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간다! 일권(一拳)이다!”
긴장된 순간, 정백이 외쳤다.
쿠와아앙-!
외침이 끝나자마자 굉음이 터졌다.
일 장 바깥의 지면이 폭발과 함께 위로 크게 솟구쳤다.
얼마 전 남해의 물기둥을 보듯, 자갈이 뒤섞인 먼지구름이 폭포처럼 솟구치면서 신호를 울렸다.
“커흡!”
주서천은 무시무시한 충격에 몸서리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정신을 차리고 상황 파악부터 나섰다.
흉부를 막아선 검을 맞댄 주먹과 이어진 정백이 보였다.
‘언제?’
분명 정백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인식조차하지 못하고 공격을 허용했다.
위험을 느낀 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더라면, 흉부에 주먹이 꽂혔으리라.
부웅.
생각할 시간 따위 없다.
파악하려할 때가 아니다.
일권을 실패한 정백은 제자리에서 반 바퀴 회전하여 추진력 삼아, 다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부우웅.
상승의 무학의 묘리도, 어떠한 초식도 없다.
그저 발을 휘두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 일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각으로 정보를 읽어 내고, 뇌에 전달하여 그에 따른 반응을 해야 하는데 도중에 얼어 버린 것처럼 굳었다.
‘호신강기!’
검으로 막으려 했으나 늦었다.
피하는 것을 단념하고 대해와 같은 내력을 끌어 올려 막을 만들어 냈다.
숨을 멈춘 채 이어질 충격에 대비한 순간 주서천은 압도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이건……!’
콰아아아아.
무술 같은 게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재해였다.
파도 혹은 산사태.
사람의 힘으로어떻게 할 수 없는 대자연의 위엄이 육신과 영혼을 덮쳐 왔다.
“커허억!”
콰앙!
직격이었다.
형태 없는 막은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충격의 여파가 파도가 되어 육신을 훑는다.
뇌를 포함해 머리가 흔들리고, 시야가 뒤집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최초로 인지한건 정백과 멀어지면서 무서운 속도로 지면에 처박히는 자신이었다.
쿠콰콰광!
재차 굉음이 연달아 터지며 모래구름이 피었다.
빼곡하게 늘어진 나무가 반쯤 꺾이거나 부서지면서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산사태였다.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사람을 넘어선 위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푸드득!
근처도 아닌, 이 인근 산의 새 떼가 난리에 깜짝 놀라며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머리 위가 까맣게 물드는 광경은 꽤나 장관이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구경할 때가 아니었다.
스으으.
정리하지 않은 잡초밭처럼 엉망이 된 산 길, 그 끝에 모래의 안개가 걷히며 주서천이 걸어 나왔다.
“퉤!”
피 섞인 침을 내뱉으며 몸 상태를 확인해 본다.
옆구리가 욱신거려 확인하니 강렬한 통증이 일어났다.
보아하니 갈비 몇 개가 부러진 모양이다.
‘호신강기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것도 일반적인 강기가 아닌 무형의 강기다.
늦지 않았다.
분명 공격이 닿기 전 펼쳤다.
문제는 전혀 막지 못한 것이다.
아니, ‘무시’ 당했다.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심상구현?”
천마의 심상구현은 부수는 힘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력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
무심코 낸 목소리에 정백이 친절하게 답했다.
“만류귀종이라 하여, 모든 흐름은 결국 하나로 통일된다는 말, 알고 있는가?”
정백이 산책하듯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무학 또한 종류는 달라도 결국 정신과 육체를 단련하는 법으로서 부딪치거나 피하거나 막는 등의 움직임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원리를 파악하면 상승의 묘리니, 초식이니 하는 그런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아!’
그제야 최초의 자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무변정안권도, 속임수도 아니었다.
그저 무학이 지니는 기본적인 형태를 내려놓은 것이었다.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심검, 아니 심권(心拳)의 경지인가?’
심검이나 심권.
아울러, 심무경(心武境)이란 곧 마음 가는 대로 무학을 펼칠 수 있는 전설 상의 경지다.
법칙을 무시하고 심상을 구현하는 것은 그 일부에 불과하며 무공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아니, 다르다.’
주서천이 이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누구보다 형태를 중요시하는 분께서 그러한 경지를 이룩할 순 없지요.”
“날카로운 지적이로다.”
권동제는 누구보다 정도를 중요시하는 인간이다.
만약 형태에 얽매이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 반대로군요.”
그의 비밀을 대충이나마 예상할 수 있었다.
“사사로운 욕심이나 잘못된 생각 등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과 도덕적으로 완성된 올바름.”
궁극의 정도(正道).
“이상(理想).”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권동제라는 무인이, 정백이라는 인간 자체가 한데 묶여 ‘이상’ 이라는 개념이었다.
외관 역시 일반적인 반로환동이 아니었다.
이상이라는 심상구현에서 발현된 부가적인 효과였다.
주서천은 권동제의 심상을 깨닫고 아연실색했다.
“정녕 사람이십니까?”
“다들 그리 묻더군.”
권동제는 미쳤다.
누구보다 순수하게 미쳐 있다.
‘이상이라는 허황된 걸 심상으로 승화시켰다고?’
겉모습을 보아하니 정도를 고집한 건 어릴 적부터가 분명했다.
아이라면 한 번쯤 꿈꿀 희망이자 헛된 꿈. 세계 평화라는 꿈을 노년까지 이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건 신이거나 미친놈이다.
이상이라는 개념을 심상으로 구현시켰다는 건,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지켜 오며 매달렸다는 의미다.
권동제, 정백은 미쳤다.
광인이 틀림없다.
‘이런 사람이 정말로 있단 말인가?’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그럼, 다시 가겠다.”
이번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격이 날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스으으으.
“이건……”
산이 움직였다.
산의 일부가, 대자연이 사람의 의지에 꿈틀거렸다.
“대기의 기가……!”
기(氣)란, 만물에 존재한다.
생명체는 물론이고 길가에 널린 돌멩이에도 실려 있다.
물질이건 비물질이건 간에 세상을구성하는 것에는 기가 있으며, 이를 흔히들 대자연의 기라 부른다.
무림인은 대기를 포함한 대자연에 포함된 기를 특별한 호흡법으로 들이쉬고 단전에 축적시킨다.
하나 축적되는 대자연의 기는 극히 일부 중의 일부이며, 또한 이 과정 역시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의지만으로 대자연의 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심상이다!’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피부가 따끔따끔 했다.
산 또는 대자연의 일부가 모이기 시작했다.
수천에 이르는 기의 흐름이 선회하고 방향을 튼다.
대자연이 사람에 의해 움직였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기가 소용돌이치며 오른손 주먹에 집중됐다.
정백의 심상은 이상적이고 순수한 것. 이론으로는 상성을 찾아볼 수 없는 최상위의 힘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낸 혼합 개념인 무학이란 틀에서 벗어나면서 내공 역시 필요 없게 됐다.
육체와 기맥을 거치지 않는 대신, 순수한 대자연의 기운을 있는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사람인 이상 전능을 발휘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끊이지 않는 기와 위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맞은 일격이 산사태로 느껴진 건 이와 같은 이유였다.
“검신.”
권동제가 순수한 눈빛으로 검신과 마주봤다.
“항복해라.”
“……”
꿀꺽!
‘저것에 잘못 맞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심상구현 회귀라 할지라도 뼈도 못추린다.
심장이나 머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포기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니.’
하지만, 여기에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저 역시 가겠습니다.”
주서천은 검을 꽉 쥐고 눈을 빛냈다.
미세하게 떨리던 몸은 멈췄다.
긴장으로 굳은 게 아니다.
압도당하지 않았다.
강한 의지로 받아쳤다.
“훌륭하나, 만용이……”
정백이 눈썹을 구부리며 뭐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우오오오!”
주서천이 지면을 박차면서 뛰쳐나갔다.
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유성이 되어 한일 자의 궤적을 그려 내며 쏘아졌다.
‘무서워하지 마!’
정백의 뒤에 암천회주가 보였다.
단 한 번, 암천회주를 봤다.
그 단 한 번에서 주서천은 공포를느꼈다.
‘여기서 무서워하면 회주 앞에서도 설 수 없다!’
절대적인 무력 앞에서 수많은 이들이 절망했다.
오늘 과거의 영웅이 죽으면, 내일은 미래의 영웅이 죽었다.
그 암흑기를 도래할 수는 없었다.
대학살이란 이름이 무겁게 다가와 가라앉았다.
그에 비해 대자연의 기를 품은 주먹질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움직여!’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눈앞의 광경이 스쳐 지나가면서 휙휙 바뀌다가 사라져 버렸다.
발바닥에 붙는 자갈의 존재를 지운다.
뺨을 후려치는 바람의 압력을 지운다.
‘더 빠르게!’
힘을 주자 복근이 갈라졌다.
배꼽아래의 하단전에서부터 무한에 가까운 힘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더 강하게!’
자하진기가 단전에서 출발해 온몸을 돌았다.
몇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그 감각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모든 걸 동원해라!’
정파인은 정직하다.
상천칠좌는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조금이라도 당황할 수 있도록, 방심할 수 있도록, 올바른 것이 일그러져 화낼 수 있도록.
정파인으로서의 명예에 흠집을 가하고, 상대방의 신경을 자극해서 틈을 만들어 노렸다.
‘자하검결!’
하늘 같은 사부님의 가르침은 아니다.
자랑스러운 사문의 가르침도 아니다.
정파인이 아닌 유령곡의 자객으로서의 방식이다.
시선을 돌리게 만들고, 속인다.
적을 일부러 도발시켜 심정을 어지럽히고 약하게 만든다.
‘제오식!’
순수한 힘으로만 싸워 왔던 건 옛일이다.
그랬다면 진작 죽었다.
승리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크하아아압!”
코앞에 닿기 직전, 정백이 외쳤다.
소리만 내지른 게 아니다.
주먹을 내질렀다.
어떠한 묘리도 없는 단순한 정권이었지만, 그야말로 산을 무너뜨릴 기세였다.
쿠와아아.
터지듯이 나오던 굉음이 멈추고 적막해졌다.
사라진 게 아니다.
청각이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가 다시 떨어지며 폭풍이 됐다.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가 대기를 찢어발기고,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던 눈을 없애 버렸다.
천지가 무너져 내린다.
발바닥에 맞닿던 지반이 뒤집어졌다.
그 아래의 바위가 잘게 부서지면서 먼지처럼 홑날렸다.
수백 년 이상을 살아온 거목이 엿가락처럼 휘었다가 부서지더니만, 산산조각이 나며 비산했다.
공기가, 대기가 떨렸다.
그리고……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주서천의 외침이 굉음과 뒤섞여 울려 퍼졌다.
‘크아악!’
아팠다.
외침에 자연스레 비명이 섞였다.
살째로 피부가 사라졌다가 재생된다.
이백하고 여섯 개의 뼈가 부러졌다가 붙기를 반복했다.
‘예상한 대로다!’
내기를 받아들인 정백은 결코 살초를 쓸 수 없다.
자신의 의지를 이어서 무림맹의 위선과 부패를 척결할 사람을 반병신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압도해 항복을 받아 내려했으나 실패했다.
즉, 지금 그의 입장에선 전력을 낼 수가 없었다.
주서천은 그 점을 노리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무궁!’
내장이 터지면서 피가 울컥 솟으려던 걸 참고 삼킨다.
손에 쥔 검에 체력과 기력, 신경을 집중했다.
‘육허!’
눈 오는 날, 얼어붙은 추위 속에서 매화가 핀다.
정면에서 부딪쳐 오는 권력(拳力).
그 압도적인 위력을 담은 미증유의 힘은 여섯 잎으로 된 매화가 닿을 때마다 차츰 줄어들었다.
여섯 장 중 반절이 날아가자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으나, 심상구현 회귀로 어찌어찌 버텨 냈다.
육체의 시간이 되돌아가며 단숨에 회복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 폭풍 속에 갇혀 상처도 되돌아갔다.
그러나 고통과 상처를 대가 삼아 전진한다.
발을 힘차게 내디디고 검병을 꽉 쥐고 팔을 뻗었다.
세 장이 두 장으로 줄어들었다.
이두근부터 시작해 상완근 삼두근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다가 결국 버텨 내지 못하고 찢어져 버린다.
성대에서부터 터져 나온 괴성에 따라 끓어오른 열기조차 권압에 못 이기고 사라져 버렸다.
두 장이 한 장으로 줄었다.
눈의 실핏줄이 터지면서 피눈물이 흘렀다.
부러진 뼈가 조각조각 나뉘면서 살을 뚫고 나왔다.
심장이 짓이겨지는 것처럼 아파 온다.
숨 쉬기조차 어려웠다.
척추가 제멋대로 휘었다가 펴졌다.
“……!”
정백이 당황을 금치 못하며, 최초로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을 놓칠 주서천이 아니다.
의식은 몽롱하고 육체는 아프지만 상관없었다.
검 손잡이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고, 그 손등을 감싸듯이 왼손을 올려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했다.
이윽고, 최후에 남은 꽃잎까지 사라지면서 검극이 대기에 구멍을 내곤 깨끗한 직선을 그려 냈다.
“죽을 생각이냐!”
정백이 다급하게 외쳤다.
“뭐가 그리 널……”
“목숨에 따라 굽힐 신념이었다면!”
주서천이 정백의 물음에 답한다.
“애초에 강호에 출두하지도 않았다!”
콰앙!
막대한 공력을 실은 용연이 흉부를 찔렀다.
“허……”
여린 피부를 열고 안으로 들어오려 했으나 멈췄다.
최후에 힘을 다한 게 아니라 고의였다.
정백은 믿기지 않은 듯 가슴을 내려다보다가, 주름 하나 없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무엇이 그대를 이렇게까지 필사적이게 하는 거지?”
정백이 물었다.
그 눈빛은 언제나처럼 깨끗했다.
“단순한 이유입니다.”
주서천은 권동제의 가슴에 검을 꽂은 채 답했다.
“향후 일어날 학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이들이 겪지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꿈을 꾼다.
피가 바다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다.
빛은 보이지 않고 영원한 암흑만으로 가득했다.
그런 미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위선이라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보다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낯간지러운 말은 필요 없다.
그저, 함께하고 싶었다.
화산오장로 시절처럼 혼자서 쓸쓸히 죽어 가는 건 싫다.
최후까지 좋아하는 사람들과 지내고 싶었다.
“그뿐인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가……”
정백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대의 승리다, 검신.”
* * *
합비, 무림맹.
“무림맹은 각성해라! 각성해라!”
“각성해라! 각성해라!”
“무림맹은 진실을 공표해라! 공표해라!”
“공표해라! 공표해라!”
암천회의 바람꾼이 대문 앞에서 외치면 성난 무림인들이 따라서 시위하듯이 외쳤다.
굳건하게 닫힌 문 앞의 경비 무사들은 표정 변화 없이 석상처럼 서서 자리를 지켰다.
권동제가 한 달간의 유예를 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날이 갈수록 시위는 격해지고 비난도 거세졌다.
무림맹 핵심 구성원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침묵할 뿐, 어떠한 답변을 내지 않고 있었다.
“무언은 긍정이라 하더니……”
“허, 참!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무림맹이란, 결국 기득권을 위한 조직이 아닌가?
무림의 평화와 안녕을 바란다더니, 헛소리였군.”
“무림맹에 소속된 것이 부끄럽네.”
“굳이 있을 필요가 있는가?”
이제는 암천회의 천선성이나 천기성이 나서서 정보 조작이나 나쁜 소문을 퍼뜨릴 필요도 없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파인들의 마음과 신뢰는 떠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무림맹.’
천선성 소속의 정보원, 혁상은 인파 속에 숨어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상황을 지켜봤다.
‘이대로 권동제의 형벌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대항하겠느냐?’
입가에 맺히려던 미소를 가까스로 참았다.
‘뭐, 어떤 쪽이건 분열을 면치 못하겠지만 말이다.’
상관인 천기가 끝까지 경계를 풀지 말라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듯 싶었다.
곧 권동제가 방문하여 무림맹을 분열시킨다.
정파의 위선이 부른 파멸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창룡이다!”
그때였다.
측면의 군중이 갈라지더니만, 그 사이에서 잘생긴 청년이 나왔다.
‘남궁선유?’
현 논란의 중심인 무림맹주 남궁위무의 손주이자 정파의 후기지수인 남궁선유였다.
“독봉이다!”
“저 여인들은 파검봉에 모사미봉이 아닌가?”
“오룡삼봉만이 아니다.
청성의 백궁자, 종남의 은하노사, 공동의 지일광…… 점창칠공자까지!”
“도대체 고수가 얼마나 온 거지?”
남궁선유만이 아니었다.
오룡삼봉을 비롯해 정파의 주요 인사들이 속속히 나타났다.
‘호오.’
혁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슥 둘러봤다.
천선성답게 주변 상황의 정보 파악이 빨랐다.
새로이 나타난 무리는 무림맹의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뭐, 뭐냐? 전쟁이라도 할 생각이냐?”
“구파일방에 오대세가…… 다 한통속이 아닌가!”
평소라면 압도될 만한 상황이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리어 반발심만 부추길 뿐이었다.
‘권동제에게 대항할 생각이구나!’
혁상이 눈을 빛냈다.
그야말로 최적이자 이상적인 결과였다.
‘그래, 싸워라. 싸워서 서로의 등에 칼을 꽂아라’
오십 년 전에 상천의 좌에 오른 늙은 괴물, 권동제를 막아서려면 한두 사람으로는 부족하다.
설득이라는 이름하에 벌어지는 격전에 정파인들은 서로를 상처 입히고 실망시킬 것이다.
무림맹에 실망해 체념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추하게 발버둥 치는 것도 좋았다.
전자의 경우엔 분열이 빠르게 이어지며 사기를 떨어뜨릴 것이고, 후자의 경우엔 입는 상처가 많아진다.
“강호의 동도들이여! 정도의 무인들이여!”
성난 정파의 군중이 비난을 퍼붓기 전, 창룡이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드디어 공표할 셈이구나!’
‘어차피 변명이나 할 생각이겠지.’
‘창룡도 실망이군.’
‘강호의 도리는 어디 있는가!’
무림맹의 입장을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였다.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이 있소!”
남궁선유는 군중을 바라보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은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최근 정파 무림의 정세가 어지럽소.
어째서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이 자리에 계신 정파인, 아니 무림인이라면 다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오.”
창룡은 주먹을 꽉 쥐곤 목소리를 높였다.
“무림맹 상층부는 그간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질렀소. 정도에서 벗어난 외도를 정당화하고, 기만(敗職)했지요.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오.”
‘대항이 아니라 체념할 생각인가?’
혁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견을 보니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보이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을 납치하여 감금하고, 고문한 죄!
외도를 정당화하여 포장한 죄! 무림을 기만한 죄!”
쿵!
남궁선유가 발을 굴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무리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됐소!
정파를 위해서라고, 무림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라고 한들 희생은 결코 강요할 수 없소!”
‘무슨…… 생각이냐?’
혁상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무언가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기 전, 사죄드릴 게 있소!”
체념한 모습이 아니었다.
반응이 너무 격렬하다.
“솔직히 흑영부에 대해서 몰랐던 것은 아니오!
무림맹의 장로들을 포함하여 무림맹주의 남궁세가, 그 밖예도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일부는 알고 있었소이다! 하지만 알고있었음에도 어찌할 수 없었소!”
남궁선유는 분한 듯이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무림맹 상층부, 아니 어떠한 사람에 의하여 탄압받았기 때문이오!”
“그게 뭔……”
혁상이 무심코 말하려다가, 누군가의 외침에 막혔다.
“권동제다!”
좌중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들이 옆으로 갈라진다.
위풍당당한 기세, 소년에 불과한 외관.
머리를 하나로 닿아 뒤로 넘긴 절대고수였다.
“설…… 마……”
혁상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주서천이다!”
“검신!”
군중에게서 경악과 의아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아니, 검신이 왜 권동제 옆에……”
“잠깐, 함께 있다는 건……”
“권동제의 의사를 따르겠다는 건가?”
권동제 바로 옆에 검신이 따로 걸었다.
상천칠좌 중 두 사람의 표정은 무심했다.
“아니야, 아니야……”
혁상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땀방울이 하나둘씩 맺히더니,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공을 수련했는데도 식은땀이 조절되지 않고 흐르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움찔움찔 떨렸다.
무언가가 등골을 훑고 지나가고, 오금이 저려 온다.
천선성은 천기성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머리 회전이 빠르다.
혁상은 그중에서도 머리가 특히 좋다.
무공에 대한 소질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천기성에 소속됐을 것이다.
혁상은 특유의 비상한 머리로 현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나, 전면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리 없다.
불가능하다. 내 망상에 불과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사이, 주서천과 정백은 당찬 발걸음으로 길을 따라 걸었다.
“무림맹의 권력은 부패하였소. 그자는 권세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했으며, 정도의 고결한 의지를 속여 왔고 과거의 영광과 권력을 잃기를 두려워해 잘못된 걸 지적하는 올바른 의견을 묵살하고 탄압했소!”
주서천과 정백이 정문 앞에 섰다.
“약속한 대로다!”
정백이 정문 너머를 노려보며 외쳤다.
“권세에 취한 위선자를 처벌하러 왔다!”
“문을 여시오!”
남궁선유도 등을 돌려 정문을 보며 외쳤다.
어떠한 일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경비 무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었다.
쿠웅.
소통을 거부했던 문이 열린다.
이상하게도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군중은 당황했다.
‘아무도 없잖아?’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에 사람이 없는 건 둘째 치고, 경비 무사도 시종도 보이지 않았다.
주서천과 정백, 그리고 남궁선유가 선두에 섰다.
타다닷.
그 뒤로 무림의 주요 인사들이 따랐다.
그러나 평화적이지 않았다.
마치 전투를 준비하는 것과 같았다.
빈 공간에 사람들이 들어오자 금세 열기로 가득 찼다.
지면 위에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이 생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주서천은 한 달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낙소월과 재회하기 직전에 있던 일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인가……”
“맹주님?”
“한 가지, 생각이 있네.”
남궁위무는 어딘가 모르게 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