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무림맹이 분열하게 되는 건 일부가 아닌 상층부 전체가 흑영부를 방조한 것 때문이지?”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오십 년 전의 무림맹이 분열하지 않은 건, 상층부 일부의 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일부가 아니라 거진 전원이 흑영부를 묵인한 탓에 위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만약 이 죄를 한 사람이 책임지게 만들면 어떻게 되나?”
“그게 무슨 말씀……”
제갈상은 말하려다 말고 얼굴을 굳혔다.
무림맹주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군사, 질문에만 대답하시오. 가능한 일이오?”
남궁위무가 무림맹주로서 물었다.
그 물음에 제갈상은 침묵했다가 답했다.
“……가능합니다.”
“맹주님.”
주서천도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남궁위무를 쳐다봤다.
“두 사람 다, 거짓말이나 연기에는 능숙하오?”
남궁위무가 인자하게 웃으며 물었다.
희생이란 결코 강요할 수 없다.
아무리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무고한 소수를 강제적으로 희생시킬 수 없다.
괜히 흑영부의 소관이 당가에게 집중된 게 아니다.
정도를 걷는 사람으로서 하고 싶지 않아서다.
잘못된 걸 알고 있으니까.
“죄인, 아니! 악인 남궁위무는 과거의 영광과 권세를 방패 삼아 사리사욕을 채워 왔소!”
대의라는 명분하에 악행은 정당화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잘못된 것은 잘못된 거지.
그에 따른 합당한 책임과 벌을 받아야 하네.”
“그게 어떠한 의미인지 알고 계십니까?
맹주님께선 향후 정파 역사상 최악의 치부이자 흑역사가 될 것입니다. 대대손손 비난을 받을 것이며, 남궁세가의 치부로 일컬어지겠지요.
아니, 비난과 치부라는 말은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부디 이 일을 내 손주가 맡아서 했으면 좋겠네. 이 늙은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손주를 비롯해 가족들에겐 아무런 죄도 없지 않은가.
물론 그리해도 향후 남궁세가는 욕을 먹겠지만……그래도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다네.”
“맹주님……”
“어떤 죄건 상관없네.
흑영부의 죄를 나에게 옮기게나. 부탁하겠네, 군사.
검신이 권동제 선배를 설득하러 간 동안 이 일을 맡아서 해 줄 사람은 그대밖에 없다네.”
“무림맹주…… 아니, 무림공적 남궁위무!”
남궁선유가 타오를 듯한 눈으로 정면을 쳐다봤다.
창룡의 검은 조부를 향했다.
“처벌을 받으라!”
눈이 내리는 겨울.
무림맹주 남궁위무는 무림공적이 됐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경우와 대면한다.
사람은 이와 같은 상황과 마주할 경우, 체념하고 타협점을 찾아서 포기해 차선책을 찾는다.
꿈과 열정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현실을 알게 되면서 어른이 된다.
남궁위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영부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오십 년 전,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무림맹주로 추대된 남궁위무는 스스로 없앤 어둠을 만들어 냈다.
결과적으로 정파의 어둠, 흑영부는 다양한 활약으로 보다 많은 이들을 구하고 평화를 유지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궁위무는 과거에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던 기성세대와 자신이 닮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의식적으로 전대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는 생각에 무심코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래, 내 차례가 됐을 뿐이구나.’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
무림맹주로서 책임을 질 때가 온 것이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무림맹이 분열하도록 둘 수는 없다. 어떻게든 막아서야 한다.’
여러 방법을 강구해 봤다.
천재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모아서 머리를 굴려 봤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고심한 끝에 이러한 결론을 냈다.
‘이것이 최선이다.’
제갈상은 최악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최악이자 최선이다.
남궁위무 역시 대악인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사후의 명예를 꿈꾼다.
살아 있다는 증거를 원한다.
악인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영웅이나 위인들처럼 영웅이 되고 싶었고, 가문의 자랑으로 새겨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속세에 미련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명예욕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없었다면 진작 신선이 됐으리라.
‘내 욕심 탓에 수많은 희생이 일어나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자신이 최악의 폭군이자 위선자가 되어 증오와 분노, 악의 등의 죄를 짊어지고 끝낸다.
그리하면 상층부 역시 가해자나 방관자가 아닌 희생자가 되어 용서받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으니까.
“처벌을 받으라!”
문 바깥의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자랑스러운 손주의 목소리에 웃음을 그려 냈다가 지웠다.
“군사.”
“뭔가.”
현 군사가 아니었다.
전 군사, 제갈중호였다.
“그동안 골치 아픈 맹주를 옆에서 도와주느라 고생 많았네.”
“알고 있으면 됐네. 이 친구야.”
제갈중호는 피식하고 웃었다.
어딘가 모르게 복잡하면서도 시원한 웃음이었다.
“잘 가게나, 벗이여.”
“그러지.”
문을 열고 발을 내디딘 순간, 남궁위무는 위선이자 악인이 됐다.
고요한 적막감 속에서 눈이 내린다.
무림맹 본부 내부, 무림인들의 이목은 한곳에 집중됐다.
문을 열고 나온 맹주, 남궁위무였다.
남궁위무는 얼음처럼 차디찬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어리석도다!”
그 목소리는 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냐 남궁위무, 무림맹주로서 정파를 위해 한 몸 바쳤거늘 이게 무슨 짓이더냐!”
“헛소리!”
남궁선유가 나서서 외쳤다.
“나의 조부, 남궁위무여!
그대는 이제 무림맹주도 전대 가주도 아니다!
무림공적이자 악인이다!”
마음을 강하게 먹는다.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의 조부는 원수다.
타락하고 부패한 악인이다.
“그 말대로다.”
권동제가 남궁선유의 옆에 서며 말했다.
“무림공적, 남궁위무.
그대의 죄질은 전대의 위선자들보다 그 업이 깊다.”
보름 전, 주서천의 내기가 떠올랐다.
‘어르신께서 패하실 경우, 부디 형벌을 맹주님 한 사람만으로 끝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권동제는 일평생을 위선과 부정부패의 척결에 바쳤다.
심상과 연결된 만큼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과거의 영광을 방패 삼아 사람들을 기만하고, 권력에 취해 제멋대로 날뛰며 사리사욕을 채웠다.”
마음을 바꾸게 만드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럴 수 없으니 차선으로 피해를 최소화하기로 했다.
“또한, 차마 입에 다물 수도 없는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이를 은폐했으며, 심지어 그 죄조차 장로진 및 상층부에 덮어 씌우려 했다.”
결과적으로 설득은 성공적이었다.
주서천은 목숨을 다해 내기에서 이겼다.
“검성, 아니 검악(劍惡) 남궁위무여!”
상천칠좌에 걸맞은 기운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 죄, 목숨으로 갚아도 부족할지어다!”
배우가 모였다.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구나!”
뻔한 대사가 정해진 연극일 뿐인 이야기.
“말이 통하지 않으니 힘으로 해결해야 겠군!”
과거의 영웅이 타락하여 부패한 권력자가 된다.
“나, 무림맹주 남궁위무!
누가 올바르고 나쁜 것인지 여기에서 증명해 보이겠다!”
남궁위무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눈을 빛냈다.
검악에게서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졌다.
정문 끝자락에 몰려든 군중은 그 기운에 압도되어, 입을 열기는커녕 몸도 꼼짝하지 못했다.
‘아뿔사!’
천선성, 혁상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위압감에 몸이 후들거렸지만, 무서워할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두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군중 속에 숨어든 바람잡이들에게 눈빛을 보내며 명령을 하달하려던 찰나였다.
“목숨이 아깝다면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혁상은 숨을 멈췄다.
‘모사미봉!’
눈부실 정도로의 아름다움,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무심한 표정의 제갈수란이었다.
“소령.”
“네.”
혁상은 소름이 끼쳤다.
제갈수란의 부름에 머리 뒤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면에서 시선을 떨어뜨린 사람들을 잡아 두고 계세요.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기절시켜도 좋아요.”
“존명.”
군중 속에 암천회의 첩자가 숨어있을 건 예상했다.
혹시 몰라 유령들을 통해 감시하던 중이었다.
“크윽……”
수를 읽힌 혁상이 침음을 흘렸다.
감시가 있다는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움직일 수 없다.’
척살 대상 중 상위권에 이름이 새겨진 모사미봉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소령이라는 이름의 고수가 물러난 척하면서 남아 있을 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굳어 버렸다.
정파의 중심이자 주요 인사가 한 자리에 모여 있다 보니 널린 게 고수였다.
‘이 소식이 천기님께 전해지긴 하겠지만……’
천기는 혹시 몰라 외부에 따로 감시자를 배치시켰다.
지금쯤 전령이 보고를 위해 뛰쳐 나갔겠지만, 이번 일이 알려질 때라면 상황은 전부 끝난 이후이리라.
아무리 연기라 하지만, 목숨을 건 싸움을 적당히 할 수는 없었다.
“하아아압!”
생사결의 시작을 알린 건 정백이었다.
정백은 지면을 튕겨 나가듯 뛰쳐나갔다.
보법이라 부르기도 힘든 동작이었으나, 순수한 만큼 속도나 힘이나 보통이 사람의 한계를 넘어섰다.
심상구현 ‘이상’의 장점은 화려함은 없으나 기초적인 능력이 하나같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점이었다.
화경의 고수들조차 눈으로 겨우 좇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일반인에겐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과연, 선배!’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하수들의 경우다.
동수인 현경의 절대고수 남궁위무에겐 움직임이 보였다.
“후웁!”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검을 휘둘렀다.
쐐액!
좌측 하단에서부터 우측 상단으로 대각선을 긋는다.
검성이라는 이름답게 무시무시한 베기였다.
하나 정녕 놀라운 건 위력도 속도도 아니다.
정백이 남궁위무에게 도달하기도 전이었다.
대기를 가르며 매서운 파공음을 토해 낸 검격이 부딪쳐 왔다.
“……“
정백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도중에 방향을 꺾었다.
보통이라면 갑작스러운 운기의 전환에 내상을 입겠지만, 그에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발걸음을 바꾸고 몸을 반 바퀴 회전해 피한다.
몸을 가르려던 검이 지면을 훑고 지나갔다.
퓨붓!
아무것도 없던 땅에 기다란 검상이 남았다.
족히 삼 척에 이르는 길이었다.
“창궁무애검법( 蒼窟無珪劍法)……”
남궁위무의 일검을 피한 정백이 중얼거렸다.
남궁세가의 절기이자 가주로 내정된 후계에게만 허락된 창궁무애검법은 이름 그대로의 특징을 지녔다.
광활하게 펼쳐진 창궁처럼 검인데도 창보다 사정권이 길며, 공력의 정도가 깨끗하며 거대하다.
즉 소림사의 백보신권처럼 먼 거리에서도 적을 벨 수 있으며, 기의 순도가 높아 내공의 대결에서도 유리했다.
“하앗!”
휘리릭!
남궁위무가 제자리에서 검을 내질렀다.
약 일 장이나 되는 거리의 바깥임에도 정백의 몸을 찔렀다.
퓨뷰뷰븃!
연달아 공기가 터지면서 대기에 구멍이 났다.
정백은 매섭게 뜬 눈으로 검을 보며 피해 냈다.
‘심상구현!’
창궁무애검법의 사거리는 사실 이 정도까지 멀지 않다.
정말로 길어봤자 일 척 정도가 한계였다.
그러나 심상구현 ‘창궁’은 시야에만 들어오면 어떤 거리건 별로 상관없게 만들어 주었다.
앞이건 옆이건 상관없다.
눈에 보이면 어떤 부위건 멀리서부터 베거나 찌를 수 있었다.
“크하압!”
하지만 정백도 만만치 않았다.
무형으로 이루어진 검강이 다방면에서 공격해 오는 것은 무시무시했으나, 보다 압도적인 육체 능력으로 피하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호신강기로 막아 냈다.
보통이라면 체력이나 내력이 떨어져서 금세 지치겠으나, 대자연의 기를 얼마든지 운용할 수 있으니 문제없었다.
“남궁위무우우!”
정백이 남궁위무에게 달려든다.
“ 정배애애애액!”
남궁위무도 정백에게 달려들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검과 주먹이 부딪쳤다.
쿠아앙!
무형이 이윽고 유형으로 바뀐다.
검풍과 권풍이 서로 부딪치면서 대기를 찢어 발기고, 폭풍이 됐다.
푸르스름한 빛과 새하얀 빛이 번쩍이면서 시야를 가렸다.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건드렸다.
쿠웅!
지면이 원형으로 움푹 가라앉았다.
힘이 어찌나 강한지 발목까지 파였다.
바닥은 거미줄 등껍질처럼 금이 갔다.
매일매일 무사들이 깨끗하게 정돈하는 바닥이 엉망진창이 됐다.
주서천은 몰아치려던 폭풍을 자하진기로 바로 잡은 뒤, 사람들에게 오지 않도록 분산시켰다.
그 외의 고수들도 땀을 흘리며 외부의 기운을 차단하면서도, 절대고수의 대결에 넋을 잃고 바라봤다.
“크으으으읏!”
정백과 남궁위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검과 주먹을 맞댄 채, 시선을 교차했다.
‘언제나, 언제나…… 그대로이십니다.’
남궁위무는 정백과 마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오십 년 전, 아니 그 이전처럼……’
겨울의 눈처럼 새하얀 사람.
세월이 흘러도 때 묻지 않은 고결한 무인.
남궁위무는 정백을 존경했다.
아니, 지금도 존경하고 있다.
‘언젠가…… 제대로, 싸워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야, 전 공적이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이라는 허황된 망상에 갇혀, 철이 들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부터는 그런 그가 부러웠다.
어떠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아이처럼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정을 보이는 그가 대단했다.
외부의 압력에도 변하지 않았다.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정도라는 의지를 관철하고 이어 왔다.
누구보다 남을 위해서 살아왔으며, 약자를 도왔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이때입니다!”
제갈상이 이를 깨물곤 외쳤다.
“극악무도한 무림공적의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습니다!
더 큰 피해가 나기 전에 그를 죽이십시오!”
남궁위무에게 있어서 정백은 영웅이었다.
“하아아아압!”
주서천이 제갈상의 명에 몸을 날렸다.
‘무림맹주……’
입술을 질끈 깨문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검을 꽉 쥐었다.
잘못됐다.
이런 게 최선이라는 것이 최악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스스로의 무능함에 구역질이 치솟았다.
전생에서 검성, 남궁위무는 영웅으로 남았다.
결코 악인으로 생을 마감할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흑영부를 탄생시키고, 올바르지 못한 악행을 저질렀으나 이런 최후를 맞이할 사람이 아니었다.
푸욱!
“커허억!”
남궁위무는 흉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피를 울컥 토했다.
새하얀 수염이 붉은빛으로 물든다.
“남궁세가의 잘못, 소가주로서 끝을 맺겠다!”
남궁선유는 머리를 숙였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몸을 던졌다.
상상 이상의 기운이 몸을 엄습해왔다.
옷것이 베이며 피부 위로 혈선이 그어졌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홑날리면서 흩어졌다.
찢어지고 베이는 고통을 무시한 채, 측면에서부터 파고들어 조부의 옆구리에 검을 꽂아 넣었다.
푸우욱!
“……커흐흑!”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통증에 피를 다시 토했다.
굳건하게 세운 다리의 힘이 풀렸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내장이 찢어지는 고통에 침음이 절로 나왔다.
“끅……”
희미하게,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남궁위무는 동공을 옆으로 살짝 돌렸다.
머리를 숙인 채, 검을 꼭 쥐고 몸을 떠는 손주가 보였다.
‘울지 말거라……’
위로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보다 완벽한 행세를 위해.
무림을 위해.
철저하게 연기한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선유야.’
남궁세가는 앞으로 가시밭길을 걸을 것이다.
소림사 역시 과거에 혈승을 배출했을 당시에 수많은 비난을 받았고, 명예는 크게 실추됐었다.
“끝이다…… 남궁…… 위무!”
특히 남궁선유는 마무리를 지었음에도 최악의 위선자의 손주라는 말이 꼬리처럼 붙어 다닐 것이다.
흑영부에 희생된 이들이나 그 유가족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 비난받으며, 고통을 겪을 게 분명하다.
“죽어라! 최악(最惡)이여!”
손주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다가올 후폭풍이 어떠할지 잘 알고 있음에도, 받아들였다.
영웅은 정백만이 아니었다.
‘녀석, 성실해서…… 여자나 제대로 사귈 수 있을는지……’
손주, 창룡 남궁선유 또한 영웅이었다.
‘아아……’
의식이 차츰 꺼져 간다.
시야도 흐릿해졌다.
떨어지려던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이렇게나…… 많은…… 희망이……’
무림맹은, 정파는 위기를 겪었다.
앞으로의 미래 역시 험난할 것이다.
하나 결코 그 끝은 어둡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남궁선유나 주서천만이 아니다.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신세대 역시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입가에 맺히려던 웃음을 참고 고개를 들었다.
눈 탓에 그런지 먹구름이 많이 보였다.
그런데도 푸른 하늘을 보았다.
‘창궁…… 이로다!’
무림공적, 남궁위무.
위선자로서, 그리고 악인으로서 숨을 거두다.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무림에 몰아쳤다.
정파 무림은 흑영부를 비롯하여 무림맹 상층부가 저지른 위선과 부패로 인해 불신이 극을 치달았다.
이를 두고 정말이냐, 어떻게 된 것이냐면서 추궁과 비난을 받았으며 시위 역시 연달아 터졌다.
“설마하니 사문에서도 묵인했던 겁니까?”
“쉿! 안 그래도 분위기 험악하다고! 입 조심해!”
“입 조심? 사형,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불의를 못 본 척하다니요.
아무리 존경받는 전 세대라 하여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겁니다.
이래서야……이래서야 정말로 사파인들이 비꼬는 것처럼 위선자들이 아닙니까?”
구성원인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직전제자는 물론이고 속가제자, 그밖의 중소문파도 격렬한 반응을 보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끝내 위선과 부패의 처형의 상징인 권동제가 복귀하면서 소문은 사실로 확정됐고, 험악한 분위기는 최고조로 올랐다.
한 달 뒤에 방문해 처단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무림맹은 그야말로 분열 직전이었다.
그러나,
“이보게나, 큰일이네.”
“자네 돈 주머니가?”
“그것도 큰일이기도 하네만……아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닐세. 자네, 남궁위무에 대해 들었나?”
“남궁위무? 무림맹주가 왜?”
“그 무림맹주가 글쎄……”
“그게 지금 정말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군.”
한 달 뒤, 최근의 악행 전부 남궁위무의 소행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쉽게 받아들이진 못했다.
무림맹주 남궁위무는 전 세대의 영웅이며, 수많은 무인들에게 존경받는 무인이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에겐 영웅이며, 위대한 지도자였던 만큼 굳은 신뢰감이 존재했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일세.
지금 무림맹 전 지부에서 공표까지 내걸었다네.
군사, 지룡 제갈상 및 장로진의 이름으로 말이야.”
“혹시 무림맹 상층부, 그놈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런 건……”
“그건 아닐세. 내 친척이 무림맹본부 소속 무사인데, 그날 있었던 일을 직접 목격했다고 그러더군.”
“허어……”
강호의 근거 없는 소문처럼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너무 정확했다.
안휘, 합비의 본부부터 시작해서 각 지부에서 성명발표가 있었다.
“남궁위무는 그간 권세를 이용하여……”
각 지부만이 아니다.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발표가 있었다.
그중에는 현 무림의 영웅이자 상천칠좌, 아니, 상천육좌의 일인인 검신 주서천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성세대만이 아니라 신세대까지 포함해 남궁위무의 악행을 줄줄이 읊고 공표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남궁위무께서 그런……”
물론,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다 보니 전부 받아들이기에는 힘들었다.
그중에선 끝까지 믿지 않는 이도 있었다.
검성은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벌인 행동이라며 비난했다.
“이보게, 사람은 변하기 마련일세.
그 깨끗했던 남궁위무도 절대 권력을 맛보고 타락해버린 거지.”
“그래. 이제 좀 받아들이게나.
사람이 완전무결하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신선이나 부처지.”
사람은 선행보다 악행에 더 민감하다.
“먹고 살기 힘든 것도 다 남궁위무 그 개자식이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그런 거네?”
“이 똥물에 찢어 죽일 놈!”
특히나 고결하고 순수한 사람의 타락에 열광했다.
사도천은 무림맹의 정세에 그럴 줄 알았다며 속으로 비웃었고, 무림맹은 원인이 된 남궁위무를 욕했다.
“설마 남궁세가도 한통속인 거 아니야?”
“아마 그건 아닌 듯하네.
듣자하니 현장에서 무림맹 대표로서 남궁위무를 비난하고, 최후에는 소가주 창룡이 직접 나서서 목숨을 끊은 모양이야.”
“창룡이 직접? 그 정도로 무공이 강하던가?”
“권동제와 검신을 도와서 죽인 모양이야.
전에 검신도 검선을 도와 혈마를 죽이지 않았나?”
“과연, 그렇군.”
“아직 지켜봐야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궁세가는 사실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피해자 유족들을 초청해 사죄하고 피해보상 한다고 하니 아무래도 정말로 어쩔 수 없이 이용당한 모양이야.”
“흠……”
결과만 말하자면,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무림맹 제갈상의 지휘 아래 정보조직인 개방, 하오문이 전력으로 나서서 여론을 조작했다.
불신과 증오, 분노와 악은 남궁위무에게로 향했다.
암천회.
콰아앙!
천기가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책상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