보냈다.
하나 그 순간.
“과거, 중원을 침공하면서 흘러들어 온 무공들.”
주서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외에도 각종 보물에 대해 혹시 관심 없는가?”
북해궁주, 냉악비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이 빛났다.
‘당했다……’
주서천은 냉악비의 말을 들은 순간, 아차 싶었다.
북해궁주가 무슨 속셈이었는지 저절로 이해됐다.
“결코 나쁘지 않은 이야기니라.”
냉악비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회심의 미소도, 혹은 북해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간절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얼음처럼 차갑기만 했다.
‘과연, 북해의 지도자라는 건가.’
주서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몸을 다시 돌렸다.
“이야기는 들어 보겠다. 하지만, 예의 법보처럼 무언가를 숨긴다면 즉시 돌아갈 것이니 명심해라.”
“물론이다. 북해궁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냉악비가 고개를 까딱였다.
움직임에 따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그녀의 신비감을 한층 더 빛냈다.
“검신 그대도 오면서 봤듯이, 북해는 이상 기후로 인한 기근에 허덕이고 있다.
추위에 적응하여 화려하게 피는 꽃과 식물은 물론이요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내해조차 얼어붙었다.”
안 그래도 척박한 땅이었다.
몇 년동안 추위가 지속되자 대지 위에서 뭐가 자라날 수가 없었다.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특수한 식물조차 이번 이상 기후엔 버티지 못했다.
북해에 새하얀 사신이 내려앉았다.
자연의 위대함이 아닌, 무서움으로 가득 찼다.
그야말로 재해였다.
“강이 어니 물고기는 물론이요, 조개나 해초도 건질 수 없게 됐고, 어류를 주식으로 삼는 크고 작은 동물들도 굶게 되면서 사람 또한 먹을 것이 없어졌지.
이 재앙은 법보, 만년빙정(凰年氷精)에서부터 시작됐다.”
“만년빙정? 전설에서나 나오는 만년빙정?”
주서천이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만년빙정 ……?”
낙소월은 잘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해의 대자연이 빚어낸 보물이니라.”
냉악비가 낙소월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빙정에 대해선 알고 있느냐?”
낙소월은 강호의 대선배이자 상천육좌가 직접 묻자 잠시 당황했으나, 더듬지 않고 또박또박 답변했다.
“앗, 네. 차가운 기운…… 그러니까, 음한진기의 정수가 한데 모여 얼음처럼 굳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평범한 사람이나 무인이 빙정을 취하면 그 자리에서 영혼까지 얼어붙겠지만, 북해의 사람처럼 빙한공 등 음한한 무공을 수련하는 이에겐 그 어떠한 보배보다 값진 것이지.”
“그리고, 그 빙정이 수많은 세월을 거쳐 북해의 기운을 흡수하게 되면 만들어지는 것이 만년빙정이야.”
주서천이 냉악비의 설명에 덧붙여 말했다.
“잘 알고 있구냐.”
냉악비가 신기한 듯 주서천을 바라봤다.
만년빙정은 북해의 전설이다.
교류가 적은 중원인이 자세히 알고 있으니 신기할 만했다.
‘암천회의 도감에서 봤으니까.’
주서천은 답하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만년빙정 역시 도감부의 조사 목록 중 하나였다.
다만, 지리라거나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조사가 행해지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대단하다면, 차라리 없애는 것보다 취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요?”
낙소월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 의문이, 지금의 사태를 불러 일으켰느니라.”
냉악비의 고운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만년빙정이란 건, 보다시피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기후를 뒤바꿀 정도의 기운을 품고 있다.
사람의 몸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거니와, 도리어 북해의 기운을 흡수한 것처럼 사람이 품은 음한진기를 흡수하겠지.
문제는 북해의 몇몇 부족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의 빙정만 해도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데, 만년빙정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독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욕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혹시’ 라는 생각이 얼어붙은 마음에 불을 지폈다.
“과연, 그런 뜻이었나.”
북해의 부족이 법보를 둘러싸고 있다는 말이 이해됐다.
즉, 내전 중이라는 걸 뜻한다.
북해빙궁 입장에선 참으로 골치 아픈 문제였다.
하루라도 빨리 만년빙정을 처리해야 하거늘, 욕심에 눈이 먼 북해의 부족들로 인해 쉽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제압하고 싶었지만, 강자들이 가득한 북해 무림답게 쉽지가 않았다.
“검신이여, 이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고 싶은 건 본 궁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안 그래도 얼마 없는 식량이 가속화하여 떨어진다면 북해빙궁 입장에서도 타격이 컸다.
초조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본 궁과 힘을 합해 만년빙정을 북해의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협력을 요청하는 바이다.
만약, 손을 빌려준다면 암천회와의 결전을 도울 뿐만 아니라 빙궁의 보고를 열어 합당한 보상을 내리겠다.
상승의 무공은 물론이요, 무림맹에 부족한 군자금의 지원 또한 본 녀의 이름을 걸고 약조하겠다.”
냉악비는 주서천과 마주 봤다.
주서천은 한참을 마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북해의 부름에 답한 것부터가 함정이었다.’
냉악비는 고의로 북해의 사정을 숨겼다.
‘중원에서 사정을 들었다면, 아무리 달콤한 제안이라 할지라도 시간부담 탓에 거절했을 거다.’
북해의 내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니 부담감에 일언반구 없이 거절했을 터.
그래서 일부러 내막을 숨기고 겉의 사정만 보여 줬다.
사실, 말을 안 했을 뿐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지라 항변하기도 뭐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은 건진 모르나 참으로 교묘했다.
“원한다면 보상을 본 뒤에 판단해도 상관없느니라.”
냉악비의 어조에서 제왕의 여유가 느껴졌다.
‘거부할 수 없도록 매력적인 걸 준비한 건가.’
주서천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꼼짝없이 낚시꾼에게 미끼를 물린 물고기 신세였다.
“제안을……”
말꼬리를 한 번 끌었다가……
“받아들이겠다.”
답했다.
‘후우.’
냉악비 대신 빙궁의 상층부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품은 고민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대신, 비급은 선불로 지급받겠다.”
“상관없다. 마침 출병하려면 시간이 비니, 그동안 마음껏 비급을 고르도록 하라.”
협상이 무사히 체결됐는데도 냉악비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마치 소령과 같았다.
“단, 빙궁의 무공은 제외한다. 또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무공 비급은 단 세 권뿐이 라는 걸 명심해라.”
“네 권.”
“……정점에 선 무인치곤 욕심이 많구나, 검신이여.”
“네 권.”
“흐응……”
북해의 무인은 팔 할 이상이 음한한 무공을 익히지만, 다른 성질의 무공을 안 익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중원예서도 손꼽히는 신공의 분류에 들어가는 건 북해에서도 놓치기 아까운 무공서였다.
굳이 익히지 않더라도 급할 때 돈 대신 사용될 수 있다 보니 그대로 내주는 건 아까웠다.
냉악비도 고민되는지, 시선을 옆으로 돌려 측근에게 의견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믿을 수가 없군.
이런 터무니없는……”
“이봐 세 권이야, 세 권 그것도 보고에서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비급에 보물까지 더한다고.”
“한 권 더?”
“도사는 물욕이 없다 하지 않았나?”
“중원인은 욕심이 많다고 하더니만…… ”
측근들은 목소리를 죽이곤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물론, 목소리를 줄여 봤자 절대고수의 귀는 피하지 못했다.
얼마 뒤 결정이 떨어졌다.
“미치겠구만…… 좋다! 네 권!”
“좋아! 바이를라! 네 권!”
참고로, 바이를라는 고맙다의 달단어였다.
북해 여정이 늘어났다.
무림맹에게 사정을 알리기 위해서 서신부터 보내기로 했다.
주서천은 빙궁의 여무사의 손에 서신을 쥐여 준 뒤, 냉악비를 따라서 북해빙궁의 보고로 향했다.
주서천은 지하의 계단을 통해 내려가던 도중 맑고 투명한 벽면을 매만지곤 물었다.
“이것도 대리석인가?”
“아니, 얼음이다.”
냉악비가 즉답했다.
‘신기하군.
성질 더러운 그 양반께서 본다면 좋아라 할 궁전이야.’
간야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북해궁주와의 협상으로 정신이 없어 미처 구경하지 못했으나 북해빙궁은 상당히 신기한 곳이었다.
우선, 내부가 생각만큼 그리 춥지 않았다.
도리어 따뜻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조사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궁 아래에 있는 어떠한 기문진 덕분이라더군.”
“기문진?”
“본 녀 역시 자세히 모른다. 워낙 오래된 일인 데다가, 궁의 근간을 흔드는 것인지라 궁주에게조차 그 내막에 대해선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면, 이 얼음은 뭐지?”
퉁퉁.
얼음벽을 손등으로 두들기며 물었다.
빙궁 내는 따뜻한데도 녹지 않는 얼음이 신기했다.
“그대는 마치 무인보다는 탐험자와 같구나.”
“모든 발견의 시발점은 호기심인 법이지.”
“천고의 명언이군.”
나선형으로 된 계단도 어느 순간부터 얼음으로 변했다.
특이하게도 별이 박혀 있는 밤하늘처럼 밝았다.
횃불이 걸려 있지 않음에도 앞이 훤히 보였다.
약 반 각 정도의 시간을 내려가자 끝없이 이어졌던 계단이 끝나고 얼음으로 된 문이 반겼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문 앞엔 잘 단련된 북해의 여고수가 경비로 서 있었다.
그녀들은 냉악비를 보자마자 곧장 부복했다.
“보고의 비급을 가지러 왔다. 문을 열거라.”
냉악비의 명에 얼음 문이 활짝 열렸다.
그 내부 역시 얼음으로 된 구조물로 가득했다.
“제한된 시간은 없으나, 본 녀가 궁주로서의 집무가 있으니 되도록 빠르게 선택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다른 곳도 아닌 빙궁의 보고다.
중요한 만큼 북해궁주가 직접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검신이나 되는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무인은 북해에서도 궁주가 유일했다.
“참고하지.”
주서천의 눈이 반짝였다.
‘이렇게 된 거 수지에 맞는 걸 가져간다.’
궁주의 집무가 쌓이건 말건 상관없었다.
후회가 되지 않도록 비급서는 전부 읽을 생각이었다.
보고에서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은 오로지 책장, 그것도 비급서가 분류된 곳뿐이었다.
그 외의 정보나 역사 등은 열람할 수 없도록 냉악비가 근처에서 감시했다.
주서천은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음으로 된 책장에 꽂힌 비급 서적을 꺼내읽었다.
‘많기도 하군.’
과거, 북해의 중원 침공의 규모가 컸던 모양이었다.
정사의 무공은 물론이요 마공과 혈공도 존재했다.
다만 그 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
상승의 무공 외에도 삼류나 이류에 준하는 것도 있었다.
마음 같아선 이름만 보고 고르고 싶었지만, 수량이 한정된 만큼 꼼꼼히 확인해서 골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약 한 시진이 될 무렵, 주서천은 결정한 듯 네 권의 비급서를 골라서 보여 줬다.
“끝났느냐?”
“그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결단의 번복은 용납되지 않느니라. 이후 보고로 들어오지 못하니 명심해라.”
“알았다. 대신에 개인 연무장을 잠깐 내줄 수 있나?”
“못 내줄 거야 없지만, 길어 봤자 닷새 정도다.
본 궁의 여유가 그다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만약, 냉악비의 감정이 풍부했다면 이맛살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참전하기 전에 잠시 몸을 풀고 싶을 뿐이니, 그 정도면 충분해.”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빌려주지.”
주서천은 냉악비의 답변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엔 기대감이 잔뜩 묻어났다.
‘좋아, 드디어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는구나.’
냉악비는 주서천에게 개인 연무장을 내주었다.
기한은 닷새.
주서천은 낙소월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수련에 들어섰다.
무공을 터득하기 위해서였다.
개인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자리에 앉아서 비급을 읽고 외우는 일이었다.
무공경지가 상승하면서 기억력 역시 좋아져서 그런지 암기하는 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다음에서야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섰다.
‘강격권(强擊拳).’
무공 비급 그 첫 번째는 단연 권법이었다.
화산파의 매화권도 있으나, 사실 매화권은 권법이라기보다는 무공의 기초를 갈고닦기 위한 준비 운동에 가까웠다.
상황에 따라선 검을 버리거나 날려 버린 뒤 손발을 쓰는 자신에게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부딪친 순간에 맞춰 강함을 더한다.’
직역하자면 세게 친다.
강격권의 원리는 단순하다.
이름그대로 강맹함을 실어 위력을 내는 것이 전부였다.
겉만 보면 그동안 해 온 방식과 비슷해 보이냐 엄연히 달랐다.
예전의 방식처럼 무식한 양의 내공을 주입해 가격하면 흘러넘치게 되며, 오히려 새는 경우가 생겨 비효율적인 면이 존재했다.
그러나 강격권처럼 정립된 무공을 사용하면 제대로 된 운기 덕에 쓸데없는 과소비를 막아 주고 최대의 위력을 내는 것도 가능했다.
강으로 비유하자면 전의 방식은 그저 강의 전체일 뿐이며 강격권은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 부분이었다.
‘일성(一成)은 기격(氣擊)의 사용법.’
기를 특정 부위에 실은 뒤, 부딪쳐 가격한다.
기초적인 부분은 알고 있는 것인지라 중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검을 다루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니 이 또한 필요 없는 과정이라 생각하지 않고 시간을 투자했다.
답습 덕에 일각밖에 되지 않았지만 .
‘다음 단계는 이성부터 오성까지 주먹, 팔꿈치, 어깨, 팔 순으로 강격을 싣는 법을 익힌다.’
권법이란 것이 주먹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보통은 맨손 무예로 알려져 있지만 팔의 운용법도 존재했다.
‘성취는 절반인 육성까지인가.’
십이성이 대성인 강격권의 절반이 육성이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반이란 한계는 아쉬웠다.
‘보법과도 조화를 이뤄야 한다.’
강격권에는 일합을 이루는 보법이 존재했는데, 그 이름은 중소보(重素步)였다.
중소보를 수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만중검의 교리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화려함 대신에 단출함을 중시하고, 일보는 묵직하게 내걷는다.’
화산파의 신행백변과는 반대되는 성질이었다.
신행백변은 이름 그대로 변화무쌍하여 기초적인 발걸음만 해도 백 가지에 이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도록 특화된 보법이었다.
화산의 변검에 알맞은 발걸음이었다.
반면에 중소보는 좋게 말하면 복잡하지 않고 간결하며, 나쁘게 말하면 단순한 형식이었다.
보폭이 넓고 움직임이 커 파악당하기는 쉬우나, 그 대신 강격권의 강맹함에 위력을 더해 주었다.
느릿해지는 것이 조금 흠이었지만, 한 걸음에 묵직함을 실은만큼 안정적이고 위력적이었다.
만중검과 접목시키기에 알맞은 보법이었다.
이로써 보법만 해도 세 종류였다.
변화의 신행백변.
가벼움과 신속의 유령보.
무거움과 안정의 중소보.
각 상황에 맞춰 대응할 수 있어 좋았다.
중소보의 기초를 다진 뒤 다음 무공으로 넘어갔다.
권법과 보법 다음은 장법(掌法)이었다.
‘공진장(共振掌).’
공진장!
무림인, 특히 사파인이 그 이름을 들었다면 눈이 시뻘게져선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설마하니 실존된 귀진(鬼震)의 장법이 북해에 있을 줄이야.’
주서천 역시 공진장의 이름을 보고 놀라워했다.
귀진의 활동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오래전부터 이름이 알려진 사도의 절세고수였다.
그리고 귀진의 독문무공이 바로 공진장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귀진의 공진장은 사람은 물론이요, 이승이 아닌 저승까지 흔들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주서천은 머릿속으로 공진장의 구결을 떠올리면서 어떠한 무공인지 파악에 나섰다.
‘유(流)의 무공.’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바닥을 매개로 하여 적의 몸에 접촉한다.
그 후, 상대의 기맥(氣脈)을 진동시켜 엉망으로 만든다.’
적의 외부를 쳐서 내부를 훼손시키는 기예,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었다.
‘과연, 유의 묘리로 기의 조작을 하는 건가.’
강의 흐름이 각기 다르듯, 사람의 몸 역시 서로 다른 흐름을 지니고 있다.
단연 그 흐름이 외부의 공격으로 인해서 급작스레 바뀌게 되면 몸은 적응하지 못해 문제가 생겨 버린다.
공진장은 이 점을 노린 외부의 공격 방법이었다.
‘음공 혹은 청성의 칠십이파검과 원리가 비슷하다.’
음공은 공기의 진동, 소리로 물리적인 파괴력을 낸다.
칠십이파검은 공기 대신 검의 진동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공통된 건 흔들리는 힘인 진동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공진장도 마찬가지 다.
손바닥의 충격파를 매개로 해 흐름을 조작하는 것이 그 원리였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다르지만 비슷했다.
“공진장이 조금 까다롭군.”
강격권이나 중소보는 매화권이나 내공의 응용 방식, 만중검 둥 기존에 쌓아 둔 것이 있어서 무척 쉬웠다.
그러나 공진장은 익숙지 않은 장법인 데다가 유의 묘리도 그리 자세히 알진 못하니 노력이 필요했다.
심상구현인 답습 덕에 성취의 속도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빠르나 그래도 꼼꼼히 하고 싶었다.
새로운 무공의 습득에 재미라도 들린 것일까, 주서천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무공에 집중했다.
닷새 후.
개인 연무장의 문이 열렸다.
“수고하셨어요, 사형.”
얼음으로 된 문을 여니 낙소월과 소령이 반겨 줬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뒤로 북해의 안내인, 하와르가 있었다.
“곧바로 말씀드리기에는 실례입니다만, 출전의 태세가 준비되어 마중나왔습니다.”
“연무장이 들어가기 전, 궁주께 들은 사항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로 가지요.”
하와르의 안내를 받아 냉악비를 만나러 갔다.
“어서 오너라.”
북해궁주의 집무실은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궁주의 위엄을 자랑하는 장식 따윈 없었다.
그녀의 성격을 반영한 듯 필요한 물건들로만 차 있었다.
책상이나 탁자, 서적이 꽂혀 있는 책장 정도밖에 없었다.
집무실이 넓다 보니 유난히 황량해 보였다.
“그대 또한 시간을 끄는 걸 원치 않아 보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느니라.”
딱히 이의가 없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년빙정은 본 궁으로부터 북부인 이산빙곡(二LU 氷谷)에 자리 잡고 있도다.
문제는 온 사방으로 빙궁 외의 북해의 세력들이 주둔하고 있어 그 여정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리라.”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왔다.
험난한 여정이 눈앞에 펼쳐졌다.
“과연, 그래서 상천의 힘이 필요했던 건가.”
상천육좌는 무립의 정점이자 신위의 무기이다.
북해의 무림에서 빙궁이 절대자로 군림할 수 있는 건, 상천육좌인 궁주 냉악비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찬데 두 사람으로 늘어 난다면 답도 없다.
단숨에 밀어붙일 수 있는 기회였다.
“빙궁의 무사는 삼천여 명에 이른다.
오백여 명은 궁의 경비로 남을 것이며, 이천오백여 명의 전력을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눌 예정이니라.”
무림맹이나 사도천, 마도이세 비하면 적은 편이지만 평균적인 무력이 높아 우습게 볼 수 없었다.
후에 물어보니 북해가 힘을 통합할 경우 만에서 만오천 정도라는 대답을 들었다.
“선발대는 오백여 명의 정예로 구성될 것이며, 검신 그대를 공동지휘관으로 삼을 것이니라.”
“공동지휘관?”
주서천이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리 상천이라고 한들, 외부인의 특히, 여성주의의 사회에서 남성의 통솔을 들을지 의문이겠지.
그대라면 듣기는커녕 무시할지도 모른다.”
“잘 알고 있군.”
“하나 걱정할 것 없노라. 이 혹한의 대지 또한 무림.
힘이 곧 법칙인 무림이니라.”
“그 말은……”
“명령 불이행 시 다소 거친 방법을 동원해도 걱정 없도다.”
“이해했다.”
“안내인, 하와르를 붙여 주마. 그 아이는 북해 제일의 길잡이이니, 길을 헤매진 않을 것이다.”
* * *
오백여 명의 선발대가 빙궁을 떠났다.
얼어붙은 강 위를 지나 북쪽으로 향했다.
“하늘이 미쳤구나.”
휘이잉!
눈 폭풍, 아니 빙설의 폭풍이 선발대를 덮쳤다.
출발부터 영 좋지 않았다.
북해의 날씨가 워낙 미친 탓에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는 이상할 것도 없었다.
전날에 부디 춥지 않기만을 빌었거늘 도로 아미타불이었다.
혹시 하는 기대는 배신당했다.
바람이 줄어들기는커녕 거세져만 갔다.
칼날처럼 매서워질 뿐만 아니라 얼음 조각까지 내렸다.
벽을 세울 정도로 높게 쌓인 눈더미는 발목이 아니라 다리가 파일 정도로 깊어졌다.
빙판길을 걷는 건지 아니면 눈이 쌓인 대지 위를 걷는지 모를 정도였다.
“으으으……”
“추워.”
북해인조차 치를 떨 정도의 추위였다.
그 정도로 기온이 낮았다.
괜히 식물과 동물이 전멸한 게 아니었다.
한빙공이 아니었다면 진작 얼어 죽었다.
일차적으로는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내공이 보호해 주고, 이차적으로 방한복이 추위를 막아 주었다.
그래도 추위에는 이골이 난 북해인이라서 버틸 수 있었다.
중원인이었다면 진작 죽었으리라.
“서늘하군.”
중원인, 주서천이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빙궁의 무사들은 그런 주서천을 보고 처음엔 어이없다는 듯이 조소를 흘렸다.
‘아무리 상천이라고 한들, 한빙공을 익히지 않은 중원인이 아니던가.’
‘꼴에 상천육좌라고 허세를 부리는군.’
‘저렇게 지껄이는 것도 한순간이다.’
상천육좌, 또는 중원인의 체면 탓에 자존심을 지키려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의혹과 경악으로 변했다.
“정말로 하나도 안 춥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하와르에게 들은 것인데, 저 중원인은 출발할 때 방한복을 하나밖에 안 걸쳤다던데?”
“그럴 리가……”
주서천은 춥기는커녕 무슨 일 있냐는 표정이었다.
동네에 산책을 나온 듯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가끔씩 얼음 조각이나 눈이 시야를 가리려고 하면 호신강기로 튕겨 내는 기예까지 부렸다.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하나도 안 추웠다.
이상 기후도 한서불침 앞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한 시진 거리 밖에 쉴 만한 동굴이 있습니다.
조금 이르지만, 폭풍이 거세 휴식을 취해야 할 듯 싶습니다.”
북해의 길잡이, 하와르의 조언에 맞춰 주서천도 명령을 내렸다.
“한 시진만 참아라! 폭풍을 피할 동굴에 도착한다!”
선발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차가 있어 한 시진하고도 좀 더 걸렸지만, 그래도 강을 넘어 지면을 밟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 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동굴이 나타나 그 안에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사매 괜찮아?”
주서천은 낙소월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낙소월은 한서불침이 아니라, 내공으로 한기의 침입을 막고 있는 것이니 몸 상태가 걱정됐다.
“조금 춥긴 하지만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주서천이 워낙 예외적이라 그렇지, 낙소월의 내공량도 보통의 수준이 아니다.
매화검수는 후보로 확정된 이후부터 영약 등 각종 지원을 받는다.
낙소월은 특히나 주서천의 도움으로 인면지주의 내단까지 섭취해 매화검수의 수준을 넘어섰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