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은 본부를 잃었으나, 정백과 제갈중호의 희생으로 인해서 비교적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다만 피해가 전무했던 건 아니었다.
최초에 출발한 퇴각대 삼천 중 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천기와 천추가 이끄는 탐색대 탓이었다.
황견의 경우엔 당명인과 맞닥뜨려 죽을 뻔했다.
곧바로 본대가 뒤따라 와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차가운 시체가 되어 합비에 묻혔을 것이다.
또한 무림맹주가 합류하게 되면서 그 힘을 등에 업고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 뒤로 하남, 산동, 호북 등으로 분산해 각 지역의 정파 세력에 의탁하여 재정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쯤, 상천육좌에 새로운 이름이 들어온다.
암천회주.
전 상천육좌인 권동제를 정면 대결로 쓰러뜨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사실 전부터 상천에 이름을 넣어야 하지 않나 싶었으나, 여태껏 나선적이 없으니 그 강함에 대해선 피부에 와닿지 않았었다.
하나 이번 일로 그 무력을 몸소 증명하면서 권동제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됐다.
“큰일이로군.”
무사히 퇴각을 끝낸 무림맹이 다음으로 할 일은 우선 임시방편으로라도 본부를 다시 수립하는 것이었다.
장소는 하남의 개봉(開封)이었다.
하남엔 예로부터 북두소림이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치안이 우수한 지역 중 한 곳이었다.
또한 합비 만큼은 아니나 정파인이 상당히 많아서 안성맞춤이었다.
“암천회는 어떤가?”
“아무래도 전 본부에 자리를 잡으려는 모양입니다.
그 날 이후로 합비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무슨 치욕인가!”
장로진의 낯빛이 하나같이 벌겋게 물들었다.
정파의 중심이자 최고 기관이 무너진 것도 모자라 그 자리를 빼앗겼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진정하십시오. 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제갈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회?”
장로진은 순간 제갈상이 조부를 잃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다음 말에 곧 흥분한 건 자신들이란 걸 깨달았다.
“안휘는 북으로 산동, 북서로 하남, 서로 호북, 남으로 강서, 남동으로 절강, 동북은 강소로 둘러싸여 있는 곳입니다.”
“아!”
우백이 감탄을 질렀다.
“포위됐군요!”
경인사태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산동은 금의상단이 있기도 하고 그 위로 하북이 있어 팽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하남에는 소림사가, 호북에는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있으며 강서와 절강은 사도천의 영역이다.
강소에는 명문정파가 없는 대신 정파의 중소 문파가 여러 밀집해 있었다.
즉, 정사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본부를 빼앗긴 건 저희 쪽에서도 타격이 큽니다만, 도리어 위기를 기회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제갈상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할아버님……’
제갈상은 군사답게 냉정하나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나 조부와의 관계는 그에게도 특별했다.
어릴 적부터 오늘날 무림맹의 군사로 지내면서까지 가르침을 받았으니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남들보다 분노하면 분노했지 조부의 죽음이 감정에 영향을 안 끼쳤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제갈상은 누구보다 공사를 철저하게 구별하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군사로서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판단을 내린다는 건 위험한 사고방식이었다.
병사가 오판하면 혼자 죽으나 군사가 오판한다면 군대가 멸한다.
그걸 알기에 감정을 최대한 죽였다.
“하면 재정비가 끝나기 전에 당장 탈환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공추가 물었다.
“무리요.”
제갈상이 아닌 우백이 즉답했다.
“어째서요? 무림맹의 본대가 지쳐있는 것이 흠이나 그 외의 전력이 멀쩡하지 않소?”
본부가 함락된 것이 워낙 충격적이라 그렇지, 전력 피해만 보자면 그리 큰 것도 아니었다.
곤두박질친 사기가 조금 흠이긴 하지만, 사도천이나 정파 세력의 전력은 대체로 준수한 편이었다.
“우리가 어찌하여 북으로 도망친 것인지 잊었소?”
“아!”
“수림구채!”
그렇다.
합비의 아래에 흐르는 장강이 문제였다.
“우백 장로님 말씀대로입니다.
그래서 기회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암천회는 장강을 이용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또한 장강을 수림구채가 완전하게 장악했으니 참으로 골치 아팠다.
“끄응.”
“그 도적놈들이 이리도 문제일 줄이야……”
정말로 상상 이상으로 성가셨다.
“일단, 양측 다 재정비가 끝나지 않았으니 전황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눠야 할 듯 싶습니다.
사도천주나 호북에 나가 계신 검신의 의견 또한 들어 봐야 합니다.”
“후우!”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졌다.
주서천을 비롯한 별동대는 귀주, 호남, 호북 순으로 북상해 하남의 임시 본부, 개봉에 도착했다.
하남의 성도는 정주이나, 개봉 역시 정주만큼이나 번화한 도시였다.
북송 시대엔 무려 백만 명이 넘게 거주하는 대도시였으며, 전국 시대의 위(魏)나라를 비롯해 양(梁), 북송(北宋), 금(金) 등 여러 왕조의 도읍이었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강남의 여러 도시와 수로로도 연결되어 있다 보니 천하의 요회(要會)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워낙 대도시인지라 약 사천여 명의 무림인들을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는 곳이었다.
그 대신 물가나 집세 등 조세가 높아서 서민들의 등이 굽고 허리띠를 졸라맬 정도로 힘들었으나, 무림맹 무사들은 금의상단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검신을 뵙습니다!”
금의상단에서 마련해 준 장원에 도착하자 군기가 잔뜩 선 무림맹의 경비 무사가 인사하며 안내했다.
주서천과 단리화, 제갈수란이 보고겸 회의를 위해 무림맹 상층부와 만났다.
“어서 오시오, 검신.”
무림맹주 집무실이나 회의실이 아닌 곳에서 보고를 하려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갈상이 눈인사를 건네며 인사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모처럼 검신께서 귀주에서 활약해 주었는데, 이를 망쳐서 미안하오.”
운광의 입가에 쓸쓸한 웃음이 번졌다.
“먼 곳에서 달려와 피곤하시겠지만, 수고스러워도 귀주 전투와 현상황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겠소?”
주서천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임시본부로 달려온 게 아니다.
사전에 전서구를 몇 번이나 보내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그래도 직접 보고하는 것과는 차이가 날 수 있으니, 재보고는 필수 과정이었다.
“물론이에요.”
주서천이 아닌 단리화가 대신 답했다.
귀주의 전황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전장에 서 있던 두 사람이다.
현장 지휘관의 보고를 중요시했다.
단리화와 제갈수란이 미리 맞춰 뒀던 보고를 했다.
불필요한 의견이나 상황을 제외하고 요점만 잘 잡아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중요한 만큼 시간이 걸렸다.
“정사가 연합한 뒤로도 사이가 좋지 않아 통제가 되지 않았던 귀주였거늘, 별문제 없이 하나가 되어 귀주의 암천군을 막아 낼 수 있어 다행이었구려.
정말로 수고 많았소.”
“정파인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지요.”
단리화가 살짝 웃으며 겸손을 보였다.
‘으으음…… 생각보다 멀쩡하네?’
웬만한 남자보다 민망한 입담을 지닌 그녀다.
혹시나 상천육좌이자 무림맹주의 앞에서 음담패설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참으로 다행이었다.
“혹시 합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오.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던 참이었소.”
운광은 단리화가 딸, 아니 손녀뻘임에도 그녀의 실력이나 직책을 생각해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설명은 군사가 해 줄 거요.”
제갈상이 운광을 대신해 설명했다.
사실, 주서천 일행 역시 서신이나 소문, 정보 단체를 통해 들은 것이 있다 보니 알 만한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들은 것과 비교할 겸, 그리고 현장의 경험담을 위해 경청했다.
‘장강……’
고인(古人)들이 말하길, 장강은 천하제일의 강이요, 장강을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고 했다.
현 상황이 딱 그랬다.
암천회는 수림구채와 협력해 장강을 지배해 많은 득을 보고 있었다.
수송로가 특히나 컸다.
“주도면밀한 자입니다.”
제갈상이 질린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주서천도 제갈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동대가 귀주에 도착하기 전 동정호 인근에서 수적에게 습격받았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일찍 알게 되었다면 신경이 쓰여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다만 귀주에 이목이 쏠려 있는 탓에 그리 신경 쓰지 못했다.
‘이목을 돌린 뒤, 병력을 각 지방에서부터 분할한 뒤에 시간을 들여 보낸 것이 기가 막힌 수다.’
적이지만 훌륭하다.
그 외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흐옹, 수송에 대한 의문이 풀리긴 했는데…… 어떻게 땅에서 솟은 것처럼 한곳에 나타난 걸까요?”
단리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휘의 구석도 아닌 합비의 코앞에서 나타났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정파의 세력권의 중심이다 보니, 들키지 않도록 만 명이 등장한 게 궁금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암천회는 병력을 세분해 수송했습니다.
매복지 역시 괜히 몸집을 불렸다가 들키면 곤란하니 수송 때와 마찬가지로 각 구역에 나눠서 배치했겠지요 인근의 산, 장강의 수중 동굴, 기암절벽, 혹은 상선(商船)으로 둔갑해 숨어 있다가 당일에 각지에서 와서 결집했을 것입니다.”
안휘 남부의 장강이 생각보다 합비에 가까운 게 문제였다.
특히 강소로 넘어가는 화현(和縣)이나 마안산(馬駿山) 부근은 전략적으로 딱 좋은 장소였다.
“향후의 전략을 생각해서라도, 암천회 이전에 수림구채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제갈상이 아닌 제갈수란이 입을 열었다.
평소엔 말이 없다가도, 모사답게 머리를 쓸 일이 생기면 말이 많아졌다.
“암천회가 합비의 본부에 자리 잡은 것이라면, 장강이라는 최대의 퇴로 겸 수송로가 생기는 거니까요.
게다가 정파는 물론이고 사파에도 수공에 능한 자는 없으니, 전처럼 중요한 순간이 생긴다면 눈을 뜬 채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사전에 제지해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땅 위에서야 끝까지 쫓을 수라도 있지, 강 위라면 답도 없다.
정사 연합도 선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강으로 들어서면 별 힘도 쓰지 못하고 수적들에게 유린당할 가능성도 적잖게 있었다.
상상이상으로 문제였다.
“모사미봉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제갈상은 공사를 철저하게 구분했다.
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여동생이 상대라 해도 경어를 붙였다.
제갈수란도 이를 당연히 여기는지 그리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분께서 오시기 전에 수림구채의 토벌 건을 검토 중이었습니다.”
“하나 크나큰 문제가 있소.”
운광이 입을 열었다.
“모사미봉이 말씀하셨던 대로 수공에 능한 자가 없다는 점이오.”
운광은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고수로 구성된 토벌대를 보낸다면 못 할 것도 없소. 하지만 그리 되면 다른 곳이 문제요.”
동시에 적림십팔채를 토벌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주서천이 살짝 웃었다.
“무슨 방안이 라도 있는 거요?”
“예. 해남검파, 어쩌면 해남도의 무림 방파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듯 싶습니다.”
“……!”
운광과 제갈상의 안색이 환해졌다.
“혹시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수십 명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해남검파가 아니라 해남도라 말한 겁니다.”
주서천은 해남도의 분쟁을 종식시키면서 해남검파는 물론이고 중소문파 및 남해용문의 은인이 됐다.
이를 통해서 도움을 요청한다면 얼마 전 포달랍궁 때처럼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리라.
“검신이야말로 영웅이오, 영웅이야!”
운광의 얼굴에 줄곧 맺혀 있던 근심이 사라졌다.
신임 무림맹주는 인자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한 가지 더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본 문의 무공 구결을 물으셔도 내 검신께 얼마든지 답하리라.”
태극검이 상당히 기분 좋은 듯 농까지 던졌다.
주서천은 순간 무당파 삼대신공의 무공 구결을 물어볼까 고민했다가, 아쉬워하면서 다른 걸 질문했다.
“암천회주와의 대결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운광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암천회주의 무공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주서천은 암천회주를 전장에서 본 적 있으나, 지척에서 본 것도 아니고 조금 거리를 둔 상태였다.
무엇보다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고수들의 대결이 워낙 대단하고 주변에 피해도 많이 끼치다 보니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주서천 본인도 암천회의 칠성사병과 치고 받느라 고수들의 대결을 구경할 여유도 없었다.
암천회주는 오늘로부터 약 오십 년 뒤에서야 노년이 된 홍고를 비롯해 미래의 상천들에게 죽는다.
‘중도만공도 없으니 그때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괴물인 건 마찬가지다. 이기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그러면……”
운광이 단리화의 눈치를 봤다.
제갈상이나 제갈수란이야 무공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군사된 자로서 심상구현도 전략 전술에 포함하고 생각해야 하지만 단리화처럼 무인인 경우 오히려 깨달음을 얻는데 독이 될 염려가 있었다.
“보고가 끝났으니 전 이만 물러나보도록 할게요.”
단리화가 눈짓을 받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눈을 보아하니 궁금해하는 모양이었지만 아쉬워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운광은 단리화가 나간 걸 확인한 다음 근처에 대기 중이던 호위대도 물린 뒤에야 입을 열었다.
“모사미봉께선 앞으로 하는 이야기는 혹여나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해 주시오.”
“네, 명심하겠습니다.”
“암천회주, 그자는…… 검신이 경고했던 것처럼 터무니없는 자였소.”
운광은 시종일관 얼굴이 굳은 채 이야기했다.
태극혜검에서부터 심상구현인 이화접목의 등장, 그 외에도 퇴각하기 전까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론 쾌검이 확실한데, 그 외의 것을 알 수가 없구나.’
쾌검, 그것도 극쾌의 검이다.
다만 쾌검은 정사는 물론이고 마도까지 포함해도 꽤나 흔하기 때문에 무공을 특정하게 유추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저 빠르다는 것만으론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전생이야 그놈의 중도만공 탓에 익힌 무공이 워낙 많아서 알 수 없었고…… 끙, 심상구현도 모르겠구나.’
삼안선투의 비고에서 중도만공을 회수하지 않았더라면, 미래의 상천을 위해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약해진 주제에 태극검과 권동제의 합공에 당하긴커녕 아무렇지 않게 버텨? 참 나.’
욕이 절로 나오는 기분이었다.
“검상이라도 남았다면 모를까, 죽은 이들은 본부에 남아 있으니 확인하지도 못해 알 수가 없소.”
“암천회의 무공 대부분은 황궁무고에서 나왔으니, 아마 실전된 무공일 겁니다.
군사진이 옛 문헌을 살펴보는 중이니 무언가 발견되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갈상이 덧붙여 말했다.
“맹주님께서도 모르신다면 군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실전되거나, 혹은 옛 무공이겠지요.”
태극검도 전 세대의 영웅답게 소싯적엔 강호를 돌아다니며 숱한 전장을 겪었다.
사파인이나 마도인은 물론이고 정파인과도 공방을 교환했다 보니 무공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다.
적어도 현 무림에 알려진 무공은 아닌 게 분명했다.
다만 무공은 그렇다 쳐도 심상구현도 알아내지 못한 게 많이 아쉬웠다.
고수의 싸움은 한순간에 정해지고, 상천이라 불리는 현경의 절대고수는 특히 심상구현으로 정해진다.
주서천도 이를 알기에 회귀라는 심상구현을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고 비밀로 했다.
“알겠습니다.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당연히 해야 할 이야기를 했을 뿐이외다.
반대로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해 참으로 미안하오.”
“아닙니다. 정말로 여러 도움이 됐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나으니 맹주님께선 신경 쓰지 말아주십시오.”
주서천은 운광에게서 정말로 미안한 감정이 느껴지자 괜히 부담 갖지 않도록 아무렇지 않은 듯이 웃어 줬다.
‘좋아, 이제 해남도로 서신을 보내고, 간야자에게 흑철갑주와 화첨창을 보여 줘야겠다.’
주서천은 요광에게서 가져온 법보가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기도했다.
안휘, 합비.
암천회는 만, 아니 구천의 병력을 이끌고 합비에 정착했다.
본부 습격 중 팔문을 제외하곤 건물에는 이렇다 할 훼손이 없었으니 거주지로서는 딱이었다.
“천기님, 보고 드립니다.”
“그래.”
“본부 내의 기관 및 함정 설비를 해제했습니다.”
“죽림의 기문진은?”
“조율해 두었습니다.”
“좋다.”
한편 암천회는 재정비하는 데 바삐 보냈다.
“건물 내외부의 함정을 해제하는데 꼬박 이틀이나 걸리다니…… 천군사, 그 여우 놈이 퇴각이 결정됐는데 그냥 갈 리가 없었다는 건 알았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질리는 놈이로다.”
무림맹은 본부에서 버선발 채로 뛰쳐나오듯 퇴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고 나온 건 아니었다.
담장의 보안 장치처럼 사용된 지는 오래됐으나 제갈승계가 정비한 함정을 작동한 뒤에 나왔다.
그 탓에 구천이나 되는 대군이 이틀 동안 멀쩡한 건물을 앞에 둔 채 마당에서 잠을 청해야만 했다.
“뭐, 됐다. 어차피 쓸데없는 발악이다. 하하하.”
이맛살을 찌푸린 것도 잠시, 천기는 별일 아니라는 듯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대승을 거둔 이후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
‘하기야, 이번엔 주서천이 끼어들 틈도 없었으니.’
‘회주께서도 천기님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았는가.’
칠성사병 무리가 속으로만 생각했다.
비록, 귀주의 최초 격돌에서 참패를 겪었으나 그래도 결과만 보자면 대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력의 피해도 적었고, 적의 본부도 손에 넣었다.
또한 무림맹이 급하게 떠나느라 남기고 간 재물까지 얻어 입맛이 제법 쏠쏠했다.
마침 재력적인 면에서도 슬슬 부담이 가기 시작하던 참이었는데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퇴각대의 뒤를 쫓은 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성과였다.
무엇보다 천기가 이리도 기뻐하는건, 대승도 대승이지만 불구대천의 원수 주서천 때문이었다.
“하하하. 주서천, 네 이놈.
그동안 본 회의 꽁무니를 뒤쫓아 다니며 하는 일마다 족족 훼방을 넣더니만 이번에는 실패했구나.
멍청한 놈, 네까짓 것이 발버둥 쳐 봤자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다.”
그동안의 실패를 본보기 삼아서 이번엔 정말 주의에 주의를,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했다.
내부의 정보가 나가지 않도록 신경 쓰고, 적림총채주에게 사람을 보내 몇 차례나 작전을 각인시켰다.
심혈을 기울인 만큼,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었다.
“발에 피가 나도록 달렸으나,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패전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하면 입이 절로 귀에 걸리는구나.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쉽군그래.”
천기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
천기가 화들짝 놀라며 제자리에 얼른 부복했다.
근처의 칠성사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만 해도 무림맹 군사들로 가득했던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암천회주였다.
“회주님을 뵙습니다.”
“환희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으나, 앞으로의 일을 어찌할지 들어 볼 겸 찾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뵐 생각이었으나, 소신이 환희에 차 있어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기다리게 해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회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조금이라도 빨리 찾아뵙도록 하겠나이다.”
“천기, 그대라면 언제나 때에 맞춰 보고를 올리니 그리 신경 쓸 것 없다.”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무림맹, 아니 정사 연합이 어찌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느냐.”
“필시 수림구채, 적림십팔채를 노릴 것입니다.”
“음, 역시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병력이나 보급이건 간에 수송(輸送)이란 전략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요건이다.
장강은 최대의 수송로이자 동시에 퇴로로도 쓰일 수 있으니 정사 연합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러나 정사 연합엔 이렇다 할 수공의 고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마 소수 정예로 구성된 별동대를 보내거나, 혹은……”
“혹은?”
“해남도의 정파인을 동원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천기가 고개를 들어 눈을 빛냈다.
“얼마 전, 좀 늦어지긴 했으나 동해의 왜구 출신인 천선성에게 해남도의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습니다.”
암천회와 손을 잡은 왜구는 남해의 방만만이 아니다.
동해 출신의 왜구 역시 존재했다.
다만, 남해만큼 영향력을 크게 끼치지도 않는 데다가 수도 적어 그리 쓸모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정보원 수준으로 운용했다.
동해의 왜구는 최근 남해를 영역으로 활동하던 방만 및 해적들이 사라지자 확인차 남해를 탐색했다.
그 탐색 인원 중에서 암천회 소속의 정보원이 숨어 있었다.
“해남도의 경계 탓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알아낸 것은 적으나 최근 해남도의 분쟁이 해결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주서천과 그 일행이 도운 탓이겠지요.”
“옳거니, 해남검파에게 빚을 지게 만들었구나.”
해남검파는 남해의 무림인이자 중원의 무림인이기도 하다.
무림맹에 소속된 명문 정파로도 인정받았다.
수공보다는 검공에 집중되긴 했으나 수공이 전무한 건 아니다.
적어도 정사 연합보단 상황이 나았다.
또 그 외에도 해남검파와 연을 맺은 남해의 중소 문파를 동원할 가능성까지 생각해야 했다.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지는 모르나, 그동안 남해에서 벌어진 분쟁탓에 해남검파 역시 피해가 작지 않으니 그리 많은 힘을 보태진 못할 것입니다.”
“흐음.”
“물론, 설사 저력이 부족할지라도 정사 연합은 적림십팔채, 아니 수림구채를 필히 토벌할 것입니다.”
천기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적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되는 것만큼 쉬운 상황이 또 없다.
이를 적극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계책을 준비해 두었으니, 부디 맡겨만 주십시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