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二章 (205/254)

무림맹은 퇴각이 결정되자마자 준비를 서둘렀다.

하루, 아니 한나절 거리도 되지 않는 곳에 암천군이 주둔해 있었다.

시행착오를 할 시간은 없었다.

작전도 간단히 설명한 뒤, 질문을 최소화하고 거의 동시에 진행했다.

“마음 같아선 강서나 절강에서 사도천과 합류하고 싶으나, 장강이 가로막고 있으니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저희는 호북과 하남으로 퇴각합니다.”

안휘에서 서쪽으로 가면 호북이 나오고, 서북으로 향하면 하남이 나온다.

다행히도 하남에는 소림사, 호북에는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위치해 있으니 안전상으론 걱정 없었다.

“오천의 병력은 넷으로 나눌 겁니다.

약 이천이 본부에서 시간을 벌 예정이고, 그사이 삼천이 천씩 셋으로 나누어 퇴각합니다.”

“퇴각의 속도를 올리기 위해서요?”

“그렇습니다. 또한, 적의 추적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대군은 강력하나 이동에 제한이 생긴다.

단순히 진군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소모된다.

그 탓에 무림맹은 퇴각에 있어 유리한 편이었다.

“퇴각에 성공한다면 그 뒤는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그 과정이 터무니없이 어렵다는 거요.

저 대군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오는구려.”

우백이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겁낼 것 없소!”

팽군평이 언제나처럼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였다.

“정파 무림의 중심, 무림맹 본부인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소.

전면전을 하는 것도 아닌데, 퇴각 정도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오.”

“에휴! 낙관적이라 좋겠구먼!”

황견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놈이?”

팽군평의 이마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나무아미타불 팽 장로님이 하신 말씀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나, 그렇다고 시작부터 우려하는 것도 괜한 생각이라고 생각하외다.”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혜노가 중재에 나섰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해요.

본부에는 무림맹주님과 권동제께서 계시니, 수적으로 차이가 나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경인사태가 혜노의 중재를 도우며 찬성했다.

중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무림맹은 수적으로 열세이나, 사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정파 무림이야 본래 숫자가 적은 편인지라 다수에 포위당하는 건 익숙한 일이기도 하지만, 본부인만큼 고수나 정예 등이 여럿이라 쉽게 겁먹지 않았다.

무엇보다 본부에는 상천육좌 중 태극검과 권동제가 있다.

사기가 높아질지언정,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 외에도 무림맹엔 기문진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를 잘만 이용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합비의 본부는 오래된 만큼 요새나 다름없다.

오래된 세월 동안 정사대전 등 여러 전쟁을 겪었으나 본부가 함락된 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동안의 경험이 축적된 만큼 여러 방어 설비도 있으며 상당한 수준의 기문진 또한 존재한다.

“자고로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걱정도 걱정이지만, 자만도 금물입니다.”

제갈상의 말이 상층부에 새겨졌다.

“암천회주의 무위는 아직 제대로 밝혀진 적 없으나, 듣자 하니 그 천마를 무력으로 굴복시킨 괴물이란 걸 참고하셔야 합니다.

검신께서도 몇 차례나 경고한 부분이니 부디 명심해 주십시오.”

꿀꺽.

누군가가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으레 강호의 과장된 소문이라 생각했겠지만, 검신이 말한 것이니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최초에 천마조차 암천회의 주인이 아닌 간부였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귀를 의심했다가 경악했다.

세상에, 상천을 수하로 두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나 사실이라는 것에 입을 쩍 벌렸다.

“암천회주가 등장할 경우, 막으실 분은 맹주님과 권동제 어르신뿐입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두 분께선 나서지 마시고 상황을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알겠네.”

“세세한 건 장로분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면, 무사히 퇴각을 성공시킨 뒤 뵙겠습니다.”

탕! 탕! 탕!

무림맹 경비대는 각 방향의 대문을 걸어 잠궜다.

그 앞으론 장애물을 배치해 방어를 준비했다.

“군사께서 명령한 대로 기문진의 준비도 끝났소.”

황견이 보고했다.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이후의 퇴각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일차 퇴각은 삼천 명.

그 책임자는 황견이 맡았다.

개방도답게 발이 빠르며, 또한 정보 단체의 일원답게 주변 환경이나 길에 대해 밝으니 당연했다.

또한 사리분별 또한 확실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니 딱 알맞은 역할이었다.

퇴각 전까지 무림맹의 기문진이 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도왔고, 이젠 떠날 때가 됐다.

“적들이 다가왔으니 슬슬 죽림(竹林)의 통로로 한시라도 빨리 퇴각하시길 바랍니다.”

“알겠소.”

퇴각 경로는 전 무림맹주, 남궁위무의 은신처였던 장소였다.

기문진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적의 추적을 따돌릴 수도 있고, 무림맹 상층부에게만 공개된 통로가 있으니 퇴각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제갈상은 등을 돌려, 정면을 봤다.

무림맹의 고수 무리가 군사의 명을 기다렸다.

“사전에 말씀드렸듯이, 본부의 문이 부서지고 적군이 들어온 순간에 맞춰 팔진도(八陣圖)를 발동시킬 것입니다.”

‘팔진도!’

제갈세가의 조상이자 과거 촉한의 승상이자 전략가였던 제갈량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기문진법이다.

사실, 기문진이 아닌 진법(陣法)이었으나 후대에 걸쳐 기문진법으로 연구 및 개량됐다.

또한 이 팔진도는 위력만큼 난해하여 천금이 들어가기에 무림에서도 두 장소밖에 없었다.

첫째는 창안지인 제갈세가요, 둘째가 바로 이곳 정파 무림의 중심지, 합비의 무림맹 본부였다.

“여덟 개의 문이 부서지면서 적들이 들어온 순간, 그들은 다른 장소에 무작위로 떨어질 것입니다.

되돌아가려 해도 문의 위치가 지속적으로 바뀌는 탓에 헤매게 되겠죠.”

무림맹 본부의 문은 정문을 포함해 여덟 개다.

최초 건축 설계 자체가 팔진도를 염려하고 만들었다.

그만큼 팔진도의 위력이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난해하기로 유명한 만큼 팔진도의 위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있는 진법가는 제갈세가에서도 극소수였다.

그중 한 사람이 천군사, 제갈상이었다.

괜히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군사직에 오르고 어릴 적부터 천재로 추앙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사이 최대한 적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명심하겠소.”

운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콰앙!

말이 끝나자마자 팔문(八門)이 크게 흔들렸다.

“들어옵니다!”

경비 무사가 외치며 경고했다.

이천에 이르는 무사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콰지직!

“부서진다!”

콰앙!

여덟 개의 문이 거의 동시에 부서졌다.

나무와 철 조각이 비산하며 흑의 무복 차림을 한 칠성사병이 함성을 내지르면서 진입했다.

“와아아아아!”

그야말로, 개미 떼와 같았다.

부서진 문은 사람을 꾸역꾸역 토해 냈다.

“담을 넘어라!”

담 위로도 칠성사병 무리가 올라왔다.

“크아아악!”

하나 벽을 타고 위로 올라온 순간, 그들은 아래에서 솟구친 창날에 의해 몸이 꿰뚫렸다.

“기, 기관?”

“기관이다!”

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문을 통해서만 들어올 리 없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책도 해 두었다.

바로 기관 장치였다.

‘다시 재정비해 둔 것이 참으로 다행이구나.’

정파 무림의 중심지인 만큼, 본부에는 여러 보안 장치가 되어 있다.

현대에 와서야 사장된 기술이긴 했으나, 예전에는 주류는 아니어도 종종 사용되기는 했다.

삼백 년 전의 도둑, 삼안신투도 사용하지 않았던가.

다만 외면된 이후로 정비도 되지 않고, 쓸 일도 별로 없어서 녹슬다시피 내버려 둔 상태였다.

‘전에 승계가 무림맹에 왔을 때 봐주지 않았더라면, 쓰지 못했을 거야. 고맙다, 승계야.’

고장 난 것이나 부품 몇 가지를 교체하는 수준으로 이렇게 재사용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시 전문 기술자가 설치한 만큼 수준이 높아, 제갈승계가 아니었더라면 여전히 사용되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으으!”

“쿨럭!”

담장 위에 무게가 실리면서 반응하는 건 창살만이 아니었다.

극독을 발라 둔 암기 세례가 쏘아지거나, 혹은 독연이 위로 뿜어져 적의 침입을 차단했다.

사실상 성벽만 세워지지 않았지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아, 아니 왜 여기로 나와?”

“넌 옆 백인대장 아니냐?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팔문의 상황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남문을 넘어왔는데 나타난 곳은 북서문이었다.

심지어 고정된 게 아니라, 한 사람마다 들어오는 곳은 같아도 도착한 장소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개개인의 당황은 물론이요, 첩첩산중으로 진형이나 지휘 체계가 엉망이 되면서 개판이나 다름없었다.

짧게는 몇 주일, 길게는 몇 년 동안 손발을 맞춰 온 동료가 바뀌었으니 그 혼란은 더했다.

“이때다! 쳐라!”

선봉인 팽군평을 시작으로 공격이 시작됐다.

“아아악!”

“커헉!”

암천군이 혼란에 잠긴 사이, 팔문각 장소에 분산되어 배치된 고수들이 무공을 선보였다.

정파의 정예들답게 하나같이 보통이 아니었다.

전체적인 수는 적어도 고수는 많은 정파 특징답게, 개개인의 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또한 명문 정파답게 합격진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건(乾), 유지. 태(兒)와 손(異)을 변경. 리(離)와 진(震) 교차……

생문(生門) 북북서(北北西)로 이동 후 사문(死門)과 변경.”

제갈상은 중앙에 서서 명령을 내렸다.

눈동자는 상하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전장의 위치를 확인.

멈추는 건 한순간에 불과했다.

입은 무어라 중얼거리지만 읽을 수 없었다.

총지휘가 아닌, 팔진도의 조율을 하고 있었다.

팔진도는 발동한다고 끝이 아니다.

팔문의 지속적인 위치 변경을 위해 진법을 구성하는 사물을 장기 말처럼 움직여야 했다.

제갈상은 손에 쥔 접은 부채로 군사와 몇몇 무사만 알아보는 자세를 취했는데, 그게 신호가 됐다.

팔문 근방에 자리 잡은 군사진이 그것을 보면 무사들에게 전달했고, 사물을 움직여 위치를 변경했다.

‘대단하도다!’

‘이리 완벽하게 팔진도를 운용할 줄이야!’

팔진도를 운용하려면 기밀 유지를 위해 제갈세가 출신이어야 한다.

그렇다 보니 현재의 군사진은 대부분 제갈세가의 방계 출신이었고, 팔진도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확인하여 반응하는 속도는 물론이고, 무사들의 움직임까지 계산해 지령을 내리고 있다.’

‘팔진도를 이렇게 완벽하게 운용했던 이가 몇이나 있었단 말인가?’

‘그야말로 지룡, 아니 천군사로다!’

정파인치곤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녔으며 또한 자만하거나 오만하지 않는다.

다음을 위해 잘못은 쉽게 인정하고 반성하며, 그 순간에도 어떻게 해야할지 전략을 짜낸다.

정보의 통제를 비롯해 사교력을 자랑해 정치에도 일가견 있으며 행정업무의 처리도 무시무시하다.

무공도 지략가치곤 상당하며, 또한 두려움이 없으며 그렇다고 만용을 부리지 않는다.

인품이야 두말할 것 없고 술과 여자도 멀리하는 편이었다.

더더욱 무서운 건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다는 것과 현재도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장기이며 어릴 적부터 교육받은 기문진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이 팔진도인가……!”

장로진 역시 경천동지할 위력에 경악했다.

‘그야말로 심상구현이 아닌가!’

운광이 속으로 놀라며 목소리를 삼켰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심상구현은 사람의 의지를 무공이란 형태를 빌려서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발현하는 효력을 지녔다.

팔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형태가 무공이 아닌 학문이나, 극의를 넘어서 물리 법칙을 무시해 신비의 힘을 펼쳤다.

제갈량, 아니 제갈세가의 심상구현.

팔진도, 공간(空間).

그야말로 기문진법의 결집체이자 극의였다.

“아니, 이런 걸 숨겨 두었으면 굳이 퇴각할 필요도 없지 않았나!”

팽군평이 신난 목소리로 도를 휘둘렀다.

무림맹 장로답게 천하백대고수의 실력을 선보였다.

통나무처럼 굵직굵직한 팔에 힘을 주면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고, 괴력을 뽐냈다.

우직하고 호쾌한 성격에 걸맞게 적이 도를 막아내도 멈추지 않고 병장기를 밀어내며 살을 베었다.

“팽가야, 그 다혈질적인 성격 좀 자제해라!”

황견이 팽군평이 자만을 보이자 경고했다.

“적들이 꼼짝도 하지 못하는데 어찌 가만히 있으랴?

수적인 차이가 이리 나는데도 우세하다니!”

팽군평이 ‘으하하’ 하고 웃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이 정도면 해 볼 만하다.’

‘암천회라고 해서 긴장했더니, 아무것도 아니군.’

‘있는지도 몰랐던 기관에 팔진도, 심지어 상천육좌까지 두 분 계시니 문제가 될 건 없다.’

‘생각해 보면 이 자리에 자리한 이들은 무림맹, 아니 정파 무림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아닌가.’

‘너무 겁먹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군사께선 참으로 겸손하구나.

스스로를 이리도 과소평가하셨으니 말이야.’

팽군평의 말에 긍정하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암천군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들어 조금은 긴장을 했었다.

한데 직접 맞붙어 보니 생각보다 순탄했다.

‘아니.’

하지만 천군사의 생각은 달랐다.

제갈상만이 아니었다.

몇몇 이들은 금세 위화감을 느끼며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내부로 진입한 숫자가 생각보다 적다.’

문을 박살 내고 진입했을 땐 많아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니 생각만큼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선봉대의 시신이 천을 넘기 시작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적들이 끈질기게 버텨서 그런 게 아니라, 선봉대의 숫자 자체가 적었다.

더욱 신경 쓰이는 건, 보면 이름이 절로 나올 만한 적군의 고수들의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수를 읽혔다.’

제갈상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 수를 읽힌 건 당연하다.

팔진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당명인이 그걸 회에 전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당명인은 무림맹 최고 기밀 흑영부의 일부이자 독왕과 더불어 암묵적인 책임자였다.

팔진도의 원리나 운용은 제갈세가의 권한이라 세세한 건 모르나, 대충 어떤 건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팔진도의 파진법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외부에서부터 내부로 진입하지 않고 팔문을 흔적도 없이 부수는 것.

그렇게 하면 팔진도는 잃으나, 그럴 시간에 전원이 퇴각하면 그만이었다.

둘째는 위치 및 길이 지속적으로 변경되는 미로를 뚫고 제갈상이 자리 잡은 중궁에 도달하는 것이다.

진법가를 사살하면 팔진도도 멈춘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는 내부의 무림맹군이 지칠 때까지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방안이 있었다.

제갈상은 이 세 번째의 경우, 지치기 전까지 최대한 막아 낸 다음 퇴각할 예정이었다.

이론상으론 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외부에서 팔문을 파괴할 생각인가?’

내부의 혼란을 겪은 탓인지 선봉대 이후 적의 병력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정황상 불필요한 피해를 최소화시키고 외부에서부터 파괴하는 걸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결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오천이나 되는 병력을 놓치는 것이 되나 발 빠른 자들을 빼내 추격대를 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상황이 불길할 정도로 쉽게 흘러가고 있다.’

정황만으로는 문제가 없다.

이성의 판단 또한 괜한 걱정이라 말했다.

하나 가슴 한구석으론 무언가가 걸렸다.

이처럼 육감 같은 불확실한 것은 군사에게 있어 배제해야 할 것 중하나다.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제갈상처럼 무인보다는 문인이 더더욱 그렇다.

‘무엇이냐.’

두근. 두근. 두근.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한기가 등골을 훑고 지나쳤다.

몸이 살짝 떨렸다.

그 와중에도 팔진도의 운용에는 빈틈이 없었다.

과연 하늘이 내린 군사다웠다.

‘무엇이 이리도……’

불안이 극에 다다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제갈상은 물론이고 이천 명의 고막을 두드렸다.

“과연 무림맹과 제갈세가가 비장의 수로 숨겨 둘 만한 기문진이로구나. 솔직히 감탄했다.”

“……!”

분위기가 바뀌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궁을 기점으로 남쪽 정문을 통해 장년의 무인이 걸어 나왔다.

그 발걸음엔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었고 도리어 위풍당당했다.

팽군평은 다혈질답게 웬 놈이냐, 라고 외치려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갔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신난 기세는 조금도 없었다.

하북팽가의 장로만이 아니었다.

격렬하게 부딪치던 전장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갑작스레 멈췄다.

“물러서게나.”

얼어붙은 시간 속, 후위에서 대기중이던 정파의 지도자가 혼자 움직였다.

태극검 운광이었다.

평소 눈길에 묻어나던 부드러움은 조금도 없었다.

그 대신 잘 벼린 검처럼 예리한 눈매가 있었다.

“천기의 말대로 선봉대를 보내 실험해 보는 것이 좋은 판단이었구나.

무림맹의 팔진도, 명불허전이었다.”

“암천회주……”

운광이 수염을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새삼 놀랄 건 없었다.

이 자리의 무림인들 전원 역시 직감적으로 장년의 무인을 암천회주라 추측했다.

등장만으로 통합 삼천, 아니 천이 줄어든 약 이천의 무인들을 압도하는 인물은 천하에 몇 없다.

“그래.”

암천의 주인이 오만하게 웃었다.

“본좌가 암천의 주인이자 무림의 정복자이며 천하제일인이다.

만나서 반갑구나, 정파의 수장이여.”

고개를 살짝 들어서 좌중을 오연하게 내려다보았다.

얼굴에선 절대자만이 보일 수 있는 오만함이 돋보였다.

하나 그 누구도 그 태도를 보고 뭐라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보이기는커녕,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주변을 압도하며 절로 허리를 숙이게 만드는 중압감이 느껴졌다.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뭐, 뭐냐? 이건?’

‘이런 위압감이라니……’

무공을 익히지 않았거나, 삼류의 무인들이었더라면 진작 무릎을 꿇고 부복했을 지도 모른다.

사도천의 절대고수, 패신군의 위압감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보자로서의 패기, 지도자로서의 위압감, 무인으로서의 강함까지 두루두루 갖춘 괴물이었다.

절대고수라면 평소에 기를 갈무리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겠으나 암천회주에게서는 그러한 기미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기문진과는 다르게 고도의 환각이 아닌, 실제로 공간을 왜곡시키다니 신기하더구나.

무공만이 아니라 기문진으로도 극의에 이르면 법칙을 위배할 수 있다곤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무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심상구현에 대해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림맹주, 태극검 운광이라 하네.”

운광이 제갈상의 시야를 가로막지 않게 나와 섰다.

“무림 공적, 암천회주여. 질문해도 괜찮겠나?”

“본좌의 아량은 넓으니, 얼마든지 좋다.”

“어찌하여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겐가?”

“무림의 정복 말인가?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암천회주는 허리춤에서 검을 천천히 뽑았다.

“태극검이여, 검수의 손에 검을 쥐여 주면 무엇을 할 것 같나. 그것과 같은 말이다.”

암천회주의 움직임에 주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굳었던 몸이 서서히 풀려 갔다.

“산의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에게 왜 산에 오르려고 묻는다면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답을 들을 것이다.”

암천회주의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사람은 언제나 누군가를 지배하고, 누군가에게 지배당한다.

그 과정에서 작은 분쟁에서부터 국가 단위의 전쟁이 일어나지.

그것이 역사이며, 사실이다.”

“진심…… 인가?”

운광의 목소리에선 분노가 느껴졌다.

“무당파의 장문인이여, 본좌에게 ‘도’라도 가르칠 셈인가?

그런 거라면 그만 두어라.

모순과 위선으로 가득 찬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지니까 말이다.”

암천회주는 오만한 태도로 코웃음쳤다.

“그대들은 이념의 대립이요, 신념이라 부르나, 객관적으로 보면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변명이자 헛소리에 불과하다.

관부건 무림이건, 결국 개인 및 단체의 이득을 위해서 싸우는 것에 불과하지 않나.”

암천회는 차갑게 조소 지었다.

“네 이노오오오옴!”

운광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따위 이유더냐! 고작! 그따위 이유더냐!”

태극검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대를 따르는 이들 중 일부는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무림이 바뀌길 바라는 이들도 있다!”

정사에 등을 돌리고 암천회와 손을 잡은 이들은 비록 방식은 잘못됐지만,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출신 성분, 무공으로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한다.

또한 기득권층의 부패에 질려 무언가 바뀌길 원했다.

이 무림은 일그러져 있다고.

“한낱 그 욕심 탓에 수많은 학살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따르는 이들의 마음을 거짓으로 짓밟고, 속였을 뿐만 아니라 우롱하다니!”

“도교의 진리를 깨우쳤다고 칭해지는 현인이 칠정에 휘둘리는 모습이라, 마음에 드는군.”

암천회주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 싶으니…… 가마.”

채앵!

순간, 인지의 부조화가 벌어졌다.

제갈상은 넋 나간 목소리를 냈다.

“어……?”

몸이, 붕 떠올랐다.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에 운광의 검이 수평으로 서 있었고, 그 너머론 암천회주가 불길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이 끝나고 눈을 감았다가 뜨니, 암천회주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나타나 검을 뻗었다.

그리고 운광이 언제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검을 수평으로 눕혀 암천회주의 검을 막았다.

‘어째서?’

하지만 몸이 떠올랐다.

손에 쥔 부채도 떨어졌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비상한 머리를 굴려 본다.

‘충격파.’

검은 닿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이 자의에서 벗어나 멋대로 떠올랐다는 건, 충격파에 당했다는 의미다.

제갈상은 상천육좌가 공격을 막았음에도 충격파가 전해져 몸이 날아갔다는 것에 경악하면서도, 암천회주의 행동에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맹주님이 아닌 나를 노렸다.’

팔진도의 파진법을 부수는 것만이 아니다.

신임 무림맹주는 전대와는 달리 맹주로서의 경험도 부족하고, 정치나 전략 등에도 서툴다.

즉, 군사인 자신이 이 자리에서 쓰러진다면 자연히 중심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파악했을 것이다.

‘위험하다.’

무서운 건 무공만이 아니었다.

판단력 또한 대단하다.

‘다리의 회전도 빠르며, 겉보기엔 오만해도 상대를 얕보거나 방심하진 않는다…… 검신과 같은 부류다.’

검신, 주서천의 대단한 점은 터무니없는 수준의 무위를 가졌음에도 결코 방심하지 않는 것이며, 그 와중에도 지략이나 판단력도 우수하다는 것이었다.

상식을 넘어선 괴물.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드는 노력하는 천재.

‘만약 내가 예상한 대로라면 암천회주는 이천 명을 동시에 상대하겠다고 혼자 온 게 아니다.’

최초부터 의문이었다.

선봉대 천을 보내 놓고는 단신으로 진입했다.

‘암천회주, 참으로 무서운 자다.’

인상이 워낙 강하고 압도당한 탓에 입을 다물었지만, 다들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리라.

설사 무공이 상천에 이른다고 해도, 혼자서 정파 무림의 정예 이천을 상대할 수는 없다.

“함…… 쿨럭!”

제갈상이 말하려다 말고 피를 울컥 토해 냈다.

털썩.

다행히 멀리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도중에 뒤에서 누군가가 받쳐준 덕에 충격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암천회주의 검격에 의한 충격파는 생각보다 터무니없었다.

내장이 다 욱신거리고, 갈비가 지끈 아파 왔다.

“군사!”

“군사, 괜찮습니까!”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콜록, 콜록!”

제갈상은 입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 내며, 오른손을 들어 팔진도의 유지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군사 및 무사들은 조금 놀랐어도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함정입니다.”

“함정?”

제갈상은 끓어넘치는 핏물을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에 질문에 답했다.

“퇴각대가 위험합니다.

최소 삼천에서 오천, 아마 당명인이나 천기가 주변을 뒤지며 퇴로를 찾고 있는 중일 겁니다.”

“과연 천(天)의 군사로다.”

암천회주의 시커먼 눈동자에 제갈상이 담겼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팔진도를 노린 걸 보면, 저 뒤에도 아마 병력의 반절 정도는 대기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선 운광과 함께 본대를 물러가게 할 순 없었다.

퇴각한 순간 오천의 병력이 넘어올 것이다.

그 외에는 이 주변을 탐색 중이리라.

만이나 되는 무식한 숫자를 습격에만 사용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답답함에 무심코 중얼거렸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의 옆을 지나갔다.

“본대를 물려 추격대를 쫓아라.”

제갈상의 눈이 커졌다.

옆을 지나친 건 어딘가 모르게 키가 큰 느낌이 드는 소년이었다.

굳이 따지면 청년이 되기 직전이다.

“……?”

태극검의 너머, 암천회주도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모습을 보였다.

그러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 꼴은 무엇이냐, 권동제.”

시간이 거꾸로 간 절대고수 권동제, 정백이었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하더니만, 정말이었던 모양이구나.

아니면 그 잘난 고집이 꺾인 게냐?”

“암천회주는 노부가 맡겠다.”

“조금만 크면 권동제라 부를 수도 없을 모습이로다.”

암천회주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썅!”

황견은 얼굴을 와락 구기며 욕설을 내뱉었다.

“오랜만이오, 황 장로.”

당명인이 차가운 눈동자로 황견과 마주 봤다.

“오랜만이오?

이놈이 배신하더니만 강호의 선후배 간의 예절을 밥 말아먹고 온 모양이구나!”

황견이 욕설을 내뱉으면서 머리를 굴렸다.

‘본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측 수가 읽혔다.’

무림맹 퇴각대 삼천은 본부의 뒷문인 죽림을 통해 합비를 유유히 빠져나가려 했다.

대나무 숲이 생각보다 광활하고, 기문진이 복잡해 길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으나 문제는 없었다.

중간 지점에 도착해 추격을 혼선시키기 위해, 천씩 셋으로 갈라질 때만 해도 순탄한 퇴각이었다.

그러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퇴각 도중, 묘한 기척이 느껴지더니만 일련의 무리가 가로막았다.

바로 전 흑영부이자 독룡, 당명인과 암천회였다.

“무림 정파의 인간들이란 예부터 무언가를 숨기는 걸 참으로 좋아하는 것 같소.”

당명인은 기분 나쁜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를 잘도 찾아냈군.”

황견이 코웃음 치며 허세를 부렸다.

‘몇 명이나 있지? 얼마에게 포위된 거냐?’

그러나 속으론 바싹바싹 말라 가는 중이었다.

“무림맹 지하 뇌옥에 연결된 흑영부 또한 만약을 위해 외부에 통로를 따로 마련해 두었는데, 본부의 탈출구라고 따로 없겠소?”

제갈상이 걱정한 대로였다.

퇴각대는 함정에 걸려들었다.

천기는 천군사, 제갈상을 경계했다.

제갈상은 여타 정파인과는 다르다.

‘그대처럼 옛적에 흑영부에 대한 것을 알고, 묵인하고 지략에 사용했다는 걸 명심해라.

사고가 굳기는커녕 간악하니, 승산이 없다면 자존심이고 정정당당이고 뭐고 간에 필히 퇴각하려 할 것이다.

팔문은 회주께서 맡으실 예정이니 퇴각대는 우리가 맡는다.’

본대와 분대가 편성됐다.

천기와 천추가 지휘하는 분대의 경우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이 주변 일대를 탐색해 퇴각대를 찾았다.

무림맹 입장에서 불행 중 다행인건, 퇴로를 정확히 모르니 최대한 넓게 퍼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기척만으론 일단 사백에서 오백 정도인가?’

퍼엉!

황견의 얼굴에 암운이 끼었다.

당명인의 손에는 붉은 빛깔의 연기를 토해 낸 죽통이 쥐어져 있었다.

“빠져나갈 생각을 한다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요.”

파삭!

손에 힘을 주자 죽통이 부서졌다.

아니, 바스라졌다는 표현이 알맞았다.

독기에 잡아 삼켜져 불에 탄 재처럼 흩날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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