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一章 (204/254)

“후우……”

천기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귀주 전선이 완패……”

“썅!”

쾅!

천기는 참지 못하고 눈앞의 탁자를 걷어찼다.

천선성 소속 칠성사병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복면 위의 피부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조용히 하고 있자.’

암천의 두뇌, 천기는 사적인 일로 수하를 죽이진 않으니 입만 다물고 있다면 문제없다.

보고를 끝낸 뒤 호기심을 접은 채 대기했다.

“포달랍궁? 포달랍궁이 정사 연합을 왜 도와!”

황당무계한 소식이었다.

한때, 서장 무림이 중원 무림을 넘본 적은 있어도 도운 적은 없었다.

또한 원 이후 국가 간 관계가 껄끄러워지지 않았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그것이, 주서천이……”

“개새끼!”

천기가 뒷목을 붙잡으며 눈을 부릅떴다.

“그 새낀 서장에 또 언제 간 거야?”

“아, 아무래도 수선행 시절인 듯 싶습니다.”

화산파의 제자는 나이가 차면 강호에 출두해 오 년 동안 도를 닦는 수행을 한다.

이를 수선행이라 한다.

그러나 주서천의 수선행, 그것도 초기 행적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었다.

괜히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도 있는 데다가, 매화정검 시절 이전까진 그리 주목할 만한 인재로 알려지지 않아서이다.

수선행 도중 이름을 알린 거야 사천당가에서 당혜와의 내기 사건 정도다.

대설산을 방문하기 전 독혈곡이라 일컬어지는 애뇌산을 방문해 점창칠공자를 도와 칠각사를 사냥했으나, 비밀에 부쳐 달라는 요청에 알려지지 않았다.

주서천이 재주 좋게도 잘 숨어 다닌 탓에 칠검전쟁 이전의 행적이 명확하지가 않아 확인이 불가능했다.

“주서천, 주서천!”

천기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름만 들어도 혈압이 솟구치고 치가 떨렸다.

“무림이 암천의 손에 떨어질 때, 주서천이라는 이름의 동명이인을 찾아서 죄다 죽여 버리겠다.”

진심이었다.

“요광은?”

“주, 주서천의 손에 의해……”

“흑철갑주와 화첨창은!”

“회수 실패……”

“육시랄!”

천기가 넘어진 탁자를 다시 한번 걷어찼다.

발끝이 아파 왔지만 분노가 고통을 넘어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패배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나, 대패하다니……”

천기답게 금세 분노를 거두고 냉정을 되찾았다.

겉으로 이성을 잃은 것처럼 화를 내는 것 같아도, 전쟁 도중인 걸 생각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끄응!”

귀주 전선의 패배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천기는 언제나 최악의 수까지 예상해둔다.

하지만 이렇게 차이가 날 정도의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사람도 아닌 기계 장치로 이루어진 기관에 이천여 명이 당했다.

그 외에는 포로로 잡히거나 죽었다.

반면 정사 연합 귀주군의 총 전력은 약 삼천오백 정도 남았다.

초기피해를 제외하곤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속이 다 쓰렸다.

“이의채, 제갈승계……”

귀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첩자를 통해 보고받았다.

이의채가 돈으로 사파의 원한을 샀다.

제갈승계가 기관으로 피해 없이 대승을 거두었다.

주서천 다음으로 두 사람이 원수로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이가 절로 갈리고 혈압이 솟구쳤다.

‘전에 주서천이 비밀 분타를 무공으로 빠져나온 줄 알았거늘. 기관괴협, 아니 기룡 탓이었구나.’

제갈승계에 대해서 몰랐던 건 아니다.

주서천의 주변 인물이니 당연히 요주의 인물로 점 찍었다.

또한, 사장된 기술을 유일하게 타파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주의하지 않았다면 머저리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천재는 아니었다.

암천회, 아니 천기성도 기관에 전문적인 인재는 없다.

과거의 유물이나 기관을 재사용하는 정도다.

사실 천기의 기관지술이 떨어지는게 아니라 제갈승계의 수준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호지관의 도해를 아직 받지 못해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단번에 이천 명을 전멸시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고금에 남을 정도의 업적이었다.

또한, 유령곡이라는 인재들을 단순한 노동력으로 동원할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산동의 경계 인원 및 자객방의 수를 늘려라.”

“존명.”

천선성이 명령을 하달받고 물러갔다.

‘포달랍궁이야 어차피 명의 눈치가 보이니 더 이상 돕지 못할 터. 신경쓸 건 없다.’

가까스로 화를 참는다.

“겨우 한 번 이긴 것으로 기뻐하지 마라.

그 이상의 재앙이 너희를 덮칠 것이니 말이다.”

천기의 안광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주서천, 귀주에 간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 * *

안휘, 합비. 무림맹 본부.

“만세!”

황견이 팔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이차 격돌의 완승에 무림맹은 축제 분위기였다.

일차 격돌 시에 검신이 있었음에도 퇴각했다고 들었을 때는 어찌하나 싶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무림맹이 완승을 거두었다.

‘승계야……’

제갈상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군사로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웠지만, 형으로서의 기쁨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컸다.

여태껏 무림에선 물론이고 세가에서조차 구박받았던 동생이 가문, 아니 무림 전체에 인정받았다.

남의 힘도 아닌 가문에서조차 등한시한 학문을 연구하여, 스스로의 노력 끝에 빛을 보았다.

‘정말로 대단하구나.’

제갈상도 제갈승계를 완전히 믿었던 것만은 아니다.

가슴 한구석으론 어찌하여 확실하지도 않은 데다가 주변에서 핍박까지 하는 걸 끝까지 붙들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하나 동생은 사장된 기술과 학문을 스스로 갈고 닦아 연구해 무림에 인정받았다.

단순히 재능만이 아니라 그 집념이나 정신력 의지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장한 동생을 두셨구려.”

“대단하오, 군사.”

“제갈세가는 복 받았군!”

주변의 장로진들이 감탄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목소리에선 부러움이 묻어 있었다.

제갈세가는 오룡삼봉을 동시대에 두 사람도 아니고 무려 세 사람씩이나 배출했다.

아무리 명문정파라 해도 쉽게 해낼 수 있는 업적이 아니다.

그야말로 천재만 배출하는 가문이었다.

화산파가 워낙 규격 외라 그렇지 제갈세가의 위상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쯤 제갈세가는 어떻게든 연을 이어 보려는 사람들의 방문으로 인해 북적일 것이리라.

“그나저나, 포달랍궁의 도움은 뜻밖이었소.”

“검신께서 포달랍궁에게 도움을 청하였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요?”

중원 무림과 서장 무림의 관계는 원래부터 그리 깊지 않았지만, 원이 망한 이후론 더더욱 멀어졌다.

그러다 보니 놀라워하거나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궁금해했다.

“몇 년 전에 검신이 강호를 유람하던 중 우연찮게 포달랍궁의 대덕고승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하오.

그 은혜로 다음에 중원 무림이 위험할 때 도와주겠다고 약조했다더군.”

황견이 대신 의문을 풀어 주었다.

“오오! 그러면 앞으로 천여 명이나 되는 라마승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팽군평이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흠……”

그러나 소림사의 혜노와 아미파의 경인사태의 반응은 미묘했다.

말은 안 했지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중원의 불학과 서장의 불학은 교의가 달라 사이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을 배제하고 우선 라마교에선 남녀합일에 의한 수행법을 긍정해, 원 시절 승려들의 난음의 명분이 되어 여러모로 문제가 됐으며 단연 음욕을 멀리하는 소림사와 아미파 입장에선 사도나 다름없었다.

그 외에도 원나라 시절 국교가 된 라마교가 권세를 등에 업고 타 종교 탄압까지 한 경우도 존재했다.

지금에서야 라마교 내부에서도 문제가 되어 격노파가 나타나고, 점점 바뀌고 있다곤 하지만, 이제 막 시작됐기에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만약 포달랍궁의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상천육좌가 아니었더라면 두 곳에서 크게 반발했을 것이다.

“포달랍궁이라 하면 원의 국교, 라마교의 주체가 아니오?

이러다 관부의 개입이 들어오는 건 아닌지 걱정이오.”

우백이 염려하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혜노와 경인사태는 반겨 하는 눈치였다가 곧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소.

안 그래도 그 이유로 곧 귀주에서 서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들었소.”

황견이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포달랍궁의 라마승, 그것도 천에 이르는 무승이다.

중원까지 온 것을 보면 무공도 평균적으로 높을 것인데, 이대로 보낸다는 것이 아까웠다.

“고수 열댓 명만 남겨 주면 좋겠거늘……”

“아닙니다. 도리어 한 사람이라도 남는다면 추후에 문제가 될 것입니다.”

혜노와 경인사태가 나서기 전에 제갈상이 거부했다.

“군사의 말대로요.”

신임 무림맹주, 운광도 동의했다.

무림맹주가 되다 보니 무림과 관부의 관계 유지에도 여러모로 신경 써야 했다.

“넵, 알고 있습니다.”

황견도 바보는 아니다.

괜한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것보단……”

콰앙!

그때였다.

회의가 한창이던 중, 문이 거칠게 열렸다.

* * *

귀주, 용안.

종객파와 근돈주파.

아쉬움을 뒤로한 채, 격노파의 라마승과 인사를 나누며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원나라 시절, 국교가 라마교였던만큼 명의 입장에선 민감한 부분인지라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끝까지 정사 연합을 도와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후, 귀주군은 승리에 젖은 채 뒷정리에 들어갔다.

부상자의 경우 중상자와 경상자로 나누어 치료 및 전선 이탈로 결정됐고, 사망자는 가족에게 돌아갔다.

항복한 종리도전을 비롯한 암천군의 잔존 병력의 경우 포로로 잡아 적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심문했다.

“서, 설마 고문할 생각이냐!”

심문 전에 종리도전이 귀주군의 간부를 위협했다.

바로 얼마 전에 무림맹이 흑영부의 일로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종리도전은 그 점을 노렸다.

“그래, 개새끼야.”

조명이 종리도전의 뺨을 후려쳤다.

“꾸엑! 혀, 형님!”

종리도전이 이가 부러진 채로 엉엉 울었다.

무림맹은 하지 못해도 사도천은 문제없다.

이해득실을 위해서라면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파의 입장에선 거리낄 게 없었던 것이다.

선을 넘어 마도에 이를 정도만 아니면 딱히 문제없었다.

“아무래도 심문에는 시간이 좀 걸릴 듯 싶습니다.”

신도균이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정보를 알 만한 자들은 심문 중에 있으나, 하나같이 입이 보통 무거운게 아닙니다.

종리도전은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은데, 다른 이들이 문제더군요.”

“……요광의 측근들은 칠 할 이상이 무림인이 아닌 본래 관군 출신이에요.

상관에 대한 충성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전우애를 상상 이상으로 중요시하니까요.”

제갈수란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모사의 말씀대로입니다.

게다가 고생해서 관군과 연을 끊었는데, 괜히 잘못 말했다가 다시 연관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겠지요.

무엇보다, 칠성사병은 하나같이 지독합니다.”

주서천이 제갈수란의 말을 긍정했다.

칠성사병의 지독함이야 예전의 경험을 통해 치를 떨 정도로 경험했다.

종리도전처럼 이해득실을 위해 정사 연합을 배신한 이들과는 다르다.

보통 독한 놈들이 아니다.

아랫것들이야 금방 불지 몰라도, 측근들은 달랐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듯 싶으니 이후의 일은 귀주 전선장께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저보다는 맹초혁이나 조명 그 친구들이 최적일 듯 싶습니다.”

신도균이 용기를 내 눈을 부릅뜨며 거절하려 했다.

회의실 좌석에 앉아 있는 맹초혁과 조명의 눈이 출세의 빛으로 번쩍였다.

‘귀주 전선장!’

최초 격돌에 완승을 거두어 만천하에 이름을 알린 장소다.

또한 익숙한 곳이다 보니 안 기쁠 수 없었다.

“저도 이제 늙은지라 검 한 번 휘두르기가 힘들더군요.”

귀주의 격전에서 신도균은 귀신같은 지휘 솜씨를 보여 줬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무공까지 선보였다.

심지어 맹초혁이나 조명의 부족한 점을 찾아 도와주기까지 했다.

괜히 최전선에 십 년씩이나 구른 게 아니다.

“그렇다면, 당분간 인수인계 겸 후임 교육을 위해 두 분을 도와 주시는 건 어떨까요?”

“물론입니다!”

신도균이 환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선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장 귀주에서 떠나는 건 기대도 안했다.

공식적인 은퇴 및 지부 변경 사실이 중요했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파견대분들께선 어디로 가실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그건……”

제갈수란이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콰앙!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전령이 들어왔다.

“그,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냐?”

신도균의 얼굴에 웃음이 싹 가셨다.

전쟁 도중 회의실에 들어온 급보는 보통 좋지 않은 소식이다.

“무림맹 본부가 암천회에 습격당했다 합니다!”

“뭣이?”

회의실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아니, 거기가 어디라고 습격을 당해?”

“정보가 확실하……”

질문이 빗발처럼 쏟아지려고 할 때였다.

전령의 다음 말이 그 질문들을 들어가게 만들었다.

“선봉장은 암천회주! 암천회주라 자처했습니다!”

“……”

“암천회주가 합비에 나타났습니다!”

안휘의 성도, 합비는 예로부터 정파 무림의 중심지다 보니 관부가 아닌 무림과 더 밀접했다.

탈세를 하거나 혹은 관에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관부도 합비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무림인이 워낙 많아 관리도 까다로운 데다가, 질서를 중요시하는 정파인 만큼 관병을 쓰지 않아도 치안이 유지되는지라 무인의 일이 터져도 눈감아 주는 편이었다.

즉, 다르게 말하자면 안전성은 보장되나 귀주처럼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관부의 개입이 없다는 뜻이다.

“암천회라고?”

“겨, 결국 일어나고 말았군!”

“전쟁이다!”

암천회의 대군이 코앞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합비의 백성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몸을 숨겼다.

무림맹 본부나 남궁세가가 위치해있어 치안이 우수하고, 인구수만큼 발달되어 나쁘지 않은 도시였다.

그러느 오늘날처럼 전쟁 등이 터지면 눈먼 칼에 맞는 등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게 단점이었다.

관의 개입까지 없다시피 하니 겁날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이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한들, 재수 없으면 죽는 것이 전쟁이 아니던가.

합비, 아니 안휘는 대낮임에도 거리에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항상 활기 가득하던 저잣거리도 고요하기만 하다.

모래 위를 구르며 뛰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끊겼다.

종말을 맞이한 후의 문명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합비에서부터 남으로 약 한 시진 정도 되는 거리의 장소에 대군이 결집했다.

무려 만에 이르는 암천군의 전력이었다.

“무림맹이라……”

만에 이르는 대군의 선두, 집채만한 바위 위에 장년의 무인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서 있었다.

도찰원 종육품, 경력 손영관.

암천회주 본래의 신분이자 이름이다.

황궁의 관리이며 감찰 기관인 도찰원 소속이라 할지라도, 종육품이면 직책 자체는 그리 높진 않다.

하나 그의 정체는 향후 몇십 년간 무림을 지옥으로 만들었으며 천하제일인이라 불릴 암천회주였다.

뒤로 넘긴 머리카락은 등허리까지 내려왔고,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에 흩날린다.

한때 문관이었음에도 체구는 천생무인이다.

누가 봐도 완벽할 정도의 체격을 지녔다.

그 앞에는 인근 지역을 경계 중이던 무림맹의 무사 무리가 차가운 시신이 되어 누워 있었다.

그 숫자만 해도 삼백에 이르렀다.

“본대의 집결을 완료했습니다.”

암천회주의 뒤편, 팔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군사 천기가 부복한 채로 보고를 올렸다.

그 옆으론 암천회의 또 다른 간부, 천추이자 정파의 배신자 당명인이 마찬가지로 부복하고 있었다.

“알겠다.”

손영관. 아니 암천회주가 무감정한 어조로 답했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도시 위, 하늘을 올려다봤다.

겨울의 눈 탓일까, 먹구름으로 가득한 불길한 하늘이었다.

대낮임에도 전혀 밝지 않았다.

“암천이로다.”

암천회주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 * *

무림맹 본부.

“허, 지금 뭐라 하셨소?”

운광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만?”

백도 아니고 천도 아니며, 만(萬)이었다.

장로진의 반응도 비슷했다.

입을 쩍 벌리며 불신과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본부 바로 근처에 만에 이르는 병력이 나타났다고 하자 무림맹은 충격에 잠겼다.

“이건 말도 안 돼!”

황견이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내지르며 부정했다.

“만씩이나 되는 대군이 움직였는데 우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그럴 리 없소!”

천 명도 아닌 만 명이다.

움직임이 클 수밖에 없다.

개방, 아니 정사 연합이 옹이구멍도 아닌데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물며 정파와 사파, 심지어 하오문까지 도움을 주고 있는 상황이거늘……!”

정파와 사파가 연합하여 생긴 힘은 대단했다.

무력만이 아니라 그 외의 정보 단체도 손을 잡았다.

사도천이 하오문의 주거래 상대여서 공식적으로 하오문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그 내막에는 하오문주 강능초와 손을 잡은 주서천이 있었지만 말이다.

“황 장로께서 말한 대로요.”

우백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했군요.”

혼란 속, 제갈상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림맹 상층부의 이목이 제갈상에게 집중됐다.

다들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치였다.

“합비는 북으로 회하가 흐르고, 남으로는 장강이 흐릅니다.”

“아!”

황견이 곧바로 이해했다.

정보 책임자답게 두뇌 회전이 빨랐다.

“수림구채!”

“……!”

그 외의 장로진 역시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런 건가……”

“이리 간단한 걸 잊고 있을 줄이야!”

감탄사가 연달아 터졌다.

“끄응!”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무인으로서 괴력과 근골을 타고 났으며 호쾌한 성품으로 정평이 났으나, 대신 머리가 굳은 하북팽가의 장로였다.

“군사께서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소?”

혼자 이해하지 못한 게 자존심 상했는지, 팽군평의 얼굴이 살짝 벌겋게 달아올랐다.

“물론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귀주로 파견한 별동대가 동정호 부근에서 수림구채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그 이후로 장강을 필두로 여러 수로가 수림구채에 의해 봉쇄됐습니다.

즉, 적림십팔채가 암천회와 손을 잡은 것이지요.”

제갈상은 팽군평의 체면이 깎이지 않도록 일부러 팽군평이 아닌 다수를 거론하며 말을 이었다.

“합비 부근에 나타난 만에 이르는 병력은 땅에서 솟은 것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강을 타고 왔습니다.”

제갈상이 눈썹을 찌푸렸다.

“만에 이르는 대군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눈에 띄지만, 병력을 분산시켜 움직이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하물며 그것이 땅이 아니라 강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지요.”

수공은 비주류 무공 중 하나다.

별별 무공이 존재한다는 사파에서조차 보기 힘들었다.

수공을 주류로 삼는 건 수적이나 해적, 해남도의 문파, 그리고 관군의 수병들 정도다.

중원에서 수공이라 하면 안타깝게도 수적뿐이다.

관군의 수병이야 무림이 아니니 예외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강은 완전히 수적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인지라, 강 위의 정보는 입수하기가 힘들었다.

무리를 한다면 수적을 토벌할 수는 있으나, 알다시피 세력이 신경 쓰여 장강 유역을 손에 넣지 못했다.

사실 굳이 그리 고생하며 토벌할 가치도 못 느꼈다.

최대의 적인 사파인이나 마도인 역시 마찬가지니 굳이 장강을 노릴 연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암천회는 그 부분을 파고들어 이용했다.

“병력은 최초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지에서 장강을 통해 흘러들어와 합비로 모였겠지요.

수십, 혹은 수백 명씩을 여러 번 시간을 걸쳐서 이동했다면 들킬 염려는 없습니다.”

“과연……!”

팽군평이 그제야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궁금증을 해결한 장본인의 얼굴은 환해졌으나, 정작 설명한 제갈상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나 아무리 정보가 제한된 장강이라 할지라도, 완벽히 숨기려 했다면 그만큼의 시간도 오래 걸렸을 것이고, 저희의 시야도 차단해야 했을 겁니다. 즉……”

“귀주는 합비로 병력 이동을 위한 눈속임 겸 시간 벌기였다는 것인가……”

운광이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귀주의 암천군에는 요광밖에 없었으니, 본대가 아니란 건 예상한 바였다.

하나 그 막강한 전력이 분대조차도 아니고 사실상 미끼였다는 것에 무림맹 상층부는 충격을 받았다.

귀주의 격전은 만에 이르는 전력을 무림맹 본부 앞에 은밀하게 집결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적의 전략을 예상치 못한 저의 어리석은 잘못입니다.”

제갈상이 입술을 피가 나도록 세게 깨물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일은 책임지도록하겠습니다.”

암천회의 의도를 눈치챈 순간 심장이 덜컥 주저앉았다.

군사로서 최악의 결과였다.

전략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의 의도에 보기 좋게 걸려 귀주만을 신경 썼다.

수를 읽힌 것도 모자라서 이용당했다.

‘허, 저리 쉽게 인정하다니.’

‘소문대로 인품 또한 훌륭하구나.’

사람이란 책임질 자리에 오르면 우습게도 그 책임을 질 상황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정파의 경우 그 성향이 특히나 짙다.

대부분 여러 변명을 대거나, 혹은 직책을 이용해 회피하려 한다.

하나 그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잘못을 인정하고, 깨끗하게 사과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오. 너무 그러지 마시오.

군사께서는 신선도 부처도 아니거늘 어찌 모든 걸 알겠소.”

운광이 제갈상을 위로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제갈세가는 향후 백 년 동안 태평성세를 누리겠구나.’

재능과 인품을 동시에 겸비한 자는 흔치 않다.

제갈승계의 경우는 조금 문제가 있으나, 그래도 이렇게나 훌륭한 영웅호걸을 연달아 배출했으니 부러울 따름이고, 또한 정파 무림에 있어 축복이었다.

“맹주님의 말씀대로요.”

“군사께선 너무 죄책감을 갖지 말게!”

“그것보단 곧 일어날 싸움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운광을 비롯해 장로진도 제갈상을 위로 했다.

굳이 군사라는 지위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동안 혁혁한 공을 세운 덕분이었다.

부군사 시절부터 시작해 잠도 줄여가며 일하지 않았는가.

주변에서 좀 휴식을 취하라고 할 정도였다.

‘애초에 지금 군사가 무너진다면 답도 없다.’

그 이면에는 향후 전쟁의 판도에 문제가 될 것 같은 걱정도 있었다.

아직 천군사의 힘이 필요했다.

“감사드립니다. 이 잘못은 책임져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대답이오.”

혹시나 자책이 심해 이대로 무너지면 어쩌나 했으나, 괜한 걱정이었다.

“군사님, 병력의 배치를 끝냈습니다.”

마침 순간에 맞춰 무사가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제갈상은 접힌 부채를 들어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현재 본부 지척까지 암천군의 본대, 만여 명의 병력이 결집했습니다.

그에 반면 무림맹 본부의 병력은 반절인 오천도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알다시피 각지에서 일어난 배신 탓입니다.”

“끄응.”

여기저기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적이지만 홀륭하도다……”

황견이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서천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속으로 지긋지긋한 놈들이라며 욕설을 퍼부었을 지도 모른다.

일차적으로 무림을 선동해 배신자들로 시선을 돌린 다음, 병력을 분산시켜 정사 연합의 행동을 제한했다.

그 뒤 귀주군을 보낸 다음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겸 장강의 움직임을 숨겨 합비에 습격을 준비했다.

확실히 끝낼 생각인지 배나 되는 병력을 모집하여, 전쟁 초기부터 총력전을 준비했다.

“본부인만큼 고수분들도 여럿 계시나, 안타깝게도 적 역시 본대인 만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도움을 청하려 해도 시간이 부족하니 지원을 기다리며 막고 버티는 것도 알맞지 않습니다.”

“하면 어찌해야 한다는 거요?”

“퇴각해야 합니다.”

“퇴각하다니!”

다혈질인 팽군평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군사께선 제정신인가?

다른 곳도 아닌 정파 무림의 중심지, 무림맹 본부를 두고 도망가다니!”

팽군평이 너무 흥분해 자리를 잊고 경칭까지 생략했지만, 이러한 반응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일 년은커녕 한달도 되지 않았다.

정사 연합이 아무리 귀주의 격전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할지라도, 전쟁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본부를 내준다는 건 사기에 큰 영향을끼친다.

심장을 찔렸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심지어 합비에 무림맹 본부가 자리잡은 지 이삼십 년 된 것도 아니고, 수백 년씩이나 됐다.

“도망이 아니라 작전상 후퇴,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팽군평 장로님, 현실적으로 지금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혹시 더 좋은 방법이 있으시다면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끄응……”

팽군평은 차마 답은 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작전을 설명한 뒤에 진행하겠습니다.”

제갈상이 눈을 빛냈다.

‘천기, 네 의도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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