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광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빽빽하게 늘어난 철의 기둥 탓에 햇볕도 잘 내리쬐지 않았다.
지상에선 잔존한 병력이 귀주군과 맞서 싸우는 모양인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듬성듬성 났다.
화첨창을 지면에 꽂고 길이를 늘려 위로 올라가 볼까 싶었지만 곧 그만두었다.
보아하니 위로 올라가면 작동하는 기관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칫 잘못해서 연쇄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라도 하면 곤란하고, 충격으로 암반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혼자만 살아남는 것이라면 전혀 개의치 않았겠지만, 아쉽게도 이천의 수하들을 살려야만 했다.
“의견을 내라, 천기성.”
요광의 목소리에서 은은한 노기가 묻어났다.
천기성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답을 내지 못하면 죽는다.’
기관에 대해서 몰라도 해답을 내놓아야 했다.
그것도 틀려선 아니 된다.
천기성은 급히 머리를 쥐어짜 내고, 의견을 통합해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이, 이 정도 규모라면 자재 또한 만만치 않게 들었을 것입니다.
운반하기 위한 통로와 출입구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천기성의 의견을 수렴한 요광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천여 명을 충분히 수용할 크기의 대공동이었다.
암벽이 이어진 천장은 철의 기둥으로 가려져 있다.
미세한 공간 사이로 햇볕이 내리쬐고, 충격의 진동이 아직도 남아 있어 흙더미가 보슬보슬 내렸다.
그 외에도 천기성이 말한 대로 통로 역시 존재했다.
대리석이 깔려 있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척 봐도 인위적인 굴을 몇 군데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이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었으나, 대군이 한꺼번에 이동할 수 있는 크기는 아니었다.
“중상자, 사망자를 제외하고 인원수를 보고해라.”
“천오백 명입니다.”
최초에 지반이 붕괴되면서 사망자 및 부상자가 속출했다.
또한 위로 올라가려다가 죽은 자도 있었다.
“안쪽에서부터 미세하게 바람이 불어옵니다!”
땅굴을 정찰하고 온 칠성사병이 보고했다.
다른 곳에서도 같은 보고가 올라왔다.
바람이 들어온다는 건, 통로가 그리 길지 않으며 전부 출입구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뜻한다.
“본 회의 분타처럼 기밀을 위지하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함정을 목표로 만들었다면 단발성이니 당연히 땅굴을 깊게 팔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위에서부터 적과 아군의 싸움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아하니, 그리 깊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천기성이 연달아 의견을 모아 보고했다.
“좋다. 그러면 정찰을 보내 반 각정도 확인한 다음, 출발한다.”
이 앞에 뭐가 도사릴지 모르나,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도 없었다.
지상의 암천군이 전멸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합류해야 했다.
정밀한 검토나 정찰은 불가능했다.
같은 이유로 출구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한곳만 탐사할 수는 없었다.
칠성사병 중 발이 빠르거나 눈썰미가 좋은 이들이 뽑혀서 땅굴 안쪽을 훑어봤다.
요광도 그사이 땅굴 하나를 맡아 확인해 보았다.
화첨창의 길이를 늘려 끝에 닿게 하는 방법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땅굴이 구불거려 도중에 막혔다.
길이는 늘릴 수 있으나, 눈이 달려 앞에 있는 장애물을 피하거나 하는 재주는 없었다.
화첨창을 회수하자마자 별문제 없다는 보고를 전해 들었다.
“외공을 수련한 자, 몸놀림이 날렵한 자, 독공에 내성 있는 자를 각자 앞세워 전진하도록 한다.”
땅굴의 숫자는 이십여 개에 이르렀다.
칠십오 명씩 나눠서 땅굴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 번에 두세 사람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넓이에, 길이도 상당하니 무리는 없어 보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도 즉석으로 횃불을 만들어서 시야를 밝혔다.
정찰도 별문제 없었으니, 함정은 무너진 지반과 미로처럼 얽힌 통로라 생각했다.
하지만 발을 내디디고 반 각 정도 시간이 지날 무렵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철컥. 푸쉬이이이이.
“독이다!”
“크악!”
최초의 시작은 독이었다.
통로의 벽면에 그어진 금 사이에서 독연이 뿜어져 나와 땅굴을 메웠다.
단연 두세 사람 정도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공간에 껴 있던 암천군은 그대로 독연에 노출됐다.
뒤로 피하려고 해도 꼬리처럼 이어진 동료들 탓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독무(毒霧)만이 아니었다.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찰칵찰칵!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원형으로 뚫린 땅굴의 벽면에 자그마한 구멍 수백 개가 나타났다.
퓨슈슈슛!
“하, 함정…… 크아아악!”
수백 개의 구멍에서 날아온 건 날 선 비수를 비롯한 암기였다.
좁은 통로에서 쇠붙이가 날아오는 건 공포 그 이상이었다.
통로 내부는 금세 비명으로 가득 찼다.
‘당했다.’
요광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절대방어의 흑철갑주 덕에 요광은 별문제 없었다.
암기는 튕겨 나가고, 독은 침입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요광이 후위와 거리를 두고 홀로 앞장선 덕분에 함정을 미리 발동시켜 막아내 피해를 줄였다.
그러나 멀쩡한 곳은 요광이 있는 땅굴뿐, 그 외에는 상황이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내 몸! 내 몸이!”
“으아악! 뜨거워!”
기관 장치는 가지각색이었다.
어떠한 원리로 움직이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일정 이상의 체중이 가해지면 발동하거나, 혹은 무언가를 건드리면 발동하는 등 여러 가지였다.
독연이나 암기는 기본이요, 불이 뿜어져 나와 화염지옥을 방불케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뒤에서부터 함정이 발동되는 경우도 있어서 도망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도, 도대체 이걸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제갈승계!’
제갈승계의 넉 자가 요광 및 천기성 머리에 박히는 순간이었다.
천재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고수들조차 어찌할 줄 모르는 기관의 설계는 악몽이었다.
일부러 함정에 걸려들기 위해 땅굴의 앞부분에만 기관 장치가 발동하지 않도록 했다.
또한, 정찰을 사용할 경우도 계산해서 몇십 명 이상이 들어와야 발동하도록 장치까지 해 뒀다.
요광은 창으로 벽면을 긁어 기관장치를 부수려다가 멈칫했다.
‘괜히 이상한 걸 건드릴 수가 있다.’
마음 같아선 전부 부수며 가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봐 왔던 것이 있어 그러지 못했다.
‘무섭구나, 제갈승계.’
괴물은 주서천만이 아니었다.
병법에서 말하길,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 최고라 하였다.
그 말이 맞지 않은가.
기관의 설계자, 제갈승계는 다른 곳에서 손도 대지 않고 무공을 섣불리 쓰지 못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함정인 걸 알고도 갈 수밖에 없다.’
뒤는 막혔다.
옆길도 없다.
무언가를 부수면서 가기에는 위험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도대체 머리가 어떻게 된 거냐?’
천기성 무리도 치를 떨었다.
오늘 몸소 느꼈지만, 기관지술의 위력은 대단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장된 기술이 된 건 기관이 대단히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산학(算學)에 능통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해 토목이나 야장술 등 각종 기술이 들어간다.
규모 자체가 크고 통합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보니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삼안신투나 흉마, 혹은 왕이나 황제의 무덤이 도굴되지 않도록 특수한 경우에만 동원되는 기술이었다.
무림에서 배척받는 거야 당연하다.
딱히 이렇다 할 재료 없이 기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기문진법으로도 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몸놀림이 잽싸고 힘이 센 무림인을 잡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그 노력과 시간, 돈으로 고수를 배출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미친놈이 따로 없도다.’
지상.
삼천오백 중 반 이상을 잃은 암천군은 순식간에 천으로 줄어들었다.
너무 앞에 있거나, 혹은 뒤에 있는 이들은 운 좋게 휘말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나 안심하기도 잠시, 그런 그들을 막아선 건 주변을 포위한 귀주군이었다.
“제, 제기랄……”
“물러나!”
암천군의 지휘관이 요광만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요광 정도의 능력을 갖춘 자는 없었다.
최고 고수가 자리를 비우자 사기가 곧장 떨어졌다.
“이때다!”
고훈이 들뜬 목소리로 손을 올렸다.
“금의검문!”
“발(發)!”
파앙!
암천군의 낯빛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그림자였다.
그들의 눈동자 너머에 수백에 화살이 비쳤다.
퓨뷰뷰뷰븃!
“으아악!”
“크윽!”
곳곳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고수들이야 쳐내거나 막았지만, 하수는 그러지 못했다.
눈먼 화살에 맞아 괴로워하기도 했다.
무림인 간의 싸움이 아닌 국가 간의 전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금의검문이라며!”
“검문인 주제에 화살을 쏘다니!”
암천군이 화살을 보고 욕을 내질렀다.
“검문이라고 검만 쓰라는 법이 있느냐?”
고훈이 이의채처럼 뻔뻔한 상인의 모습을 보였다.
과거, 칠검전쟁 때도 제갈승계가 만들어 낸 다발화전이라는 병기를 사용한 경험이 있는 금의검문이다.
이제 와서 체면을 중시하니 뭐니 할 필요는 없었다.
다발화전을 관군의 병기부가 가져가 버려서 더 이상 무림에선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조명이 측면으로 도주하려던 녹림도를 베었다.
“굳이 무리해서 힘쓸 건 없다!”
맹초혁의 검이 칠성사병의 심장을 꿰뚫었다.
“정파는 견고한 방어벽을 만들어, 사파의 방패가 되어라!”
“사파는 교대로 정파를 지켜 가면서 도망치려는 암천군을 함정으로 유도하거나, 격파해라!”
정사의 호흡이 하나가 됐다.
* * *
지하, 호지관.
“끄아아아아아.”
몇 번째의 비명인지도 모른다.
이젠 너무 익숙해 어디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스물에 이르는 땅굴은 지옥의 통로가 된 지 오래였다.
푸쉬이이.
또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독연이 나왔다.
휘리릭!
요광은 화첨창을 풍차처럼 돌려 독연을 반대편으로 쏘아 냈다.
통로의 끝 쪽에서 바람이 불어 왔지만, 산들바람 정도의 수준인지라 저항감이 대단하진 않았다.
사방에서 불이 뿜어져 화염지옥이 될 때도 있었으나, 이 역시 창을 풍차처럼 돌려 내보낼 수 있었다.
흑철갑주를 착용해 불길 속에서도 멀쩡했다.
내부에서 온도가 오르긴 했지만 버틸 만한 정도였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는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광에게 선택되어 살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승에 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가까워진다! 이제 곧 출입구다!”
요광이 외쳤다.
땅굴은 하나로 연결돼서 그런지, 옆의 땅굴까지도 그의 목소리가 닿았다.
온갖 함정에 진저리가 난 암천군이었으나, 이제 곧 끝나 간다는 말에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진군했다.
‘여기서 빠져나간다면 제갈승계를 죽여 버리겠다.’
‘제갈수란이 제갈승계의 누이라고 했던가?’
‘제갈세가……’
호지관의 설계자를 향한 분노와 증오도 짙어졌다.
암천회의 살생부에 제갈세가 전체가 새겨졌다.
‘여기만 지나면……’
‘살 수 있다!’
‘바람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암천군이 호지관을 지나가는 방법은 무식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외에 이렇다 할 수단이 없었다.
파해하려 해도 기관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괜히 섣불리 건드려 화를 면치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시체를 쌓고, 그 위를 건너서 앞으로 나아간다.
끝없이 길었던 땅굴도 끝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 바람과 함께 빛이 그들을 반겼다.
* * *
산동, 금의상단.
깡! 까앙!
공방 내는 소란스러웠다.
불똥이 튀기고, 금속 내리치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후아!”
제갈승계는 꼬박 일주일 만에 공방밖으로 나왔다.
잘생긴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수고하셨어요, 공자님.”
곁을 보좌하던 무선화가 제갈승계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슥슥 닦아 주었다.
무선화는 제갈승계에게 산학을 비롯해 기관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이후, 조수로서 곁에서 보필했다.
‘어떻게 봐도 연인 사이로 보이지만…… ’
‘어머, 어쩜 땀범벅인 데도 저리 멋질까.’
‘아가씨께서 워낙 예쁘니…… 난 가망이 없을 거야.’
공방의 구석, 두 사람이 갈아입을 옷을 준비 중인 금의상단의 하녀 무리가 선남선녀를 보고 생각했다.
사실, 제갈승계가 워낙 밖에 나오지 않고 조금 괴이해서 그렇지 중원에서 상당한 인기를 지녔다.
주변에서 제갈승계를 가만히 두는 이들이 없을 정도였다.
첫째로 오대세가 출신의 적통이다.
둘째로 무림맹 군사의 남동생이다.
셋째로 검신의 유일한 의동생이다.
마지막으로…… 잘생겼다.
배경이면 배경, 인맥이면 인맥, 외모면 외모.
이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비록 공방에 틀어박혀 사장된 기술이나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것 따위는 사소한 문제였다.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걱정이었으나, 꼬시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금의상단의 시녀 중 삼 할 이상은 제갈승계를 노리는 여인들로 가득했다.
그중엔 부모가 이의채에게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자녀를 식객으로 머물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들도 존재할 정도였다.
하나 그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선화라는 적수를 보고 절망했다.
어떻게 해보려 해도 무선화 역시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청순하고 가날픈 미모도 있지만, 검신이나 상왕도 조심스러워하는 무림 고수의 딸이란 게 문제였다.
정마대전 당시 활약해 천하백대고수가 된 검마가 아끼는 딸인 것도 부담스러운데, 무엇보다 대단한 건 제갈승계의 전부나 다름없는 기관지식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 종종 그를 돕는다는 점이 컸다.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어머나. 공자님, 그건 무엇인가요?”
무선화의 시선이 한곳에 박혔다.
바퀴와 끈 등, 복합적인 장치로 이루어진 활차(滑車 : 도르래)와 풍차를 축소화한 물건이었다.
“아, 이거요?”
제갈승계가 눈을 반짝이며 코를 세웠다.
기관에 대해 물어보면 없던 힘도 생기는 제갈승계였다.
“좋은 걸 보여 드릴게요.”
제갈승계가 히히 웃으면서 풍차와 활차에 이어진 철판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그러자 끼익 하고 소리가 나더니, 무게에 따라 활차가 움직이면서 풍차의 날개도 빙글빙글 돌아갔다.
“어머나.”
무선화가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날개가 돌아가면서 바람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공방의 열기가 너무 후덥지근해서 만들었어요.
인위적으로 바람을 만드는 장치죠.”
“대, 대단한 발명품이 아닌가요……?”
무선화는 거짓이 아닌 진심을 담아 물었다.
사모하게 되면 콩깍지가 씌워 무엇을 하던 사랑스럽고 대단하게 보인다지만, 그래도 이건 달랐다.
“아뇨, 실패에요.”
제갈승계는 머리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시는 것처럼 날개가 회전하려면 일정한 무게,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것도 시원할 정도의 바람을 만들어 내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고요.
인력이 대거 필요한 장치라니, 이런 건 기관도 뭣도 아니에요.”
자고로 기관이란, 결과적으로 별다른 힘이 들지 않아도 발동하여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장치다.
이러한 개념에서 봤을 때, 이 물건은 실패였다.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닌 제갈승계 입장에선 외부로 발표하기도 부끄러운 물건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호지관에 비슷한 장치를 해 두었지?’
* * *
호지관.
“아아아……”
빛을 본 순간,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암천군은 전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무엇이냐……”
요광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무거운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바람이……”
외부에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 이 통로를 지나가면 출입구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나, 그 확신과 희망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변했다.
고생 끝에 지긋지긋한 통로를 빠져나오자 그들을 반긴 건, 또다시 땅굴과 이어진 대공동이었다.
최초에 떨어진 장소와 달리 시야도 밝았다.
벽면에 횃불이 빼곡하게 늘어져 있고, 천장의 중앙 부근엔 값비싼 야명주가 달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대공동의 끝자락에 활차가 복잡하게 얽힌 채 작동하고 있는 풍차였다.
그리 힘차진 않으나, 여섯 장의 날개가 돌아가면서 미약한 바람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걸 본 순간, 암천군은 바람 또한 함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무림인은 일반인에 비해 감각이 예리하다.
보통이라면 바람 같은 건 느끼기도 힘들겠지만, 감각이나 신체 능력이 우수한 무림인은 달랐다.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가는 산들바람을 확인하고, 지상으로 향한 출구에서 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예리한 감각이 도리어 독으로 작용했다.
통로가 함정이 아니었다.
지반이 무너져 떨어진 장소도 묶여 함정이었다.
중상자를 내버려 두지 않고 데려왔다면, 무게의 차이 탓에 기관 일부가 작동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최초에 지상으로 무리하게 올라가지 않으려 했다면 돌무더기가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제, 갈, 승, 계!”
요광이 이름을 한 자 한 자 끊으며 외쳤다.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며, 새로이 나타난 공동을 가득 메웠다.
마음 같아선 당장 눈앞의 풍차를 부수고 싶었지만, 또 무슨 연쇄 작용을 할지 몰라 그럴 수 없었다.
철컥!
또다시, 절망의 소리가 퍼졌다.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찰칵찰칵찰칵!
“뭐, 뭐야!”
드르르륵!
회전축에 연결한 활차가 움직인다.
기관을 이루는 장치가 서로 맞물린 채 금속음을 냈다.
요광이 등을 급히 돌려 뒤를 되돌아보았다.
어서 빠져나오라고 외치려 했으나 늦었다.
두세 사람밖에 지나갈 수 없는 땅굴의 벽면에서 쇠창살이 빠져나왔다.
절망에 젖어 멍해져 있던 탓에 그만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스무개의 땅굴의 출입구가 막혔다.
“안 돼!”
“안 돼! 이럴 순 없어!”
풍산채주, 왕급간이 쇠창살을 붙들고 발광했다.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비명은 그야말로 공포였다.
그동안 닦아 온 무학을 쓸 차례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 전진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살려 줘!”
다시 한번,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호지관이라는 이름의 지옥에 빠진 이들은 함정 속에서 죽어 갔다.
희망이 무너졌고, 그 대신 절망과 고통만이 가득 찼다.
천오백 대군의 숨은 땅굴 속에서 꺼졌다.
“더, 더 이상은 못 버텨!”
“난 도망칠 거야!”
요광에 의한 지휘 체계도 붕괴됐다.
어찌어찌 천운이 닿아 땅굴에서 빠져나온 암천군 무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몇십여 명이 혼비백산하며 뛰는 광경이 벌어졌다.
앞에 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나,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다.
당장 이 숨쉬기도 싫은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천장의 야명주 덕에 주변이 밝은 탓인지 발을 내딛는데 거침이 없었으나, 도리어 그게 명을 재촉했다.
빈 굴에 들어간 순간, 안쪽에서부터 끅 하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람의 몸이 쓰러지는 소리도 들렸다.
“끅!”
그러나 최후의 도주조차도 끝내 막혀 버렸다.
아무렇게나 분산되어 흩어진 이들은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한두 명씩 신음을 흘리며 죽어 갔다.
후발 주자 몇몇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나려 했지만,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손에 잡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빨려들어갔다.
“주…… 서…… 천!”
절규의 소용돌이 속, 요광의 마른 입술 사이에서 증오와 분노가 맺힌 감정이 용암처럼 들끓었다.
“네놈은 무인으로서 자존심도 없는 게냐!”
족히 일 장 정도 되는 풍차가 느릿하게 돌아간다.
“상천육좌씩이나 되는 자가……!”
공동파의 근거지를 연상시키듯, 개미굴처럼 얽혀진 빈 굴에서 한두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아니, 한두 사람 수준이 아니었다.
수십을 가벼이 뛰어넘고선 거의 백에 이르렀다.
맨 밑에서부터 시작해 그 위로 층처럼 나누어진 구역의 굴에서 연달아 등장해 공포 그 자체였다.
시커먼 천을 안대처럼 둘렀고, 대체적으로 가날픈 몸 역시 면적이 좁은 천으로 주요 부위를 가렸다.
물에 젖은 것처럼 몸에 달라붙는다는 느낌이 났고, 옷인지 거적때기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이리도 강렬한 차림새임에도 이상하게 머리에 잘 인식되지 않는 점이었다.
요광의 눈앞에 나타난 건 아흔아홉 명의 유령과 홀로 도복 차림을 한 주서천이었다.
“요광. 나는 백 대 일로 싸워서 이겨 본 적이 있다.”
전란의 시대, 사람들 틈에서 싸워왔다.
“물론, 내가 백(百)이었다.”
진시황의 유산, 흑철갑주.
전신이 만년한철로 된 터무니없는 방어구이다.
금속의 무게는 가벼우며, 무형의 강기조차 통하지 않는다.
황제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틈 하나 없었다.
간야자에게 약점을 물어보았으나, ‘모른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아무리 남해 제일의 야장이라 할지라도 전설상에서나 나오는 법보에 대해서 알 리가 없었다.
직접 만져 보면 이야기는 좀 다를지 모르지만, 그 전에 요광에게 승리해야 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었다.
적의 공력이 닿을 경우 분산시키는 것이 흑철갑주의 능력이라면 기가 흩어져서 빠져나갈 공간을 막으면 그만이다.
‘과연 통할지 의문이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힘이 부족하면 양으로 승부하면 된다.
독마도, 혈승도, 흉마도.
무림을 격동케 했던 대마두조차 공적으로 몰려 결국 도망치는 신세가 됐다.
집단 폭행에는 장사 없는 법.
그래서 내놓은 해답이 이것이었다.
호지관을 공사한 노동력, 유령곡의 힘을 동원했다.
‘보다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서 준비한다.’
포달랍궁, 호지관, 유령곡.
만약 포달랍궁이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혼자라도 요광을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이 미로처럼 얽힌 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쉽지 않으니, 탈출구를 봉쇄하고 승부를 낼 생각이었다.
“설마, 비열하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주서천이 대놓고 조소를 흘렸다.
“평생을 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면, 그게 얼마나 멍청한 말인지 알 수 있을 거다.”
생명을 건 전장에선 법도 예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군의 시체 사이에 숨어 적이 지나가길 기다리거나, 혹은 그 시체를 방패로 삼기도 했다.
대군의 사기를 결정짓는 장수전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신경 쓰는 게 머저리다.
뿌드득!
요광은 이를 악문 채, 화첨창을 쥔손에 힘을 줬다.
‘정파? 사파?’
아흔아홉 명의 흑의인을 보고 정체에 대한 의문이 치솟았다.
머리가 열을 내면서 회전했다.
암천회에서 전해 들은 것이나 보고를 떠올려 봤지만,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척 봐도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무인이라면 느껴져야 할 기척이 이상할 정도로 희미했다.
하수가 고수의 경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평범하다거나 알 수 없다는 감상이 아니라, 마치 죽은 자처럼 느껴졌다.
‘죽은 자?’
투구 속 요광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고수답게 희미한 존재감의 정체를 금세 눈치챘다.
‘귀식대법!’
호흡과 맥박이 멈춘 것처럼 느리다.
암살자의 기본이 되는 귀식대법이 틀림없었다.
정체가 자객일 것이라 추정해 보니 여러 가지가 보였다.
남녀 구분 없는 마른 체구, 움직임의 제한을 최소화한 옷차림과 등허리에 걸친 비수였다.
“설마……”
사자(死者)라는 이름에서 요광은 불길함을 느꼈다.
“소령.”
주서천은 요광의 분위기를 느끼고 명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