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章 (197/254)

사흘 후, 귀주.

무림인의 아침은 빠르다.

동이 트기 전 운기조식을 위해서 밤도 아침도 아닌 시간에 미리 일어나 있다.

사박사박.

경비 무사가 걸을 때마다 지면의 눈이 깊게 파였다.

밤을 지새우며 경계를 서던 무사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고, 동료 무사는 꾸벅꾸벅 졸았다.

“이, 이, 일어나, 이 새끼야!”

빠악!

의식을 잃기 직전, 동료 무사가 뒤통수를 맞고 일어나며 욕설을 내뱉으려 했다.

“이 새끼야!

깨울 거면 얌전히 깨울 것이지 왜 남의 머리를 쳐?”

그는 사도천 소속의 무사다.

사파인 중에서 머리 맞고 화 안 낼 정도로 순한 사람은 없다.

안 그래도 잠을 제대로 못 자 짜증이 극에 다다른 상태였다.

“앞! 앞에!”

“앞에 뭐? 어디 천하절색의 여자라도…… 허억!”

무사는 무심코 머리를 들었다가 눈을 부릅떴다.

시선의 끝, 지평선에 대군(大軍)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중 단연 눈에 띈 건, 온몸을 시커먼 갑주로 무장하고, 창을 어깨에 멘 장신의 무인이었다.

무사는 상부에서 내려온 신상명세를 떠올리며 목청껏 소리쳤다.

선두에 요광 및 대군 출현!

정사 연합 대 암천회.

그 첫 번째 대결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무림맹 상층부는 귀주의 격전을 예상하고 주서천을 비롯한 고수로 이루어진 별동대를 파견했다.

다만 귀주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상황인지라, 발 빠른 주서천만 따로 빠져서 귀주로 향하기로 했다.

경공도 경공이지만, 거의 끊이지 않는 내공을 소유했으니 속도나 지구력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정사 연합의 화해가 이어졌을 당시 무림맹에서 파견된 별동대는 귀주의 동북, 호남(湖南)의 장강 유역인 동정호(洞庭湖)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중원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이며 아름다운 풍치를 지닌 것으로 유명하나, 한가하게 구경하러 온 건 아니다.

안휘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보다는 장강의 물살을 타고 배를 이용하는 것이 더 빨라서였다.

동정호의 남쪽 끝자락의 포구에서 내려, 말로 갈아타거나 경공을 이용해 남서의 귀주로 갈 생각이었다.

하나 생각만큼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장강의 물살도 물살이지만 별동대 앞을 막은 수적 떼 탓이었다.

“혹시, 저희가 누구인지는 알고 계신가요?”

단리화가 머리에 쓴 죽립을 슬쩍 올리며 웃었다.

입과 다르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알고 있다.

“파검봉, 아니 이젠 나이도 서른이니 다르게 불러야 하나? 단리화.”

적림십팔채의 반절인 녹림구채는 대부분이 중경에 밀집해 있다.

반면 수림구채의 경우에는 중경만이 아니라 전역, 정확히 말해선 장강 일대를 끼고 활동했다.

수채 역시 각지에 골고루 퍼져 있는 편이다.

호남의 동정호 일대 역시 수림구채가 있었다.

동호채(洞湖塞)라 불리는 중규모의 수적 소굴이었다.

“서른인데 아직 이렇다 할 남자가 없었던 건 이 동호채주, 유탁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지 않느냐?”

유탁이 호호 하고 음흉하게 웃었다.

우락부락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 아무렇게나 자라난 지저분한 수염, 못생긴 얼굴은 도적 그 자체였다.

단리화는 유탁의 희롱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뇨, 괜찮은 남자가 없어서 그래요.

특히나 당신 같이 목소리만 크고, 근육만 부풀어 오른 남정네는 하나같이 아랫도리가 손톱만큼 하더라고요.”

“……”

미녀, 그것도 정파의 후기지수 출신에게서 나오기 힘든 말이었다.

무림맹에서 파견한 별동대도 할 말을 잃은 듯,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더 부끄러울 지경이야……”

당혜는 눈썹을 구부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화산의 매화검수, 낙소월은 얼굴을 살짝 붉힌 채 눈앞의 수적에게만 집중했다.

“이, 이 계집년이……”

유탁이 눈을 부릅뜨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단리화는 유탁의 반응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어머나, 농담이었는데 아무 말도 못하는 걸 보면 정말로 그런 모양이네요.

괜찮아요. 기교만 있다면 작아도 문제없으니까요.

아, 근데 그쪽은 보니까 기교도 별로인 것 같다…… 이렇게 된 거 저기 배 아래의 장강이나 임신시키지 그래요?”

“죽여 버리겠다아!”

유탁의 피부 위로 퍼런 핏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조, 조용히 하자.’

‘웃었다간 죽는다.’

동호채의 수적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적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거칠고 지랄 맞다.

성격이 유순하면 우습게 보여 금세 죽기 마련이다.

자기 자리를 넘보지 않게 하려면 성격도 지랄 맞아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제일 지랄 맞다는 뜻이었다.

만약 여기서 웃는다면 이 일이 끝나고 죽기 직전까지 맞거나, 물고기밥으로 던져질 것이 분명했다.

“쳐라!”

유탁의 외침에 수적들이 달려들었다.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도 공격했어.’

단리화가 물 흐르듯 검을 휘두르면서 생각했다.

‘장강이야 이들의 영역 내이니 우리의 위치를 알아낸 건 그렇다 쳐도, 전쟁 중인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무림맹의 고수가 여럿 있는 배를 습격했다는 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적림십팔채가 암천회와 손을 잡았다.’

* * *

귀주, 옹안에 모인 사파인만 이천여 명이었다.

사흘 전, 주서천과 고훈이 중개한 화해 협정 이후로는 각지에서 사파인이 모여들어 천이 더 늘었다.

고수는 적지만 인구가 많은 사파의 특성답게 약 천오백 명인 무림맹보다 두 배는 더 많았다.

귀주의 정사 연합은 이로써 사천오백여 명.

전력의 숫자는 괜찮지만 무력이 좀 낮은 편인 게 흠이었다.

약 사흘 동안 정사 연합은 화해한 뒤, 재정비를 하고 연합군으로서의 지휘 체계를 갖췄다.

정파 측은 주서천과 신도균, 맹초혁.

사파 측은 조명.

금의상단의 고훈이었다.

“요광 및 대군 출현!”

전령의 다급한 외침에 지휘 막사의 대화가 끊겼다.

“도주한 종리도전 역시 보입니다!”

약 이틀 전, 종리도전은 모습을 감추었다.

주서천은 종리도전이 천추성이라 예상했던 바,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으으으, 그 개새끼…… 날 이용하다니……”

조명이 씩씩거리면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종리도전과 몇 년 동안 귀주에서 등을 맞댄 전우인 동시에, 의형제 배분을 맺은지라 배신의 충격이 컸다.

“귀주 전선의 힘, 보이도록 하지요.”

신도균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지휘 막사를 나섰다.

“자만하시는 건 금물입니다, 암천회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그들은 하나하나가 보통이 아닙니다.”

주서천은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경고했다.

귀주에서 하루하루 위험한 나날을 지내는 신도균이야 정파 특유의 높은 자존심의 경향이 옅으나, 그래도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상 암천회의 저력은 소문만 무성할 뿐 대대적으로 이렇게 나선 적은 없다 보니 그리 체감되지 않는 모습인지라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강조했다.

“또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주로 무장한 자.

요광을 조심하십시오.”

“정말로 그의 갑옷이 전부 만년한철인 겁니까?”

맹초혁이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만년한철이란 것 자체가 전설의 금속이다.

검이나 비수의 재료만 해도 천문학적인 금액이 있어야 한다.

한데 전신으로 휘감았다 하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예.”

사실 정확한 건 아니다.

하나 경각심을 높이도록 일부러 그리 말했다.

간야자를 데려왔다면 제대로 알 수 있겠지만, 제갈승계의 곁에 있으니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귀주 지부장님, 아니 귀주전선장(貴州前線將)님께 총지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 두십시오.”

신도균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맹초혁과 조명은 부러운 듯이 신도균을 쳐다봤다.

귀주전선장이라는 직책을 탐내는 눈초리였다.

‘어라, 이거 잘하면 후임한테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신도균은 귀주전선장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선장이라는 직책은 좋았지만 그것이 십 년이 넘도록 구르고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귀주에서라면 사양이었다.

‘만약 정사 연합이 오래가고, 일차 격돌이 잘 풀리면 맹초혁이나 조명 둘에게 대충 넘겨야겠다.’

신도균은 사악한(?) 계획을 세우며 걸음을 옮겼다.

옹안 앞에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사천오백에 이르는 정사의 무인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채 지평선 너머의 암천회의 군대를 기다렸다.

삼류와 이류투성이인 전력이라 해도 사천오백이나 모이니 그 기백이 보통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도천의 경우, 암천회 수괴의 목을 베어 배상금을 받아 낼 생각으로 살의가 보통이 아니었다.

“금자, 금자……”

“평화를 위해서 암천회 수괴의 목을 베겠다.”

“그러면 돈은 나한데 주라.”

“돈으로 맞아 본 적 있나?”

전장을 앞에 둔 무인의 고양감, 살의, 긴장 등이 섞였다.

긴장을 풀려는 농담으로 때때로 웃음이 퍼졌다.

겉으론 경박해 보이긴 해도 하나같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경계한 채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광경……’

정파인과 사파인 틈에 있으니 옛추억이 새록새록 피어 올랐다.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이구나.’

옛 기억이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십 년간 이어져 온 정사대전이 끝난 후, 암천회의 등장으로 정사가 여러 일을 겪은 끝에 힘을 합쳤다.

몇십 년 전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도 오늘처럼 정파와 사파에 섞여 그들을 기다렸다.

“……왔다.”

누군가 외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동이나 북소리로 알린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암천회가 지척에 다가오더니 귀주군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파도와 같구나.’

전방에 나타난 암천군(暗天軍)은 파도였다.

해변의 모래를 집어삼키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바도로 가져가는 파도 그 자체였다.

전처럼 은밀 활동을 위해 복면을 쓰진 않았지만, 여전히 흑의 무복차림이라 비유하자면 암흑의 파도였다.

‘요광……’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전신을 휘감은 흑철 갑주와 적색과 금색의 조화를 이루는 화첨창이었다.

몸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기세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주서천……‘

요광 역시 주서천을 한눈에 알아봤다.

암천회의 대원수, 검신을 모를 리 없다.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 본 채 앞으로 걷는다.

약 오 리(里) 정도 남았을 때, 양 군대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춰서서 가만히 서 있었다.

‘전란…… 이로다.’

주서천은 고요함 속에서 눈을 감아 생각에 잠겼다.

전생의 경우, 요광처럼 거물과 마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누군가의 등을 보기만 했다.

앞에 나오기는커녕 중간 즈음에 서서 앞으로 일어날 격전에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랬던 자신이 어느덧, 선두에 서게 됐다.

사천오백의 무림인들의 등이 됐다.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뇌에 새겨진 전란의 기억이 떠올랐다.

“후웁……”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하아.”

내쉬면서 감았던 눈을 떴다.

“들어라!”

뒤를 보지 않는다.

옆도 보지 않는다.

“정사는 무언가를 위해 오랫동안 싸워 왔다!”

그저 앞을, 적을 바라보며 외쳤다.

“무공의 방식부터 시작하여, 사상의 차이!

때로는 이해득실의 관계나 은원 등으로 싸워 왔다!”

주서천의 외침이 귀주 땅에 메아리쳤다.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다양한 방면으로 부딪쳐 왔다!

하나, 지금 이 순간! 대립은 내려놓고 정사는 하나가 됐다!

어째서인가!”

검신의 물음에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뒤에서 공작 몇 번 성공했다고,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거리는 놈들 때문이다!”

암천군 역시 조용했다.

“지금부터!”

하나같이 차가울 정도의 표정이었다.

“그게 얼마냐 엿 같은 기분인지 알려 줘라!”

다만 살의의 폭풍이 요동쳤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뭔가를 원하는 새끼들한데, 그게 얼마나 도둑놈 심보인지 알려 줘라!”

손에 쥔 검을 들며, 앞으로 힘껏 내디딘다.

“정사의 영웅들이여!

정도를 보여라!

사도를 보여라!

신의를 보여라!

금의를 보여라!

정의를 보여라!

사의를 보여라!

벗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사문을 위해서, 사형제를 위해서, 연인을 위해서, 개인을 위해서라도!

뭐든지 좋다! 무언가를 위해서 왔다면, 결의를 보여 줘라!”

콰앙!

“가자아아아아아아아!”

정사와 암천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우오오오오오오!”

누구보다 든든한 상천육좌, 검신이 앞에 나서서 몸을 날리자 정사 연합도 뒤를 따라 달렸다.

두려움은 없다.

그 대신 전의만 있을 뿐이었다.

귀주 땅을 밟은 무림인들은 정사의 구별 없이, 하나같이 제각각의 사정을 간직한 이들밖에 없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서, 또는 단숨에 출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귀주를 찾았다.

그만큼 그들의 각오는 잘 잡혀 있었다.

몇몇은 귀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긴장된 표정 이었으나, 그들 역시 주변 아군의 전의에 동화되어 몸을 움직였다.

쿠구구구!

땅이 흔들린다.

아직 눈이 덜 녹은 대지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사천오백여 명의 정사 연합과 삼천에 이르는 암천군이 만들어내는 진동이었다.

양군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든다.

오 리가 순서대로 일 리까지 좁혀진 순간, 요광이 창을 쭉 뻗었다.

쐐애애액!

화첨창의 몸체가 늘어나며 한일 자를그렸다.

“주서천!”

요광의 외침이 고막을 두드린 동시에 피부 위로 열기가 느껴졌다.

화첨창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이었다.

“으아악!”

주서천 뒤를 따르던 정사 연합군이 기겁했다.

창이 여의봉처럼 늘어나더니만, 불꽃까지 뿜어 댔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열기가 대단하다 보니 몸이 저절로 피해졌다.

그에 비해 주서천은 멈춤이 없었다.

열기에 개의치 않고 곧장 달려나가다가 지면을 박차 뛰어올랐다.

휘리릭!

창이 일직선으로 뻗어와 피하긴 어렵지 않았다.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라 제비를 돌아 아래로 착지했다.

다만 발밑에 닿은 건 지면이 아닌 창대였다.

“어림없다!”

요광은 창 위에 주서천이 올라왔음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창에 올라오는 건 묘기에 지나지 않는다.

부웅!

창을 쥔 손에 힘을 주고 힘차게 들어 올린다.

창대가 엿가락처럼 휘면서 파도처럼 출렁였다.

일찍이 장창(長槍)의 기준이 되는 길이를 넘어섰으나, 요광의 창 솜씨는 변함이 없었다.

‘후우.’

과연 군부의 무장, 화경의 고수답게 보통이 아니다.

길이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났음에도 어떻게 다뤄야할지 잘 알고 있었다.

숙련도는 두말할 것 없다.

장창을 단창 아니 자기 손처럼 자유자재로 능숙하게 다룬다.

주서천은 화첨창에 붙어 있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가 균형을 바로 잡아 무사히 바닥에 착지했다.

“와아아아아!”

착지한 순간, 전장에 함성이 터졌다.

최선두를 따라온 양군이 최초로 격돌했다.

“크아아악!”

“아악!”

그야말로 ‘전쟁’의 시작이었다.

수천에 이르는 무인들이 뒤엉켜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해 목을 베고, 심장에 검을 꽂고, 다리를 자르고, 내장을 박살 냈다.

바로 옆 아군이 적에게 위협을 당하면 옆에서부터 허를 찔러 도왔다.

그 등 뒤로 또 다른 적이 등에 창을 꽂았다.

주변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무림의 싸움이란 건, 보통 비무를 칭한다.

규칙을 세우거나 일대일 승부로 결과를 낸다.

그러나 전쟁은 다르다.

규칙이라곤 적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과거, 전생에서 정파인은 이 무규칙적인 어떠한 질서도 존재하지 않는 전쟁에 적응하지 못해 죽었다.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걸 보고 비겁하다면서 비난하고, 당황해하며 어이없이 죽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귀주에 칼 밥 좀 먹어본 정파인들은 이 점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사고방식이 딱딱하게 굳어 있지 않고, 유들유들했다.

그 덕에 어이없이 죽는 경우는 적었다.

퍼엉!

머리가 과육처럼 터지면서 피를 흩뿌렸다.

공포에 짓눌려 방광이 터졌는지 노란 물줄기가 흘렀다.

그중에선 변을 지린 자까지 있었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린내 따위보단 비릿한 혈 향이 문제였다.

“크아악!”

“죽어라!”

“죽어!”

자르고, 베고, 부수고, 막는다.

평생을 갈고 닦은 무학은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도구로 변했다.

“종리도전이다!”

귀주연검!

암천군은 귀주군보다 수의 차이는 있었으나, 평균적인 무위가 위였다.

단연 고수의 수도 여럿이었는데, 그중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군이었던 배신자도 속해 있었다.

“뒈져라!”

종리도전은 허리띠처럼 두른 연검을 꺼내 휘둘렀다.

휘리릭!

연검이란, 이름 그대로 유연한 검이다.

재료가 되는 금속의 탄성이 강해 철임에도 부드럽게 휘었다.

궤도를 읽으려 해도 도중에 검이 휘는 탓에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종리도전은 절정의 고수였으나, 이 연검이라는 특수한 무기 덕에 초절정도 능히 상대할 수 있었다.

“커헉!”

종리도전이 손목을 튕길 때마다 검이 활등처럼 휘면서 요사스러운 움직임으로 공격해 왔다.

정사의 무인들은 종리도전에게 접근했다가 그가 휘두르는 연검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종리도전, 이 새끼야!”

삼 장 밖, 정사 연합 측 중앙에서 조명이 종리도전을 보고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네가 날 어떻게 배신할 수 있느냐!”

“그야 뻔하지 않소. 암천회에서 챙겨 주는 것이 보통이 아니외다.”

종리도전이 왼손을 문지르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내 특별히 상부에 잘 말씀드릴 테니, 형님께서도 이참에 암천회로 전향하는 건 어떻소?”

“지랄!”

조명이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답했다.

“내 아무리 욕심이 많다곤 하지만, 날 오랫동안 이용해 온 새끼랑 손잡기는 싫다! 카아악, 퉤!”

“으휴, 네놈의 속은 여전히 작구나. 자, 덤벼라.

내 연검을 쓰지 않고 이 주먹만으로 상대해 주마.”

종리도전이 도발하듯 왼손을 들어 까딱였다.

조명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의동생으로 여겼던 이의 저급한 도발에 진노했으나, 나서지 않았다.

사도천엔 이렇다 할 고수가 몇 없다 보니, 전선의 지휘자로 삼을 만한 자가 적다.

주서천은 사전에 조명에게 웬만하면 나서지 말고 오랫동안 살아남아 전장의 조율을 부탁했다.

“저 개새끼……!”

조명은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기세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명! 도발은 무시해라!”

대열의 오른쪽, 맹초혁이 멀리서 소리쳤다.

“알고 있다!”

조명도 바보는 아니다.

귀주라는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실력자답게 머리도 비상한 편이다.

만약 저 뻔한 도발에 걸려들어 당하기라도 한다면 사도천의 지휘 체계는 엉망이 된다.

자신이 할 역할은 이 난전 속에서 내공을 눈과 목소리에 집중시켜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종리도전도 그걸 알고 일부러 도발했다.

조명은 화를 삼키며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하하하! 겁쟁이 놈!”

종리도전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 높여 비웃었다.

비명과 절규속에서도 이상하게 잘 들렸다.

“자아, 저 겁쟁이 새끼들에게 암천의 힘을 보여 주마!

승자에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우오오오오오!”

암천군의 사기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의 충의나 전의는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은 편이 아니었다.

종리도전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암천회에서 일한 대가는 실제로 후했다.

최소 이류 이상의 무공 비급을 선사해 훈련을 시켜줄 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자에겐 영약이 주어진다.

금전 면으로도 후한 보상이 가능했다.

암천회는 명의 태조, 홍무제의 숙청에게서 도망치고 숨기 위한 조직이었다.

알다시피 인원이 관료투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각 가문의 재산을 투자한 만큼 경제력이 작지 않았다.

황궁 무고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금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돈과 무공.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건 너무나도 달콤한 것이었다.

“으아악!”

전장의 비명이 쉴 새 없이 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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