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 장강수로채(水路塞).
“누님……아니, 총채주!”
수적이 문을 열고 들어와 외쳤다.
“꿀꺽, 꿀꺽…… 크으으!”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보인 건, 책상에 발을 올려두고 술을 목 너머로 시원스레 넘기는 미녀였다.
붉은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은 등허리까지 흘러내리고, 비단처럼 고우며 약간 곱슬곱슬해 파도처럼 출렁였다.
치켜뜬 눈매는 맹수처럼 사나우며, 그 안의 시커먼 눈동자는 보는 것만으로 압도당할 만큼 냉혹했다.
잘록한 허리 위의 풍만한 가슴은 가릴 생각이 없는지,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모르는 복장이었다.
남자라면 당장 바지를 벗어 던질 미모였으나, 눈썹에서부터 광대뼈까지 내려오는 화상(火傷)은 흉악한 인상을 만드는 데 한몫해 흠칫하게만든다.
겉으론 보기엔 막 서른 살이 된 요염한 미부(美婦)였으나, 실제로는 불혹(不惑 : 40세)을 넘긴 중년이었다.
“뭐냐?”
“암천회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수로채주, 아니, 적림총채주 홍하랑이 손을 까딱였다.
수적, 수로부채주 야표가 서신을 건냈다.
홍하랑은 서신을 읽어 내리곤 코웃음쳤다.
“무슨 일입니까?”
야표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암천회.
칠검전쟁이나 사문반란 등 굵직굵직한 사건에 개입한 것도 모자라 뒤에서 조작했다는 무력단체.
무림맹과 사도천이 이 암천회와의 전쟁으로 동맹까지 맺게 만들어 화제가 되지 않았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안인가.”
“제안? 뭔 제안입니까?”
“정사연합과 암천회가 전쟁을 준비중인 와중에 올 제안이라면 뭐가 있겠냐? 당연히 동맹이지.”
홍하랑이 보란 듯이 서신을 야표에게 던졌다.
야표는 건네받은 서신을 읽곤 눈을 크게 떴다.
“전쟁에 승리할 경우, 중경의 산이나 장강은 물론이고 황하나 동정호…… 그 밖의 노략질을 묵인하며, 암천회의 무림 정복 시, 적림십팔채와는 대등한 동맹 관계로……”
요약하자면 도적 토벌을 내버려 두겠다는 뜻이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한데, 이 새끼들이 나중에 가서 입 씻지 않을지가 문제가 되겠군요.”
“받아들여라.”
“예?”
홍하랑의 고민 없는 대답에 야표가 되물었다.
“그리 쉽게 결정해도 되는 겁니까?”
“약속을 지키건 지키지 않건,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 않다뇨?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야표가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하랑은 야표를 병신 보듯이 쳐다보곤 한숨을 내쉬더니만, 머리가 모자란 부하를 위해 설명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도와 사도, 아니, 무림 세력의 감퇴다.
특히나 그 정파의 위선자 새끼들이 여유가 생겨 협의다 뭐다 하면서 산채 및 수채를 털지 않도록 만들면 돼.
그것만으로도 중경 외의 타 지역에 돌아다니는 게 가능해지니까.”
적림십팔채는 하오문처럼 흑도다.
정파인에게도 사파인에게도 경멸의 대상이었다.
무림맹은 사문이나 개개인의 명예를 드높이려고 도적을 털고, 사도천은 재정 좀 채워보자며 턴다.
그 밖의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등장하는 신비문파나 은거기인은 출두를 알리려고 털었다.
수림이야 비교적 상황이 낫긴 한데, 녹림은 중경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수림의 수장이었던 시절은 상관없었으나 적림총채주가 되니 녹림도 책임져야만 했다.
“그러면 굳이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공멸하도록 옥수수 뜯으며 구경이나 하면……”
홍하랑은 무심코 욕설을 내뱉으려다가 참았다.
작년 이맘때 쯤 회류채주(回流塞主)가 수하에게 머저리 같다고 호통을 치다가 뒤통수 맞고 죽었다.
도적에게 의리나 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필요 이상으로 잘해 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괜히 작은 일에도 막 대했다가 배신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무림맹과 사도천 다음으로 사라지겠지.”
홍하랑이 바로 앉아 목을 엄지로 슥 그었다.
야표는 무심코 목이 아니라 자세를 바꾸면서 드러난 풍만한 가슴을 힐끗 살폈다가 얼른 눈을 돌렸다.
일주일 전에 저 가슴을 훔쳐보던 수하 하나가 남색가인 수하에게 삼 일 동안 강간당했던 게 떠올랐다.
야표는 순간 향했던 시선이 들키지 않도록 이목을 다른 곳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놈들이 만약 저희를 이용만 하고, 무림 정복에 성공한 다음 토벌하려 하면 어쩝니까?”
“한낱 도적을 토벌하느니, 차라리 무림맹이나 사도천의 잔존 세력이나 찾아 없애는 게 나을 거다.”
총채주의 답변에 야표는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 정복이란 과정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정복 이후에도 문제이다.
정사 할 것 없이 무림을 통합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 후 관리까지 생각해야 한다.
총채주가 된 이후의 일로 인해 툭하면 얼굴을 찡그리는 홍하랑을 생각하니 수긍이 갔다.
“그리고, 주서천 그 애새끼한데 갚아야 할 빛도 있거든.”
홍하랑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것도 그렇군요.”
야표의 얼굴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신(新) 적림총채주, 홍하랑은 주서천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악연이 나름대로 깊은 편이었다.
약 십년 전, 주서천이 강호조출 때 천하백대고수인 도수창병 육대랑을 죽인 것이 시작이었다.
주서천과 제갈승계의 실종으로 인해 체면을 구긴 화산파와 제갈세가는 대노해 수림구채와 척을 졌다.
예전 같으면 적당히 통행료를 내고 끝낼 일이었으나, 화산파와 제갈세가가 그를 넘어, 토벌까지 나섰던 터라 적림십팔채, 특히 수림구채는 당시 거의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
이로 인해 도적질으로 연명하던 수림구채는 한동안 수익이 끊겨 굶어야 했고, 녹림에게 조소 섞인 수모를 겪었다.
적림 내에서의 입지 역시 좁아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녀가 적림총채주에 오르고 수림구채의 입지가 오른 것도 주서천 때문이었다.
삼 년 전, 주서천이 정파인들을 이끌고 녹림을 토벌하여 전 적림총채주인 맹강을 죽였다.
녹림구채 중 대호채와 녹룡채가 박살 났고, 관병에 넘어감으로써 녹림채의 세력이 크게 줄어 들였다.
이후 녹룡채나 대호채가 남겨둔 보물을 차지하기 위한 녹림도의 싸움이 일어나 내분이 벌어졌다.
약 반 년 정도 후 녹룡채와 대호채를 대신할 산채가 생기고, 보물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끝났다.
하나 이 사건으로 인해 녹림 역시 입지가 좁아졌다.
내분으로 녹림도가 줄기도 했지만, 녹림채주 출신이었던 맹강의 패배와 세력 감퇴 탓이었다.
수림구채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금니를 드러냈고, 몇 차례 싸움 끝에 총채주는 한 사람에게 돌아갔다.
수로채주, 홍하랑이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십 년 전, 녹림에게 받은 수모도 수모지만 토벌이 늘어나면서 여러모로 고생을 했다.
아끼는 수하를 여럿 잃기도 했다.
그 이후로 화산파나 제갈세가의 이름만 들어도 화가 솟구치곤 했다.
“동맹을 받아들이겠다고 답신을 보내라.”
* * *
무림맹주 선출 과정은 본래 오래걸린다.
전 맹주가 퇴임할 시기에 맞춰 후임자에게 인수인계가 완료된 이후에야 무림맹주에 오를 수 있다.
또한 후임자 선출 역시 구파일방 및 오대세가의 장문인이나 가주, 무림맹 장로진과 군사가 회의 끝에 결정지으나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전쟁이 코앞인 데다 전 맹주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 하루라도 빨리 무림맹주를 뽑아야만 했다.
이 탓에 선출 과정은 대단히 빠르게 이루어졌다.
“다수결로 인해 무림맹주는 태극검을 추대하기로 결정됐습니다.”
“찬성하오.”
후보 중 일 순위라면 단연 상천육좌다.
검신은 어리기도 하고 지도력이 확실치 않아 미묘했다.
권동제의 경우엔 도리어 너무 나이가 많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또한 한 사람이라도 더 전선에 설사람이 필요해 부적합했다.
자연스레 태극검, 운광에게 돌아갔다.
“알았네. 부족하네만 맹주로서 소임을 다하겠네.”
무당파도 최초엔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현 상황에서 무림맹주가 되는 건 좋지 않았다.
무당 장로들 중 반이 거절하라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운광은,
“나 역시 과거의 망령이자 잔재이자 책임자일세.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하지 않겠나.”
사실, 운광은 누구보다 이번 사태에 당황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본래는 그 역시 남궁위무를 찾아가서 권동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거절 당했다.
“검신도 나도 이 일로 발이 묶여있네. 자네까지 나서게 된다면 만약의 사태를 누가 막겠는가.”
“끄응.”
오십 년 전, 운광도 신세대의 강자로 활약했다.
권동제와도 나름대로의 친분이 있었다.
누구보다 나서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남궁위무나 제갈상의 간곡한 요청에 아쉬워하면서 대기했었다.
그리고 계획과 더불어 무림공적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땐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했다.
‘편히 쉬게나, 검성이여. 그대의 의지, 내가 잇겠네.’
얼마 뒤, 태극검이 만장일치로 무림맹주에 오른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위임식은 생략됐다.
* * *
전쟁의 근본은 물자다.
무인이라 해도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무기도 필요하다.
특히 겨울이라면 추위를 버티기 위해서 따스한 모포나, 옷 등이 요구됐다.
무림맹과 사도천은 전쟁의 준비를 위해 금의상단 및 여러 상단을 통해서 각 지부에 물자를 요청했다.
물자의 운송을 위해선 단연 호위도 필요하다.
손이 부족해 표국이나 낭인 등 무사들의 고용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무림맹과 사도천이 맡았다.
째앵!
“크읏!”
개방의 절정 고수, 오귀성이 신음을 흘리며 물러났다.
“관호청! 이게 무슨 짓이냐!”
물자의 운송 도중 일이었다.
무림맹 소속의 절정 고수, 관호청이 미친 것인지 갑작스레 검을 휘둘러 오귀성을 기습했다.
검지를 잃긴 했지만, 천만다행으로 목숨은 구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관호청이 매서운 눈매로 답했다.
그의 몸에선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살의가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오귀성은 개방도답게 머리 회전이 빨랐다.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네 이놈! 무림맹을 배신하다니! 제정신이냐!”
“제정신?”
관호청이 코웃음을 쳤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다.
미친건 너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정파다.”
그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면서 그게 마냥 도가와 불가의 진리인 양 변명으로 지껄이지.”
“뭣들 하나! 저 배신자를 잡아라!”
호위대가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미, 미친……!”
“자네 뭐하는 건가!”
배신자는 관호청만이 아니었다.
오귀성만이 아니라, 개방도 전원이 호위대의 무림맹 소속 무사들에게 포위당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이 전원 중소문파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나, 천추성, 그리고, 웅권협의 의지를 잇는 자로서 뿌리까지 썩은 정파를 처단하도록 하겠다.”
푹! 푸욱!
“크악!”
“컥!”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암천의 아래, 그 어떠한 차별도 없으리라!”
관호청은 오귀성의 목을 베며 외쳤다.
“전쟁이다!”
“급보입니다!”
콰앙!
전령이 회의실 문을 거칠게 열며 들어왔다.
“보고하게나.”
회의 도중 난입할 정도면 보통 소식이 아니리라.
“하북, 산동, 하남, 안휘, 호북, 섬서, 감숙, 청해, 사천 그리고 운남까지! 물자 운송 중 습격!”
상층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또한 정파 영역 내에서 무림맹 및 중소 문파 중 이 할이 배신하여 암천회임을 선언했습니다!”
“……”
상층부가 술렁였다.
“드디어 시작된 건가……”
“허어…… 그렇게나 많이!”
“끄응!”
암천회가 전부터 첩자를 심어 두고, 정파인을 회유한 것은 주서천에게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흑영부에 깊숙이 관여한 당가의 소가주, 당명인은 암천회의 간부가 아니던가.
배신은 이상하지 않다.
다만 생각보다 수가 많았다.
“끝이 아닐 겁니다.”
제갈상이 그다지 희망치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사, 그게 무슨 소리요?”
“여러분께서도 알다시피 전쟁에서 중요한 건 물자와 정보입니다.
후자의 경우엔 이 정보 하나둘로 인해 형세가 뒤바뀌곤 하지요.
아직 의심받지 않은 이들을 심어 두고 이쪽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유출시킬 겁니다.”
“이 개놈들!”
팽군평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소?”
신인 무림맹주, 운광이 물었다.
“발등 위에 떨어진 불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다.”
“동감입니다. 물자 운송 호위 병력을 늘리고, 또한 배신에 대응하기 위해서 출신이 다양해야 합니다.”
혜노와 경인사태가 순서대로 의견을 꺼냈다.
“애초에 배신자 중 대부분은 중소문파 출신이 아니었습니까?”
우백이 불만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황견이 눈살을 찌푸렸다.
“출신이 확실한 이들에게 맡기자는 거요.”
중소 문파를 쳐내자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하하하, 대단하군!”
황견이 대놓고 이죽거리며 조소를 날렸다.
“이 사달이 일어난 것 자체가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 대우로 인한 것인데, 또 차별하자는 거요?”
“그 뜻이 아니외다. 황견 장로께서는 반응이 과하시구려.
만약의 사태를 배제하자는 말이오.”
“그게 그 말 아니오!”
황견이 사납게 으르릉거렸다.
“실망이군!”
황견과 사이가 좋지 않은 팽군평이 이번에는 같은 편을 들어 주었다.
“설사 출신이 안 좋다 하여도, 그들 역시 같은 무림맹 소속이며 협의를 위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믿지 못하겠다면, 누굴 믿자는 것이냐!”
팽군평이 흥분했는지 경어를 생략했다.
“맹가 놈이 실로 오랜만에 바른말을 하는군.”
황견은 팽군평의 말에 동의하듯 피식 웃었다.
“그만!”
쾅!
운광이 손바닥으로 책상 위를 내리쳐 정리했다.
“얼마 전만 해도 분열을 앞두고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또 이렇게 싸우자면 어쩌자는 거요!
그분의 희생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생각이요?”
“……”
당장이라도 불똥이 튀길 분위기였으나, 운광의 말에 깨끗이 사라졌다.
세 사람 다 입을 꾹 다물었다.
운광은 한숨을 푹 내쉬곤 군사에게 말을걸었다.
“군사의 의견을 듣고 싶소.”
“황견 장로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우백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고, 황견은 보란 듯이 웃었다.
그래도 대놓고 도발을 걸진 않았다.
“암천회는 사람의 마음에 교묘하게 침투해 약한 부분을 이용하고, 속이는 데 능숙합니다.
공작 및 선동은 그들의 특기 분야이니, 만약 호위인원이 특정한 출신으로 편향된다면…… 그 결과는 좋지 못하겠지요.”
“그러면 군사께선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경인사태 장로님 말씀대로 배신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출신으로 배치하여 물자를 지켜야 할 겁니다.”
“나무아미 타불 군사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혜노가 염주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다른 장로진도 무언으로 긍정했다.
“그나저나 줄어든 전력부터 어떻게 해야겠군요.
북해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떤지요.”
경인사태가 제안했다.
“과연! 그걸 생각 못 했군!”
“북해빙궁!”
북해빙궁(北海氷宮).
새외 무림 중 북측에는 북해란 곳이 있다.
여름인 남해와는 다르게 사계절 내내 겨울밖에 존재하지 않아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척박한 땅이다.
이 척박한 땅에도 여러 문파가 있으나 그중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게 바로 북해빙궁이었다.
“북해궁주께서 도와주신다면 결과는 바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북해빙궁의 궁주가 바로 상천육좌 중 일인이자 홍일점인 북해궁주다.
“북해빙궁의 저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북해빙궁의 무위는 옛적부터 유명했다.
일반적인 겨울이 아니라, 조금만 바깥에 있어도 금세 얼어 죽는 북해에서 살아남으려면 기본적으로 강인해야 한다.
무공이 필수라 무인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 할 정도다.
이렇다 보니 북해인은 구 할 이상이 무림인이며, 음한지기가 충만한 북해에 있어 기본적으로 수련의 속도나 내공 또한 심후하였다.
북해에서 살아가는 것조차 힘든 일인지라 일반 무사조차도 이류, 아니 거의 일류의 무인들이었다.
“북해빙궁은 과거에 중원을 침공했던 사례가 있지 않소? 그러다가 뒤통수를 치면 어찌하오.”
“동의하오.”
북해가 워낙 척박하다 보니, 북해빙궁을 비롯한 북해인들이 비옥한 중원의 대지를 노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북해의 패배로 끝났다.
빙공(氷功)을 수련한 입장에서 중원의 따뜻한 기후가 도리어 불리한 환경으로 적용된 탓이었다.
음한지기가 부족해 회복도 느려지고, 기후 변화에 익숙하지 못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긴 탓이었다.
그 후 북해빙궁은 후퇴하여 중원과 약간의 교류만 한 채 문을 닫고 살았다.
다만 그 무위는 여전히 위명을 떨쳐 세대가 달라져도, 북해제일고수 북해궁주는 상천에 이름을 올렸다.
“마침 그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잘됐군요.
그렇지 않아도 전에 서신을 보내 의사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됐소?”
“거절당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내린 폭설 탓에 식량난으로 문제라 하더군요.”
북해의 날씨는 그저 춥다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심하면 일 년 내내 멈추지 않고 눈보라 폭풍이 몰아칠 정도로 이상기후가 발생한다.
이럴 경우 동사자(凍死者)는 물론이고 아사자(峨死者)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나오게 된다.
암천회고 중원이고 간에 지금 당장 굶어 죽는 문제에 처해 있으니 다른 곳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식량을 대가로 고수들을 빌리는 건 어떻소?”
“맹가야, 머리 좀 굴려 봐라. 우리에게 그런 여유가 어디 있냐?”
황견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전쟁을 앞둔 무림맹 입장에선 그럴 여유가 없다.
종전 후도 마찬가지다.
자고로 전쟁에서 남는 것이란 없다.
전쟁은 파괴할 뿐이다.
사람도 식량도 환경도 부순다.
승패란 작은 문제일 뿐이다.
“금의상단을 비롯해 구파일방의 속가제자 출신이나 무림맹 출신이었던 상단에서 지원을 해 준 덕분에 시작점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만, 북해빙궁을 챙겨 줄 정도는 되지 않습니다.”
제갈상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일축했다.
만약, 이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정혈대전이나 정마대전 후 겪은 피해를 보충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武)와 금(金)이 깊이 엮이는 걸 싫어하는 무인들이었으나, 모순적이게도 누구보다 더 돈이 필요했다.
또한 그 돈이 목숨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전력의 이할이나 잃은 채로 싸워야 한다는 거요?”
황견이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
“이 할 ‘밖에'입니다.”
무림맹의 군사가 장로의 말을 지적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결과 역시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시작부터 불리하다, 질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싸우기도 전에 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지룡, 아니 천군사의 말에 황견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희망은 좋은 소식이 나쁜 소식보다 우세한지 계산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란, 그저 행동하겠다는 선택이지요.”
제갈상은 진지하면서도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그러나 계산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보다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 그리고 희생자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저희 군사진이 밤낮 구분 없이 힘내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며, 산전수전 다 겪은 강호의 어르신들보다 실력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조금은 믿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 군사님께서 소승을 부끄럽게 만드는 구려.”
혜노가 합장하며 경의의 눈빛을 보냈다.
“예상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제갈상은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암천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림맹 및 사도천, 아니 정사 연합을 간교한 말로 흔들고 배신자를 통해 물자를 약탈해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혼란을 틈타 여러 가지 방안으로 공격해 오겠지요.”
제갈상은 침하나 튀기지 않고, 듣기 좋은 미성으로 설명하면서 접은 부채를 꺼내 한곳을 가리켰다.
“그중에서 하나를 꼽자면 바로 이곳, 귀주(貴州)입니다.”
* * *
중원의 여러 지역 중,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을 꼽으라 하면 단연 백이면 백 귀주를 꼽을 것이다.
예로부터 무림맹과 사도천, 아니 정파와 사파의 세력권이 검으로 가른 듯이 균등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분쟁이 벌어졌으며, 심지어 휴전이냐 종전 중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분쟁 중의 분쟁 지역이며, 오랫동안 쌓여 온 싸움의 역사는 시간이 갈수록 안 좋아졌다.
복수의 소용돌이이자 연쇄점이라 불릴 정도다.
이로 인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등 명문 정파는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무인들을 정기적으로 보내기도 했다.
천하제일상단, 금의상단도 귀주에 무림맹의 전쟁 상단으로 계약해 돈을 쓸어 담기도 하였다.
“어이! 저기, 위선자 새끼들이 지나가는데?”
“뭐?”
“킁킁,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그 잘난 신념이 뿌리까지 썩어 버린 냄새 잖아!”
“이 비열한 놈들이 어디 뚫린 입이라고……!”
정사 연합 결성 뒤, 대부분의 분쟁은 사라졌다.
만약의 상황을 위해서 서로 견제하긴 했으나 그래도 대놓고 싸우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무림맹주와 사도천주는 삼안신투의 보고 때처럼 협약을 맺고 싸움이나 도발을 금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나 이 귀주에서만큼은 그리 지켜지진 못했다.
“하아……”
무림맹 개양 지부장, 신도균의 입에선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싸우지 말라고 해도…… 가당찮은 소리지……”
귀주에서 서로 간의 원한은 상당히 깊다.
여러 사건으로 전 무림이 떠들썩했음에도 귀주는 언제나 같았다.
싸움뿐이었다.
한 사람이 누군가 죽이면, 세 사람의 원수가 생긴다.
제자나 사형제 혹은 전우다.
세 사람이 죽으면 거기서 또 원수가 발생한다.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복수와 원한의 연쇄였다.
하루 멀다 하고 치고 받고 피에 미쳐 서로를 죽이다 보니 은원 관계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았다.
다행히 무림맹주와 사도천주가 명령 거부 시의 불이익을 명시해 살인은 잠시 동안 멈추긴 했지만, 도발은 여전하며 폭력 다툼은 간간이 벌어졌다.
“아니, 남들은 귀주에서 버티다가 공을 세우면 안휘로 근무지가 바뀐다더니만…… 내 신세야!”
신도균은 다시 한번 푸념 어린 한숨을 토해 냈다.
자신은 무려 십 년 넘도록 귀주에서 근무지가 바뀌지 않았다.
무능해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몇 년 전부터 갑작스레 소란스럽기 시작하더니만, 암천회라는 놈들이 나타나선 중원을 헤집었다.
그 탓에 무림맹 역시 여러모로 바빠지면서 승진이나 인사이동이 연기됐고, 얼마 전에 겨우 들어온 후임자가 인수인계 도중 전장에 나갔다가 눈먼 칼에 맞고 죽었다.
그 후 적당한 후임자가 없고, 무림맹도 어지러워 결국 유능하고 경험 많은 그가 아직까지 남아 이 고생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 병이라도 걸린 척 해볼까 하려다가, 이후 귀주가 걱정되어 그만두기로 했다.
“으윽, 전임자께서 귀주에선 잘하지도 못하지도 말고 딱 중간만 하면 된다고 했었는데……”
위가 슬슬 아파 왔다.
출세에 혈안이 되어 너무 열심히 한 게 문제였다.
그때였다.
“지부장님. 무림맹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나도 무림맹 소속이다, 이 멍청한 놈아. 어디 지부?”
“본부입니다.”
“본부?”
위약을 찾던 신도균이 눈을 번쩍 뜨며 일어섰다.
‘드디어! 드디어 나에게도 후임이!’
신도균은 기대 가득한 목소리로 수하를 들볶았다.
“어디 있어? 빨리 데려와!”
“예, 귀빈실에서 대기 중……”
“그냥 데려올 것이지 왜…… 아니, 됐다. 내가 직접 가마.”
신도균은 무어라 하려는 수하를 지나쳐 문을 열고 귀빈실로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입가에는 절로 웃음이 맺혔다.
귀빈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청년이 보였다.
‘으응? 꽤나 젊잖아?’
신도균은 청년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어떻게 봐도 약관 밖에 되지 않는 젊은이였다.
혹시 출신이나 인맥으로 들어온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떤 미친놈이 인맥으로 귀주 지부에 와?’
귀주의 악명은 자자하다.
상식적으로 출신이나 인맥을 동원해서 올 곳이 되지 못한다.
신도균은 잡념을 지워 내곤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무림맹 본부에서 왔다고? 어서 오게!
개양 지부장, 아니 귀주 지부장 신도균이라 하네.”
귀주에 신도균만큼 경험 많고 공을 많이 세운 무림맹 지부장은 이제 없다.
바로 얼마 전에 귀주의 전체 통솔을 위임 받았다.
당연하지만 신도균 본인은 반기지 않았다.
귀주를 일임하게 되면 또 오랫동안 이곳에서 썩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청년이 일어나서 포권으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신도균은 혹시라도 이 청년이 귀주의 상황을 봤다가 도망칠까 봐 걱정되어 얼른 그와 어깨동무를 했다.
“자자, 귀주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이리 오게나.
내 ‘귀주 지부장’ 자리에 안내해 주겠네.
아니, 이제 자네가 앉을 자리가 아닌가? 신임 귀주지부장!”
신도균은 일부러 권력욕을 자극하며 유혹했다.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전 후임자로서 방문한 것이 아닙니다.”
“하하! 또 이상한 소리를!”
신도균은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끌었다.
‘이 지역이 어떤지 벌써 보고 온 건가? 이대로 놓칠 수는 없지!’
십 년 넘게 근무지를 떠나지 못한 책임자의 원한이었다.
“그보다, 자네 이름이 뭔가?”
“주서천입니다.”
흠칫!
“……주서천?”
신도균이 발걸음을 멈췄다.
“흠…… 자네 검신과 이름이 같군그래.”
“본인입니다.”
어깨에 올라간 손이 슬쩍 떨어졌다.
신도균은 머리를 삐걱삐걱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신도균은 검신 주서천을 과거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어린 시절, 강호 초출 때의 일이다.
당시 십사검협 구풍이 화산파의 연화각 출신 제자들의 실전 경험을 위해서 데려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가끔씩 심심하면 검신과 십 년 동안 알고 지냈다면서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오랜만입니다, 개양 지부장님. 아니, 귀주 지부장님.”
“으아아악!”
신도균이 괴성을 내지르면서 나가떨어졌다.
“거, 거, 거, 검신!”
귀주 지부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방금 전에 검신에게 ‘자네'라거나 멋대로 어깨를 두드리면서 힘으로 이끈 게 생각났다.
“지부장님! 큰일입니다!”
복도 끝에서 수하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나도 알아! 왜 검신께서 오신 걸 말 안 했어!”
귀주 지부장이 눈물을 쏟을 것처럼답했다.
“예? 다 듣지도 않고 가셔서 아시는 줄만 알았…… 아니, 그보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내 신세보다 더 큰 문제가 뭐가 있는데!”
“귀주에서 문제라 하면 분쟁 외에 또 뭐가 있겠습니까!”
수하가 다급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뭐?”
신도균의 얼굴이 굳었다.
“늦었군요.”
주서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