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章 (209/254)

합비에서 천기가 계책을 세우고 있을 때, 주서천은 임시 본부의 주요인물을 만나 인사를 끝냈다.

전황인지라 차를 마시며 쉴 틈은 없었다.

작전 회의로 간단한 이야기를 끝내고 하남을 나섰다.

“산동으로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목적지는 하남의 동북, 산동이었다.

기존의 별동대는 하남에서 해체되면서 재편성됐다.

낙소월과 몽각과 담향 외 화산파검수 일곱 명.

당혜 외 당가 아홉 명.

제갈수란 외 무림맹 무사 아홉 명.

단리화 외 청성파 검수 아홉 명.

겉으론 주서천까지 더해 마흔하나였으나, 바로 뒤에 따라오는 유령들까지 포함해 쉰하나였다.

“……뭔가 많지 않나요?”

낙소월의 시선이 당혜와 단리화에게로 향했다.

“모사님이야 모략이나 그 외에도 지휘를 맡아 주시니 이해가 가지만…… 두 분은 어째서……?”

“……독에 대한 대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앞에 침묵이 조금 신경 쓰이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단 언니께서는요?”

당혜가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단리화를 바라봤다.

“그야 검신의 크고 긴 것과 접촉해 보기 위해서잖니.”

“무, 무슨……!”

당혜와 낙소월이 당황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제갈수란의 동공도 물고기처럼 커졌다.

“이보시오. 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파검봉…… 아니, 단리화 소저께선 항상 저러오?”

당가의 무사가 청성파 제자에게 물었다.

“……”

청성파 제자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회피했다.

못 들은 걸로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면전에서 성희롱을 당한 주서천도 비슷했다.

“어머나, 어머나. 다들 무슨 생각을 했는데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난 그저 상천육좌이신 검신의 검술을 견식하고 싶었을 뿐인걸.

혹시, 이상한 걸 생각한 거니?”

단리화가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죽립 아래의 초승달처럼 흰 눈매 속엔 짓궂음이 돋보였다.

“입 닥쳐! 이 음마(淮魔)!”

당혜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일장(一掌)을 날렸다.

손바닥 사이로 독기가 넘실거렸다.

화경의 고수, 단리화는 물 흐르듯이 슥 피하곤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혹시 정곡을 찌른 걸까? 누가 누구보고 음마라고 하는 건지, 웃음이 나오는 걸. 후후.”

‘아혈을 짚을까?’

주서천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하남 동북 끝자락에 위치한 개봉에서 그대로 조금만 올라가면 산동이 나온다.

금의상단이 자리 잡은 제남(齊南)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다.

과장해서 말하면,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정말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겨울도 끝인가……”

제남에 도착하자 지겹게 내리던 눈이 그쳤다.

일 년의 세 번째 달이 밝으며 봄이 시작됐다.

금의상단 제남 지부.

“어떻습니까?”

평소 모루를 내리치는 소리가 끊임없던 공방 내에서 침음이 대신 흘러나왔다.

“허미……”

간야자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최초의 황제, 진시황의 유물이자 미신의 집합체인 흑철갑주의 실체는 생각보다 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한철도 귀하거늘, 전설 속의 금속인 만년한철로 된 갑주였다.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녔다.

야장의 입장에선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인의 신공만큼이나 눈이 돌아갈 만한 물건이었다.

한데 정작 야장인 간야자의 반응은 미묘했다.

“이걸 자네가 이렇게 했다고?”

간야자가 부서진 팔 부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뭐, 대강 그렇습니다.”

“흠…… 내가 볼 때 자네는 인간이 아니야.”

“뭐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만년한철을 이리도 박살 낼 수 있는 건가?”

퉁퉁.

간야자가 흑철갑주를 망치로 두드리며 물었다.

“완갑(腕甲)이 날아간 것은 물론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균열이 가 있거나, 약해져 있어.”

“예? 그럴 리가요.”

주서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간야자는 망치를 내려놓더니, 흑철갑주를 들어 공방의 열기를 내뿜는 화로 안에 집어 던졌다.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주서천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됐으니까 눈 똑바로 뜨고 봐.”

간야자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서천은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강기에도 흠집 하나 남지 않고, 화첨창의 불길에 휩싸여도 멀쩡했던 흑철갑주가 기껏 화로 안에 들어갔다고 녹아내릴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전설상의 금속인 만년한철이 아니던가.

주서천이 생각했던 대로 흑철갑주는 불길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일반 철이었다면 진작 시뻘겋게 달아올랐겠지만, 달아오르긴커녕 달빛 하나 없는 밤처럼 검었다.

약 반 각의 시간이 흘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균열……?”

흑철갑주의 몇몇 부위가 드디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는데, 가지를 친 뿌리처럼 균열이 보였다.

“갑주가 전체적으로 약해져 있어.

만약, 멀쩡한 부분이 없었더라면 흑철갑주라고 안 믿었을 거다.”

“끄응!”

입에서 침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찌어찌 고생해서 가져왔거늘……!’

부서진 건 겨드랑이 부분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겉으로 봤을 땐 몰랐으나, 생각 이상으로 박살이 나 있었다.

“어떻게 고쳐 쓸 수는 없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천하제일의 야장인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다만, 만년한철로 부르기도 힘들 만큼 약해진 부위는 쓸 수 없으니 괜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거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다른 걸로 제작해 재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만 했다.

그래도 만년한철로 된 갑주가 암천회주와의 결전에서 도움이 될 줄 알고 기대했는지라 내심 실망이 컸다.

‘흑철갑주에 주입한 공력이 과했나?

그래도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군.’

주서천이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무얼 만들 수 있습니까?”

“병기의 경우엔 대형만 아니라면 만들 수 있고, 방어구라면 장갑(掌歷) 정도다.”

“흠.”

주서천은 쉬이 답하지 못하고 고민에 잠겼다.

“의외로군.”

간야자가 주서천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입니까?”

“네놈은 검수 중의 정점이 아니냐.

당연히 검을 택할 거라 생각했다.”

“일반적인 무인의 경우라면 그러겠지만, 저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별 의미 없습니다.”

“어째서지?”

“강기입니다. 설사 손만 가져다 대도 베일 정도의 예기(親氣)를 자랑하는 명검이라 할지라도, 검강에 준하지는 못하지요.

화경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고, 내공 소모도 극심하여 오래 쓸 수는 없지만 그 위 단계에 오르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그런 것도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매개체가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주 무공에 맞게 형태만 갖추면 별문제 없었다.

“그래도 무기가 형편없다거나 한다면 내공을 싣기 힘들지 않겠나?”

“현경의 고수 중에 그런 자가 있다면 죽기 직전이거나 혹은 허풍쟁이일 겁니다.”

검이라는 형태만 유지한다면 딱히 상관없었다.

“뭐, 그래도 좋은 검을 선호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연습이라거나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일일이 강기를 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 외에도 관리의 수고를 덜 수 있다는 점을 비롯해 이것저것 있지요.”

물건은 쓰면 닳기 마련이지만, 잘 만들어진 무기는 그 닳는 속도가 늦다.

특히나 월오삼검처럼 보검 축에 드는 무기는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도 새것과 같은 예기를 유지했다.

“검수로서 좋은 검이 싫은 건 아닙니다만, 성능의 차이가 없다면야 좀 더 쓰임새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나저나, 어르신께서도 참 특이하신 것 같습니다.

용연을 보고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으셨으니까요.”

주서천이 허리춤에 걸려 있는 용연의 자루를 툭툭 건드렸다.

월오삼검, 용연의 제작자가 누군가.

춘추 전국 시대의 전설적인 명장인 구야자(歐治子)와 간장(干將)이다.

주서천이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용연을 소유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물론 미치지 않은 이상 상천육좌, 그것도 검신의 검을 노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역사에서 명검과 미녀는 언제나 사람을 미치게 하지 않았는가.

화근이 될 가능성을 배제했다.

간야자의 경우는 자신의 검을 보자마자 예사롭지 않은 검이란 걸 눈치채 정비를 맡길 겸 알려 줬다.

용연이라는 이름에 놀라워했으나, 그 이후론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아 조금 의외였다.

입을 떡 벌리면서 경악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상보다는 반응이 약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어르신의 성함은……”

주서천은 명장의 이름을 떠올리자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간장의 간(干), 구야자의 야자(治子)다.”

간야자가 불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시나 말하는 것이지만, 간장의 피 따위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

부모도 모른 채 산속에 버려진 날 거두어 준 사부님께서 대충 붙여 준 이름일 뿐이다.”

대답한 뒤 간야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야장으로 살다 보니 그 이름에 관련되어 여러 일이 있어 성가실 지경이지만 부모나 다름없는 분께서 지어 주신 이름인데 어쩌겠냐. 끄응.”

주서천은 간야자의 반응을 보고 나름 추측해 봤다.

‘혹시, 그 탓에 일부러 무시하는 건가?’

그럴싸한 추측이었으나, 직접 묻지는 않았다.

자존심을 건드려 혹시라도 기분이 상할까 염려해서였다.

괜한 호기심은 화를 부른다고 생각하며 의문을 접으려 했으나, 반갑게도 간야자가 풀어 줬다.

“불필요한 오해는 받고 싶지 않으니 말하마.

사적인 감정으로 옛사람의 신위(神威)를 부정할 정도로 난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다.”

간야자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위라 말하는 걸 보면 야장으로서는 인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다른 것에 필요 이상으로 사로잡혀 있는 것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옛 위인 이상으로 스승님께서 전수해 주고, 갈고 닦은 기술도 그만큼 대단하니까.”

간야자의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 말을 듣고서야 주서천도 이해할 수 있었다.

대단하다고 인정하되, 사로잡혀 집착하지 않는다.

무림인으로 치자면 타인의 전설적인 무공에 집착해 본연의 것을 잃거나, 혹은 타인의 가르침이 도움은커녕 도리어 독이 되어 정체되는 경우와 같았다.

“도중에 잡설로 빠졌다만, 무얼 만들지 결정은 한 건가?”

“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고민이 좀 필요할 듯 싶습니다.”

“좋을 대로 해라.”

간야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음, 어쩐다.’

주서천은 공방 구석에 서서 고민했다.

‘방어구야 흑철갑주처럼 전신이 갑옷이라면 모를까, 장갑 정도면 호신강기로 대체할 수 있으니 그다지 필요가 없다.

검이나 창도 그리 쓸모있진 않고, 암기를 여러 개 만들기에는 뭔가 아깝고……’

막상 쓰려고 하니 적당한 게 없었다.

‘아니, 잠깐.’

주서천이 무언가 떠올린 듯 눈을 껌뻑였다.

‘나에게 불필요하다면야, 굳이 나에 한해 한정될 필요는 없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일각의 시간이 흐르자 고민이 끝났다.

“어르신, 결정했습니다.”

주서천은 간야자에게 생각한 것을 전했다.

“알았다. 만년한철이다 보니 제련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릴 거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걸 당분간 빌려도 되겠나?”

간야자가 화첨창을 들어 보였다.

“상관은 없습니다만, 무엇에 쓰시려고……?”

“어이! 장령(匠靈)!”

간야자가 이름을 부르자, 공방 구석에서 작업 중이던 유령이 흐릿해졌다가 눈앞에서 나타났다.

원래 호위로 붙여 주었으나 간야자가 노동력이 아깝다면서 공방 일을 맡겨 조수로 삼았다.

그 탓인지 오랫동안 열기에 노출되어 피부도 그을려 구릿빛이었다.

“자, 저기를 향해 쏴라.”

간야자는 장령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유령의 손에 화첨창을 쥐여 주었다.

‘설마……’

주서천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는 진짜가 됐다.

장령은 화로에 겨눈 화첨창에 내공을 주입했다.

화르륵!

창끝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와 화로를 가득 채웠다.

‘맙소사……’

신병이기, 화첨창이 분사기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창을 다루는 무인이 있다면 대노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터무니없는 쓰임새였다.

“직접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꽤나 쓸 만하더군.”

“……”

* * *

주서천은 당분간 제남에 머무르기로 했다.

해남도의 답변도 기다릴 겸 암천회를 지켜보고 그에 맞춰 움직일 생각이었다.

물론, 하릴없이 빈둥거리진 않았다.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지만, 엄연히 전쟁 도중이기에 조금이라도 힘을 키워 놓는 편이 좋았다.

주서천은 금의상단 지하에 갖춰진 개인 연무장을 찾아 한동안 수련에 집중했다.

며칠 뒤.

“허미……”

주서천은 기가 막힌 듯 감탄사를 토해 냈다.

“회귀도 회귀지만, 답습도 보통이 아니로구나.”

그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한 것도 있지만, 이번에 틈틈이 집중하게 되면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최근의 알게 된 해남일검류를 포함해 중도만공으로 익힌 여러 무공을 반절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좀 더…… 다양한 무공이 필요하다.”

무학에 대한 욕심은 원래부터 끊임없었으나, 운광에게 암천회주와의 대결을 들은 뒤로는 더 늘어났다.

‘무기가 없어도 싸울 수 있도록 권각공(拳脚功)이나, 혹은 장법 든이 있으면 좋을 텐데……’

주서천은 검을 넣어 놓고 손을 쥐락펴락했다.

얼마 전, 귀주의 옹안에서 검법이 아닌 권법을 수련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갈공명도 완벽하게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 전장이 아니던가.

검을 쓸 수 없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는 데다가, 최후의 적은 천하제일인이라 불렸던 암천회주다.

최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싶었다.

‘무변정안권……’

권각공을 떠올리니 권동제의 창안무공이 떠올랐지만, 이내 머리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권동제 성격상 제자를 들이지 않으려고 생각했으니, 심득을 남겼을리 없다.

‘아니, 애초에 그가 남긴 무공을 잇고 싶지는 않아.’

권동제의 사상까지 받아들이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어디, 괜찮은 무공 없을까……’

주서천은 바람도 쐴 겸, 과거이자 미래의 일을 떠올리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갔다.

“은공.”

“응……?”

주서천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서천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여 개인 연무장 근처엔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의문은 목소리의 주인을 보자마자 단숨에 이해됐다.

“어르신!”

검마, 무곡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정마대전 이후론 워낙 바삐 지내다 보니 서로 만날 일이 없었다.

모처럼 본지라 반가운 얼굴이었다.

“어째 얼굴에 근심이 서려 있는 것 같소.”

“아, 그게……”

주서천은 쉬이 답하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검마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중도만공이 끼쳐 올 영향을 생각하니 쉬이 답하지 못하겠네.

숨길 수 있다면야 끝까지 숨기는 편이 좋지.

무엇보다 이 양반, 딸이 물어보면 바로 답할 것 같고……’

중도만공이 끼칠 파장이 워낙 크다 보니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아 적당히 돌려 답했다.

“암천회주에게 어찌 대응할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짓말은 안했다.

“호오.”

무곡의 눈에 흥미로운 기색이 묻어났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아서 그런 게 아니라, 주서천이 옛적부터 경고해온 암천회의 수장이라 그렇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오.”

“그게…… 아! 마침 잘됐습니다.”

주서천이 답하려던 중 무언가 떠올린 듯 웃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공에 대해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주서천도 무곡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모른다.

신비 문파 출신이라는 건 아는데, 그 외에 것은 잘 모른다.

아무리 은인이라 할지라도, 지켜야할 선이 있다.

사문이나 무공에 관한 것이 그렇다.

자칫 잘못하면 은인이란 관계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주서천은 훗날 검마라는 악몽을 재현시키고 싶지 않아 되도록 이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고 싶었다.

태도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물론이오.”

무곡이 시원스레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주서천의 태도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어르신이 펼치는 검은 혹시……쾌검이십니까?”

검마, 무곡의 검은 정마대전 때 천마를 쓰러뜨린 이후로 도움을 받으면서 본 적이 있었다.

현경의 고수, 그것도 검수의 눈으로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검이었다.

어떠한 것을 내포한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휘두른 검이 워낙 빨라 쾌검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비슷하오.”

대답이 애매했지만, 그래도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암천회주 역시 쾌검을 펼친다고 들었기에, 어르신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주서천의 주 무공, 화산의 검법은 환검(幻劍)과 산검(散劍)이다.

해남일검류 덕에 쾌검을 쓸 수는 있으나, 그 깨달음이 현경에 견줄 정도는 아니다.

화산의 검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대충 응용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같은 쾌검의 고수의 관점이라면 무언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의견을 물었다.

주서천은 운광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무곡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돌아온 답변은 상상 이상이었다.

“선천검법 (先天劍法)이로군.”

무곡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예?”

“후초식이 선초식의 속도를 맞추거나, 그보다 빨리 펼치는 특징의 검법이라면 고금에서도 몇 없소.”

무곡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응암동(鷹岩洞)의 검성(劍聖). 그의 무공일 거요.”

“응암동 검성?”

주서천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무곡이 암천회주의 무공을 특정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남해용왕이……’

주서천은 남해용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나저나 사람이 그 정도의 무위를 보일 줄이야, 참으로 대단하더군.

특히나 그 쾌검은 화산파라 말하지 않았더라면 응암동의 검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야.”

“모르나? 하기야, 그의 사문이 신비문이다 보니 모르기도 하겠군. 또한 세월이 흘렀으니 말이야.”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라곤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해서 그냥 넘어갔었다.

그런데 설마 암천회주의 주 무공으로 그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오.”

검마가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최소 이백 년 전. 혹은 그보다 오래된 이야기요.

옛 무림에 당시 쾌검의 달인이자, 천하제일을 다툴 정도의 실력을 지녔던 전설적인 무인이 있었소.

그자가 응암동 검성이요.”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무리도 아니오.

그가 무림에서 종적을 감춘 지 시간이 오래되기도 했지만 검성의 사문은 무림이 위기에 빠진다 할지라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신비 문파이기 때문이오.

아무리 당대 최고수라 해도 사문이 오랫동안 활동을 하지 않으면 무림에선 잊혀지기 마련이지.”

“어디입니까?”

“신비 문파, 천녀문(天女門).”

무곡의 눈이 가늘어 졌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보타문처럼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신비 문파라 하오.”

“예?”

주서천이 이해가 안 가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암천회주는……”

응암동 검성의 성별이야 그렇다고 쳐도, 암천회주는 남자가 분명하다.

속일 수도 없는 게, 훗날 무림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때 시신이 남아있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주서천은 본 적 없지만, 만약 특별한 방법으로 성별을 숨겼다면 밝혀지지 않았을 리 없다.

“그건 이야기가 좀 복잡하오.

미리 말하지만, 응암동 검성 역시 남자요.”

“무슨 사연이 있군요.”

“천녀문도 한때 폐쇄적이기는 해도, 강호에 출두해 활동한 시절이 있었소.

당시 천녀문주는 소문주 시절 강호에 출두했다가 그만 크게 다쳤는데, 지나가던 어떤 자가 그녀를 구해 주고 치료까지 해 주었다고 하더군.”

“혹시 그자가……”

“응암동 검성이오.”

무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녀문주는 용암동 검성에게 목숨을 빚진 대가와 감사의 의미로 사문의 무공을 전수해 주었소.

그것이 선천심공(先天心功)과 선천검법이었지.

다만, 이 무공에는 문제가 있었소.”

“문제요?”

“천녀문이 여인들의 문파인 건, 대표 무공인 선천검법을 비롯해 운기법이 여자의 몸을 기초로 했기 때문이오.

남자가 펼치지 못하는 건 아니나, 대성을 이루기가 극히 어려워지고 위력조차 크게 줄어들어 사실상 이류도 되지 못한다고 하오.”

무림에는 별의별 무공이 존재한다.

음양이기(陰陽二氣)를 나누어 성별에 따라 맞고 맞지 않는 경우야 그리 드문 것도 아니었다.

“천녀문주가 응암동 검성에게 그러한 무공을 전수한 건 여러 일화가 있으나, 워낙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실을 알 수 없어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오.

다만, 그 탓에 응암동 검성은 선천검법을 스스로 자기 몸에 맞춰 개량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천녀문이 아닌, 응암동 검성의 무공이 라 하셨군요.”

“그렇소.”

생각지도 못한 정보였다.

암천회주가 지닌 미증유의 힘에 대한 정체를 알게 되니 속이 좀 편해졌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은공께 도움이 됐다면 나도 기쁘오.”

“이러한 정보는 어디서 알게 되셨습니까?”

주서천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문의 역대 문주 중에 천녀문과 동시대에 활동한 분이 계셨는데, 인상적이었는지 제자에게 검술 수련 중 쾌검의 묘리에 대해 가르칠 때마다 천녀문의 선천검법을 이야기했다 하오.

그 뒤로 사문에서 쾌검을 가르칠 때마다 선천검법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오게 됐소.”

‘이쯤 되니 어르신의 사문이 궁금하다.’

주서천은 속으로 끙끙 앓았다.

그러나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고 하지 않았나.

검마와의 관계가 틀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응?”

무곡이 주서천에게 무언가 느낀 듯 눈을 껌뻑였다.

“아아, 나의 사문이 궁금한 거요?”

주서천은 무곡의 물음에 흠칫 놀랐다가 이내 머리를 위아래로 미미하게 끄덕였다.

“전에 사문의 이름은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기억나시오?”

“예. 용제문(龍帝門)…… 이었던가요?”

“그렇소. 잘 기억하고 계시는 구려.”

무곡은 주서천이 그동안 했던 걱정이 괜한 것이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대답이 너무 시원스러워서 허무할 정도였다.

“신비 문파라 해야 할까, 은거 문파라 해야 할까…… 본 문 역시 천녀문만큼 폐쇄적이고 무림 일에 적극적이지 않소.

하물며 일인전승으로만 전해지는 은거 문파다 보니 잘 모를 거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곳인지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주서천은 무곡이 사문에 대해 묻는 걸 그리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 보여 적극적으로 물었다.

“물론이오. 쾌검이나 난검, 혹은 강검이나 중검.

그 외에도 수많은 검을 완벽히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한 문파가 용제문이오.”

“허어……”

주서천은 사문의 정체를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완전 미친 곳 아냐?’

무곡은 지나가듯이 가볍게 말했으나, 그 속을 보면 결코 가볍지 않다.

터무니없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검술의 근원이 되는 성질이란 건 전부 다루겠다는 뜻인데, 권동제의 이상만큼이나 허황된 이야기였다.

어려운 수준의 일이 아니다.

사람의 몸으론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무인, 그중에서도 천재라 할지라도 끽해 봤자 하나나 둘의 성질이 한계다.’

당장 검신이라 일컬어지는 주서천만 해도, 극의를 이룬 건 화산파의 검술인 산점과 환검 정도다.

쾌검이나 중검 등을 펼치지 못하는건 아니 나, 중도만공의 도움을 받아 성취는 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 외의 것들도 현경의 깨달음이나 끝없는 내공으로 응용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오.

도저히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무곡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개파조사께서는 반대로 사고를 전환해 사람을 벗어난 힘을 얻자고 생각하였소.”

“혹시, 용제라는 의미는……?”

“용을 지배하고, 그 힘을 통해서 사람을 초월하게 되는 것을 뜻하오.”

용은 생물의 제왕이자, 최강의 생물이며 초월체이다.

해남도를 비롯한 남해만이 아니라 육지에서조차 신성시된다.

용제문의 시작은 용의 힘을 얻는 것이었다.

“사문의 이름은 용제문이긴 하다만, 사실은 용이 된다기보단 초월적으로 강해지기 위한 문파요.”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별로 숨길 것도 아니었소.”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물어볼 걸……’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을 줄은 몰랐다.

주서천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 무곡의 말 중 무언가 떠올렸는지, 질문을 한 가지 더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의 사문은 방금 일인전승 문파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소만?”

“그러면 슬슬 제자를 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생이야 딸, 무선화의 복수에 미쳐 제자를 받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니 이해가 됐다.

하지만 살아 있고, 건강하기까지 한 현생은 제자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용제문은 정신 나간 문파이나 그래도 현경이라는 절대고수를 배출했다.

이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에는 아까웠다.

“음……”

무곡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나, 사실 그에 관련된 고민이 하나 있소.”

“혹시 괜찮으시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르신께 도움을 받았으니 저도 그 빚을 갚고 싶습니다.”

검마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속셈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정마대전만 해도 무곡이 뒤를 이어서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여러모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은공도 알다시피, 선화가 전보다 건강해졌지만 무공을 익히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소?”

“그렇지요.”

“그래서 적당한 자를 데릴사위로 삼아서 무공을 전수해 줄 생각이었소.”

“아, 그건……”

주서천이 제갈승계를 떠올리며 무언가 말하려다가, 무곡의 다음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웬 놈이 나타나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선화를 채 가는 걸 상상하니 무심코 화가 나더구려.

나도 모르게 쳐 죽이는 생각을 골백번 했지 뭐요?”

“……”

주서천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데, 은공. 방금 전에 무어라 말씀하시려 하지 않았소?”

“아닙니다.”

주서천이 즉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으로 인해 분위기가 가라앉으려고 할 때쯤, 멀리서부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오, 제갈 선생이 아닌가.”

무곡이 제갈승계가 오는 걸 보고 평소답지 않게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어르신도 계셨군요.

그보다 선생이라니, 과한 호칭입니다. 편하게 대해 주세요.”

제갈승계가 무곡을 보고 허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닐세. 딸이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 있는데 내 어찌 허투루 대하겠는가.

내 비록 아는 건 검 밖에 모르는 일자무식이네만 그래도 안하무인은 아니오.”

제갈승계를 향한 무곡의 눈길은 인자했다.

“그래, 선화는 선생 밑에서 잘 배우고 있는가?

최근엔 선생 곁에서 기관 설계도 돕는다고 들었네만.”

“아, 물론입니다!”

기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제갈승계가 눈을 반짝였다.

“머리도 좋으셔서 기관에 대한 이해도도 높으시고, 열의도 남다르십니다.

휴식을 취하라고 말씀을 드려도 언제나 제 곁에 남아 밤늦게까지 기관에 대해서 물으시더군요.

자랑스러운 따님을 두셨습니다!”

“하하하하! 그 정도란 말인가?

암, 선화가 어릴 적부터 머리가 비상하긴 했네.

그나저나, 오룡삼봉인 제갈선생께서 그리 칭찬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그래!”

무곡이 기분 좋은 듯 호랑하게 웃었다.

금의검문에서 악귀 교관이라 불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점술학도 공부하시는 모양인지, 제 손금을 봐주시더군요.

기관 공부만 해도 상당히 하시는 모양인데 다른 것까지 공부하시는 걸 보고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님 같은 분을 보고 노력하는 천재라고 부르지요.”

제갈승계는 무곡의 칭찬에 기분 좋았는지 얼마 전 자신의 손을 매만지면서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행복하게 미소 짓는 무선화를 떠올렸다.

“허허허!”

“핫핫핫!”

무곡은 딸에 대한 칭찬을 듣자 너털웃음을 흘렸다.

제갈승계도 평소처럼 가슴을 쫙 펴고 웃어 댔다.

“으……으……”

상천육좌, 검신이 갑자기 신음을 흘렸다.

“응? 형님? 왜 그러십니까? 안색이 안 좋습니다.”

제갈승계가 무곡 뒤의 주서천을 보고 물었다.

“아니야…… 위가 좀 아파서 그래……”

주서천이 제갈승계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아, 네. 상단주가 부릅니다. 무림맹에서 서신이 도착했다 하더군요.”

“그래, 고맙다. 난 이만 가 보마.”

주서천이 힘없이 웃으며 제갈승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잠깐 스쳐 가는 그 눈빛엔 동정이 가득했다.

“……?”

제갈승계와 무곡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은공께서 무언가 이상한 것 같네만……”

“그러게요. 뭐 잘못 드셨나?”

주서천은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생각했다.

‘신의에게 위약 좀 챙겨 달라 해야겠구나……’

주서천은 위약 한 알을 먹고 이의채를 찾아갔다.

“대협, 무림맹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아직 확인해 보진 않았습니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안색이 영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이의채가 주서천의 낯빛을 힐끗 보고 걱정했다.

“어떤 놈이 대협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겁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이 상왕 이의채가 아주 그냥……”

“무곡 어르신이요.”

“아주 그냥 잔치 하나 열어서 어르신과 대협의 기분을 풀어드리지요! 크으!”

“극쾌의 고수로다……”

이의채가 눈부신 속도로 태도를 바꿨다.

주서천은 무림맹 서신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음……”

“무슨 내용입니까?”

“해남도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는군요.”

“오! 어떻게 됐습니까?”

“도움을 준다고는 하는데, 지금 당장은 힘들다고 하더군요.

인근 해역에 왜구가 모이기 시작한 탓에 그들을 소탕한 뒤에 보낸다 합니다.”

주서천은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남해에서 날뛰던 왜구가 사라지니, 동해가 문제로군요.”

이의채가 말했다.

‘전에 방만에게 들은 것으로 동해에는 암천회 출신이 몇 없다.

선단(船團)을 움직일 힘도 있을 리 없으니, 아마 영역이 비었으니 가로채려는 왜구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겠군.

후우, 해적들 탓에 계획이 좀 틀어지는구나.’

왜구의 대대적인 소탕이 이뤄지는 건 앞으로 몇 년 뒤의 일이다.

이시기에 워낙 문제가 많아지다 보니 결국 명의 수군이 나서게 되며 한동안 잠잠해졌다는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즉, 다르게 말하면 명의 수군이 나서기 전까진 기승을 부린다는 의미였다.

이유 있는 움직임이었다.

“장기간 동안 머무르시게 될 것 같군요.

필요하신 게 있다면 말씀만 해 주십시오.”

“아니오. 그럴 수는 없지요.”

주서천은 서신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턱을 매만졌다.

“금의상단도 수적들 탓에 최근엔 장강을 이용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수적에게 거액의 현상금도 걸어 봤지만 그놈들이 암천회와 손을 잡았다는 게 알려진 이후론 도전하는 자가 별로 없더군요.

있다 해도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암천회는 적림십팔채로 장강을 지배하게 됐고, 적림십팔채는 암천회로서 무력과 재력, 배경을 얻었다.

적림십팔채라 해도 한낱 도적 무리라서 하수가 대부분이었는데, 암천회에서 고수를 파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엔 자기 전에 짚으로 엮어 만든 인형을 가져와 못을 박는 걸 하루에 네 번씩 하고 있습니다.

언젠간 저주가 먹히겠지요? 이 천하의 개새……”

이의채의 눈에서 살의가 느껴졌다.

적림십팔채 탓에 손해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동안 중원의 여러 강을 이용해 수송 시간을 단축했는데, 적림십팔채와 암천회의 동맹 이후론 육지만 사용하거나 혹은 동해를 통해 돌아가는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

“시간이 남는다고 농땡이를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총력전 전에 미리 정리를 해 두어야겠습니다.”

“정리라 하오면……?”

“수림구채의 영역이 워낙 넓어 전부 돌아다니는 건 무리지만, 일부정도야 그리 큰 문제는 아니지요.”

주서천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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