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七章 (212/254)

수로채.

“……뭐?”

홍하랑은 술이 담긴 표주박을 넘기다 말고 물었다.

“백마채가 박살 났습니다.”

그녀의 심복, 수로부채주 야표가 답했다.

“그게 뭔 개소리야!”

콰직!

홍하랑이 손에 쥐고 있던 표주박도 박살이 났다.

술이 바닥을 적시며 알싸한 향이 퍼졌다.

“방금 전 들어온 정보입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몇 번이나 확인해 봤습니다.”

“말도 안 돼.”

홍하랑이 고운 눈썹을 찡그리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백마채주, 그 새끼가 주제를 모르는 놈이긴 해도 나름 고수인 데다가 머리도 비상한 놈이야.”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홍하랑과 함께 차기 총채주 후보로 이름을 올렸을 정도다.

나름대로 상위에 속한 인재였다.

“수하도 오백이나 거닐었는데 소리 소문도 없이 박살이 났다는 것도 이해가 안 돼.

그 정도면 최소 몇 배나 되는 전력을 데려왔어야 하고.”

땅 위도 아니라 강 위에서 싸웠다.

고수를 데려와도 불리할 정도로 환경이 좋지 않다.

“그 정도 되는 대군을 움직였다면 강 위건 땅 위건 간에 눈에 안 뛸 수가 없는데……”

“대군이 아닙니다.”

“뭐?”

“혼자입니다.”

“혼자? 대체 뭔 개소리를 하고 있……”

홍하랑이 말하다가 말고 얼굴을 굳혔다.

“주서천입니다. 검신의 단독 행동이라고 합니다.”

콰앙!

홍하랑이 앞에 놓인 탁자를 내리쳤다.

힘이 어찌나 센지 탁자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다.

바닥도 움푹 가라앉은 게 보였다.

“주서천, 이 애송이 새끼가……”

홍하랑은 주서천과 악연이다.

암천회 만큼이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의 분노는 상상 이상이었다.

‘상천육좌가 괴물이 란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 불가능한 일이다.’

상천육좌는 무인의 정점이지만, 그렇다고 만능은 아니다.

그들도 사람이니 상식이 적용된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단신으로 백마채를 박살 낸 거지?’

홍하랑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검신이라 일컬어지는 절대고수라 해도, 수공을 익히지 않는 한 강에선 본신의 힘을 발휘하진 못한다.

게다가 적이 전부 수림도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오백 명에게 포위당하면 상천육좌 할아비가 와도 무리였다.

그게 천하의 법칙이며, 상식이다.

“누님, 아니 총채주. 어떻게 할까요?”

야표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홍하랑은 분노하면서도 감정을 최대한 죽이며, 이성을 되찾았다.

“장강의 수로와 은신처 일부의 위치가 알려졌을 테니 조심하라고 연락해 둬라.”

“알겠습니다. 암천회에겐 뭐라고 할까요?”

“우리가 알고 있다면, 그들도 들었을 거다.

아마 조만간 어떻게 할지 연락을 보낼 테니 기다려.”

* * *

합비, 암천회.

“뭔 개소…… 으윽!”

천기의 얼굴이 울긋불긋 해졌다.

말하다 말고 뒷목을 붙잡은 건, 급격하게 오른 혈압 탓이었다.

“그렇게 조심하라곤 했건만, 기어코 이따위 병신 같은 짓을 저질러?”

백마채주의 단점은 욕심이 많다는 것과, 그걸 제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탓에 이런 사달이 벌어졌다.

만약 최초에 숨겨진 배를 보고 수상쩍게 여겨 숨거나 도망쳤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홍하랑이나 천기가 먼저 보고를 받았다면 무언가 수상함을 눈치채고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암천의 두뇌인 천기라 할지라도, 수하도 아니라 전쟁이 벌어진 이후 협력 관계를 맺은 도적무리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것을 알고 있어 주서천의 생각대로 전쟁에 관련된 주요 정보는 알려 주지 않았다.

애초에 백마채주를 위에 올려놓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적림에 그만한 인재가 또 없다.

그대로 내치기엔 홍하랑도 천기도 아까워서 적당히 협상하고 통제하기로 했다.

아니, 애초에 주서천이란 존재가 너무나도 변칙적이었다.

수공이라는 법칙과 상식 자체를 무너뜨렸다.

만약 이 상식이 깨질 가능성이 있었더라면, 정사 연합이 이렇게까지 난항을 겪었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 개……”

천기의 욕설이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적림십팔채는 산채나 수채가 무너져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근처의 도적 떼가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귀주의 풍산채, 의창의 백마채의 전멸 소식에 도적 떼도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과거엔 무조건적으로 적림의 구성원이 되기를 원했으나, 전쟁을 시작한 이후론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제부터 적림에 들어간 순간 정사와 척을 지게 되는 것은 물론이오, 거기에 더해 대대적인 전면전에 참전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고수는 턱없이 부족하고 하수밖에 없는 한낱 도적 떼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이었다.

그 탓인지 풍산채나 백마채의 자리를 대신 채울 이들은 나타나지 않고, 적림십육채로 격하됐다.

“주서천 대협께서 풍산채에 이어 백마채를 박살 내셨다!”

“그 도적 무리가 말인가? 속이 다 시원하군!”

“화산파 만세!”

“주서천 대협 만세!”

“검신 만만세!”

검신, 주서천의 유명세는 더 이상 솟아날 곳이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무림인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까지 포함해 주서천의 이름을 칭송했는데, 이는 도적이 당장 무림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골치 아픈 문제였던 탓이었다.

그중에서도 상단에 속하는 이들은 백마채의 소탕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산이나 평야에서 놀아나는 도적 떼야 표국이나 낭인 동을 고용해 처리할 수 있으나, 수적의 경우 이렇다할 저항을 하지 못해 난항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매번 멀리 돌아가야 하거나, 혹은 터무니없는 통행세를 강제적으로 낼 수밖에 없어 속이 쓰렸던지라 도적들의 소탕은 상인 입장에선 호재였다.

“이 수적 나부랭이 놈들아! 까불더니 잘됐다!”

특히, 하루에 몇 번씩이나 수적에게 저주를 퍼붓던 이의채가 소탕 소식을 듣자마자 굉장히 기뻐했다.

아홉 개의 수채 중에서 겨우 하나가 줄어든 것뿐이었으나, 그래도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하남, 개봉. 무림맹 임시 본부.

“군사님, 백마채의 재물을 무사히 확보했다 합니다.”

“휴우!”

제갈상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시름 놓았군요.”

“검신께서 큰 공을 세웠소.”

우백도 안심한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돈이 부족해 여러모로 곤란했는데……”

무림맹은 암천회의 습격 탓에 합비의 본부에서 야반도주하듯이 후퇴했다.

그 과정에서 무림맹의 군자금 등 여러 예산으로 쓰일 재산을 놓고 와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금의상단이나 하남의 소림사 등 이곳저곳에서 도움을 받았으나, 언제까지고 신세를 질 순 없었다.

특히나 금의상단의 경우 공짜로 지원받는 것이 아니라, 반 정도는 빚이었다.

“쯧! 그 황금충!”

팽군평이 대놓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일개 상인 나부랭이도 아니고 상왕씩이나 되는 자이거늘 대의를 위한 돈을 아까워하다니!”

팽군평은 화가 난 듯 씩씩거렸다.

“다른 일도 아니고 무림의 안위가 걸린 일이 아니오?”

“이 미친놈아, 반이나 공제한 것만 해도 파격적인 거다.”

황견이 팽군평을 보고 혀를 찼다.

“행여 상왕 앞에서 그깟 헛소리는 지껄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뭣이?”

“쯧쯧쯧!”

팽군평과 황견이 평소와 다름없이 으르릉거렸다.

“어쨌거나, 이로써 군자금을 마련할 수 있겠구려.”

우백이 팽군평과 황견을 무시하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직 미비한 설비를 보충하거나, 지급되지 않은 보상금 등도 어찌 지불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정파는 신의로 움직인다.

그러나 돈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당장 기본적인 숙식만 해도 돈이 든다.

보상금은 후에 지불한다 쳐도 숙식비는 책임져야만 했다.

그 외에도 부상의 치료 등 여러가지 돈이 들었다.

“당분간 암천회와 적림십육채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재정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암천회 역시 마찬가지로 정비에 들어갔다.

“백마채의 병신 같은 짓에 대해선 들었겠지?”

홍하랑이 십육채의 전령을 불러 으름장을 놓았다.

“만약, 또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녹림이건 수림이건 채주는 물론이고 그 밑으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백마채가 불러온 피해는 생각보다 상당했다.

백마채에 알려진 장강 수로나 은신처를 사용할 수 없는 건 물론, 적에게 군자금까지 건네줬다.

“회주님, 전력의 보강이 필요합니다.”

주서천의 이름을 몇 번이나 곱씹고, 저주를 퍼부어 겨우 침착함을 찾은 천기가 암천회주에게 보고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현 본부는 정사 세력의 영역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원래는 전의 습격으로 무림맹의 본부 세력을 반절 이상 없애버릴 예정이었으나, 아둔하고 능력이 부족한 제 탓으로……”

천기가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삼켰다.

“됐다.”

암천회주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과거의 망령이 생각보다 끈질겨서 그랬던 것이니, 자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

정백과 제갈중호.

전 세대의 주역이자 영웅들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특히나 최후에 선천진기는 암천회주도 놀랐다.

“비급을 풀어 전력을 보강해라.”

“명을 받듭니다.”

얼마 뒤, 암천회는 전력 보강을 위해 비급을 푼다.

“무림이여, 들어라. 알다시피 무림은 불평등하다.

재능이나 노력의 유무에 상관없이 상승의 무공이 아니라면 배척받고 차별받아 왔다.

하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암천회에 들어와 충성을 맹세하고, 능력을 증명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가 지불될 것이다.”

암천회는 일정한 공을 세우고, 충성을 맹세한 자들에게 무공 비급을 선사했다.

황궁무고만이 아니라 무림맹 보고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급까지 손에 넣은지라 부족할 일도 없었다.

“암천회에 입회한다면 상승의 무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인가?”

“에이, 하지만 공을 세워야 한다고 하지 않은가?”

“이봐, 무림맹이나 사도천에 들어가서 공을 세우면 상승의 무공을 받을 수 있나?”

“으음!”

“무공의 성질이 다르면 말짱 도루묵이지만, 소문에 의하면 암천회가 소유한 무공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하더군.

실제로 아낌없이 비급을 푸는 걸 보면, 거짓이 아닌 듯하네.”

“과연!”

“정사 연합을 척으로 지는 것이 흠이지만, 다시 없을 기회일세.

언제까지 하수에서 만족할 생각인가?”

“자네 말대로야. 우린 잃을 것이 없지.”

암천회는 사람, 특히나 무림인의 마음에 파고드는 것만큼은 기가 막힌 솜씨를 보였다.

천기성과 천선성이 나서서 전력 보강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정파나 사파는 공을 세운다 할지라도 외부인은커녕 내부인에게도 상승의 무공을 주는 데 수많은 절차와 인맥이 필요하다.

혹여나 문파의 무공이 유출되기라도 하면 밑천이 공개되는 꼴이니 그러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본 회에선 그럴 필요가 없다.”

암천회는 무력 단체이나 문파가 아니다.

밑천인 무공은 황궁무고에서 나왔으며, 그 종류는 수십 가지를 넘는다.

무얼 내놔도 상관없었다.

“인재들에겐 후에 회의 전력 증감을 위해 적당한 수준의 비급을 내주면 되고, 어중이떠중이야 공을 세우지도 못할 터니 적당히 버리는 말로 사용하면 그만이다.”

천기는 상왕만큼이나 사람을 어찌 다루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의 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공략했다.

“강호의 위선이나 불합리한 차별에 지쳐 있는 무림인을 데려오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은 더더욱 말이야.”

* * *

주서천은 백마채의 정보를 토대로 알게 된 은신처로 사람을 보내 정찰을 시켰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천기와 홍하랑이 일찍이 손을 쓴 탓에 떠난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편, 전란의 소용돌이인 연합군과 암천군은 충돌을 잠시 멈추고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양측이 각자의 사정으로 준비하느라 바쁜 탓이었다.

무림맹은 백마채에서 확보한 군자금으로 부대의 정비에 나섰고, 암천회는 전력의 보강에 집중했다.

사도천의 경우 무림맹이 정돈할 수 있도록 각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배신자의 소탕을 맡았다.

남해에서 올 해남도의 지원군 역시 자질구레한 것이 앞을 막고 있는지 시간이 제법 걸릴 듯 싶었다.

불비필패(弗備必敗).

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한다고 했다.

승리를 위해 준비는 필요 과정이었다.

승부는 한순간에 나지만, 준비는 시간이 걸린다.

전쟁이 오랫동안 이어지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주서천은 호남에서 북상해 개봉의 임시 본부에 도착한다.

“어서 오십시오, 검신.”

무림맹주와 군사가 언제나처럼 주서천을 맞이했다.

“요 며칠간 정말 수고 많았소.

또한 언제나 드리는 말이네만 정말로 감사드리오.

검신께 또 빚을 지고 말았소.”

운광이 미안함 반, 감사함 반이 섞인 인사를 건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지요.”

주서천도 언제나처럼 겸손을 섞은 답변을 건냈다.

“백마채의 재물은 잘 처리해 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갈상이 대신 나서서 답했다.

“장물의 경우, 수림에 피해를 입은 마을과 백마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

마음 같아선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었지만, 이름이 새겨진 것도 아니니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의창을 필두로 수적이 휩쓸고 간 마을이나 피해 백성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단, 현물의 생김새나 약탈당한 기록이 새겨진 장부를 가져오는 이들에겐 돌려주기로 했다.

“그 외에 주인을 확인할 수 없는 금전이나 은전 등의 돈은 약 일 할을 의창의 관리에게 건네고, 사 할은 군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수로채와 대립했던 백마채 답게 쌓아 둔 재물이 상당하더군요.”

주인 없는 현물은 나라의 것이다.

요컨대, 주서천이 고생해서 얻은 걸 관리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뇌물을 건냈다.

관리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아무리 권력을 앞세운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대놓고 빼앗을 수는 없었다.

백성의 눈치도 있는 데다가, 백마채를 인수받아 공을 세우기도 했으니 억지를 부릴 필요는 없었다.

“역시 깔끔한 일 처리십니다. 군사께서도 수고하셨습니다.”

“검신께서 차려주신 밥상에 숟가락만 올렸을 뿐이지요.”

제갈상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 내며 답했다.

“이러다가 끝이 안 나겠구려.”

운광이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흘렸다.

“무림의 미래를 짊어질 분들께서 서로 칭찬하는 모습은 보기 좋으나, 아쉽게도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소. 검신께 긴히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말이오.”

운광이 소매에서 서신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주서천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걸 보니 무언가 있는 듯 싶었다.

“그걸 읽어 보면 대강 알 수 있을 것이오.”

읽어 보라는 듯 운광이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 말에 탁자 위의 서신을 집어들어 읽었다.

“북해빙궁?”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주서천의 눈이 커졌다.

‘식량난으로 곤란하다던 북해빙궁이 왜……?’

새로운 전란이 시작될 무렵, 무림맹은 힘을 빌리기 위해서 북해빙궁에 서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몇 년 전 시작된 기록적인 폭설로 인해 대대적인 식량난이 생겼다면서 거절당했다.

당시 소식을 들었을 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북해빙궁, 나아가 새외무림에 속하는 북해는 전란의 시대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북해빙궁은 중원에 관심이 없다 보니 전란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한때 비옥한 중원의 땅을 노린 적도 있었으나 기후나 환경 등이 생각보다 맞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 뒤로는 중원과의 교류도 최소한만 유지한 채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일단 읽어 보자.’

주서천의 의문이 깃든 눈동자가 움직였다.

“이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불쾌감보다는 고민이 느껴졌다.

“북해빙궁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제갈상이 설명을 시작했다.

“서신에 적힌 대로 북해빙궁, 아니 북해의 상황이 영 좋지 못한 모양입니다.

몇 년 동안 이어진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는 북해 내부에서도 예외적인지라,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북해인은 주로 극한의 땅에 적응한 식물, 그리고 북해에서 잡히는 해산물로 식량을 해결했다.

그러나 그 식물과 해산물조차 최근에는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북해빙궁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던 중, 현재 벌어지는 이 이상 기후의 원인을 우연찮게 발견했다 하더군요.”

“서신의 내용대로라면 그 원인이 법보의 탓이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본궁은 탐사 도중 눈폭풍을 일으키고, 땅은 물론이요, 대기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전설의 법보이자 재앙의 물품을 발견했다.

북해궁주가 파괴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힘이 부족하여 실패했다.

이에 무림맹에 상천에 이르는 절대고수의 도움을 요청하는 바이다.”

제갈상이 서신의 내용을 읊었다.

“어렵군요.”

주서천이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북해의 사정은 딱하나, 암천회와의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상천의 절대고수가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남해, 해남도에 다녀올 수 있었던 건 아직까지 전쟁이 시작되지 않아서다.

무엇보다 기문진이나 남해의 지랄맞은 날씨가 가로막곤 있어도, 내륙에서 섬까지 그리 멀진 않았다.

하지만 북해는 생각보다 좀 멀다.

중원의 북부이자 중심지인 북경에서부터 북동쪽으로 올라가야 있다.

“검신의 말씀대로입니다. 원래라면 볼 것도 없이 거절해야 하지요. 하지만……”

“북해의 위기를 도와준다면 본 궁 역시 중원 무림의 전란에 참전하여 정사 연합을 아낌없이 도울 것이다.

상천육좌, 북해궁주가 직접 궁의 정예를 이끌고 중원에 갈 것을 북해빙궁과 궁주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는 바이다.”

주서천이 서신의 끄트머리를 읊곤, 서신을 접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천육좌가 직접 북해빙궁의 정예를 이끌고 온다 하니……”

운광이 고심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검신께서 아실지는 모르나, 북해무인의 무위는 평균적으로 높은 편이오.”

“맹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실제, 기록에 의하면 중원 무림은 과거 새외 무림인 북해빙궁과 싸워 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무서운 점은 그 힘도 중원의 기후나 환경 탓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는 점이지요.”

북해는 춥다.

긴장의 끈을 좀만 놓아도 얼어 죽는다.

이 추위를 극복하려면 방한복, 정신력, 그리고 내공이 필요했다.

이러한 특수한 환경 탓인지 북해빙궁 외에도 북해인은 대부분이 무인이며, 중원인보다 무공이 높았다.

다만 환경 탓에 인구 역시 적었다.

“북해궁주는 물론이고 빙궁 내에서 정예라 꼽힐 정도라면 중원의 기후나 환경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오.

그만한 전력이 도움을 준다면 정사 연합 또한 앞으로 든든하겠지.”

“끄응.”

주서천도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고민됐다.

운광은 주서천의 고민이 길어지자 몇 마디 더했다.

“북해빙궁의 도움은 매력적이나, 검신께서도 말씀하셨듯이 현 전황에 자리를 비우게 되니 위험 부담이 크오.

딱히 거절하셔도 상관없으니 마음 편히 답해 주시오.

그리고 사도천주에게 협력을 받아 패신군에게도 제안할 생각이니 부담 갖지 마시오.”

‘아니, 그건 안 돼.’

패신군이란 이름에 검신이 끙끙 거렸다.

‘지금, 북해로 갈 수 있는 상천은 나뿐이다.’

운광이야 무림맹주니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사도천주도 마찬가지 이유로 갈 수 없다.

패신군이야 또 하나의 신분이니 별 의미 없으니, 결국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자신이 가야만 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북해의 힘을 빌리느냐, 아니면 중원에 남아서 결전을 준비하느냐……’

주서천은 마음에 천칭을 만들어내 저울질했다.

약 일각 뒤, 고민이 끝났다.

“다녀오겠습니다.”

천칭이 북해로 기울게 된 건,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 들어 여유가 생긴 것도 크지만 최근 암천회가 비급을 풀어서 전력을 보강하려는 것이 컸다.

“어려운 결정을 하셨구려.”

운광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정말로 괜찮겠소? 북해의 여정은그리 녹록하지 않을 거외다.”

“현경이신 맹주님께서 물으시니 의외로군요.

이 정도 경지에 오르면 한서는 불침이지 않습니까.”

주서천은 편법으로 진작 한서불침이 됐다.

반대로 제가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괜찮겠습니까?”

주서천이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북해에 가서도 중원의 소식을 들을 수야 있지만, 시차가 상당하다.

대응도 자연스레 늦어질 수밖에 없으니, 정사 연합이 불안하다고 하면 갈 수 없다.’

무림맹주 입으로 곤란하다고 한다면 결정을 철회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컸다.

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상당했다.

특히나 북해궁주의 도움을 직접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컸다.

전생에서도 암천회주라는 괴물을 상대하려고 상천 여럿이 희생됐다.

“물론이오.”

운광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답변했다.

“언제까지고 검신께 모든 걸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겠소?

나 역시 맹주로서, 태극검으로서도 체면이 있다오.

검신이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도록 연합군을 지키고 있도록 하겠소.”

“맹주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 역시 안심이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태극검, 운광……’

솔직히, 운광에 대해서 그리 깊게 알진 못한다.

운광은 정백과 제갈중호, 그리고 남궁위무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무인인 만큼 나이가 많았다.

연령이 연령인 만큼, 전란의 시대 한창인 도중에 자연의 품에 돌아간지라 활약이 그리 많진 않았다.

그러나 현생에서 역사가 바뀌면서 무림맹주로 취임한 이후 우수한 행보를 보이는 등 몰랐던 모습을 알게 됐다.

만약, 조금만 더 젊었어도 미래의 영웅들만큼이나 이름을 알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림의 미래를 짊어진 두 절대고수의 대화에 초를 치기 싫습니다만,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제갈상이 미안한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얼마든지 말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야기라기보다는 사실, 주의 사항입니다.”

제갈상의 입가에 머금은 쓴웃음이 사라졌다.

“북해로의 여정이 결정된 후에 말하는 것도 좀 뭐하지만, 이 모든 건 이상 기후의 원인이 북해빙궁에서 거론한 ‘법보’일 경우를 전제로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군사? 혹시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거요?”

운광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아닙니다.

암천회의 손이 북해빙궁에까지 닿았을 경우는 지극히 낮습니다.

본래 황제의 눈을 피하려던 무력 단체에게 수도인 북경과 명이 주시하는 몽골, 즉 달단이 코앞에 있는 북해는 서장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테니까요.”

“과연.”

“그러니 북해빙궁의 서신은 거짓이 아닐 겁니다.

다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이들의 ‘추측’이 어긋날 경우입니다.”

“으음.”

주서천과 운광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북해빙궁도 궁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사안이고, 이름을 건 만큼 몇 번이나 확인했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만약, 의뢰를 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 기후가 계속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운광이 주서천을 대신해서 물었다.

“빙궁의 여인들은 사천의 당가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하니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름을 건 만큼 약조는 지키겠지요.

다만, 더 도움을 달라거나 혹은 시간을 달라거나 한다면 냉정하게 거절하십시오.

검신께서 하실 일은 법보를 없앤 뒤, 북해빙궁의 전력을 동원하는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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