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옹안에서 서로 향하면 개양이 나오고, 개양에서 조금만 더 가면 귀양에서부터 이어진 교역로가 나온다.
이 교역로를 통해 북으로 가면 어딜 가도 비슷한 시간이 걸리는 준의(連義)가 나온다.
금의상단은 귀주의 성도인 귀양을 중점으로 삼아 활동하는데, 이 준의로 향하는 교역로를 즐겨 썼다.
귀주군은 작전대로 암천군을 기관으로 유도하기 위해, 옹안에서 출발해 교역로로 향했다.
사망자와 중상자를 제외한 삼천육백 명이었다.
“뭔가 수상합니다.”
종리도전이 귀주군의 움직임을 보고 의심했다.
“천선성의 말에 의하면, 동호채에서 습격 받은 별동대가 귀주군과 합류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적림십팔채가 저희에게 붙은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중경 바로 아래에 있는 준의로 향하다니……”
암천군은 적림십팔채의 지원군과 합류했다.
귀주군이 북상하다 지원군과 마주칠 일은 없어졌지만, 귀주군이 준의에 도착한다면 중경을 근거지로 한 적림십팔채 입장에선 얼마든지 병력을 보낼 수 있는 거리였다.
미치지 않는 이상 준의로 갈 일이 없다.
“함정이군.”
요광 역시 무언가를 눈치챘다.
다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암천의 두뇌인 천기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는 다른 일로 바빠 그럴 수 없었다.
전서구를 보내려 해도 최전선이나 위치상 변방인 귀주다 보니 시간이 걸려 문제였다.
그러나 요광은 관군, 그것도 능력과 연륜 있는 장수다.
개인적인 판단이 충분히 가능한 인물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런 중요한 전투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북에는 중경이나, 북동과 서쪽은 사천과 운남이 있다.
당가와, 점창파의 도움을 받을 생각인가?’
운남이야 조금 멀지만, 사천은 중경만큼 코앞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전 무림맹주가 죄를 뒤집어쓴 덕분에 사천의 독왕 그 늙은이의 행동 반경도 조금이나마 늘어났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검악 사태 이전, 흑영부에 대해서 공개됐을 때, 당명인이 세가의 죄를 불며 당가는 궁지에 몰렸다.
평소 오대세가 등 기득권층을 곱게 보지 않던 이들과 희생자의 복수를 하려 하는 유가족 탓이었다.
그러냐 남궁위무가 죄를 짊어지는 것으로 그중 반 이상이 사라졌다.
다만, 아직까지 당가에 의심을 떨치지 못한 이들이 남기는 했다.
본인이 직접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이유였다.
그래도 당가의 무사 정돈 움직일 수는 있었다.
천기성 역시 같은 의견을 냈다.
“아무래도 저쪽 역시 승부를 보려는 모양입니다.”
“당가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천추께서 당가에 대항할 수 있는 해독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암기가 남아 있긴 하나, 독이 없는 당가는 이류 문파에 불과합니다.”
“점창파 역시 각지에서 벌어진 배신으로 골머리를 썩이는 와중이니 큰 지원을 보내진 못할 겁니다.”
“허장성세(虛張聲勢)를 펼쳐서 저희를 지레 겁먹게 하려는 것이 분명하니 그리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설사 그들이 우세할지라도, 고수가 적은 사도천 탓에 별거 아닙니다.
또한, 주서천도 어찌하지 못한 요광 님 앞을 누가 감히 막겠습니까?”
객관적으로 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나 요광은 여러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주서천은 머리도 굴릴 줄 아는 자인 데다가, 모계에 능한 제갈수란까지 있다.’
요광은 자만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전장에서 자만에 죽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장수 한 사람의 판단이 잘못되면 수천의 유골이 생긴다.
병법에서 말하길, 장수의 판단은 지혜로워야 한다.
“……”
요광의 잘생긴 얼굴에 근심이 실렸다가 사라졌다.
수하 앞에서 걱정을 보이면 사기가 떨어진다.
장수란 언제나 용맹해야 하고, 거침없어야 한다.
“진군의 속도를 올려라.
지원이 오기 전에 귀주군을 전멸시킨다.”
요광이 결정을 내렸다.
“옹안은 어떻게 할까요? 다 없애버립니까?”
“민간인도 있는 모양이긴 한데, 옹안이야 무림 영역권이고 도시도 아니지 않습니까.
관리는 그리 신경 쓰지 않으니 전부 죽여 공포심을 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습니다.”
“정사 연합을 향한 민심을 떨어뜨리는 건 괜찮은 방법입니다.
안 그래도 정파는 최근 계속된 전쟁 탓에 민심이 좋지 못한 편이지요.”
마도이세나 생각할 법한 생각이었다.
“중상자와 부상자 따위엔 관심 없다. 귀주군의 전멸을 우선하도록 해라.”
“존명.”
귀주 교역로.
“미끼를 물었습니다.”
정찰 무사가 지휘부에 보고를 올렸다.
“전력은?”
“삼천오백입니다.”
“뭐? 삼천오백? 이천오백이 아니고?”
이틀 전만 해도 암천군은 삼천이었고, 일 차 격돌로 인해 오백을 잃고 이천오백이 됐다.
“녹림구채가 천의 병력을 보냈습니다.”
“흠.”
원래 복귀한 것도 모자라 오백씩이나 늘었다.
생각보다 숫자가 부담스러웠다.
전생에서도 숫자 탓에 적림십팔채는 방해가 됐다.
“잘 될는지……”
검신의 설득에 수긍하긴 했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남은 불안함을 버리지 못한 지휘부였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불안히 있을 순 없으니, 부정적인 감정을 가까스로 집어넣고 할 일을 했다.
귀주군은 암천군의 추적을 받으며 진군했다.
“교역로를 따라가다 보면 준의에서부터 두 시진 거리쯤에 작은 호수가가 있습니다. 위치는 이곳입니다.”
“허어…… 이곳은 교역로의 중간 휴식 지점이 아닙니까. 탁월한 선택이로군요.”
신도균이 감탄했다.
금의상단은 용의주도하게도 기관장치 자재의 운송이 들키지 않도록 일부러 이러한 장소를 골랐다.
“휴식지라면 필수적으로 들를 수밖에 없는 곳인 데다가, 물자의 확인겸 기관 장치에 필요한 자재를 빼내서 몰래 전달도 할 수 있습니다.
상단주님의 혜안이시지요.”
고훈이 자기 일처럼 코를 세우며 신나 설명했다.
“그럼 다시 한번 작전을 설명하도록 할게요.”
작전의 지휘는 다섯 사람이 맡았다.
총지휘 신도균, 보좌 겸 중앙 지휘 제갈수란과 고훈.
무림맹과 사도천은 각각 맹초혁과 조명이었다.
“호수를 등으로 두고 약 백 장 거리 지면 아래에 기관이 숨겨져 있습니다.
평소에는 지지대로 무너지지 않도록 되어 있으나, 장치를 조작하면 간단히 붕괴한 뒤 위에 있는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립니다.”
귀주의 기관 장치를 설치한 건 금의상단 소속 몇몇의 야장과 유령곡이지만 지휘한 건 고훈이었다.
이 중에서 누구보다 기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범위는 직경 백이십 장으로 상당히 넓습니다.
삼천오백 명이 밀집해서 이동하진 않을 거고, 무인들이다보니 몸놀림도 잽싸 전부는 무리지만, 반 이상은 함정에 빠뜨리는 데는 충분할 겁니다.”
“적의 유도는 검신께 부탁드릴게요.
최고 전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적이 경계할 테니까요.”
고훈이 제갈승계를 대신해 기관을 설명하고, 제갈수란이 이를 토대로 작전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병력은 셋으로 분산시킬 예정이에요.
적이 북상하도록 유도한 뒤, 동쪽과 남쪽에서 퇴로를 차단.
이후 적당한 수가 모이면 기관, 호지관(湖地關)을 작동시킬 예정이에요.”
“이해했습니다.”
사전에 작전 설명을 들어 세세한 건 제외됐다.
“좋아요. 그러면 시작할게요.”
작전을 위해 병력이 분산됐다.
퇴로 차단 및 매복은 각각 동남으로 오백 명씩 맡았다.
마음 같아선 좀 더 병력을 늘리고 싶었으나, 수가 적어 유도 부대가 의심받을 일을 배제해야 했다.
이천육백도 시각적으로 차이가 좀보여서, 한 사람당 무기를 두 개 드는 등 눈속임을 추가했다.
그 외에도 매복이 들키지 않도록 동과 남에 고수를 배치하고, 하수들은 미끼 역할에 배치했다.
제갈수란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나절 뒤, 걱정과 달리 암천군이 귀주군의 뒤에 따라붙어서 작전 지역까지 도달했다.
‘신호는?’
‘참아라. 아직이다.’
되도록 최대한 수가 많이 모여야 했다.
그래야 호지관이 최적의 효과를 발휘한다.
귀주군은 숨죽인 채로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적의 근거지에서 싸울 예정이었거늘, 인근의 지형에 대해서 조사하지 않을 줄 알았느냐?”
요광이 손을 들어 암천군의 진군을 멈췄다.
“……!”
매복 중이던 귀주군의 지휘관들의 숨도 멈췄다.
“상단의 교역로, 근처에는 호수를 등으로 하고 있다.
포위당하면 적어도 퇴로 중 한 곳이 차단되니 매복해 기습하는 데 딱 적당한 곳이지.”
요광은 다 보고 있다는 듯, 숨을 만한 장소를 예리한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화첨창을 들었다.
“병력을 나누어 이동한다.
호수를 제외하고 북, 동, 남쪽을 경계하면서 진군해라.”
“하지만 병력이 분산된 틈을 타서 공격이라도 한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으니 걱정할 거 없다.
설사 앞의 귀주군을 놓친다 할지라도, 이 방향이라면 중경에 도착하니 문제는 없다.
다른 곳으로 방향을 꺾으면, 대군을 움직이는 데 시간이 걸리니 능히 따라잡는다.”
‘아뿔사!’
매복 중이던 맹초혁과 조명의 얼굴에 패색이 짙어졌다.
이렇게 되면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 없다.
심지어 일차 격돌 시 전방에 선 요광도 이번에는 후위에 있었다.
문제는 요광이 이끄는 부대의 수 또한 적다는 것이다.
요광이 지나갈 때 기관을 작동하면 걸려드는 수가 적다.
그리 되면 단연 실패였다.
‘뭐 저딴 놈이 있는가!’
요광은 전쟁이라면 학을 뗄 정도로 경험이 많은 장수다.
괜히 암천회주가 포섭한 인재가 아니었다.
그 역시 천기성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머리도 좋은 데다가, 무엇보다 특정한 육감이 뛰어났다.
‘네놈에게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다, 주서천.’
수하들은 괜한 걱정이라 했으나, 요광은 특유의 육감과 그동안 당해온 것을 잊지 않았다.
전장에선 이기는 자가 승자가 아니다.
살아남는 자가 승자다.
겁쟁이는 살아남고, 만용을 부린 자는 죽는다.
‘어떻게 합니까?’
‘실패 시의 작전을 따른다. 앞을 보내고 요광이 지날 때 습격해야해.’
암천군에서 최대 위협 요소는 요광이었다.
암천회의 간부이자, 절대방어를 자랑하는 갑옷을 저지해야 했다.
그래서 작전 실패 시 요광을 최대 위협으로 지정했다.
손을 들어 실패 시의 작전 내리려고 할 때,
탁탁, 탁, 탁.
그 순간, 맑은 소리가 전장에 울려퍼졌다.
“……?”
그 소리에 암천군도 귀주군도 멈췄다.
요광은 몸을 천천히 돌리며, 투구 안에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림사?”
머리까지 맑아지는 소리의 정체는 목탁을 두드리면서 나오는 소리였다.
“아니, 그럴 리가……”
소림사는 정파 세력권의 중심, 하남에 있다.
거리도 거리지만, 소림사 정도가 움직이면 모를 리 없었다.
요광은 머리를 들어 등 뒤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렇다면 저들은 누구지?’
산길을 따라온 언덕 위, 한 무리가 나타났다.
“뭐, 뭐냐! 저건!”
종리도전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족히 수백을 넘어선 수였다.
황색 모자를 쓰고, 누런 법복을 입은 승려들이었다.
“귀주 바로 근처는 사천과 운남…… 그 옆에는 서장이……”
요광이 무언가 떠올린 듯 중얼거렸다.
“설마……”
소림사와는 법복 등 차림이 다르다.
염불을 외는 것 같은데,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으드득!
요광이 이를 갈았다.
“주서천…… 도대체…… 언제나……”
눈동자가 떨려 왔다.
“언제, 포달랍궁을……!”
요광이 중얼거린 사이, 북측의 유도 부대의 주서천 역시 뒤를 돌아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려 냈다.
“언제나처럼 보다 확실한 방법을 찾아내고, 처리한다.”
결코, 기적 같은 게 아니었다.
기적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는 것.
주서천은 숨을 크게 들이쉬곤……
“전군!”
소리를 내질렀다.
“포위해라!”
주서천의 외침이 시작이었다.
유도 부대는 등을 돌려 철벽으로 변했고, 동쪽과 남쪽의 매복 부대가 암천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수백 아니 천에 이르는 포달랍궁의 라마승 무리가 위용을 보이면서 암천군을 밀어냈다.
“뭐, 뭐야?”
“무승?”
“소림사인가?”
“적의 지원?”
암천군이 적지 않은 당혹감을 보였다.
포위도 포위지만, 정체불명의 적이 한꺼번에 천여 명씩이나 등장한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배치!”
주서천이 고함을 내질렀다.
“재배치하라!”
귀주전선장, 신도균이 눈치 좋게 명령을 하달했다.
“동쪽을 보강해라!”
남쪽에 천의 지원 병력이 나타났다.
동쪽에 오백여 명밖에 남지 않았으니 합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최전선에서 십 년 넘게 구르다 보니 눈치나 판단력이 발군이다.
주서천도 속으로 감탄할 정도였다.
귀주군 역시 대단한 건 마찬가지였다.
사전에 이야기해 둔 것도 아닌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자고로 전장이란 항상 변칙적이기 마련이다.
의도대로 되는 경우는 몇없다.
작전이 틀어져서 변경되는 경우는 흔하게 있었다.
“커흐흠!”
천에 이르는 무리 중, 한 노인이 앞에 섰다.
민머리는 햇볕에 반사되어 빛났고, 얼굴에는 세월의 흐름을 보이듯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희고 긴 눈썹은 아무렇게 자란 것이 아니라 관리를 하는 건지 깔끔하다.
체구는 왜소했으나, 이상하게도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상천육좌, 주서천 대협께 진 생명의 빛을 갚으러 포달랍궁에서 한 걸음에 달려온 종객파라 하외다.”
노승, 종객파의 목소리는 전혀 크지 않았음에도 전장에 선 이들의 귀에 들렸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포달랍궁?”
“포달랍궁이라 했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귀주군도 암천군도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포달랍궁이라 하면 원나라 시절에 중원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던 서역무림의 대표 세력이 아니던가.
그들의 이름이 나오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방금 전에 저 라마승이 뭐라 했는가?”
“누구에게 진 빚을 갚으러 왔다고?”
귀주군의 얼굴에 희망의 꽃이 피었다.
“귀주군은 들어라!”
주서천이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나섰다.
“포달랍궁은 적이 아니라, 아군이다!
서장의 포달랍궁이 정사 연합을 도우러 왔다!
다시 한번 말한다!
포달랍궁은 적이 아니라 아군이다!”
잠시 간의 침묵.
그리고……
“와아아아아아아아!”
천지가 무너질 정도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척 봐도 다들 보통 기세가 아니다.
‘저 노승은 역시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구나.’
주서천도 라마승 무리를 보고 놀라워했다.
시간을 되감아 귀주로 떠나기 전의 일이다.
제갈상에게서 귀주에서 무연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옛 인연을 떠올렸다.
약 사 년 전, 열여덟 살 때 강호출두 때의 일이었다.
당시 주서천은 암천회의 도감부가 선점해 관리하던 만년화리와 칠각사의 사냥에 성공했다.
체질을 한서와 천독의 불침으로 만든 뒤, 훗날 미래에 발견될 천년설삼을 찾아 대설산으로 떠났다.
그 여정 중에서 만난 이가 바로 수행 중이던 노승, 종객파였다.
변수 탓에 새외 무림과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돕게 되면서 라마승과 싸운 일이 일었다.
이에 종객파가 생명의 빚을 졌다면서 훗날 도움을 주겠다고 했던 일을 떠올려 이번에 도움을 요청했다.
혹시 몰라 호지관에 대해서도 첨부해 보냈다.
어쨌든, 당시 고수에 준하는 라마승 무리가 쫓아와 습격한 걸 보고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의 인원을 동원할 줄은 몰랐다.
삼백여 명 정도 데려올 수 있다면 대박이라 생각했는데, 무려 천 명씩이나왔다.
예상외의 전력에 웃음이 절로 맺혔다.
‘암천회는 방심하지 않는다.’
암천회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다.
설사 연령이 어리다 할지라도,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살생부에 이름을 적고 뿌리를 뽑으려 한다.
‘하지만 나 역시 방심하지 않는다.
너희가 얼마나 대단한지, 또 무서운지 나 역시 알고 있다.’
자신이 괜히 어릴 적에 힘을 숨기고 다닌 게 아니었다.
고수거나 천재라면 자만하기 마련이지만 암천회에겐 그런 것이 없다.
주서천은 항상 그 점을 조심했다.
그래서 혹시 하는 마음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포달랍궁에 도움을 요청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연락을 해 두었는데, 다행히 절체절명의 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제갈 소저께 잔소리를 듣겠구나.’
포달랍궁에 대해선 지휘부는 물론이고 모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정보가 새어 나갈 것 같아서가 아니라, 과연 얼마나 도우러 올지 확신하지 못해서였다.
불확실한 정보와 희망만큼 방해되는 건 또 없다.
멋대로 기대하게 만들어 실망시킬까 봐 비밀로 했다.
“뭘 당황하고 있느냐!”
종리도전이 혼란 속에서 소리쳤다.
“시대에 뒤처진 새외 무림에 기죽지 마라!”
암천회조차도 서장 무림엔 손을 대지 못했다.
이는 그 힘을 두려워서가 아니라, 서장 무림의 대표 격인 포달랍궁이 중원의 무림과는 다르게 무림 문파인 동시에 관부의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원나라 이전, 몽골은 서장을 제압하고, 종교 지도자를 대리 통치인으로 삼아 라마교를 국교로 삼았다.
이후 포달랍궁을 비롯한 라마교는 원에 종교를 전파하면서 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패악질을 저질렀다.
원이 멸망한 뒤로도 아직 그 성향이 남아 있다 보니 국가 규모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암천회는 괜히 라마교를 건드렸다가 황제의 눈에 띌 것을 껄끄러워했다.
명 건국 후에도 라마교는 민감한 사항이다.
철천지원수인 북원, 즉 몽골의 국교였으니 당연했다.
그 탓에 암천군 역시 서장 무림, 포달랍궁에 대해서 정보가 부족해 좋지 못한 판단을 내렸다.
암천군의 후위가 움직여서 퇴로를 뚫으려고 시도했으나 포달랍궁의 라마승 무리로 인해 막혔다.
“으아아악!”
“커헉!”
후위의 칠성사병은 무심코 라마승에게 달려들었다가 낭패를 보았다.
황색 법복 차림의 무승이 손바닥을 내밀자, 부채처럼 부풀어지면서 막강한 장력(掌力)을 쏟아 냈다.
흉부에 맞는 순간, ‘억’ 하고 피를 토해 내면서 내장이 엉망이 됐다.
“대수인(大手印)!”
라마교의 가르침이자, 포달랍궁의 절기무공이었다.
“크아악!”
“어억!”
포달랍궁은 강했다.
하기야, 도움을 주러 파견된 전력이니 약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때다!”
“밀어붙여라!”
귀주군은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질풍처럼 신속했고, 마치 불이 번지듯 맹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꼬리를 보이며 도망치던 유도 부대, 본대도 합류해서 격전에 참전했다.
“주서천!”
요광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아압!”
격전지 한가운데, 주서천은 이십사수매화검법으로 활약했다.
요광과 붙기 전이니 아직 힘을 아낄 필요성이 있었다.
자하검결이나 그 외의 무공은 자제했다.
다수를 상대할 수 있고, 공수의 전환도 자유로운 이십사수매화검법이 딱 제격이었다.
검신에 맺힌 자색의 빛이 번쩍일 때마다 짙은 매향이 퍼졌다.
“타앗!”
전장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하는 건 주서천만이 아니었다.
단연 그 외의 고수들의 활약도 있었다.
“주서천의 사매다!”
“낙소월, 저년부터 쳐 죽여라!”
주서천의 관계자들은 죄다 살생부 상단에 올라와 있다.
낙소월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산제일미라고 알려지기도 하다보니, 노리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매복 부대 중 일인인 낙소월이 나타나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이들로 가득했다.
서걱! 파바바밧!
“아아악! 내 팔이!”
“제기랄, 이 계집애가!”
그러나 상대가 될 리가 만무했다.
낙소월은 인면지주의 내단을 복용한 뒤, 주서천도 예상하지 못한 깨우침을 얻어서 화경에 올랐다.
스물아홉 살에 화경에 올라 무림을 떠들썩하게 한 파검봉의 뒤를 이을만한 고수로 자랐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검에는 거침이 없다.
평소엔 여린 마음씨를 지닌 숙녀이나, 싸울 때는 귀신과도 같았다.
얼굴에 피가 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그저 묵묵히 검을 휘둘러 칠성사병의 목숨을 앗아 갔다.
“막내야, 머리!”
매화검수, 몽각이 외치는 동시에 검을 낙소월의 정면을 향해서 수평으로 그었다.
낙소월은 약속이라도 한 듯 허리를 뒤로 젖혔고, 그 위로 검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동 뒤를 노리던 칠성사병은 눈앞의 시야가 위와 아래로 분리되자, 머리가 둘로 갈라진 걸 깨달았다.
“비켜.”
또 다른 매화검수, 담향이 몽각의 팔을 잡아 빙글 돈 뒤에 측면에서 파고 들려던 칠성사병을 찔렀다.
기본적으로 다수 동행조가 기본인 매화검수이니 혼자 왔을 리 없다.
사형제도 함께 왔다.
아쉽게도 장홍과 장서은은 실력이 아직 부족해, 최전선에 투입되진 않고 다른 지역을 맡기로 했다.
낙소월은 검신이 아끼는 사매라고 지원으로 뽑힌 게 아니다.
충분한 실력이 뒤따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제기랄, 빌어먹을 화산파!”
위에서도 옆에서도 매화가 피었다.
대원수, 주서천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활약은 화산파만의 것이 아니었다.
화경의 고수인 단리화야 두말할 것도 없었고, 당혜 역시 일취월장한 독과 암기술로 적들을 유린했다.
“정파에게만 공을 줄 생각이냐!”
조명이 도로 칠성사병을 일도양단하며 외쳤다.
귀주의 고수, 조명 역시 절정에 이르는 고수였다.
무공의 경지는 절정에 이르나, 싸움은 물론이고 이처럼 난전 속에서도 기가 막힌 실력을 발휘했다.
적이나 아군의 시체를 들어 방패로 삼거나 혹은 비열한 계략으로 틈을 찌르는 방식이었다.
비록 옳지 못하나, 이 방식으로 초절정 고수 몇을 저승으로 보낸 적도 있었다.
조명은 싸움의 귀재였다.
그래서 투귀도(鬪鬼刀)라는 별호가 붙었다.
또한, 전술에도 능해 사도천 귀주 지부에서 제법 오랫동안 지휘권을 잡았다.
그 능력만큼은 인정할만했다.
어떤 순간에 들어가야 하는지, 빼야 하는지만 알아도 이상적인 지휘관이다.
정파에게 경쟁심을 가지면서도 선을 넘지 않고, 냉정한 판단하에 움직이는 것이 훌륭했다.
북쪽의 본대, 동쪽의 분대, 남쪽의 포달랍궁.
암천군의 병력은 궁지에 몰리게 되면서 조금씩 밀집됐다.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요광! 포달랍궁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암천군의 지원 세력, 녹림구채 중 산발에 수염이 북슬북슬한 덩치가 욕설을 내뱉으며 항의했다.
도주하려 해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서쪽에는 적이 없었으나, 호수라서 문제였다.
수림도가 아닌 녹림도는 수공은커녕 수영도 못하는 자도 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사이 삼천오백 중 절반 이상이 밀집됐다.
후위에 걸쳐 있긴 하나 요광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요광의 투구 속 표정 에 불안감이 맴돌았다.
굳이 감각이 아니라도, 주변을 둘러보면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새로이 편성된 귀주군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포위하려 하는 건가 했지만, 그런 것치곤 거리가 상당했다.
발걸음에도 경각심이 묻어났다.
요광은 특유의 예리한 감각으로 함정에 빠졌다는 걸 눈치챘으나, 그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지금이다!”
쿠오오오오!
주서천은 용후로 적들의 움직임을 마비시켰다.
그것이 곧 신호가 됐다.
“암천회에게 호지관의 위력을 알려줘라!”
드르르륵!
기계 장치의 무언가가 맞물리는 소리가 울리고.
찰칵! 쿠르르르릉!
암천군이 밟고 있던 지반이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악!”
“살려 줘!”
“끄아악!”
“따, 땅이 무너진……”
삼천오백 중 약 이천여 명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아래로 떨어졌다.
조금이라도 분산되어 있었더라면 휘말리지는 않았을 텐데, 불행하게도 밀집된 형태라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 탓에 피하지도 못하고 빨려 들어갔다.
포달랍궁이 합류한 귀주군조차도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지옥의 아가리 틈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누가…… 이런 걸 만들었다고 했지?”
아래를 내려다보던 조명이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갈…… 승계.”
누군가가 훗날 역사에 남을 이름을 말했다.
삼천오백 중 이천이 땅 밑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악!”
“컥, 커헉!”
벌써부터 부상자가 속출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머리를 들어보니 높이는 넉 장 정도 됐다.
“빠, 빠져나가야 해!”
눈치 빠른 몇몇이 무언가 불길함을 느꼈다.
여기에 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벽을 타거나 누군가의 어깨를 빌려 뛸 생각이었다.
머리 위가 제법 높지만, 무림인에게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다.
힘을 합하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
하나 그걸 감안하지 않을 제갈승계가 아니었다.
무너진 지반의 울퉁불퉁한 벽을 타고 이 장 정도 올라가자,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덜컥!
소리가 난 직후, 벽 중간쯤에 깨끗하게 새겨진 검상처럼 정사각형 무늬로 금이 그어졌다.
무엇인가 하고 확인도 전에, 안에서부터 철로 된 기둥이 솟아나 반대편 벽면에 꽂혔다.
콰앙!
“아아악!”
나무나 돌로 되어도 파괴적인데, 무려 철이었다.
반대편에서 벽을 오르던 칠성사병은 날벼락에 휘말려 몸이 납작하게 찌부러져 육편이 됐다.
가까스로 피한 이들은 밑의 아비규환 속으로 떨어져 뼈가 부러지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열댓 개를 넘어서며 머리 위의 시야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더 이상 올라가지 마!”
“그러다가 위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아비규환 속, 생존자들이 뒤늦게 위험하다는 걸 느끼고 고함을 질러댔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이들도 결국 내려와야만 했다.
‘기관 장치……’
혼란 속, 요광만이 침착함을 가진 채 상황을 파악했다.
‘기관괴협.’
제갈승계는 몇몇 사건으로 별호를 얻었다.
주로 금의검문에서 동원된 여러 무기들에 의해서였다.
‘제갈승계.’
또한, 주서천의 동료로서도 암천회에 이름을 알렸다.
사장된 기술에 집착하는 괴인이었다.
하나 암천회에선 단순히 특이한 사람이라 기억할 순 없었다.
암천회의 분타나 혹은 기타 계획에 기관 장치가 상당수 잠들어 있는 만큼, 위험 인물로 지정했다.
현 장소의 기관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요광!”
생각에 잠긴 도중,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녹림구채에서 파견된 산적의 우두머리, 풍산채주(風山棄主) 왕급간이었다.
드러난 이는 누렇고, 머리는 산발과 같다.
육 척 가량의 신장에 풍채가 좋았다.
오른손엔 박도를 쥐었다.
안광에서는 사나운 불길이 번졌다.
‘저놈 탓에 이게 무슨 꼴이더냐!’
왕급간은 초장부터 요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웬 개뼈다귀 놈의 명을 따르는 것도 싫었고, 언제나 갑주로 모습을 감추고 있어 신뢰가 안 갔다.
적림총채주, 홍하랑이 얌전히 따르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때려눕혔을 것이리라.
왕급간은 녹림도답게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놈이 실패한 틈을 타 이 풍산채주 왕급간님이 우두머리가 되겠다.’
삼천에 이르는 암천군이 자기 손과 발처럼 움직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왕급간은 나름 야심찬 계획을 머릿속으로 세우며, 요광에게 달려들 듯 접근해 소리를 질렀다.
“네 이노옴!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 케헥!”
그러나 왕급간의 야욕은 삼일천하도 가지 못했다.
요광은 한 손만으로 왕급간의 목을 낚아채 올렸다.
“천기성 중 살아 있는 자들은 집합해라.”
“예!”
요광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주변에 퍼졌다.
꺼진 의식 속에서 깨어난 이들이 몸을 채 정비하기도 전에, 요광의 목소리에 압도되어 얼어붙었다.
“보다시피 함정, 그것도 기관에 걸려들었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빠져나갈 방법은 있는가?”
요광의 물음에 천기성 소속 칠성사병은 쉬이 답하지 못했다.
서로 마주 본 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칠성사의 두뇌, 천기성이라고 전부를 아는 건 아니다.
특히나 기관처럼 사장된 기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천기성 내부에서도 일부에 불과했다.
“쯧.”
요광은 천기성의 반응에 혀를 찼다.
“컥, 커헉!”
“끅!”
“끄으윽!”
손에 잡힌 풍산채주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지만, 요광은 개의치 않았다.
얼굴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생사가 위독한 순간에 맞춰서 집어 던졌다.
우당탕!
“채, 채주!”
“괜찮으십니까?”
녹림도, 그중에서도 풍산채 소속 산적들이 기겁하면서 바닥을 구른 왕급간에게 달려갔다.
“또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다음은 이보다 더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요광의 투구 안에서 서슬 어린 안광이 뿜어졌다.
꿀꺽!
무심코 그 눈빛과 마주친 이들은 압도당해 고개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